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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12,29-36
열째 재앙 - 맏이(בכור 버코르)
지난 시간에 신부님께서 한 얘기중에 하나가 누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집에 있는 헌 누룩은 치워버리고, 새해가 시작되면은 파스카와 함께 새해가 시작되면 헌 누룩은 치우고 새 누룩을 사용해야 한다는, 누룩에 관한 말씀과
그리고 파스카 저녁이 되면은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는....말씀에 출발점은 아마도??
무언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그와 같은 기본적인 전통적인 전례에 역사적인 의미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한 해에 일정한 시간, 새해가 되면 새 곡식과 새 누룩을 가지고 새로운 빵을 해야되고 기존까지 있었던 것들은 다 없애버리는 굉장히 오래된 전통 일 것입니다.
새해가 되면 새 누룩을 사용하는 전통은 어떤 사회의 전통일까요?
농경사회의 전통입니다.
대신에 파스카 축제에 양을 잡는것은? 유목사회의 전통입니다.
그런 전통에 신학적 의미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이제 한 해를 시작하니까 모든 것이 새로워야 된다. 라는 일반적인 그런 의미 내지는 위생학적인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것은, 우리도 새해가 되면 새로운 봄이 되면서 청소를 한번 다 하는 것처럼...
부활맞이하기 전에 본당마다 새로운 청소를 하는 것처럼, 그런 의미로..집에서 부엌 다 청소하고, 누룩 찌거기 남아있던거 발효된것은 잘못되면 썩으니까, 그런것들을 다 치우고,
새로운 누룩으로 새로운 곡식과 새로운 빵에 새로운 역사적 의미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하나???
왜냐하면 우리들이 이집트를 탈출 할 때 이런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가 누룩 없는 빵을 먹는다... 라는 의미로, 탈출기에 저자는 그런 의미로 기존에 있었던
누군가로부터 배워온, 내지는 이스라엘 민족안에 있었던 전통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하는 그것으로 우리가 누룩 없는 빵에 대한 탈출기에 텍스트에 해석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면은, 안됩니다.
신부님이 강의때 해주시는 것은 성서 구절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것까지 해 주시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들이 묵상을 해야합니다.
신부님께서 해 주시는 것만으로 알아 들었다고 끝난다면 그것은 성서 백주간의 어떤 목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알아 들은 성경 말씀을 내 삶 안에서 어떻게 묵상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헌 누룩을 치우고 새 누룩으로 이제 새로이, 새로운 시간을 시작한다. 라는 것이
우리들이 묵상안에서 어떤 가능성이 있을 것인지? 에 대해서 물으시며,
그것은 결국 어떤 이야기를,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통해서 알아 들을 수 있을까요?
→ 일정한 시간이 되면 옛것들과는 이별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 해야 한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이 바로 예수 사건 입니다. 예수님이 와서
"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2,22 中
라는 이제부터 뭔가 새로운 시간이 시작한다. 라는 것에 대한 말씀이고
그 마지막 결정적인 새로움은 무엇이냐?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인 종말사건 입니다.
우리에게 종말은 왜 필요한가?
하느님께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종말은 필요하다. 는 의미에서 우리는 종말을 기다립니다. 무서워하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고,
물론 우리가 세상이 망해버려라. 이야기를 하는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종말론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 어서 오소서....그리하여 우리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게 우리와 함께 하소서..라며 종말을 기다리는 마음.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해져 왔던ㅡ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들을 떠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집에 있던 헌 누룩을 치워버릴 수 있는 마음과 연결이 됩니다. 이것을 개인적인 신앙의 차원 내지는 실존적인 신앙의 차원으로 내리고 보면은,
헌 누룩을 치워버리고 새로운 것을 기다리는 마음이 회개 !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삶과는 다른 것을 희망하겠다. 전혀 새로운 것들..따라서 회개라는 것도 나 혼자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 혼자의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내가 넘어가겠다는 궁극적인 희망이 바로 회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총과 함께 가능합니다.
따라서 회개한다는 것도 은총의 사건입니다.
공동체 안으로 넘어오면 헌 누룩을 치워버리는 게 무엇이 될까요?? 공동체적인 차원 또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교회가 회개해야 한다고 얘기할 수 도 있지만,
교회의 쇄신!에 관해서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를 봤을 때, 교회가 쇄신해야한다.를 가장 바라는 사람은 바로 프란치스코 교종이십니다. 그래서 더욱 쇄신에 관해서 얘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 이대로 좋은가?
