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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천산 역사연구원>에서 작성한 중국의 역사연대 구분을 소개합니다.
현존하는 중국측의 역사에 관한 기록은 이미 오염된지 오래되었다.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중화주의적
사고에 의하여 왜곡되었는지는 불명이나 대체적으로 주나라가 춘추시대에 접어든 후 중화주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서기전 500년경의 공자의 출현으로 중화와 동이를 구분하여 차츰 중화를 격상하고 동이를
격하하는 논리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공자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것인지, 동이를 구이라고도 적으면서 동방 예의 군자 불사국이라는
찬양조의 글을 적고 있기는 하다. 소위 중화가 예의를 잃었을 때는 구이에서 구하였다.
이말은 요순 하 은 주나라가 멸망하고 건국되고 왕통이 교체되는 그러한 역사속에서 구이의 정치력이나
군사력이 미쳤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 된다.
구이라는 말은 단군조선 전체 영역이나 전체 백성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구이라는 말은 조선의 제후국
이라는 말과 통한다. 즉 9이(夷)로 나뉘어져 다스려지는 조선이라는 말이 된다. 나중에 춘추시대 이후에는
구이가 동이로 불리어지면서 주나라의 동쪽에 있는 단군조선 본국만을 의미하게 되고, 주나라의 서, 남,
북에 위치하는 서융, 남만, 북적은 동이에서 분리시키고 있고, 다만, 이들을 제후격이라고 기록하면서
조선의 제후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긴 하다. 주나라는 사이로 구성된 구이의 일부에 해당하는 나라가
된다. 그래서 주나라는 구이 중의 사이를 그 뿌리로 하여 사이는 그들의 조상의 나라가 되며, 스승의
나라가 되며, 하늘나라인 본 임금의 나라로서 결국 구이는 중화의 유교사상으로 보면 군사부(君師父)의
나라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실제로도 그러하였으며, 중화는 신하, 제자, 아들의 나라였던 것이다.
군사부(君師父)와 신제자(臣弟子)의 나라임을 단적으로 예를 들면, 요순과 하은주는 단군조선의 천자국
으로서 신하의 나라이고, 요 임금은 배달나라 서보의 간에게서 도를 배운 자이고 순 임금은 단군조선의
포의자의 제자이며, 우임금은 순임금의 신하일 때 단군조선의 태자부루에게서 치수법을 전수받은 제자에
다름없는 자이다.
은나라 시조 탕의 재상이던 이윤은 단군조선 선인 유위자의 제자로서, 결국 고대중국의 핵심지배층은
모두 배달조선의 제자였던 것이고, 특히 순임금은 단군조선의 중신이던 유호씨의 아들이고 그외 요, 우,
탕, 무왕 등 모두 배달나라 웅족출신이던 황제헌원의 피를 이은 자들로서 계보(족보)로 보면 단군조선의
방계혈족이 되는 것이다.
[시대구분 기준시기]
1. 요임금 시대(서기전2357년~서기전2284년)
서기전 2357년경 요임금은 9주를 마음대로 설치하였다. 요임금의 나라인 당나라의 수도는 태원의
남쪽에 위치한 평양이다. 중원에 해당하는 지역이 되는데, 이를 중심으로 9주를 나누었던 것이 되는데,
기주, 옹주, 연주, 청주, 예주, 양주, 서주, 양주, 형주이다.
기주는 태원의 북쪽에 해당하며, 청주는 산동지역의 서쪽이고, 서쪽의 양주는 서안부근이며, 양주는
양자강 하류지역이 되는데, 대체적으로 요임금의 구주는 서안~태원~안양~양자강에 걸치는 영역이 된다.
처음 요임금은 서기전2357년경 9주를 나누어 다스리다 서기전2324년경에 단군조선의 토벌작전에
굴복하여 제왕을 참칭한 것에서 물러나 단군조선의 천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태평시대가 되었는데,
이를 요순태평시대라 하나 실제로는 단군조선에 도전하지 않고 천자로서 천하를 전쟁없이 다스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서기전2288년에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대홍수가 발발하였다. 서기전2280년까지 9년간 곤이
치수에 성공치 못하였고, 곤의 아들인 우도 서기전2267년까지 13년간 치수에 성공치 못하였다.
