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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풀기
강 서 완
열쇠가 열리지 않아, 라는 말을
열 시가 열리지 않는다고 들었다
열 시 십 분의 자세로
일어서고 눕는 계단
바다는 열려 있고
아이들은 닫혀 있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도서관에서 고시원으로
나비가 날지 않는 놀이터
아이들의 홍채 속에서 풀들이 자란다
베어내도 풀들은 자라고
봄을 잡으러
벽속으로 걸어 들어간
청년의 피를 믿을 수 있을까
하늘과 꽃과 새를 책갈피에 끼운 채
새벽 전철을 타고 직장으로
어둠을 안고 집으로
열시 너머 어둠에 기댄
열려라 계단,
너울성 파도가 밀려온다
수평선을 박차고 열시를 허문다
열한 시 십오 분의 각도로
갈채가 쏟아지는 계단
벽속에서 나온 아이들이
사분사분 계단을 연다
강서완 경기 안성 출생 ─동아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2008년 『애지』로 등단.
뒤안길
강 정 이
머리 뚜껑 잘려나간 마네킹이
거리에 나와 있다
꽃잎만 먹는 척 이슬만 먹는 척
손톱에 때 끼지 않는 척
톡톡 물방울 털어내더니
삭은 내장을 바람에 버무리며
알몸으로 서 있다
내가 걸친 쉬폰원피스는
저 마네킹이 입혀준 것인데
치맛자락은 양귀비꽃처럼 나부끼는데
河伯의 딸인 척 백조인 척
그 척 훌렁 벗어던지고
나도 속은 문드러졌다며
마네킹 손 잡고 서 있어야 하나
가던 길 그냥 가야 하나
강정이 2004년 『애지』로 등단 ─시집 꽃똥 ─수필집 달을 찾아 나서다, 다가가다 등.
노을이, 구두를 신고
곽 성 숙
발 편한 신발을 찾는다 신발장 안으로
하루의 노을이 스며들어 오고 있다
딸아이가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나간다
내 안에 몰래 숨겨 둔 나를 만나
쓸쓸한 속을 들킨다
언제였을까?
생일 선물로 뭘 받고 싶냐고 묻는 남편에게
높은 소리로 대답했었다
굽 높은 뾰족 구두 사주세요
내 신발은 늘상 통굽이거나 단화였기에
놀란 듯한 남편이 이내 기쁜 얼굴이 되었다
그 구두를 두어 번쯤 신었을까?
지금의 나는 다리가 불편한 아내가 되었다
어쩌면 저 굽 높은 구두를
신발장 안에 평생 모셔만 두게 될지 모른다
굽 높은 구두가 밖을 기웃거리자
노을이
구두 속으로 제 발을 밀어 넣고 있었다.
곽성숙 2014년 『애지』로 등단.
중년 워킹 맘
김 명 이
다단계를 거슬러 오르는 빌딩 회랑엔
몽당 크레파스 같은 하루의 빛깔이 어려 있다
왕인 고객 그의 은근한 말
목의 칼을 씌우는 건 고전적 방식이라는데
회식자리에서 비켜 앉으며
니트가 멋진 그의 직각어깨 외면할수록
개양귀비 피워내듯 마음아
돌아와 당신 사진 앞에 딸꾹질을 하고
거울 속의 너 맑아 보일 때까지 물티슈로 닦아낸다
방마다 아이 발밑에 깔린 신음을 꺼내놓고
베란다에 나가 마지막으로 걷는 빨래
밤의 불빛마저 버티컬로 지우기 위해
또 다른 목의 줄을 당긴다
어둠 속에서도 내가 보일까?
굳게 물린 이불장을 열어젖힐 때
걸쇠 틀어져 입 벌린 옷장 문에 줄 선 넥타이
골라잡아 그들에게 잡히지 않으려 목을 뺀 것 알겠다
이 방에서부터 힘껏 잡아당기곤 했으니
이젠 걸대에 주름진 스카프로 늘어뜨린 내 목 감을 차례
취업시험에 실패한 큰애가 달팽이 등 비집고 들어와
안방 전등스위치를 내릴 때
겁이 나서 이불 뒤집어쓰며
아 나는 이불속에서
도 메인 목을 아프도록 잠갔다
김명이 전북 오수 출생 ─한남대학교 사회문화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석사) ─2010년
『호서문학』과 『문학마을』로 등단 ─시집 『엄마가 아팠다』.