어떤 것이 바꿔야 될까? 한국 교회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우리가 떠나야 할 곳은 무엇이고, 바꿔야 할 꿈은 무엇인가? 이런것들에 관해서 얘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것에 대한 논의 없이 단지 행사만, 이벤트만 한다면은 그것은 교종을 기쁘게 하는 손님 맞이에 태도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런면에서 한번 쯤 나의 회개라는 것, 교회의 쇄신이라는 것.
헌 누룩을 치워버린다는 것,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무엇이 바꿔야 하고, 무엇이 떠나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간들을 꼭 가지시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열째 재앙 : 맏이 탈출 12,29-36
피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탈출 12,22절에서는 피를 상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는것
그리고 우슬초 한 묶음을 가져다가 대야에 받아 놓은 피에 담가라.
그것으로 그 대야에 받아 놓은 피를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탈출 4,24-26 -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받는 내용
"나에게 당신은 '피의 신랑'입니다."
당신과 나는 하탐 담밈(חתן דמים), 당신은 나의 피로 맺어진 형제입니다.라는 얘기와 함께 모세가 살게 된, 모세의 아들이 목숨을 잃지 않게 된 이야기로,
따라서 피를 통해서 위험이나 재앙을 피한다는 그런 문학적 신학적 상징체계가 계속해서 공존해 있는 것입니다.
탈출 24장을 보면 시나이 장면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재물의 피를 뿌립니다. 레위기 8장에서 보면은 사제의 임직식(사제 서품)을 거행하면서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에게 숫양의 피를 발라줍니다.
거기에서 얘기하는 피(דם) 라는 것은?
하느님께 속한 거룩함을 상징하고, 피는 곧 생명을 의미 합니다.
생명을 버림으로써 생명을 얻게 된다는, 복음에서도 예수님이 이와 같은 상황을 '너희가 나를 위해서 하느님을 위해서 죽는다면, 너희는 영원히 살 것이고,
너희가 세속의 것을 움켜잡기 위해 살려고 한다면, 너희는 죽게 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런 것들을 우리가 버림으로써 하늘에 것을 얻게 된다는, 의미에서 마태 26장에 보면 예수님께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성찬례를 제정하시며) 계약의 피에 관해서 언급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사 때 마다 그얘기를 합니다. ' 이 잔은 계약의 피가 드는 잔이다. 그러니 너희는 이것을 받아 마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라.' 라는 그와 같은 말씀을...신약안에서도 같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천상적인 것을 찾는,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찾는 그와 같은 구도 안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피라는 극단적인 상징을 선택함으로서 하느님에 안전한 보호를 얻게되는 그런 어떤 두가지 틀안에서 우리는 이 파스카에서 양의 피를 가지고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는 그런 예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7절에 나오는 표현이 재밌습니다.
탈출 12,27中
그분께서는 이집트인들을 치실 때, 이스라엘 자손들의
집을 거르고 지나가시어, 우리 집들을 구해 주셨다."
- 요 대목만 딱 끊어서 읽으면 아파트 값이 올라갔나??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런뜻은 아닙니다.
집들을 구해 주셨다. 라는 것에 안에서 구약 성경이 갖고 있는 집에관한 좀 특별한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안에서 집, 이라는 말과 집안, 가문은
히브리어 ( 바잍, בית) 으로 표현됩니다. 야곱집안 이라면, 야곱과 딸린 모든 것을 말합니다. 특히 야곱, 야곱의 부인, 야곱의 아들들, 야곱의 종들, 야곱의 가축들, 등 이런것들, 그 모든것들이 야곱집안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집과 가문은 자주 동일시 됩니다. 마찬가지 그런 틀 안에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집도 동일시 됩니다. 즉 성전= 하느님 입니다.
구약에서 크게 하느님과 동일시 되는 것은 세가지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법
따라서 누군가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면 그것은 신을 함부로 하는 태도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을 함부로 얘기한다면 그것도 역시 하느님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이고 하느님의 법을 훼손한다면 그것도 역시 하느님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구약의 관점에서 보면 신약의 예수님이 그 세가지를 다 합니다. 신약 성경 보면은 예수님에 갈릴래아 활동 안에서 주로 드러나는게 율법 논쟁입니다.
