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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수님의 불교와 뇌과학 관련 강연과 글에서 자유의지를 인정하면 윤회도 가능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부처님께서도 결정론이나 숙명론을 부정하셨으니 자유의지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인정하시지 않으셨나 추측해봅니다. 그런데 의도나 의지라는 것도 조건에 의해 형성된 법이다보니 완벽히 독립적인 자유의지를 갖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자유의지를 불교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입니다.
자유의지(free will)와 결정론(determinism)의 문제는 동서고금의 거의 모든 사상가들이 고민했던 난제(難題) 중의 난제입니다. 보리심님께서 질문에서 쓰셨듯이, 부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암묵적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전법과 교화의 일생을 보내셨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1.고락의 자작자각 타작타각의 문제
2.숙명론과 자유의지론을 모두 배격하는 불교의 인과응보설
3.상수멸정에 근거한 벤자민 리벳 실험 비판
1. 고락의 자작자각 타작타각의 문제
먼저 '자유의지'의 유무를 논의하는 사고방식의 저변에는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초기불전의 가르침 가운데 자유의지의 유무와 관련된 것으로 '고(苦)의 자작자각(自作自覺), 타작타각(他作他覺)' 여부에 대한 물음이 있는데 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무기답(無記答)으로 대응하신 후 연기를 설하셨습니다. 잡아함경에 실려 있으며 경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如是我聞: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류수의 조우라고 하는 마을에 계셨다.이때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 세존을 뵙고 서로 경하하고 위로한 뒤에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一時,佛住拘留搜調牛聚落。時,有異婆羅門來詣佛所,與世尊面相慶慰,慶慰已,退坐一面,白佛言:
“어떻습니까? 구담이시여, 제 자신이 짓고 제 자신이 깨닫는 것입니까?” “云何瞿曇,爲自作自覺耶?”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佛告婆羅門:
“나는 이것을 무기(無記)라고 말한다. 제 자신이 짓고 제 자신이 깨닫는다면 이것은 곧 무기이니라.” “我說此是無記,自作自覺,此是無記。”
“어떻습니까? 구담이시여, 그러면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깨닫는 것입니까?” “云何?瞿曇,他作他覺耶?”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佛告婆羅門: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깨닫는다는 것도 곧 무기이니라.” “他作他覺,此是無記。”
바라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婆羅門白佛:
“왜 제가 ‘제 자신이 짓고 제 자신이 깨닫는 것입니까?’ 하고 물어도 무기라고 말씀하시고,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깨닫는 것입니까?’ 하고 물어도 무기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云何?我問自作自覺,說言無記;他作他覺,說言無記,此義云何?”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佛告婆羅門:
“제 자신이 짓고 제 자신이 깨닫는다고 하면 곧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깨닫는다고 하면 곧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뜻에 대한 설명과 법에 대한 설명은 이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 처하여 설법하는 것이니라. 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즉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고 ……(내지)……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느니라.”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그 바라문은 기뻐하고 따라 기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自作自覺則墮常見,他作他覺則墮斷見,義說、法說、離此二邊,處於中道而說法,所謂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緣無明行,乃至純大苦聚集,無明滅則行滅,乃至純大苦聚滅。”佛說此經已,彼婆羅門歡喜隨喜,從座起去。('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에서 발췌)
여기서 바라문이 부처님께 자작자각인지, 타작타각인지 묻는데, 이와 유사한 내용이 실린 다른 경문들을 참조하면, 이는 고(苦)와 락(樂)의 자작자각, 타작타각 여부를 묻는 장면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또 위에서 覺(각)을 '깨닫는다'고 번역하고 있는데, 그 의미로 보면 '느낀다'거나 '감수한다'고 번역하는 게 옳겠습니다. (빠알리 경문에서는 자작자각을 "so karoti so pațisamvediyatī", 타작타각을 "añño karoti añño pațisamvediyatī"라고 씁니다.)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갖가지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이 내가 짓고[自作] 내가 겪는 것[自覺]인지, 타자가 짓고[他作] 타자가 받는 것[他覺]인지 부처님께 여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짓고 내가 겪는다."는 생각은 "과거에 업을 지었던 자와 나중에 그 과보를 받는 자가 동일하다."는 사고방식이고, "타자가 짓고 타자가 받는다."는 생각은 "과거에 업을 지었던 자와 나중에 그 과보를 받는 자가 다르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일하다면 무상,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상견(常見)이 되고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면, 무상에 집착하고 무아에 집착하는 단견(斷見)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들 질문에 대해 모두 침묵으로 대응하신 뒤에, "자작자각이라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타작타각이라면 단견(斷見)에 떨어진다고 비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상견과 단견의 치료제로서 중도의 가르침인 12연기설을 제시하십니다.