자꾸만기어오르는여름
김 바 다
스타일리시한해와구름맑고깨끗하게정돈된돌속에살고있는수수께끼노랗게굴러다니며부딪히는복층의시선들크고둥근눈물로빚어지는여름옆구리로번져나오는신성한향기그한가운데요구적인구멍꾸역꾸역불멸의새끼가머리를내밀고집보다길이더익숙한사람들이들락거리는거칠게으르렁대고충동적으로물어뜯는겁먹은입존재만으로도가능한고문살과구멍이서로조르고파먹으며돌은아득해진다소리와바람을들이고별별무언가를다들여누구도스스로끝내지못하는반대로걸어와서반대로걸어가는뒤틀린다리를삼킨돌급격히세일중인꿈눈이닿는곳마다생소한악보가그려져있어온전히발가벗은귀로만오르내릴수있는이것은아름다운일인가요?정말몰라서기어다니던순간부터눈앞에서출렁이는것은유리가루를먹인외줄뿐이었는데이세상에서저세상까지저세상에서이세상까지도피중인발바닥깊이파고드는음들은떫고시큼해바늘돋힌초강력꼬리를마구흔들어대며믿을수없는증언만을늘어놓죠너보다더크고깊은멍을수없이보았어요환한고름과부스럼앞에서모두동의를표하며고개를끄덕여야지외줄은정교하게음험한길목발목지뢰처럼가득
묻혀진도돌이표들텅빈핏자국들이부르르몸을떨고우리가결코
동시에밟을수없는작고빨간혀허공에묻은물기를핥아먹고
장마진방광을터뜨리면쏟아지는정체불명의육회들
눈에건져지는모든물찰랑대는물밑은어머니들의
나라*어렵게가져온향로의연기속에서파리
스와헬레네가나타나요고대의끈과끈을
묶은채풀과꽃을뜯어먹으며자란염소한
마리고기먹는개보다구린똥을싸지요동
글동글한감상은말뚝을중심으로그리는원
바깥에서부탁드려요둥글게둥글게짝검은털로
뒤덮힌네다리의연주위대한밧줄에모가지를맡기면
수온이올라가고숨바꼭질은자주중단되고둥글게둥글게
짝이특별한환영이사라지지않도록개가죽을뒤집어쓴얼굴에만
비치는기이한열정슬픔을이용해판을뒤엎으려는비이성적*발푸르기스의
밤꿈틀거리는점과선다양한사건들마녀는쿠폰으로동물을부리고동물은사람을부려개구리가되고야수가되고돌이되어이쪽저쪽진정화해로운순간서리가내리고농사를망치고사고로죽고더는어떤소리들려오지않아도도박처럼다리위로자꾸만기어오르는여름고드름만큼차갑고채집통처럼단단히잠긴위장은푸른기왓장위에던져두고
* 괴테의 파우스트.
* 김지하의 조선일보.
김바다 2011년 『애지』로 등단.
카우치*에서 시를 읽다
김 연 종
손님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소파인지 침대인지 비스듬한 안락의자에 누웠다 천정은 높고 창문은 비좁았다 식은 커피 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종업원인지 바리스타인지 흰 가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뜨거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다 지난 풍경들이 연탄가스처럼 스며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묻힌 기억이 몽롱해졌다 균열은 몸을 둘러싼 지붕이 아니라 몸을 촘촘히 떠받들고 있는 기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구겨진 쪽지를 건네주며 생각나는 대로 읽고 보이는 대로 말하라고 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 점자처럼 어른거렸다 내 유년시절도 먼지처럼 떠다녔다 물에 빠져 죽은 누이를 위해 지붕이 불타기를 기도했다 흰 연기가 꼬리곰탕처럼 끓어올랐다 썩지 않은 누이가 썩은 지붕에서 쏟아져 나왔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소화되지 않은 말들이 입속에서 오물거렸다 지금까지 내뱉은 말이 자유연상이면 치유가 될 것이고 자동기술이면 詩가 될 거라고 했다 상담료를 지불했는데 커피 대신 껌딱지 같은 책 한 권을 주었다 단물이 빠지기 전에 책상다리에 붙여놓았다
* 카우치 : 정신분석에서 사용되는 안락의자, 자유로운 연상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침대모양의 평평한 의자이다.
김연종 광주 출생 ─2004년 문학과 경계 등단 ─시집 『히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 『극락강역』
─산문집 『닥터 K를 위한 변주』 등 ─김연종 내과의원.