율법에는 이렇게 써있는데 당신은 왜 이렇게 합니까?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당신은 왜 사람들을 고쳐줍니까?(다른 날 고쳐주어도 돼는데,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일을 합니까?)
신약 성경(복음서)의 전반부는 율법논쟁이고 후반부는 성전논쟁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서 환전상들 쫓아내고 성전에 관해서 '너희가 이것을 무너뜨려라. 내가 사흘안에 가서 다시 세우겠다.'
따라서 하느님의 율법, 하느님의 성전, 예수님 스스로가 자신의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하느님의 이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유다인들의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은 예수님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존재로 보게되는 신학적인 딜레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신학생들 가르치시면서 자주 하시는 말씀 중에서
'나도 참 자신이 없다. 내가 만약 예수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리고 예수 시대에도 신학자였다면, 나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 광장에 가서 빌라도에게 재판받는 예수님을 보면서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면서 주먹을 흔들지는 않았겠지만,
하!! 참? 신부님이 갖고있는 신학, 체계라는 틀 안에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분이다. 라는 그런면에서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공격했던 유다인들이 조금은 이해도 간다고 하시는....(하늘나라 가셔서 이러다가 야단맞으실 것 같다고 하시면서....)
"너가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 라고 예수님이 야단치실지는 모르겠는데....
그렇지만 그런것들이 바로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율법, 하느님의 이름,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그것을 굉장히 신중심적이 아니라 인간 중심적으로 해석을 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유다인들이 알아 들을 수 있었을까?? 이 문제에 관해서.....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율법주의적인 생각을 자주합니다.
본당신부하시다 보면 이런 얘기 자주 듣는다고 하시며,
"신부님..어떤 자매가 *** 하고, ***했는데 그거 틀린 거지요?" 이런식의 질문들과 "이렇게 하면 안돼지요?" 라는 ...
우리 신자들도 신앙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곱지 않은..시선이 갈때가 있는 듯 합니다.( 저거...저렇게 하면 안돼는데..🧐) 형제 자매로 보기보다는 율법주의 적인..
신부님께서도 대한문에서 쌍용차 해고자들을 위해서 미사를 하셨을때, 부끄럽지만 고백하신다고 하시며...한번도 거기에 가시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쌍용차 해고자들 정말 불의한 일을 당했고 어떻게든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지만 한번도 그곳에 가시지 않으셨다고...
'이게 미사인데?? 그렇게 거리에서 그런식으로 잘못해서 보면은 미사가 사람들을 선동하는 도구로 쓰여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때문에...항상 머뭇거리게 되셨다고 합니다. 결국 대한문 미사는 마무리가 되어버리셨는데...
그러다 나중에 쌍용차를 돕는 심리학, 정해신 박사님의 말을 들으면서 신부님께서 참 잘못 생각했구나...
그분의 얘기는 '쌍용차에서 그렇게 해고 사건이 있고 경찰이 들어가서 폭력적으로 용역들과 노조를 탄압하고 이러는 과정 안에서
또 그것이 수습되는 과정 안에서....굉장히 많은 사람들..2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살을 했는데, 신부님들이 대한문에서 미사를 시작하고 수녀님들이 미사에 오셔서 그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영정사진 앞에서 수녀님들이 꽃을 놓고..하면서 단 한 사람도 자살하지 않았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그 얘기를 들으면서 '아!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뭐라고 하셨나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셨는데, 당시에 신부님은 성사로서의 미사에 우리가 지켜야 될 가치, 중요함, 그 성스러움, 거룩함 이런것만 생각을 하고 그것이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신것 같았다는...
굉장히 부끄러운 마음으로 대한문 미사를 생각했던 기억을 얘기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그 열번째 재앙,
탈출 12,29-36
아홉번째 재앙이 뭔지 기억이 안날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아홉번째 재앙은 어둠이었습니다.
탈출 12,29
한밤중에 주님께서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곧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맏아들부터 감옥에 있는 포로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까지 모조리 치셨다.
먼저 이 부분에서 해주실 말씀은, 우리말 성경에서는 사람과 동물에 그 처음 태어나는 맏이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우리말에는 그 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맏아들, 이라고 해도 사람이고, 신부님은 이곳에 맏이, 라고 쓰셨습니다만,
그것도 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사람에 한정된 표현입니다. 동물일 경우에는 맏배 입니다.