14무기설(無記說)이나 10무기설과 같은 일반적인 무기설과 마찬가지로 위의 경문의 대화는 '질문자의 난문(難問) → 부처님의 침묵 → 부처님의 연기설(緣起說)'의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즉, 고락의 자작자각, 타작타각에 대한 물음은 연기법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한 잘못된 의문이기에, 부처님께서는 즉답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대응하신 후, 그런 의문이 떠오르게 만든 상견과 단견의 사고방식[邪見], 즉 흑백논리적 사고방식의 치료제로서 십이연기설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의거할 때, "나에게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라는 의문은 '고락의 자작자각'의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일어난 의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는 변치 않는 내[自]가 있고, 내가 하는 행위[作]에 대한 과보를 내[自]가 받는다[覺]는 사고방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의 토대 위에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경문에서 부처님께서 제시하셨듯이, 내가 체험하는 세상은 12연기의 부단한 흐름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12연기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자유의지의 유무'에 대한 의문을 다시 명료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즉, "부단하게 흘러가는 세상만사가 기계적으로 전개되는지, 아니면 그런 흐름에 개입하여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라고 다시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앞의 물음은 결정론, 뒤의 물음은 자유의지론과 관계됩니다. 비단 생명체만이 아니라, 사물의 세계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조망입니다.
현대의 학자들이, "일정한 크기(프랑크상수) 이하의 세계에서는 소립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 즉 미시세계의 불확정성에 근거하여 자유의지의 여지를 남겨놓긴 했지만, 불확정성원리가 자유의지의 존재를 증명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2. 숙명론과 자유의지론을 모두 배격하는 불교의 인과응보설
불교적으로 볼 때 숙명론(결정론)도 옳지 않지만, 우리의 미래가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아닙니다.
나의 미래가 완전히 백지 상태인 것은 아닙니다. 인과응보의 법칙이 생명의 세계를 지배하기에 내가 과거나 전생에 지었던 갖가지 업의 종자들이 나의 마음 속에 내재하다가 시기가 무르익으면 과보로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미래가 완전히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즉 전생이나 과거에 지었던 업의 과보가 기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현생에서 내가 한 행위에 의해 새로운 업의 종자가 영글어 미래에 싹을 티우기도 하고, 참회 등에 의해서 과거에 지었던 악업의 종자가 말라버리기도 합니다.
즉 업 종자를 갖고 태어나지만, 지금 내가 하는 행위에 따라서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불교의 업 이론이고, 인과응보설로 숙명론과 자유의지론 모두 배격합니다. 인과응보설은 연기설의 거시적 각론입니다.
