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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지으신 우리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과 특권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도 그것을 존중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거나, 교회에 가야 한다거나, 선교에 동참해야 한다는 등 어떤 강요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할 수 있는 특권에는 항상 선택의 결과에 대한 무서운 책임이 따릅니다. 그런데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자신의 에세이를 통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眞實)과 안락(安樂)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를 고를 수는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진실과 안락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은 일거리를 만듭니다. 진실은 알려야할 사명과 함께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진실이 진실로 전달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떤 안경을 끼고 보느냐에 따라서 진실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습니다. 진실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촛불 정국은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부가 굴욕적인 협상을 통해 검역 주권을 포기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여야의 반응, 일반 국민들과 일명 보수 신문의 반응은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촛불 집회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보인 대응에 대한 반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촛불 집회를 이끈 사람들은 중고생이었습니다.
거기에 성인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면서 규모는 점점 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들의 배후에 북한이 있다느니, 불온 세력이 있다느니 붉은 색칠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진실을 그렇게 왜곡했습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을 수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진실을 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진실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열정을 투자한 사람들에게는 진실을 전했다는 만족과 기쁨과 자부심이 주어지기는 할 것입니다. 반면 안락은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편안하게 즐기면 됩니다. 부정적인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실을 전하는 것보다는 백 번 쉽고 좋습니다.
사람들이 갈등하면서도 진실을 외면하고 평안한 삶을 선택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탈린(Ioseb Dzhugashvili)이 통치할 당시, 시베리아의 집단 수용소에 수용된 유대인 의사 보리스 콘펠드(Boris Cornfeld)는 거기서 한 그리스도인의 집요한 전도를 통해 거듭났습니다. 이후 영혼의 자유와 평안을 얻은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결코 부정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수용된 감옥에서 활동하는 의사들은 검은 뒷거래를 통해 치료할 환자들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그는 돈이 없어 수술을 포기하고 있던 한 암 환자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교도소 규칙을 어기게 된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말았습니다. 죽기 전날, 그는 밤새도록 자신이 치료해준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리고 처형당하기 직전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형 집행관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무엇인가를 선택했다면, 그렇게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 합니까? 로마 군병들은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주님을 "브라이도리온"이라 불리는 뜰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16-20절입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戱弄)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빌라도는 처음부터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주님을 끌고 왔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어떤 죄도 발견할 수 없었던 그는 유대인들이 고발하지 않는 한, 그들의 종교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습니다.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요18:31a)고 퉁명스럽게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풀어주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수고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며, 최고의 반역죄를 지었다"는 정치적인 공세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의 신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는 그들의 정치적인 공세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만에 하나 그들이 로마 정부에 자신이 정치범으로 고소된 자에 대해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는 내용의 탄원서라도 올린다면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가 급격히 좁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그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로 인해 민란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민란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지역의 안정을 위해 파견된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죄도 찾을 수 없었던 주님을 심하게 매질한 후, 십자가에 못박도록 군병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자신의 자리와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은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주님을 궁전 안에 있는 "브라이도리온"이라 불리는 뜰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뜰 안에서 모든 군대를 모았습니다. 그때까지 주님이 입고 있던 옷을 벗기고, 왕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만들어 씌웠습니다. 절하며 희롱(戱弄)했습니다. 차례로 돌아가며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있던 주님의 머리를 갈대로 쳤습니다. 흥분한 그들은 침까지 뱉었습니다. 그렇게 짐승이 되어버린 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끌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고통을 묵묵히 참아내셨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어 마땅한 인류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친히 증거 해 보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리를 지키기에 전전긍긍하는 삶입니까? 아니면 짐승 같은 삶입니까? 아니면 죽기까지 사명에 충성하는 삶입니까? 사명을 이루기 위해 충성하고 있다면, 그 삶은 자발적인 삶입니까? 아니면 어쩔 수 없어서 사는 삶입니까? 구레네 시몬은 어쩔 수 없이 주님의 십자가를 맨 사람이었습니다. 21절입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모진 매를 맞고 많은 피를 흘려 지칠 대로 지친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via dolorossa)를 걷는 동안 쓰러지고 또 쓰러지셨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수 없겠다고 판단한 군병은 구경하고 있던 무리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끌어냈습니다. 그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 마침 시골에서 올라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보고 있던 그는 로마 군사에 의해 어쩔 수없이 십자가를 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는 그런 일이 자신에게 닥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아니 십자가를 지는 일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원치 않는 바로 그 일이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는 가장 필요한 때에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로마 군사의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가장 알맞은 하나님의 때 곧 주님의 십자가를 져야할 바로 그 시간에,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요?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고 설명하면 모든 의문이 풀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연을 인정하지 않는 반면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인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연한 만남도, 우연한 사건도, 우연한 출생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세상에 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통해서 세상에 왔든 그것은 절대 우연은 아닙니다. 만세 전부터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기로 결정하신 하나님은 심사숙고 끝에 우리의 부모를 결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진실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출생으로 인한 상처가 없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불륜을 통해 왔다할지라도 그렇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불륜을 권장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막아야될 일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예정 없이 세상에 온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시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도무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인데 해야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무조건 해야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따지지 말고 무조건 순종해야합니다.
