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10월 2일(일) 대구에서 대구부산간고속도로를 들어서 삼랑진IC로 나와 경남 김해시로 들어선다.
그리고 곧장 김수로왕릉으로~ 김수로왕릉 (金首露王陵, 경남 김해시 가락로93번길 26) 숭화문과 가락루를 지나 만나는 김수로왕릉이다. 요놈들 도토리인데, 숭선전과 숭인전을 지나 김수로왕릉 뒤뜰로 들어서니 큰 참나무에서 떨어져 줍는다. 김수로왕릉 좌측에는 위, 유물전시관이 있다. 김수로왕ㆍ김수로왕비 영정과 의복 및 제사풍습 등을 엿볼 수 있다. 저기 가락루를 들어서면 김수로왕릉이 나타나! 김수로왕비릉 (金首露王妃陵, 사적 제74호, 경남 김해시 가락로190번길 1) 김해 시내 북단에 위치해 있으며, 가락국(駕洛國, 金官伽倻) 수로왕비(許王后)의 능이다. 원형 봉분의 규모는 지름 16~18m이며, 높이 5m 정도로 봉분을 두르는 호석은 없다. 능 주위는 네모나게 돌담을 둘렀으며, 앞쪽으로는 낮은 단의 축대가 있다. 능비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 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라 새겨져 있다. 파사석탑 婆娑石塔 김수로왕비릉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파사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김해시 중심에 있었던 호계사(虎溪寺)가 1873년에 폐사되자 김해부사 정현석이 이곳에서 수로왕비역으로 옮겼으며, 이를 영구보존하기 위해 1993년 5월에 다시 이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을 세웠다. 삼국유사 등 고서에, 특히 삼국유사에는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이 서기 48년(수로왕 7년)에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올 때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에 싣고 왔던 것으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파사석탑은 파도를 진정시켜준다는 신령스러운 탑으로 일명 진풍탑(鎭風塔)으로 불리운다. 탑의 부재(部材) 5층만 남아 있는데 조각이 기이하고 돌에 붉은빛 도는 희미한 무늬 같은 것이 남아 있다. 신농본초(神農本草)에 닭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는 것이 바로 이 탑이어서 신비를 더하고 있다. 즉 파사석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로 닭벼슬의 피를 떨구면 굳지 않는다고 하는데, 김해시의 향토사학자가 이를 확인하였다고 한다. 김수로왕비릉에서 구지봉공원으로 건너가는 구지터널 위쪽 오솔길에서 내려다본 김해 도심지 전경 이곳은 사적 제429호(2001.03.07)로 지정된 구지봉이라~ 아래 그 터다.. 원래 사적지 지정 이전에 조성되었던 '천강육란석조상'은 일반 조형물로써 사적지 내 설치는 부적합하다는 전문가의 의견을 반영하여 2002~2003년도에 시행한《가야 역사문화환경 정비사업》시 지금의 수로왕릉 연못 인근으로 옮겼다. 김해구지봉 金海龜旨峯, 사적429호 구지봉은 서기 42년 수로왕이 탄강한 성스러운 장소이다. 구릉이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구수봉(龜首峯), 구봉(龜峯) 등으로도 불리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실린 수로왕의 탄강설화에 의하면 서기 42년 당시 이 지역을 다스렸던 구간(九干)과 백성들이 구지봉에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보라색줄에 매달린 황금상자가 내려왔으며, 상자에서 나온 6황금알을 깨고 태어난 분들이 6가야를 세운 왕들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구지봉이 가야 500년 역사의 출발점인 동시에 고대 국문학상 중요 서사시인 "구지가"가 탄생한 곳임을 알려준다. 수로는 가장 먼저 태어났다는 뜻으로 수로왕은 태어난지 10여일만에 장성하여 가락국(駕洛國, 金官伽倻)을 세운 분으로 김해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구지봉 고인돌 支石墓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이다. 지하에 깬 돌로 쌓거나 돌판으로 상자를 짠 무덤칸을 마련하고 그 위에 작은 받침돌(支石)로 큰 돌(上石)을 지탱하는 구조가 대부분이다. 위, 구지봉 정상에 있는 고인돌은 전형적인 남방식(南方式, 基盤式) 고인돌로 규모는 240×210×100cm로 작은 편이지만, 특이하게 구릉의 정상부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아직 정식 발굴조사가 되지 않아 정확한 축조시기 등을 알 수 없으나, 주변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마을유적 등의 사례로 보아 기원전 4~5세기 경 이 지역을 다스렸던 추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구지봉 고인돌의 상석(上石)에 새겨진 구지봉석(龜旨峯石)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의 명필인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