그런데,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에서 우가 단군조선 태자부루에게서 치수법을 전수받고 결국 치수에
성공하게 되었으며 이후 백성들의 신망이 높아지게 되었으며 결국 도를 넘어 서기전2224년에 자칭
하왕이라 하면서 독립을 시도하여 중국역사상 최초의 왕조가 성립되었다.
2. 순임금 시대(서기전2284년~서기전2224년)
서기전2324년 20세에 아버지 유호씨를 따라 환부의 직을 수행하면서 요임금을 토벌하러 갔다가
요임금이 굴복한 이후, 효자로 소문난 순을 요임금이 자기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두딸을 시집보내는 등
무진 노력을 하였고, 결국 서기전2314년 순의 나이 30세에 요임금이 순을 등용하였던 것이며,
서기전2294년에 섭정을 맡겼던 것이다.
순이 섭정이 된 서기전2294년부터 순이 요임금을 유폐시키고 천자자리를 찬탈한 서기전2284년경에
순은 요임금이 설치한 9주에다 다시 유주, 영주, 병주의 3주를 임의로 (상제이던 단군왕검의 허락없이)
설치하여 모두 12주가 되었다. 아마도 순이 천자가 된 서기전2284년에 3주를 설치한 것으로 되는데,
이때 단군조선에서는 대홍수가 발생하였으며 치수에 힘을 쏟느라 신경을 쓰지 않았던 틈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유주는 기주의 동북에 위치하고 영주는 청주의 동북에 위치한다고 기록된다. 유주는 태원의 동북지역
으로서 지금의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 되며, 영주는 태산의 동북지역에 해당한다고 보이는데
유주의 동남쪽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병주는 태원의 북쪽으로서 유주의 서쪽이 되며 태항산 서쪽으로
보인다. 즉 순임금은 단군조선과의 완충지대에 병주, 유주, 영주를 설치한 것이 되는데, 서기전2301년에
단군조선은 요동과 요서지역에 요중12성을 축조하였다. 순이 설치한 유주는 요서지역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서기전2267년까지 치수를 마무리 하지 못한 사공 우는 순임금에게 상국에 도움을 요청하도록 간하였고
이에 순임금은 단군왕검에게 상소를 올렸으며, 홍익인간의 이념실현 차원에서 단군왕검은 비록 순이
임의대로 천자에 오르고 3주을 설치하는 등 소행이 괴씸하기도 하였지만 이참에 버릇을 들이기 위하여
태자부루를 사자로 파견하여 도산회의를 주관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에 태자부루는 양자강 유역의 도산으로 가던 중 반달 동안 발해만 유역의 번한에 머물면서 민정을
청문하고 순임금으로부터 치수에 관한 보고를 받은 후, 번한을 대동하고 도산에 이르렀으며,
도산회의를 주관하면서 번한을 통하여 우에게 치수법을 전수하여 주었던 것이다.
이때 순이 임의로 설치한 3주 중 유주와 영주는 단군조선의 영역에 편입시키고 병주는 그대로 두었으며,
5년에 한번씩 순시 때 치수에 관한 경과 등을 보고토록 하였던 것이고, 이후 사공 우는 태자부루의
가르침에 따라 치수에 힘써 성공하게 되었고, 백익과 함께 산천을 두루 다니면서 산천지리를 기록하게
되니 이것이 산해경이며, 치수를 마무리 한 후 사공 우는 양자강 유역의 남악 형산에 치수공덕비를
세웠던 것이다.
치수에 상공한 우는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이는 서기전2224년 우가 하나라를
세운 바탕이 되었다.
유주는 이후 단군조선의 고죽국으로 봉해진 것으로 된다. 고죽국은 서기전2224년에 건국된 하나라
이전부터 존속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즉 고죽국은 요서지역에 있었던 것이며, 지금의 북경, 천진,
탁주 등을 중심으로 하던 나라가 된다.