손
김 정 원
빤쓰바람으로 탈주한 선장과
승무원들을 공판하던 화요일 아침
우리는 광주지방법원 정문에서
손팻말 들고 시위하고 있었다
수사권 기소권 보장!
세월호 특별법 제정!
경기도 안산에서 새벽부터 한달음에 달려온
단원고 유가족들 중 세 어머니가
그 무엇이라도 주고 싶은 듯
그냥 지나치지 않고 대절버스에서 내려와
우리들 왼쪽 가슴 윗도리에
노란 리본 배지를 일일이 달아주고
차가운 손 따뜻이 잡아주던 손
수의에까지 호주머니를 달려고 무시로
무람없는 자본주의의 손톱을 날카롭게 벼리는
참사의 공범자들, 온 국민이 낯을 들지 못하고
무조건 미안합니다, 석고대죄해도
벼룩의 간만큼도 위로가 안 될 손이
되레 위로하고 눈물 닫아주던 손
죽음보다 더 아픈 것은 잊히는 것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잊지 마시오, 잊지 않겠습니다,
대쪽 같은 마음으로 부탁하고 다짐하며
왜?를 들이부어 그랬구나!를 퍼 올리는
납득과 진실의 마중물 되자고
오월과 사월이
울컥, 철과 자석처럼 맞잡은 손
처음 본, 34년 전 금남로에 낯익은 손
손수건 젖은 그 손
김정원 전남 담양 출생 ─2006년 『애지』로 등단 ─시집 『줄탁』, 『거룩한 바보』 , 『환대』 등.
미명
김 현 식
너는 보고 있느냐
신비로운 미명의 세계를
밤새 뒤척이다 꼬박 날을 샌 사람도
아주 일찍 일어나 어둠을 배웅하는 사람도
그저 새벽이 좋아 새벽을 기다렸던 사람도
신비로운 미명의 정적과 희망처럼 반짝이는
어둠 속 불빛과 외로운 가로등과
언덕위의 꼬막집들에서
새 나오는 수선한 빛들의 속삭임이
희망을 얘기하고 있지 않느냐
곧 모든 것이 드러나 사라지고 말 신들의 몸짓과
고요의 속삭임
생명의 촉수를 간질이는 밤의 요정들,
너는 보고 있느냐
고독하게 총명하게 빛나고 있는 적막 속의
빛의 요정을,
어둠의 장막을 열고 희망의 웃음을 선사해 줄
미명의 선물을, 곧 사라지고 말
신비로운 불꽃들이 보이지 않느냐
아, 이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나는
들어가련다 고독과 침묵의 세계로
무겁지 않은 샤갈과 모차르트의 세계로
기다려지는 것보다 어서 지나가길 바라는 것이
훨씬 많은 일정표를 뒤로 하고
김현식 광주 출생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외과 전문의 ─2006년 『애지』로 등단 ─현재 서울송도병원 병원장으로 재직중 ─시집 『나무늘보』 ─공동사화집 『날개가 필요하다』 외 다수 ─산문집 『시의 향기』.
멍게는 문이다
남 상 진
밤마다
바다의 주름을 한 장 한 장 벗겼다
구름과 별빛과 바람을 등지고
반짝 우는 꽃의 영역
날카로운 향기의 속도는
석화보다 빨랐다
단단한 음모를 숨기는 물컹한 찰나의 꽃
들키지 않고도 건너는 언덕을
늘어진 그늘처럼 미끄러지는
씁쓸한 맛의 기억이
한 줄 소화관을 따라 빠져나가고
만질수록 터져 나오는 비명들
출구는 발끝에서도 자라났다
문이 닫히면 비로소 열리는 또 다른 문은
제 몸을 닫으며 스스로 자랐다
거추장스러운 뿌리의 집에 갇혀
한 번도 양분을 빨아 본 적 없는
낯선 길의 통로에 묵언으로 오열하는
꽃송이 하나 있다
남상진 경남대학교 졸업 ─2014년 애지로 등단.
망상 바닷가
류 현
이른 봄 추억의 망상 바닷가를 찾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은 찾을 수 없었고
쓸쓸하고 외로운 바람이
파도를 부둥켜안고 소리 내어 울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곁가지조차 찾기 어려웠는데
날 반갑게 맞아 준 해당화 한 그루가 있었지
향기에 취해 예쁜 네 모습을 만져볼라치면
앙살궂은 가시가 손의 접근을 막는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가시를 달고 났으니
아픔도 가지고 태어났겠구나.
