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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7월19일(日)雲晴
▲도덕산(道德山)(옥산리-도덕암-정상-안부-옥산리)
해봉(130명)
♠참고
▲도덕산(道德山) 703m -- 한국의 산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영천시 고경면
산길도 잘 나 있고 특별히 위험한 코스도 없어 가벼운 마음으로 오를 수 있는
도덕산은 전망이 뛰어난 곳이다. 큰바위가 쌓여있는 꼭대기에 서서 봉좌산, 자옥산,
보현산, 단석산, 동해바다의 시원한 전망을 보노라면 저절로 `야호'소리가 목을 간지
럽히며 터져 나온다.
또한 산꾼들에게도 낯선 곳이 되어놔서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은 덕분에 누구나 하늘
을 향해 꼿꼿하게 뻗어 있는 고목들이 무리지어 서 있는 숲을 만나게 되면 뜻하지 않게
소중 한 인연을 만났을 때처럼 기뻐진다.
산언저리에는 국보 40호인 정혜사지 13층석탑과 조선시대 회재 이언적이 말년을 보낸
독락당(보물 413호), 그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옥산서원 등 역사적인 의미가 깊이 녹아
있는 유물과 유적지도 있다.
♧산행 코스
10시30분 옥산리
11시20분 도덕암
12시15분 정상
13시10분 잘록이(자옥산 갈림길)
14시00분 옥산리
총 3시간30분
☞☞☞해봉 창립 10주년 기념 산행. 전날, 일기예보에 오전 중에 많은
비가온데서 신경을 섰는데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아 안도.
시민회관 앞은 많은 등산객이 모여들었고 전세 낸 관광버스 3대중 2대가
만원입니다. 임대장이 2호차에 승차하라며 인사합니다.
2번 석에 내 이름이, 1번 석엔 k양이 앉아 있습니다. 3호차도 거의 만원이 되어
08시5분에 출발한다.
백두대간 종주하면서부터 체력단련을 위해 매일 조기등산, 운동하면서 알게 된
마을 뒤 시약산 싸릿골의 청솔산악회 회장님등 낮 익은 얼굴들이 보입니다.
k씨와 모악산과 금산사 산행을 언제가 하기로 약속합니다.
달리는 차중에서 지난번 백두대간종주 시 촬영한 비디오를 보면서 경주 나들목을
빠져 안강의 옥산리 ‘독락당’ 앞 햇볕이 쨍한 공지에 도착한 게 10시20분.
임대장의 산행과 행사일정 소개와 상견례를 끝으로 행사요원,
유산객 등 20여명을 제하고
10시28분, 전원 임도를 따라 출발합니다.
낯익은 반가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포장로를 따라 올라갑니다.
강한 햇살을 피한다고 양산을 바쳐 든 부녀회원,
꼬맹이의 손을 잡고 가는 아주머니.
왼쪽으로 국보40호인 정혜사지 13층 석탑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요란한 물소리를 내는 개울을 끼고 가다
왼쪽으로 꺾어져 올라갑니다.
10시45분, 왼쪽으로 시그널이 보이는 등산로를 따라 본격적인
산행 길에 오릅니다.
구름사이로 나온 강한 햇살, 회원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앞서가든 k양이 얼굴이 백지장이 되어 나무를 잡고
서있습니다.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무리인 것 같아 되돌아 내려가게 합니다.
더위에 상의를 벗은 조군의 등이 많이 굽은걸 발견하고
속으로 안쓰러워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니콘은 목에 걸려있습니다.
팥죽 같은 땀을 흘리는 젊은이,
묵묵히 땀을 닦으며 올라가는 많은 회원들.
다시 임도에 올라섭니다.
11시20분, 암벽을 수문장처럼 세워놓은 듯 한 도덕암(道德庵) 입구에
당도합니다.
신라 때의 절인 정혜사 12암자 가운데 하나인 암자,
신라 경덕왕 때 세워졌으며 처음엔 두덕암 이라고 부르다가
회재 선생이 정혜사에 머무르며 공부할 때 도덕암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하는데 도덕산도 이 도덕암에서 유래된 듯합니다.
나무그늘에서 많은 회원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는 걸 촬영하고
왼쪽으로 갈지자로 가파 르게 올라가는 끝에 ‘산령각’이 보입니다.
쉬지 않고 된비알을 계속 올라갑니다.