그것이 우리말에는 없어서 여기서는 두 단어로 쓰셨지만,히브리어 원문에는 한단어만 나옵니다. 버코르, 라는 한 단어..
따라서 이집트 땅에 버코르(בכור)를 모조리 치셨다. 인데,
우리말에서는 그 단어를 한단어로 표현할 수 없어서 둘로 표현을 했고, 신부님은 그것을 조금 바꿔 보실려고 그냥 '맏이' 라고, 이집트 땅의 맏이들을 곧 왕좌에 파라오의 맏아들부터~~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엄격하게 국어사전을 따른다면은 동물에는 쓸수 없는 표현인데 억지로 쓰신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교회의 성경을 보면'
감옥에 있는 이라고 번역이 되어있는데 그 뜻을 보자면 '구덩이 집에 있는' 즉 구덩이를 깊이 파서 그곳에 사람을 집어 넣는 겁니다. 거기서 못올라오게, 그리고 음식 같은 것은 던져 주는 것입니다.
'구덩이에 들어가 있는'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이런 표현이 나왔습니다.
탈출 11,5 에서 파라오, 여종, 짐승에 관해서 나왔는데
탈출 12,29에서는 파라오, 포로, 짐승 관해서 나옵니다.
따라서 11,5절에서는 인간의 제일 높은 사람은 파라오고 제일 밑에 있는 계급은 여종 이었는데, 여기 탈출 12,29에서는 가장 높은 계급은 파라오인데 제일 밑에 있는 계급은 포로입니다.
약간의 수정이 보입니다.
포로? 라고 생각하면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은?
이스라엘도 바빌론 유배 때 포로 였었습니다. 따라서 그때를 유배기라고 부르고 포로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바빌론 유배 때 포로로 있던, 이스라엘이 처했던 역사적인 처지가 여기서는 조금도 반영된 표현으로 이 표현을 알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들을 모조리 치셨다는,
여기서 치셨다는 것은 단지 때렸다는 소리가 아니라, 때려서 죽게 한 상황입니다.
탈출 12,30
그러자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과 이집트인들이 모두 그 밤중에 일어났다.
이집트엔 큰 곡성이 터졌다. 초상나지 않은 집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곡성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게 히브리말로 다 같은 단어입니다. 쩌아카(צעקה)곡성, 라는 탈출기 시작할 때 보면은 이스라엘인들이 파라오가 그들을 억압하자, 울부짓습니다.
그 울부짖음과 여기에 나오는 곡성과 나중에 22장에 등장하는 부르짖음이 모두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말에서는 같은 단어를 문맥에 맞게 단어를 조금 여러개로 번역을 한 걸로 우리들이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아무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탈출기 시작을 할때는 이스라엘이 울부짖었다. 그런데 재앙 사건이 끝나고 마지막 재앙이 끝나자,..이스라엘은 더 이상 울부짖지 않고 이집트인들이(파라오부터 포로까지, 파라오부터 여종까지) 울부짖는다.
복음에서도 예수님이 "지금 우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웃게 될 것이다. 지금 웃고 있는 사람은 나중에 그렇지 못하다." 아니면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이세상에서 부자는 잘 살았고, 라자로는 노숙자로 살았지만, 아브라함과 같이 하늘나라에 가서는 그것들이 변하는, 하나의 대조적인 모습들..)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문학적인 전환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탈출 12,31
파라오는 밤중에 모세와 아론을 불러 말하였다. "너희도 이스라엘 자손들도 어서 일어나 내 백성에게서 떠나라. 너희가 말한던 대로, 가서 주님께 예배드려라.
파라오가 좀 궁색하게 되었습니다. 가지말라고 해 놓고, 밤중에 불러 말하는 템포가, 굉장히 많은 명령형이 사용되는 바쁜 템포에 아주 그냥 바쁜,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이들에게 '너는 뭐하고... 너는 뭐하고 이래서 바쁘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일어나라. 나가라. 내 백성의 한 가운데서 부터 너희들도 이스라엘 자손들도,
가라, 야훼를 섬겨라. 빠르게 빠르게 얘기하고 있는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탈출 29~31절을 보면은 밤중에(לילה)라는 것이 나옵니다.