3. 상수멸정에 근거한 벤자민 리벳 실험 비판
현대의 과학적 실험 가운데 자유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 1916-2007)의 실험인데 고안과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상단의 4장의 그림에서 보듯이, 먼저 피험자 대뇌의 운동피질 근처의 두피에 센서를 부착합니다. 운동피질의 전기적 흥분을 기록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피험자의 손에 스위치를 쥐어주고서, 시계를 보고 있다가 임의의 시점에 스위치를 누르라고 지시합니다. 피험자가 스위치를 누르면, 그 때의 시간이 정확히 기록됩니다. 피험자가 손가락으로 스위치를 누르면, 손가락 근육의 수축과 함께 운동피질에 전기적 흥분이 일어나기에 운동피질 근처의 두피에 부착한 센서를 통해 전압의 변화 역시 기록됩니다. 하단에 그려진 그래프가 그런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 실험에서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됩니다. 피험자가 스위치를 누른 시간보다 약간 앞서서 운동피질에서 전기적 흥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의식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는 것보다, 약간 먼저 그 행위와 관련된 근육을 담당하는 운동피질의 활성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겠다고 의식하면서 행동을 하는 줄 알았는데, 벤자민 리벳이 실험을 해 보니, 먼저 행동이 일어나고, 뒤이어 그 행동을 하겠다고 의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행동을 할 때 우리의 의식은 뒷북치기일 뿐"이기에, 이런 실험결과를 접한 현대의 많은 과학자, 사상가들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는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초기불전의 상수멸정(想受滅定) 이론에 비추어 보면 이 실험의 결과에 대한 해석에 큰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상수멸정이란 문자 그대로 생각(想)과 느낌(受)이 모두 사라진 삼매(定)로 멸진정(滅盡定)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불교의 성자 가운데 아라한과 아나함만 들어갈 수 있는 삼매인데, 생각과 느낌이 모두 사라지기에 이 삼매에 그냥 들어갔다가는 깨어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깨어나겠다."는 생각조차 떠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느낌도 사라지기에 옆에서 천둥번개가 쳐도 깨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감각과 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삼매입니다. 그래서 상수멸정에 들어가기 전에 언제 깨어나겠다고 작정을 하고 삼매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하루 뒤에 깨어나겠다든지, 1주일 후에 깨어나겠다고 작정을 하고 상수멸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불전에는 상수멸정과 관련하여 이 이상의 설명이 없지만, 다른 교리에 근거하여 유추해 보면, "언제 깨어나겠다."는 '작정'은 오온 가운데 행온에 심어놓는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본 게시판에서 이미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상수멸정이란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 가운데 상온과 수온만 사라진 삼매입니다. 따라서 상수멸정에 들어간 수행자에게 색온과 행온과 식온은 남아 있습니다. 색온은 그의 몸뚱이이고, 행온은 상과 수를 제외한 여러 심소들인데 그 가운데 작의(作意, manasikāra)가 '언제 깨어나겠다."는 '작정'의 작용을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망하지 않았기에 식온 역시 남아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상수멸정'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오온 가운데 우리의 '의식(consciousness)'에 해당하는 것은 상온과 수온뿐이며, 색온(色蘊)은 물론이고 행온(行蘊)과 식온(識蘊) 모두 우리의 '의식'과 무관함을 알 수 있습니다. 행온과 식온은 우리의 의식에 떠오르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자유로운 의지든, 기계적인 의지든 의지는 행온에 속합니다. 즉 "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의지는 결코 나의 의식에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행온이 아니라 행온에 대한 관념으로 상온(想蘊)에 속합니다. 의지인 행온 그 자체는 결코 의식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는 내 눈이 내 눈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의지는 능동적 작용이기에, 의식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영화를 볼 때 스크린에 비친 영상이 수(受)와 상(想)만으로 이루어진 의식에 해당한다면, 영상을 쏘는 영사기는 행(行)에 해당합니다. 빛을 쏘는 영사기의 작용이 스크린에 나타나지 않듯이, 우리의 의지는 원래 의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벤자민 리벳의 실험에서 '의지가 수반된 손가락 근육의 수축'이 '스위치를 누른다는 의식'보다 선행한다는 실험 결과가, 결코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온설의 경우, 오온의 배열순서 역시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색→ 수→ 상→ 행→ 식'의 순서는 객관대상이 주관인 식에 의해 파악되는 과정과 일치합니다. 형상(色)을 접하면 고, 락, 불고불락의 느낌(受)이 생기고, 이어서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가 파악되며(想), 그것을 배척할지 포획할지 의지가 발동(行)한 후 최종적으로 나의 마음(識)에 수용됩니다. 이와 반대 방향인 '식→ 행→ 상→ 수→ 색'은 주관이 객관에 작용하는 과정과 일치합니다. 나의 마음(識)이 발동하면 수용(탐욕)과 배척(분노)의 의지(行)를 발하여, 그에 적합한 대상(想)을 떠올리고, 그 대상이 주는 느낌(受)에 따라서 그 대상(色)과 접합니다.