산령각을 촬영하면서 이끼 낀 암벽 밑에 석간수와 선 그라스를 낀
김경애양이 올라오는 걸 내려다보면서 촬영하는데
산령각 쪽으로 건너오려는 걸 왼쪽으로 올라가게 합니다.
암괴사이로 두 팔까지 동원하며 올라가는 회원들.
등산로는 계속 급경사입니다.
해발 702m만 생각하고 참여한 한 회원이
숨찬 소리로 한마디 합니다.
“아~~ 이 산이 사람을 은근히 진을 빼네!”
등산로 위에 어느 무심한 회원의 등산화에 밟힌
지렁이 한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요동치듯 꿈틀되고 있습니다.
등산로변에 ‘더 맑게 더 푸르게’라고 쓴 팻말이 시선을 끕니다.
12시15분, 1사간45분만에 정상비가 2개 서있는 암봉에 올라섭니다.
잡목에 전망이 조금 가린 정상.
‘도덕산’이라고 한글로 쓴 부식중인 목비 옆에서 기념촬영하고
주변을 살피니 서쪽으로 또 다른 석비가 있습니다.
높게 떠있는 검은 구름아래 있는
안강읍이 내려다보이는 들판을 캠코더로 턴하며 촬영합니다.
점심식사는 조금 하산하면서 한데서 자옥산 쪽으로 내려갑니다.
암괴가 돌출해 있는 전망이 확 트인 곳에 70대라는 김태완씨등과 어울려
빵으로 식사를 하는데 뜨개질한 베레모를 쓴 노처녀가 여분을 가져왔다며
김밥을 내밉니다.
처음 보는 회원인데 누가 귀띔을 해주어 알았지만
항상 남을 배려하는 너그러운 분인 것 같습니다.
좌측 아래로 멀리 옥산리와 독락당 앞
우리들이 출발했든 주차장이 보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주변풍광에 매료되어 김태완씨에게
“한 오백년을 한번 뽑아보시지요!”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한가락 뽑습니다.
그 가락에 맞추어 캠코더로
아름다운 산수를 훑어나갑니다.
온갖 풍상을 겪은 7학년 김 회원의
주름 잡힌 얼굴에서 자옥산을 거쳐 삼성산까지.
암괴를 내려서니
완만한 경사의 탄탄대로입니다.
13시28분, 자옥산 갈림길 이정표 잘록이에서
왼쪽으로 꺾어져 내려갑니다.
앞서 내려가는 김 노익장의 창은 계속 이어집니다.
13시32분, 작은 개울을 건너고
13시58분, 정혜사지 13층석탑에 도착합니다.
보통 석탑과 달리
국보답게 정교하고 특이한 모습을
캠코더와 카메라에 조심스럽게 담고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淨惠寺址十三層石塔)
지정번호 : 국보 제40호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시대 : 통일신라시대
크기 : 높이 5.9m, 기단 너비 2.1m
국보 제40호. 높이 5.9m, 기단 너비 2.1m. 신라 때 작품으로 유례를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기단은 현재 단층 토축(土築)으로 고태(古態)를 보이고 있으나
이것이 어느 정도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초층 옥신은 특히 큰데, 사우(四隅)에 굵은 사각형 석주를 세우고 그 안에
양측으로 우주 (隅柱)에 붙여 소주(小柱)를 세웠으며 그 위에 인방(引枋),
아래에 하방(下枋)을 걸쳤고 이러한 시설은 4면에 모두 같이 설치되었다.
초층 옥개석은 옥석(屋石)과 받침이 별석으로 옥석은 8석, 받침은 4석으로
되었으며 받침수는 3단이다. 옥개받침은 각층 3단으로 초층과 같고 상륜부
는 노반(露盤)이 남아 있을 뿐이다.
탑은 보기 드문 13층이며 초층에 비해 2층 이상이 일반적인 체감의 비례를
무시하고 줄어든 점 등, 특수한 형태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초층 옥신 4면의
감형(龕形) 개설과 아울러 기단 도 통식에서 벗어난 특수 형태로 축조되었다.
14시10분, 오늘의 행사장인 독락당 뒤편, 숲속으로 들어섭니다.
먼저, 창립 10주년 현수막을 친, 산신제 돼지머리 제단에 들려
인사 하려는데 한 회원이 다른 사람만 찍어주고 본인은 한번도 못 찍는다며
캠코더를 달라며 찍어주겠다 고 합니다.