3. 주나라 춘추-전국시대(연나라)(서기전1122년~서기전222년)
서기전1122년경 은나라는 주무왕에게 멸망을 당하였는데, 이때 은나라 왕족 기자는 패잔병 5천여명을
이끌고 북쪽으로 달아나 조선에 망명하였으며 고죽국의 서쪽이 되는 태항산 서북으로 가서 정착하여
다스렸다. 태항산 서북이자 태원의 북쪽이 되는 기자국을 서화(西華)라 부른다. 이로써 태항산 서쪽에는
기자국, 그 동쪽의 요서지역에는 고죽국이 자리잡은 것이 된다.
그런데, 주나라는 은나라의 영역보다 넓게 차지하게 되는데, 특히 단군조선과 동쪽지역의 경계를 보면,
주나라 제후국 중 연제조의 위치가 중요하다.
처음 연나라는 하남성 안양부근의 "燕"에 봉해졌다가 북쪽으로 이동하였는데,
국명은 은나라의 "연"이라는 글자를 피하여 "언(堰-土)"이라 하였고, 이 언이라는 국명은 진시황의
진나라 때까지 이어진 것이며 진나라 이후에 "연"이라 고친 것이 된다. 처음 연나라의 수도를 언사라고도
하는 설이 있으며, 이후 지금의 안국시 위치가 되는 "안(安)"으로 이후 역현(이현,易縣)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요동의 계(북경)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계라는 지명은 후대에 생긴 것이어서 연나라 수도를
계라고 적는 것은 원래 북경의 서남쪽에 있던 안, 이를 계로 적은 것이 되는 것이다.
북경이 계라는 수도로 된 시기는 서기전222년경 연나라가 진나라를 피하여 요동으로 피한 때임이
틀림없는 것이 된다.
연나라가 서서히 역사무대에 등장하는 시기는 춘추시대가 되는데, 서기전680년경에 제나라 환공이
연나라의 요청으로 고죽, 영지를 정벌한 기록이 있고, 서기전651년에 다시 제환공이 연나라의
구원요청으로 고죽, 영지, 산융을 정벌한 기록이 있는데, 이때 고죽국이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고죽국은 북경, 천진, 탁주 등을 중심으로 한 요서지역의 나라로서 당시 연나라는 탁주 이남에 수도를
둔 나라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춘추시대 연나라의 수도는 안국시(安) 부근으로 보인다. 고죽국이 망한
때인 서기전651년이후에는 연나라의 수도가 지금의 이현(역현, 易縣)이 틀림없으며 서기전222년경
진나라 군사를 피하여 요동으로 달아난 때까지로 보인다. 이후 요동의 계가 수도가 된 이후 연나라의
수도는 계라고 적히는 것이 된다. 이 당시의 계는 지금의 북경이 된다.
지금의 북경이 계라는 명칭은 서기250년경에 지어진 수경이라는 기록에 의하여 입증된다. 즉 북경이
계현이라는 땅은 서기250년경까지는 확고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후 지금의 계로 계라는 지명이 이동된
것이 된다. 아마도 수나라 때? 아니면 그 이후에?
제나라 땅은 산동지역에 임치를 중심으로 한 것이 되는데, 이 산동반도에는 여전히 단군조선의 세력이
남아 있었고, 산동반도의 남쪽에 해당하는 회수부근에 여전히 서이(徐夷), 회이(淮夷), 사이(沙夷) 등이
서기전221년 진시황의 통일시기까지 존속하고 있었다. 서이는 서기전684년경 초나라에 일차적으로
수도를 함락당하는 타격을 받은 후 서산(徐山)으로 옮겼다가 제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하기도 하면서
결국 서기전 512년 오나라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주나라 춘추전국시대에 산동반도에 잔존하고 있었던 동이족의 나라로는 태산부근의 엄이, 산동반도의
개이, 래이, 우이, 양이가 있었고 남쪽의 서이, 회이와 더불어 단군조선 초기에 봉해졌던 남이(藍夷)를
합하여 회대지간 또는 내륙 8이라고 불리운다. 산동반도 중남부 이남, 양자강 이북의 동이족의 핏줄은
주로 남이가 된다.