대뇌에서 중심고랑(central sulcus)을 경계로 앞 부분의 피질(전두엽)은 능동적인 의지와 운동을 담당하고, 뒷부분의 피질(두정엽, 후두엽, 측두엽)은 수동적인 인지와 감각을 담당합니다. 앞부분에서는 전기신호가 뉴런을 타고 뇌에서 몸으로 나가고 , 뒷부분에서는 전기신호가 몸에서 뇌로 들어옵니다.
주관적으로 보면 오온 가운데 나의 '식(識)'은 나에게 파악되는 모든 현상에 존재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나의 '식(識)'은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현상에 수반하여 나의 뇌 속에서 요동하는 한 점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무엇을 인지하고 감각할 때에는 그 한 점의 식이 뇌의 뒷부분에서 주로 활동하고, 내가 의지를 갖고 어떤 행동을 할 때에는 그 한 점의 식이 뇌의 앞분분에서 주로 활동합니다. 식은 모든 감각의 종착점이면서, 모든 행동의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식이 어느 곳에서 활동하는가에 따라서 식(識)의 능동성과 수동성이 달라집니다.
설명이 길어졌지만, 어쨌든 벤자민 리벳의 실험에서 말하는 '의식'에 행위의 생각이 실제의 행위보다 나중에 떠오른다는 점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의지'는 의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자유의지 존재는 논리적 사유를 통해 입증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습니다. 눈이 눈을 볼 수 없듯이, 행에 속한 의지는 상과 수로 이루어진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유의지의 유무가 증명불가능하다는 점은 250여 년 전에 이미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역설한 바 있습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편의상 일종의 '자유의지'가 있다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 불교의 인과응보설은 숙명론도 자유의지설도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벤자민 리벳의 실험해석을 불교의 상수멸정(想受滅定)으로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질문드리기 전에 리벳의 실험에 대해서 찾아보고 실험에 대한 몇몇 비판글도 읽어보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또 다른 비판을 제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의식(consciousness) 개념에 수(受), 상(想)만 해당되고 행(行)과 식(識)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의지(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직접 인식을 통해 아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결과를 바탕으로 추론을 통해 간접적으로 아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눈이 눈을 보지 못하지만 눈을 뜨면 보이고 눈을 감으면 안보이는 것으로 눈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처럼..
식(識)이 말씀하신대로 대뇌와 같은 신경계 회로의 한 점 흐름이라면, 상수멸정을 경험하지 않아도 척수반사(spinal reflex) 등을 통해 순간적으로 수(受), 상(想) 없이 행(行)과 식(識)만 있는 상태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열반에 들면 12연기의 수(受)의 단계에서 더이상 애(愛)로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니 아라한이 반열반에 들기까지 생전에 하는 모든 행위는 일종의 '척수반사적' 혹은 '무조건반사적' 행위와 유사하지 않을까 싶은데 제가 이해는 잘했는지 너무 오버하진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리학적 결정론(숙명론)은 모든 입자의 움직임은 물리법칙에 따라 정해져 있고 우리몸과 뇌도 또한 입자로 이루어져 있어서 물리법칙에 따르며 구성하고 있는 입자의 정해진 움직임에 따라 우리 감각, 의지, 기억등 모든 정신활동이 나타나므로 사람사이의 관계 행위 운명 등우주의 모든 상태변화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는 당연히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인데 이게 진정 해방일수도 있다는생각이 듭니다. 내가 뭘 생각하든 이미 그렇게 생각하도록 정해져 있다면 도둑이 되든 견성을 하던 자살을 하든 전적으로 무책임할 수 있고 이게 바로 해탈이 아닐까요? 물론 모든 종교 도덕 문명이 부정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