우리도 날 때부터 두 주먹 불끈 쥐고
큰 소리쳤지만 끝내, 그
소리는 울음이 되어 세상을 흔들었지
그러니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괴로운 삶의 여정임을 성경에서는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는 쇠약한 몸입니다.
제 뼈들이 떨고 있습니다’*고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 잔잔하게
밀려오던 파도가 철석 철써덕 바다도
처절하게 부서지면서
고통의 신음소리로 아픔을 날리고 있다.
* 구약성경 시편 6장 3절의 말씀.
류 현 경북 칠곡 출신 ─2015년 애지 봄호로 등단 ─현 변리사, 기술거래사.
혁명은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가
민 경 환
이 나라에서 더는 못 볼 줄 알았는데
2013년, 그 하 무덥던 폭염의 끝자락에서
역모라 불리는 반역의 불씨가 살아있음을 확인했네
께름칙함이야 없잖지만 한편 뿌듯함도 느껴졌네
웬, 요즘같은 시절에 저리 홀홀한 문장을 접하게 되다니!
벌겋게 눈뜨고 혁명이 살아있다 하네
북에 동조하거나 지령을 받은 내란음모란 말이지
대통령 선거 같은 데는 조금도 개입하지 않는 의기로운
공안당국께서 재빠른 수사를 하시는 통에
에크! RO의 원대한 계획이 미수에 그쳐버렸네
‘모든 현대의 혁명은 자유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그간의 모든 혁명이 자유를 목표로 하지 않았는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못한다 그랬듯
실패한 내란음모도 엄밀히 말해져야 하네
낭만과 냉소가 교차하는 이 정치적 대열에서
혁명이 숨죽이거나 죽은 사회는 너무 노곤할 것 같네
‘보수는 썩어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하네
보수의 미끄러운 욕망과 질 높은 계급은 늘 녹록치 않아서
그것이, 낮은 자들의 동맹을 부르고 진보의 분열을 막기도 한다지
비판과 저항은 견뎌내야할 권력의 덕목일 터일 것
실재적 혁명성과 관념적 혁명론 사이에서
민주주의는 투쟁을 통해서만 밝혀낼 수 있는 개념이라고 할 때,
‘민주주의를 실천함으로써만이 민주주의를 배울 수 있고,
그 길만이 오늘날 혁명개념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도 하네
그래 우리가 누구인가
그 오랜 당쟁과 사화와 피침과 피지배와 내전과 쿠데타로 진한 피와 떡진 살을 흩뿌려 오지 않았는가
언제나 과도기라네
개혁과 혁명정신이 늘 필요한 이유라네
지배와 통치, 억압과 선동, 분열과 모반, 분배와 독점, 안보와 복지, 수꼴과 좌빨, 이념과 분단 좋다네!
이 모든 말과 행위가 오해와 혐의를 불러와도
민주주의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통치’라고 한다면
노골적 색다른 꿈과 비아냥도 그 중의 한 목소리인 것을,
괜한 마녀사냥으로 오해 받아도 괜찮으시다면 뜻대로들 하시게나요
* 한나 아렌트.
* 마이클 하트.
민경환 강원 영월 출생 ─2003년 『애지』로 등단 ─시집 탈주냐 도주냐 ─2008년 제6회 ‘애지문학상’ 수상.
홍룡사 가거든
박 영
홍룡교 근처에서 잠시 머뭇거릴 것
발밑에 흩어져 있는 때죽나무 꽃 보이거든
아, 이렇게 아름답게 지는 꽃도 있구나
절로 감탄하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것
꽃 하나, 꽃 하나
손바닥 위에서 부르르 몸 떠는 꽃 하나, 하나
얌전히 모아 쥐고
다리 중간 즈음,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서서
살짝 벌린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스밀 때
바람에 스치어 꽃잎이 다시 바르르 떨 때
다리 밑으로
꽃 하나
꽃 하나
손가락 끝에서 도르르 구르듯 떨어지게 할 것
홍룡폭포에서 떨어져 내린 물
꽃나무에서 떨어진 그것
엉키듯 뱅뱅 한 자리에서 맴돌 때
서툰 물살에 꽃 하나, 꽃 하나 흘러갈 때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을 것
오월 끝 무렵
그곳에 그렇게 서 있을 것
* 홍룡사 :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천성산千聖山에 있는 사찰.