배추닢 한 장, 제주 한잔 올려놓고 무사산행을 기원하며 재배를 합니다.
그리고 캠코더를 받아 5,6명씩 둘러앉아 집행부에서 준비한
수육과 떡 등으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담소하고 있는
넉넉 정겨운 광경을 촬영합니다.
여기저기서
“이리, 오이소!”
하며 부르고 사리골 회원들이 반기며 손을 흔듭니다.
독락당을 지을 때 회제 이언적이 직접 심었다는
수령 450년의 주엽나무[卑角樹]가 시선을 끕니다.
♠높이 약 20m의 주엽나무는 쌍떡잎식물 장미목 콩과의 낙엽교목으로
쥐엽나무라고도 하는 데 산골짜기나 냇가에서 자라고 열매는 협과로
비틀리며 길이 23cm, 나비 3cm로서 10월에 익는데 가시는 소종·배농 등에,
열매는 거풍·거담 등에 사용한다고 합니다.
잠시 회원들과 어울려 고기와 떡, 술 한 잔을 주고받으며 허기를 메우고
독락당 촬영을 위해 임 대장에게 이야기하고 너럭바위로 내려 개울로 내려섭니다.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독락당(獨樂堂)
지정번호 : 보물 제413호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옥산서원
시대 : 조선 중기
크기 : 정면 4칸 40자, 측면 2칸 16자, 단층
종류 : 목조건물
정면 4칸 40자, 측면 2칸 16자, 단층 팔작지붕집.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
을 봉사(奉祀)한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있는데,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서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다.
낮은 기단 위에 서 있는 팔작집으로, 마주 향하여 오른쪽 3칸은 널찍한 대청이나 앞을
모두 터놓았고 왼쪽 1칸은 칸을 막아서 온돌방을 꾸몄다. 그러나 원래는 맨 오른쪽 칸
도 막아서 방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어 대청은 가운데 2칸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청 앞면에는 문짝을 달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문설주가 남아 있다. 기둥은 원주
(圓柱) 를 세웠는데 공포(뱀包)는 초익공(初翼工) 계통의 구성과 같고, 기둥 위에 얹은
주두(柱頭) 로 직접 대들보[大樑]와 도리를 받쳤다. 그러나 주두에 꽂힌 첨차(墅遮)의
형태에는 여전히 주심포집 건축의 전통이 남아 있다.
대청의 연등천장에서 볼 수 있는 대들보와 그 위의 종량(宗樑)은 제법 형식을 갖추어
다듬어져 있으나, 둘 사이에 받친 대공(台工)은 양봉형(樑奉形)의 간단한 만듦새이다.
대청과 양쪽 방의 경계에 배치된 양재(樑材)는 인방(引枋)보다 조금 굵은 재목을 사용
하고, 그 아래로 기둥머리를 얹은 방주(方柱)로 받치고 있다. 이 부분에서 대공은 동자주
(童子柱) 로 대신하게 하고, 회벽(灰壁)을 쳐서 공간을 막았다.
많은 물이 흐르는 개울 오른쪽 언덕위로 지은 정자안의 담정(潭亭), 인지헌(仁智軒)의
글씨. 축대 중간쯤에 만들어 놓은 아궁이가 시선을 끕니다. 특히 담장 중간에 바깥을
집안 마루에 앉은 체 개울을 보기위해 만들어 놓은 담장, 나무창살이 색다릅니다.
담장을 돌아들어 선 대문 안 사랑채에
할머니 혼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습니다.
“할머니 혼자 계십니까?”
하고 물으니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잘 들리지 않습니다.
본체는 자물쇠로 채워놓아 들어가 볼 수 없어 되돌아 나오니 담장에
‘李全仁(호 잠계공)의 후손이 살고 있는 종택이므로 본 종가에 특별한
문의와 출입을 금하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8대 종손 드림‘
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옥산리가 고향이라는 이진복회원이 좀 더 내려가면 옥산서원이 있는데
여기보다 볼게 더 많다고 합니다. 약 5분 거리의 마을과 포도밭을 지나
바위 개울의 작은 폭포가 굉음을 내는, 통나무 다리가 걸쳐있는 곳을 조
금 스릴을 느끼며 건너, 뒤돌아보니 k양이 무서워 서인가 R씨의 등에 업혀
건너옵니다.