(29절 시작할 때 한 밤중에- 2번, 30절- 모두 그 밤중에, 31절 파라오는 밤중에.....같은 단어가 이렇게 반복이 되었는데,
조금은 의도적인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밤이라는 시간은 사람들이 활동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이 집에서 나오면은 안돼는 시간입니다. 집 안에 들어가서 보호를 받아야 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밤에 밖에 나오면은 자꾸 이상한 일이 생겨요. 성경을 쭈욱 이렇게 생각해 보면은 좋지 않은일이 생깁니다.
좋지 않다기 보다는 조금은 더 두려운일이 생깁니다.
야곱 같은 경우에는 라반을 떠나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야뽁강까지 왔는데,
하느님의 천사를 만납니다, 그리고 싸웁니다. 그러다가 마지막까지 아침에 되었는데도 놓아주지 않고 축복을 얻어 내는,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모세도 하느님을 만나러 길을 가는데 야훼가 와서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할례를 하고 나서야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따라서 밤이라는 시간에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이건 좀 두려운 일입니다.
여기서도 '밤중에'
따라서 밤에 하느님의 천사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기쁜일입니까?무서운 일입니까? 무서운 일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밤에 아이들이 죽고 그 밤에 모세를 불러서, 밤에 그들로 부터 나가라고 하는 급박한 시간적 묘사를 이것을 통해서 하고 있다고 볼수도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홉째 재앙이 어둠과 관련된 재앙이었습니다. 따라서 아홉째 재앙과 연관된 계속해서 밤인 상황안에서 열째 재앙을 연결시키는 그런 어떤 묘사라고 우리가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파라오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가축과 함께 광야로 가서 야훼에게 예배 드리는 것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단지 여기서 파라오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완전히 떠나는 것를 염두해 두고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토론의 여지가 있습니다.
좀전에 말씀하신
31절
그리고 그는 모세와 아론을 밤에 불렀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일어나라! 나가라!
내 백성의 가운데로부터
너희들도 이스라엘의 자손들도
가라! 야훼를 섬겨라!(예배하라!)
너희가 말한대로
탈출 14,5
이스라엘 백성이 도망쳤다는 소식이
이집트 임금에게 전해졌다.
파라오는 이야기의 흐름상 완전히 도망갈 수도 있다고, 짐작은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세가 얘기한 것은 완전히 도망가게 됐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3일동안 길을 가서 제사를 드리고 돌아오겠다.
라는 자꾸 붙으러 하는 것과 모세는 다 갖고 갈려고 하고,
탈출 14,5절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도망쳤다는 소식이 이집트 임금에게 전해졌다. 따라서 도망칠 거라는 사실을 염두해 둔것 같지는 않아요.
도망쳤다는 소식이 들리자, 파라오가 그런 말들과 군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뒤쫓아 가는 그와 같은 장면들, 갈대 바다 사건이 그 다음에 일어나는 내적 논리가 생깁니다.
따라서 누군가 신부님께 물어본다면,
신부님은 파라오가 한편으로는 이 이스라엘 노예들이 완전히 도망갈 수 있다. 라는 가능성을 완전히 몰랐다. 라고 볼수는 없고,
하지만 반대로 정말 도망갈까? 아닐까?에 관해서 의심정도 하고 있는 그와 같은 틀안에서 이 이야기를 우리가 이해해야되지 않을까?라는게 신부님의 의견입니다.
탈출 12,32
너희가 말한던 대로, 너희의 양과 소도 데리고 가거라.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복을 빌어 다오."
대개 이상해요??
실컷 싸우고 나서 야곱이 야훼의 천사와 실컷 싸우고 나서 복을 빌어 주기전에는 놓아주지 않겠소...하는 것과 통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약간은 다른 형태이기는 하지만은 여기서도 계속해서 명령형 동사들이 연속으로 드러납니다. 그것만 모아 두면은,
31절과 32절
일어나라! 나가라! + 가라! 섬겨라!
(가축들을)가져라!+ 가라! 축복하라!
그냥 한단어로 하면 일어나가라!, 가서 섬겨라!
가축들을 가져라! 가지고 가라!그리고 축복하라!
너희들도+ 이스라엘 자손들도
작은 가축도+ 큰 가축도 +나도
그다음에 히브리 말에서는 ~~도, ~~도 라고 얘기할 때 히브리 말에 (감, גם)이라는 부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감' 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너희들고 이스라엘 자손들도
작은 가축도, 큰 가축도, 나도 축복해라.