박 영 2006년 애지로 등단.
바다와 벚꽃이 있는 연극무대
박 종 인
공간적 배경- 아테나 얼굴
눈동자-아파트
코-의자
입-바다
광안리 바닷가 제1막
큰 입이 벚나무를 쏟아낸다 흩날린 꽃잎의 입술로 갯바위를 덮는다 입술 위를 거닐던 내 삶의 꽃물 시간이 역류된다 갈매기 공중전이 한창인 대극장 무대 긴장감이 날선다
영역 다툼에 휘말린 관객석 여신 아테나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결국 입이 명령을 내린다 모래 무대 위로 벚꽃 만발한 벚나무들 말 탄 군사처럼 맹렬히 출동한다 전쟁포로로 끌려가던 나, 연거푸 벚꽃을 토해낸다 놀란 앤을 구하려 바다로 뛰어든다 마음 밖 무대 言이 몰입을 찌른다 분위기도 죽고 기분도 죽고 과거는 달아난다
망나니 행인 #1 최루탄처럼 파도가 날뛰는군
갈무리 행인 #2 꼭 5·18 광주진압장면 같지?
극적 상황, 울부짖는 큰 입의 대사에 관람객은 매료된다 셀 수 없는 벚나무군사 틈에 앤과 내가 있다 간신히 빠져나오려는 순간, 한 군사에게 앤을 뺏긴다 눈물 콧물 계속 토해낸다 지켜보던 관객이 밧줄을 던진다 필사적으로 빠져나온 앤 벚꽃 거품을 문다 전쟁은 숨을 곳을 찾는다 속눈썹 짙은 아테나의 눈동자엔 벚꽃눈물 흥건하다 우선 멈춤! 극적 순간을 제지시킨 사진사도 들병이 간이의자도 숨을 죽인다
2막
역사책에서 걸어 나온 전쟁의 영웅들이 무대에 오른다 관객들이 야유를 보낸다 여신 아테나 전쟁을 즐기는 광기 뒤에 매스꺼운 지성을 숨겨 놓았다 전쟁은 끝났는데 벚나무 군사들 계속 총칼을 휘두른다 모래 위로 벚꽃벚꽃 비명이 낭자하다 도시가 무자비하게 부서진다 나팔소리 요란한 무대 위에서 장군복에 감춘 지성이 객석으로 군례를 보낸다 아테나가 객석을 빠져나간다
박종인 2010년 애지로 등단 ─시집 미술관에서 애인을 삽니다 ─제9회 산림문화작품공모전 대상 ─부경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사각의 희망
안 영 민
내가 내려놓으면 되겠습니까
서슴없는 목소리가 판자를 뚫고 나온 칼끝처럼 거리를 향하고
무너진 관절의 지우금 노인勞人은 출렁거리며 다리를 건넌다
뼈 속마다 내려놓을 것이 없는 젊은이靑春는 난간에서
공기 속으로 자신의 무게를 풀고
거리마다 사거리에는 붉은 눈目들이 켜진다
그때도 할아버지는 선유도 다리 밑에서 낚시를 하였다
커다란 잉어며 장어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혈안이 되었고
남쪽 모래판 사이로는 자갈들이 익어갔다
그곳엔 처염한 빨래들이 조그만 돌에 눌린 채
널브러진 햇볕 아래서 바짝바짝 말라갔고
아낙들은 푸릇푸릇한 치마를 물위에 띄운 채
엊저녁 흔적을 힐끔거리며 지우곤 했다
그날 강가에는 붉은 글씨의 간판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금지되었고
잉어를 담은 자백이 위로 무지개 빛깔의
기름기가 둥둥 뜨기 시작했다
소리는 신호에 따라 흘러갈 뿐
사거리마다 서낭기가 나부끼고
마룻바닥 결을 따라 사각의 세상이 들어왔다
안영민 2014년 『애지』로 등단.