기쁨으로 순종해야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만일 시몬이 주님이 누구신지,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셔야 했었는지 알았더라면 어떤 마음으로 십자가를 대신 졌을까?"라고 반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만약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계시며, 그 십자가를 자신이 대신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절대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재수 없으려니까 별일을 다 당한다며 기분 나빠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분명 주님의 십자가를 자신이 질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크게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못합니다. 영적으로 어둡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영적인 눈을 떠야하는 이유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으로 충만하기 위해 힘써야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삶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과 상황과 사람을 만나든 기쁨으로 받으십시오. 감사함으로 섬기십시오. 그것을 통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거절하셨습니다. 22-32절입니다.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쌔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때가 제 삼 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 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지극히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은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이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내려가고 싶은 충동 사이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여 결정한 길이기는 하지만,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조롱과 멸시를 받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내려가서 끝내 버리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도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십자가에 달린 자들에게는 극도의 피로와 고통과 갈증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께서 고통을 덜 느끼시도록 마취 성분이 있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지막 배려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받기로 결정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반드시 받아야할 고난의 잔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의 왕 뿐 아니라 온 인류의 왕이시지만, 말씀 한마디만으로도 성전을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실 수 있으시지만,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으시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고난을 온 몸과 마음으로 고스란히 받으셨습니다. 당신을 모욕하는 사람들 틈에서, 이해 받지 못하는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33-39절입니다.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은 아침 아홉 시였습니다. 그리고 낮 열두 시부터 온 땅을 뒤덮은 어둠은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하루 중 가장 밝고 환한 낮 열두 시 곧 낮의 중심에 어둠이 온 땅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시는 고통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문 위에 머물렀더라"(신31:15),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왕상8:12b) 등의 말씀에 의하면, 어두움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결국 어두움이 임했다는 것은 아들이 당하시는 고통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버림받아 죽어가고 있으며, 죽음의 문을 넘고 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고통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하나님을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렇게 인류 구원이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셨습니다. 저는 모아산을 오를 때마다 평소 느끼지 못하던 쾌감을 느끼곤 합니다. 사실 처음 산을 오르기 시작할 때는 몸도 무겁고 숨이 턱까지 차 올라 금방 기진맥진해 집니다.
거기서 포기하면 더 이상 산을 오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비만 잘 넘기면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것은 축구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숨이 찰 때까지 뛰고 나야 비로소 몸이 풀려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인생과 신앙 생활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시험을 만났을 때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참고 견뎌야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한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어떤 길을 걷고 있든 그 길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길입니다. 어렵고 힘겨울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스스로 선택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라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합니다. 혹시 어쩔 수 없는 길을 걷고 있을 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해 그 길을 걷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묵묵히 참고 견디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양과 질이 똑같은 두 더미의 건초 사이에 놓인 나귀는 어느 것을 먹을 것인지 망설였습니다. 양쪽으로부터 똑같은 자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망설이던 나귀는 결국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유명한 "뷔리당(Buridan)의 나귀"의 예화입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같은 두 더미의 건초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인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하지 않고는 절대로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선택은 포기 또는 손해가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Pierre Cardin)이 꿈 많던 22살 청년 시절 길은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꺼번에 파리 적십자사로 갈 수 있는 전근 사령장과 디자이너 왈드너의 가게에서 일할 수 있는 소개장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긴 망설임 끝에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낸 그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튕겨 올리며 앞면이 나오면 왈드너, 뒷면이 나오면 적십자로 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해서 패션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재능을 인정받아 왈드너를 거쳐 당시 유행을 선도하던 최고의 디자이너 디올(Christian Dior) 밑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디올의 죽음과 함께 그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 동안 디올의 사업을 후원하던 섬유회사 사장이 그를 후계자로 지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가게를 갖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연필을 세우고 오른쪽으로 넘어지면 디올에 남고, 왼쪽으로 넘어지면 자신의 가게를 차릴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독립을 선택한 그는 이후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기해야합니다. 자신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포기해야합니다.
누군가 바른 선택을 위해서는 탁월한 분별력을 가져야하고, 탁월한 분별력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을 철저히 비워야하고, 자신까지 비운 그 자리에는 하나님으로 채워야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할 때 바른 목적을 위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선택한 목적은 바릅니까?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하나님으로 충만하기를 소원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탁월한 분별력을 소유할 뿐 아니라, 바른 목적을 위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