바로 ‘玉山書院’입니다.
亦樂門은 자물통으로 채워져 있고 오른쪽으로 돌아들어서니
관리인이 시간이 다되어간다며 신경질적으로 빨리 보고나오라고 합니다.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옥산서원 (玉山書院)
16세기의 유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배향한 서원.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지정번호 : 사적 제154호
지정연도 : 1967년 3월 8일
시대 : 조선시대
크기 : 26,075㎡
분류 : 서원
창건된 해는 1573년(선조 6)으로 그가 세상을 뜬 지 20년이 지난 후였다.
당시 경주부윤 이었던 이제민(李齊閔)은 안강 고을의 선비들과 더불어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독락당 (獨樂堂) 아래에 사당을 세웠으며, 사액
(賜額)을 요청하여 1574년에 '옥산'이라는 편액과 서책을 하사받았다.
양식은 전면에 강학처(講學處)를 두고 후면에 사당을 배치한 전형적인
서원 건축구조로 되어 있는데, 중심축을 따라서 문루,강당,사당이 질서
있게 배치되어 소박하면서도 간결 한 모습을 띠고 있다. 서향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무변루(無邊樓)라는 누각이 나타나고, 이어서
계단을 오르면 마당이 전개된다. 정면에는 구인당(求仁堂)이란 당호의
강당이 있고, 좌우에는 원생들의 기숙사격인 민구재(敏求齋), 암수재
(闇修齋)의 동,서재실 이 있다. 강당을 옆으로 돌아서서 뒤로 가면 이언적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체인묘(體仁廟) 라는 사당이 나타나는데, 사당의 주변
에는 장판각(藏板閣),전사청(典祀廳),신도비(神道碑) 등이 있다.
이 서원은 현존하는 서원 문고 가운데 많은 책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현재 두 곳에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하나는 서원 경내에 있는 어서각(御書閣) 소장본이고,
다른 하나는 이언적의 사저에 있는 독락당에 있는 소장본이다.
보관된 책 중에서 1513년에 간행된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
은 현재까지 발견된 활자본으로는 가장 오래된 책으로 보물 제524호로 지정
되어 있으며, 이 밖에 《삼국사기》 《해동명적》 《이언적 수필고본일괄》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6세기 영남사림파의 선구가 되는 이언적을 모신 만큼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까지 영남 사림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훼철되지 않았다. 일제 말기에
화재로 옛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곧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玉山書院 현판, 그안 대청마루 위에는 求仁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대학생인 듯 한 젊은이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어 바쁘게 촬영하고 옥산서원을 나섭니다.
넓다 란 길이 개울을 끼고 내려가는데 좌측으로 고목과 푸른 숲으로
덮여 있어 콘크리트 속에서 일상을 보낸 사람들에겐 마음이 풍요롭게
하는 호젓한 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진복회원의 생가를 지나쳐 포장도로에 나섭니다.
독락당 뒤 숲속에서 잔치 후,
독락당과 옥산서원을 들려 관광하고 내려온 사람은 겨우 10여명인가,
독락당 앞 주차장에서 회원들을 태우고 내려오는 버스에 10여명의 회원
들과 함께 승차하여
16시42분, 부산으로 출발합니다.
모심기가 끝난 들판은 푸르고 하늘은 뭉게구름으로 덮여있습니다.
2호 버스를 탄 이대장이
조문기 회원에게 기증할 비디오테이프를 그냥 전하겠다는 걸
많은 사람 앞에 그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사연을 이야기하고
전하라고 했더니 양산을 지나 인사 및 안내방송을 하면서
많은 회원들의 박수와 조군의 흐뭇한 미소 속에 기증식이 끝납니다.
집행부 젊은이들의 뒤편에서 폐기물 쓰레기를 수거를 하고
18시50분, 부산T/G를 통과,
평소와 달리 금정구로 들리지 않고 곧장 도시고속도로로 빠져
모두들 경쾌한 마음속에 최종 종착지 평화시장 앞으로 달립니다.
이제 그룹산행도 하산 후, 느긋하게 우리조상들이 자연과 더불어
지혜롭게 산, 발자치를 되돌아보는
문화 관광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예기치 못한 숨은 국보 한 점을 촬영한 것만으로도
보람 있는 하루였습니다.
산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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