月背에 여자가 산다
안 이 삭
주황색 치마를 입은 여자가 있어요
목 긴 꽃무늬 얇은 블라우스가 어깨를 조금 돌려요
무슨 말인가 내게 한 것 같은데
입만 둥그렇게 뻐끔거리네요
색색의 헝겊을 잇댄 조각이불을 만들던 중이었어요
따뜻한 색깔이 필요한 자리마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죠
늦은 여름이었고 졸음이 몰려왔어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불을 덮고 조각난 꿈을 꿔요
칸나가 경고등처럼 켜진 마당이었죠
가끔씩 뒷모습이 궁금했어요
뒷짐 지고 있는 손에 무엇이 들려있는지 보고 싶었어요
등 뒤에서 비치는 달빛만 만지작거리는 줄 알았으면
모르는 척 했을 건데요
빛바랜 주황색 치마를 넓게 펼쳐놓은 저녁이예요
안이삭 대구 출생 ─2011년 애지로 등단 ─시집 한 물고기가 한 사람을 바라보는 오후.
회를 뜨다
이 돈 형
광어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목을 따 피를 뺀다
왈칵 쏟아내는 리듬
한 번의 기도를 적시는 중이다
절규나 절망보다 조용히 뱉어내는 숨이 더 뜨겁다
회칼이 잘 갈려 있기를 너나 나나 바라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 배어든다면 우리는 한 치와 두 치 사이에서
쉼 없는 궁금증으로 흔들리기에
정교한 손놀림으로 회를 떠야 했다
결의 반대쪽으로 칼을 들이댄다
왼쪽으로 쏠려 하선한 생을 결대로 썰면
짓물러진 물에 대한 숭배가 솟구칠 것 같아
욕망의 반대쪽을 택하였다
죽음보다 무거운 것이 날것의 미련이었기에
슬픔은 부드러웠고
자객의 칼에 베인 천성이
생각보다 기도를 쉽게 내주었다
얇게 썰려진 살점에서 네가 버틴 통점들이 내게로 온다
염장질러야 발라지는 것이 삶이지만
싱싱해서 만만할 수 없었고
사색의 빛이 묻어있어 미안했다
마지막 살점에 칼을 들이대자
뼈대를 갖춘 네 눈이 시간을 물어본다
너나 나나 시간이 필요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이돈형 충남 보령 출생 ─2012년 『애지』로 등단.
봄
이 순 화
하얀 벚꽃길 따라 운구행렬이 지나가고 있다
사흘 밤낮 고요하게 울려 퍼지는 만가 속에
검은 제복의 상제가 떠메고 가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꽃상여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는
가로수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이순화 경북 상주 출생 ─2013년 『애지』로 등단.
한 방울 사람
이 희 은
캄캄한 길을 헤매다가
나는 눈사람이 되었어요
녹지 않는 눈,
벽난로 앞에 오래 앉아 있어도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예요
유리창 너머
부리 없는 새가 다녀갔어요
발목을 다친 짐승도 잠시 머물렀지만
눈동자까지 얼어붙어서
서로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죠
바람은 창틀에 닿을 때마다
관절 비트는 소리를 들려주었어요
나는 다시 따뜻한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요
얼어버린 눈 속에 한 방울,
성에 낀 눈을 닦고 바라보니
다시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는군요
이희은 충북 청원 출생 ─2014년 『애지』로 등단.
각도를 맞추다
임 덕 기
해거름 따라 산책을 나가면
삐거덕거리는 관절이 비명을 질러댄다
억새가 우거진 물가에 앉아 고통을 잠재운다
문득 회한의 시간들이 밀려온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던 시간들이
회심의 눈웃음을 보낸다
고통으로 절삭된 순간들이
뼈의 각도가 원인인 줄 미처 몰랐다
안락한 소파 대신 허리받이 의자에 각을 세워 앉는다
틀어진 관절이 서서히 제집을 찾아오기 시작한다
맞물린 아귀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고통이 뒤태를 보이며 사라진다
‘본래 지니고 있던 각도를 유지해주기 바란다’ 라는
관절의 깊은 속내를 알아차리는데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임덕기 경북 포항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2014년 『애지』로 등단 ─시집 『꼰드랍다』 ─수필집 『조각보를 꿈꾸다』.
본태
정 해 영
단추가 나란히
두 개 달린 옷에서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온전하지 않다
같은 색실의 인연 줄에
걸렸던 단추이지만
수명이 다르다
이제
어떤 짝이 오더라도
이색지다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
오 어수룩하기까지 한
본래
금강석보다 견고하다
정해영 경북여고 ─대구교육대학 졸업 ─2009년 애지로 등단 ─시집 왼쪽이 쓸쓸하다.