이리하여 노, 제나라는 원래 동이족의 무대였으며, 제나라의 팽창에도 불구하고 남쪽의 회이 등
남이(藍夷)의 나라는 존속하였던 것이 된다.
4. 진시황 시대(서기전221년~서기전210년)
서기전221년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여, 요동의 연나라 땅을 접수하여 서기전300년경 연 진개가
경계로 삼은 만번한까지 차지한 것이 된다.
그런데, 중국측 기록인 한서 지리지나 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진시황이 설치한 요동군에 패수(난하)
부근에 위치한 단군조선의 험독, 안시, 서안평 등이 포함되어 있어 진시황이 패수부근가지 차지한 것이
되는지 의문이 생긴다.
진시황 시대에 관한 기록에서 한나라의 한사군과 같은 정도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즉, 지명만 거론하고
있을 뿐 진나라가 어떻게 요동을 차지하였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다만, 연나라가 차지한
요동을 차지한 것으로만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이후 한나라가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보수하여 패수까지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라고 기록되고 있으므로,
진나라의 동쪽 국경은 아마도 만번한까지인 것으로 된다. 진나라의 요동의 옛 공지(空地)라 적고 있는
상하장(上下障)은 패수의 동쪽에 위치한 것이 되는데, 이곳은 서기전209년 연제조 사람 수만명이 진승의
난으로 망명한 곳이기도 한 바, 아마도 이 상하장을 진나라 공지라고 날조한 것으로 된다.
한나라가 패수를 경계로 하기까지는 진나라의 경계는 아무리 동쪽으로 와도 만번한 부근이 되며, 패수는
아닌 것이 된다. 패수가 경계로 된 때는 서기전202년 한나라 연왕 노관에 의해서이다.
5. 전한 시대(서기전206년~서기8년)
알 수 있으므로 삼국지 이후의 기록은 다만 참조만 하여야 할 것이며, 고구려의 영토에 대하여는 후한시대
이전의 강명이나 지명으로 소급시켜 그 위치를 찾아야 한다고 본다.
즉 늦어도 서기250년경에 수경(水經)이 지어진 때까지의 강명과 지명을 기준으로 그 위치를 정리하면 되고,
수경 이후에 지어진 수경주(水經注) 등의 기록은 이미 강명이나 지명이 이동되는 등 고구려 초기의 강명과
지명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할 것이므로 다만 참조대상이 될 뿐이라고 본다.
*고구려 3경 제도 : 졸본, 국내성, 제1환도성
*서기57년 고구려가 백암성, 통도성 축조
*서기110경 고구려가 요동회복, 낙랑군 현도군 공격
*서기168년 고구려가 요동정벌
*서기197년 고구려가 요동평정(현도, 낙랑)
*후한 서기204년 공손강이 낙랑군의 둔유현을 나누어 그 남부를 대방군으로 함
*서기209년 고구려 수도 제2환도성
8. 삼국시대(서기220년~서기265년)
- 위 (서기220년~서기265년)
고하는 독석구라는 지역의 특석상 동쪽으로 적절히 변동시키기 어려워 이후 변동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
이후에 쓰여진 수경주에서는 대요수와 패수, 유수 등이 원래의 위치와 함께 동쪽으로 옮겨진 강명,
지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9. 진나라 시대(서기265년~서기421년))
- 북위 (서기386년~서기534년)
*서안평 점령 후 서기313년 낙랑군, 대방군 축출, 현도군정벌
*서기342년 전연 모용씨 제3환도성 함락
*광개토왕 후연격파 요동확보
10. 5호16국시대(서기304년~서기439년)
이동된 강명, 지명으로 기록되고 있어 날조인지, 실제 강명, 지명의 이동이 있었는지 불명하다.
-송(서기421년~서기479년
-제(서기479년~서기501년)
평정
*거란(요 )(서기907년~서기1125년)
*송(서기960년~서기1279년)
*여진(금)(서기1115년~서기1234년)
16. 원나라 시대(서기1206년~서기1368년)
17. 명나라 시대(서기1368년~서기1628년)
18. 청나라 시대(서기1616년~서기19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