왜 이렇게 파라오가 명령형을 겹쳐가면서 사용하고, 그리고 계속해서 ~~도,~~도 하면서 하느냐? 왜냐면 저자가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은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빨리 떠나는 것을 바라고 있는,
그와 같은 뜻으로 이런 표현들에 집중적인 등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파라오는,
'내가 무조건 항복할테니, 빨리 떠나라! 너희 더이상 보기도 싫다.'
그것을 통해서 파라오의 아들이, 또는 이집트의 맏이들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완전히 끔찍하다. 떠나라!라는...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복을 빌어달라' 는
나도 축복하라. 라는 표현인데요, 그 의미로는
1) 이스라엘이 광야로 나가면서 광야에 제사를 드릴때 나(파라오)를 위해서도 빌어 달라.
2) 이 재앙을 당장 멈추어 달라.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죽지 않게 해달라. 이집트의 모든 아이들이 죽으면 안 된다.
3) 서로 헤어지면서 마음에 없는 형식적인 인사(제의적인 축복)
안녕히 가세요. 나는 당신의 안녕을 기원합니다.(축복), 하지만 상대방이 가서 사고날 것을 바라면서도 이를 악물고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축복한다는 마음은 사라지고 축복에 형식만 남은 겁니다.
그리고 또 특별히 다우베(Daube)라는 유다인 학자의 의견입니다. '옛날에는 주인이 종을 풀어주면 그렇게 해방된 종들이 떠나면서 주인을 축복하는 그와 같은 예식의 전통이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신명 15장과 24장에도 비슷한 흔적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이집트를 대표하는 파라오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모세와 아론에 관해서 얘기했다면 이제부터는(33절)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의 관계입니다.
탈출 12,33
이집트 인들은 "우리가 모두 죽게 되었구나."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네 땅에서 어서 떠나가라고 재촉하였다.
여기서 재촉한다(חזק,하자끄)는 동사가 히브리말 동사에서 '강해지다', '강하게 하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파라오에 마음이 완고해 졌다', '파라오의 심장이 완고해졌다(완고하게 만들었다)' 라는 표현과 같은 동사가 사용이 됩니다.
따라서 "재촉하였다(חזק 하자끄)”의 일차적인 의미는,
- 강하게 얘기했다, 강하게 쫓아냈다.라는 내용과 다음 단락(paragraph)에 가서 이스라엘에 떠난거냐? 아니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쫓겨난 거냐? 라는 것에 대한 그 뉘앙스가 분명하지 않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문장만 가지고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쫓겨난 겁니다.
탈출 12,34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빵 반죽이 부풀기도 전에,
반죽 통째 옷에 싸서 어깨에 둘러메었다.
빵반죽이 부풀지 않았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2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1) 반죽을 하고 누룩을 아직 집어넣지 않았거나, 아니면 누룩은 넣었지만 빵반죽이 아직 부풀기전에 빨리 떠나는 바람에 반죽이 부풀지 않은...
그런데 신부님이 빵만드는 법을 전에 한번 배우셨다가 까먹으셨답니다. 첫본당에서 주일 새벽미사 오시는 분들과 빵을 만들어서 빵과 차를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시고 빵만드는 기계를 다 살 생각을 하셨는데,(첫본당의 주방이 굉장히 넓어서 기계를 놓을 곳이 있었다고...) 그렇게 많은 돈을 안들이고 200~300만원을 가지고 70~80명의 신자들이 드실 수 있는 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주문하시려 했는데
갑자기 주교님이 딴 본당으로 가라고 하셔서, 본당을 떠나는 바람에 그것을 못하셨다고 합니다. 당시에 우리밀로 빵만드는 법을 보셨는데, 우리밀로 빵만드는 것은 굉장히 단가가 높으셨다는....
기계사는게 문제가 아니라 재료비가 문제구나...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사실 빵을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관해서 우리가 잘 모릅니다. 왜냐면 요음의 습관과 당시의 이스라엘의 습관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르코 4장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그 씨뿌리는 사람" 을 요즘 우리나라 농부들은 잘 못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나라 농사짓는 사람들은 밭을 먼저 갈고 밭에 골을 만든후에 거기에 씨를 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씨가 길이나 가시덤불에 뿌려질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와 농사 짓는 방법이 다릅니다. 농부들이 밭이 있으면은 듬성듬성 씨를 흩뿌립니다. 그렇게 흩뿌리다가 어떤것은 길에 떨어 질 수도 있고, 가시 덤불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흩뿌린 다음에 밭을 갑니다. 우리와 농사짓는 방법이 다릅니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빵만들때 반죽 먼저하고 나중에 누룩 넣고 다시한 번 버무렸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지에 대해 우겨본다고....하셨습니다.