스토리텔링
조 영 심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마저 이야기를 이야기해
볼
까
여자만 셋이서 낚싯대 들고 금수산에 올라 화석시대이래 먹어온 돌솥밥 시켜놓고 도대체 예쁜 돼지를 어떻게 먹을 수 있담 꿉닭의 총각 셰프가 비틀스를 알랑가 몰라 어라, 정통 꼬치가 원조 조개 불러 KISS를 하네 알다마 투다리는 당구 한판을 엣지 있게 치고 있군 꽃미남 세븐한테 종합상조 권유가 먹힐까? 취연에서 술 따르는 황진이가 글쎄 본향교회 권사님이래 3층 옥상에서 나는 조개다 떠벌리는 춘자는 어
떻
고
한 조가비의 달빛만을 톡 떠낸 듯
방제수 같은 입간판들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한밤의 골
목
상
가
조영심 2007년 『애지』로 등단 ─시집 『담을 헐다』.
침묵을 엿듣다
조 재 형
나는 고장 난 신호등
당신의 하루를 지켜줄 수 없다
더 이상 나를 준수하지 말기를
빨간불에서 천편일률로 멈추는, 상투적인 당신에게
필요한 무기는 일탈이라는 이탈
눈감아주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계급으로 쌓아올린 바벨탑을 허물 기회
무너짐 너머에 개척할 새 바닥이 기다린다
나는 유쾌한 제한구역
네모난 정직이라면 불허한다
고함으로 두드려도 열리지 않겠다
어디서나 우대받는 정품은 그만
낙과처럼 버려진 당신을 우대한다
바닥을 전전해본 반품이야말로 삶이 배어 있는 것
부러진 희망은 당신의 몫
잘 손질하면 양지원에 배송되는 감사로 거듭날 것
나는 촉촉한 비데다
천기누설을 주름 잡는 통치자
마를 날 없는 하루를 지퍼처럼 열어놓는다
오늘의 속내를 관장하는 유일한 총구로
착륙하는 비밀을 향해 정조준 한다
당신의 위치를 점검하기를
나는 빈 주전자
쓸쓸한 오늘을 담아 목마른 허식을 적셔줄까
벌컥 들이마실 작정이면 나를 유의하기를
때로 나는 당신에게
함부로 취하면 안 되는 독배다
나는 오래된 바퀴
어디라도 굴러 찾아간다
탄탄대로보다는 전투적인 비포장을 선호한다
호의호식하는 측근으로 정체되느니
유리걸식하며 길을 닦는 중고 타이어로 버려졌으면
패가망神이 구원할 것인 즉
당신의 경사대로 추락하게 나를 방치해두기를
나는 눈물이 출렁이는 만년필
애용하려거든 슬퍼할 각오를 다져야
나를 집어드는 당신은 비극의 저자
발굴되지 않았으면 우리는 한낱 교정되어야 할 비문非文,
오기誤記에 지나지 않을 사족,
폐기처분되었을 시대의 과오다
나는 숫자 0
나를 영득하는 순간
추수한 과실보다 몇 배가 부풀려지겠다
하지만 당신이 응대하는 방향에 따라
성취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당신의 경향을 택하고 나를 포용하기를
조재형 2011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지문을 수배하다』.
플랑크의 시간
황 경 숙
이제 다시는 정처定處가 되지 말자
덜 자란 나무에
이른 꽃이 신음하는 밤
너무 뜨거워서
나는 어두워진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것
그러므로 새로 당도한 것
모든 말이 씨앗이 된다면
빛을 나르던 심장 속에 잠들어 있겠지
젖은 눈동자의 검은색이 검은색으로 울거나
검게 떠다니는 동안
운석과 운석 사이 침묵처럼
내가 가진 가장 어두운 색을 꺼내 보인다
빛으로부터 건너 온 암시처럼
죽은 별이 내 몸으로 온다
심장이 생겨나고
귓불이 달궈지고
발가락 끝까지 차오르는 투명한 빛
여러 겹의 우주 속에서
또 다른 하나의 순간이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단 하나의 점으로 점, 점, 점
빛의 속도로 태어난 몸
밝기가 변했으므로
별의 목록은 다시 쓰여진다
* 플랑크 단위로 알려진 시간 단위로, 광자가 빛의 속도로 플랑크 길이를 지나간 시간을 말한다. 물리적으로 의미가 있는 측정할 수 있는 최소의 시간단위.
황경숙 전남 여수 출생 ─2009년 『애지』로 등단 ─시집 『그린란드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