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쥐똥나무들이 외 4편
신혜진
사거리 중앙에 오토바이 하나 쓰러져 있다
오토바이와 한 몸이었던 남자가 부서져 있다
남자와 한 몸이었던 빨간 공구가방이 입을 벌린 채 공구들을 토해놓았다
그의 뼈들처럼
아래턱이 벌어진 아우디 앞에 선 빨간 원피스 하나
한쪽 팔로 허리를 짚고 비스듬이 남자를 지켜보고 있다
빨강 마네킹 같다
빨강의 표현법은 선명도 하다
빨강은 월세
빨강은 차압 딱지
빨강은 막다른 골목
빨강은 불꽃
빨강은 무중력으로 부풀어 오른 풍선
신호가 바뀌고
길게 늘어선 차들이 별것 아니라는 듯 달려간다
버스가 남자를 피해 길게 휘돌아 좌회전 한다
키를 맞춘 도로변 쥐똥나무들 하얀 꽃잎을 밀어올리고
피투성이 공구들이 빨갛게 번져나간다
어느 봄 도서관의 오후 두시
신혜진
커다란 구두가 남자를 끌고 일어선다
열람실 한 편의 붙박이가 사라지며
오후 두시의 고요가 끌려간다
저벅 저벅
숨죽인 책상 위로 그가 걷는다
쓰기공부 하는 아주머니 천자문 글자들이
우루루 쏟아진다
네루다와 눈을 맞추던 여학생 눈동자가
동그랗게 끌려나간다
저벅 저벅
정숙, 핸드폰을 꺼주세요를 밀치고
복도의 무료를 밀치고
해를 따라 얼굴이 돌아간 벤자민의 반짝임을 밀치고
그가 걸어간다
복도 끝
막 흐드러진 복사꽃 속으로 커다란 구두가 들어선다
남자를 복사한 복사꽃이 진다
저벅 저벅
오후 두시가 진다
절벽
신혜진
한낮의 무료 가로지르던 나방 한 마리가
책상 위로 떨어진다
무심코 휴지 뽑아 드는데
반짝, 멎었던 숨이 돌아와 버둥거리기 시작한다
버둥거릴수록 사납게 뒤집히는 날개
뒤집힌 날개 위에서 핑그르르 지구가 돈다
놀란 손을 거두자
실 끊어진 연처럼 날개가 솟구친다
좁쌀만 한 날개에 얹혀 솟구치던 세상이
두어 뼘 전방의 벽을 부딪고 떨어진다
어제 같고 그제 같던 오늘이 소스라친다
솟구친 속도만큼 추락이 깊다
내겐 팔만 뻗으면 닿을 높이가
그에겐 시퍼런 절벽이 되는 것을 본다
책상 위로
다시 무료가 내린다
잠시 허공을 반짝인 불빛 한줌이
그의 절벽 아래서 쉰다
죄
신혜진
옛 유대 나라에는 장례행렬 맨 앞자리에
가문의 여자들을 세우는 법이 있었다지
몸을 깨끗이 닦은 뒤 향을 바르고
무명천으로 꼭꼭 싸맨 고인에 앞서 여자를 세우는 이유는
여자 때문에 죽음이 들어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지
할머니는 늘 당신의 죄가 많다고 했지
앞뜰 논배미들이 속수무책 날아갈 때도
한밤중 내가 배 아파 뒹굴 때도
당신 죄라며 아랫배를 쓸어내렸지
늦가을 대청 시렁 끝에
말갛게 말라가는 곶감으로 주저리주저리 매달리던 할머니의 기도문들
어른이 되어 시퍼런 절망 앞에서
날밤 지새우던 날
할머니의 죄는 다시 나를 찾아왔지
모두 내 죄 때문이다 얘야, 너는 잘못이 없어
밤새 아랫배를 쓸다
깜박 든 잠 속으로 사라지던 손
火葬을 하면
내 가슴에서 대못 몇 가마니는 나올 것이라던 말은
진실이었지
참빗 곱게 쪽진 머리 위로 얹혀있던 그녀 죄들이
이제서야 보인다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내리친
온갖 못자국들
새소리와 봄안개 사이
신혜진
아직 어둠인 곳에서 어둠이
뒤채입니다
새가 웁니다 꿈결인 듯
간간한 날갯짓
푸드득, 고요가 흩어집니다
안개와 새와 꿈과 봄이
몸무게를 불립니다
이제 막 피어
북쪽으로 돌아앉은 목련꽃들
그쪽이 어디냐고 묻던 안개가
요양병원 골목을 휘돌아갑니다
당신은 난해합니다
젖었으나 가볍고 가벼우나
어둡습니다
새의 리듬이 경쾌해집니다
소리가 소리를 부릅니다
불어난 소리에
목련나무 가지가 찢깁니다
안개가 희미해집니다
희미한 새벽을 껴안고 나는 묻습니다
당신은 안녕하신가요?
당선 소감
소녀 시절 친구네 집에서 잠을 잔 적이 있다. 면장집 딸이었던 친구에게는 예쁜 여동생이 있었다. 그밤 친구는 틈만 나면 동생을 앉혀놓고 동그랗게 입술을 모으며 '옥아' 하고 부르기를 반복했고, 언니의 입술 모양을 본 동생은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서로 잘했어, 잘했어, 손뼉치며 환하게 웃던 자매의 모습이 문득 문득 떠오르곤 한다. 친구는 농아로 태어난 동생에게 자기 이름을 알려주기 위해서라 했다. 시도 그런 것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누군가 갑갑한 세상 속에 갇혀 제 이름마저 잊고 살 때 한 편의 시가 그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다면 세상은 그만큼 따뜻해지고 환해지지 않겠는가.
'모든 시는 영혼의 파란만장'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맞는 말 같다. 세상의 모든 파란만장을 노래하는 게 시일 것이다.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무작정 찾아간 인천의 새얼 문예창작교실, 그곳에서 엿본 시의 정원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갈수록 통증이 되어 가슴을 치받을 때가 많았다. 숨통이 되기도 통증이 되기도 하는 시 앞에서 주춤거리는 나를 시의 길로 인도해주신 장석남 박형준 박지웅 이경림 교수님과 중앙대 예술대학원의 문창전문과정 모든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교내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먹어가며 공부한 문우님들 잊지 못할 것이다. 시와 함께 오랜 지기가 된 새얼문학 식구들과 언제 만나도 오붓한 오우가, 묵묵히 지켜봐준 남편과 내 생의 버팀목 윤호 윤정에게 사랑을 보내며 미숙한 시를 뽑아주신 애지에 깊이 감사드린다. 늦깎이인 만큼 통증마저 사랑하며 즐거이 가고 싶다.
이 메 일 : ease1106@hanmail.net
약 력 : 경남 의령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