아무튼 신자분들의 빵만드는 방법의 주장대로, 누룩을 넣었는데 부풀기 전인 것입니다.
탈출 12,15에서는 누룩을 아예 치워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룩이 들어간 것이라면, 그래서 부풀기 전이라면 앞의 내용과 모순이 됩니다. 이미 그런 규정이 있었는데 왜 그렇게 했을까?
그것을 오늘날 학자들이 설명하기에 '앞에 있는 규정은 나중에 이스라엘이 약속에 땅에 가서 정착하고 난뒤 가나안에서 만들어진 규정이 탈출기 이야기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이 규정을 몰랐다!!
라고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는 그와 같은 틀입니다.
여기서 재밌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반죽통' 입니다. 어떤 모양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통안에 반죽을 넣고 그것이 적당한 온도로 맞추어서 그 안에서 그 밀가루 반죽이 부풀기를 기다리는 특별한 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요즈음에 김치가 김치 냉장고에 들어가는 것처럼..)- 신명기 28장에서
신명 28,5.17
º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 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º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 통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
누구 누구집에 해당하는 것에는 반죽 통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축복하시면 축복안에 광주리와 반죽통까지, 반대로 저주를 하면 광주리와 반죽 통도 저주를 받습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기억해 보십시오. 죄는 카인이 지었는데 벌은 카인의 땅이 받습니다. 땅이 더이상 소출을 내지 못하는, 황량한 땅이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에게 축복하면 그에게 딸린 모든 것들이 축복을 받을 것이고, 저주하면 그에게 딸린 모든 것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가장 경계상에 있는 것은 광주리와 반죽통이 있는 겁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집트를 떠나올때 그것을 통째로 짊어지고 이집트를 떠나오는 모습입니다.
탈출 12,35-36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가 일러 준 대로,
이집트인들에게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가지를 요구하였다.
잼 있는 어순입니다.
우리들은 금과 은이라고 그러는데 이스라엘의 언어 습관은 아마 발음상에 경제적인 발음을 찾다보니 이렇게 되었을 겁니다.
은붙이와 금붙이 + 옷가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인들에게 호감을 사도록 하시어,
요구하는 대로 다 내주게 하셨다. 이렇게 그들은 이집트인들을 털었다.
이것은 이미 탈출 3장에서 예견되었던 대목이고 탈출11장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급박한 것입니다.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 다 갖고 나가~~ 다 줄테니까 !! 우선 나가기만 해라." 라는 의미로 요즘식으로 얘기하면은 회사에서 일찍나가라고 할 때 뭘 주죠???
명예퇴직과 관련된 그런..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단어, 이상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호감을 사도록 하시어"
이것은 이 구절을 조금 다르게 이해 할 수 없다면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는데 여러가지 전승이 있었구나! 라고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부님께서 여러 주석서를 살펴보셨는데, 설득력있는 설명이 없으셨다고...
신부님이 생각하시기에는 아! 이렇게 재앙 때문에 이스라엘을 쫓아내는 그와 같은 전승도 있었고,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잘 있다가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올 때가 되니까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고 금붙이, 은붙이를 주어서 이스라엘이 그것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라는 다른 이야기의 틀이 있지 않았을 까? 라고 짐작을 해 보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순수한 의미에서 상상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석가들은 은붙이와 금붙이에 대해서 여기서 언급된 이유가 뒤에 있을 금송아지 사건을 준비하고 있는 그런 하나의 문학적 준비과정이 내포되어 있다. 라고 보고 따라서 은붙이 금붙이 얘기가 들어갔다고 짐작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나중에 금송아지 이야기가 나오면은 , 금송아지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가 질문할 거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그렇게 도망나왔는데 그리고 이집트에서는 노예 생활을 했는데 그들이 뭐가 있어서 은붙이와 금붙이를 가지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까?" 라고 하면은 사람들은 대답해야 합니다.
어떻게??
"어, 이집트를 떠날때, 이집트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줬어. " 그것이 여기서 문학적으로 설명되어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히브리어는 항상 최승정신부님 탈출기I 에서 참조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