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미(재영한인의사협회장·외과전문의) |
스페인에서 태어나 비뇨기과의사가 된 내 동생은 어렸을 때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처럼 격하게 놀다가 깁스를 자주했고 팔꿈치 아탈구(pulled elbow)도 많이 생겼다. 난 유치원생 때 트럭에 받혀 죽을 뻔 하고 왼쪽 갈비뼈에 금이 간 것 말고는 깁스를 한 번도 안 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엄마는 그때 날 치료한 스페인 의사의 좋지 않은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기억하신다. 어린 내가 복막세척튜브(peritoneal lavage tube)가 불편해서 자꾸 움직이니까, 스페인 말로 호통을 치셨다고. 그걸 보고 있으면서 외국어로 항의도 못하신 게 마음에 걸리셨나 보다.
주말이나 저녁에는 주니어 의사들만 응급실에 있을 거라며, 동생이 다쳤던 날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처음 간 곳은 아빠의 지인이신 태권도 사범이었고 그 다음이 병원이었다.
스페인은 대부분의 유럽처럼 무상의료다. 그러나 이민 1세대의 특징인 직업 가치관과 직업윤리가 높아 많은 세금을 내고 있으면서도 의사소통이 원활치 않아 혹시나 잘못된 치료를 받을까 싶은 걱정에 충분한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어른이 되어서 이민을 간 1세대가 현지 병원을 다녔을 때 얼마나 답답했을지 상상이 안됐다. 나는 어렸을때부터 스페인어와 한국말을 했고, 중학교때 부터는 영어·프랑스어로 간단한 대화가 가능했다. 또 라틴언어에 속하는 포르투갈어나 이태리어, 그리고 독어는 인사와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서유럽·북미·남미·영 연방 국가에서는 한 번도 언어 장벽으로 인한 불편함을 느끼지를 못했다.
내가 처음으로 1세대의 답답함을 이해하게 된 것은 인턴때 프라하 여행을 갔을 때였다(영국에는 인턴도 일년에 5주의 휴가를 준다). 체코의 낯선 슬라빅 알파벳은 라틴계통 언어들이 익숙한 나에게 그 문자가 한문보다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중학생 때 토요일에 다녔던 스페인 한인학교에서 한문도 배워서 가끔씩 눈에 들어오는 한자가 있었지만, 체코어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추리를 할 수 없었다. 이 슬라빅 계통 언어에는 폴란드어도 포함된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영국내 제일 큰 외국인 그룹이다. 1989년 유럽의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2004년 폴란드가 EU로 들어왔을 때부터 영국에 폴란드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해서, 2015년에는 폴란드 이민자들이 83만명(경기도 부천시 인구)을 넘었다. 내가 구사하는 여러 언어들 중에 하필이면 못하는 언어의 외국인 환자수가 제일 많다.
대장항문외과 외래에 방문하는 새로운 환자들에게는 20분씩의 진료시간이 주어진다. 주치의가 의뢰(referral)를 할 때 언어장벽이 있어 통역사가 필요하다고 하면 병원 측에서는 그 환자의 외래시간 맞춰 환자에게는 무료 통역사가 지원된다.
하지만 몇 주 전, 직장 출혈로 온 중년 폴란드 남자 환자는 영어 한 마디 못 하고, 통역사도 준비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전화 통역은 어느 영국 병원에서나 연결이 가능하다, 하지만, 전화로 진료를 진행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진찰을 해야 하고, 신체검진·항문검사·결장경과 대장내시경 의뢰까지 40분이 걸렸다. 이런 긴 시간이 가능치 않으면 환자의 진료의 질이 떨어지고 환자의 이해도가 낮을 수 밖에 없다.
▲ 일러스트=윤세호 기자 |
최근에 더 많은 의학 논문이 나오면서 언어 불일치로 심리적 스트레스가 증가하고 의학적으로 중요한 의사 소통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더 긴 입원기간, 더 잦은 재입원 뿐만 아니라 응급으로 입원시의 사망률과 이환율이 의료인과의 의사소통이 안 되면 더 높다고 한다.
영국(United Kingdom)의 National Health Service(NHS)에서는 영어가 제 1 언어가 아닌 환자들에게 효과적인 소통 지원을 법적 및 윤리적 책임으로 부여한다. 이런 책임은 영국·유럽 그리고 국제법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모든 환자가 동등하게 대우를 받아야 하고, 높은 질의 보살핌을 받고, 환자가 자신의 치료에 관한 결정에 참여하려면 정확한 정보도 나눠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의사소통의 책임은 의료인에게 있다. 높은 질의 의료 통역은 무료로 환자들에게 제공한다. 특히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도 병을 앓거나 스트레스가 심한 병원 생활을 하면 언어 기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의료인들과 의사소통이 더 나빠지거나 모국어로 돌아갈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치매 환자들에게도 볼 수 있다.
한국인 대학원생이 영국에서 일년 있는 동안 둘째를 출산하게 됐다. 남편은 한국에 있는지라 우리 병원에 왔길래 진료를 끝내고 산부인과로 함께 갔었다. 평소에는 영어를 잘 하는 이 친구는 진통이 시작되고부터는 영국 산파들이 아이의 출산을 위해 풀장에 앉아있는 자신에게 열심히 설명하는 것은 하나도 듣지 않고 나한테 한국말만 계속했다.
나는 얼떨결에 산모 손을 잡아주면서 통역을 하고 몇 시간 동안 같이 있게 됐다. 그 다음날 산모는 내게 그 순간에는 머리에서 영어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모든 영국병원에서 찾을 수 있는 외국인을 위한 통역안내서 안의 한국어를 살펴봤다. 두 페이지에 어디가, 언제부터, 어떻게 아프냐고 물어볼 수 있는 문장들이 있고, 흔한 병 이름들이 적혀 있다.
이런 책자가 있는 것이 감사하지만, 내가 접한 한인 1세대들은 증상을 설명할 때 의학 번역 사전에 없는 말들을 많이 쓰신다. 중학생때부터 부모와 한인사회 어른분들을 위해 병원에서 통역을 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통역하기 어려운, 이해할 수 없는 용어를 쓰시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아프다'라는 말은 통역할 수 있지만, '쑤시다', '쓰리다', '애리다', '욱신거리다', '시렵다' 등의 말은 도무지 어린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영국 의대를 다니고 나서도 이런 언어를 어떻게 설명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특히 엄마가 오십견이라고 했을 때, 영국 정형외과 교과서에서는 50살에 걸리는 병을 찾지를 못했다. 지금처럼 위키백과와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바로 답을 알 수 있었던 시절이 아니었다.
영국병원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2세 의사들은 미국과는 달리 모두 영국에서 의대를 나온, 1.5세 아니면 2세들이다. 미국에는 한국에서 의대를 나와 USMLE를 거쳐 미국에서 근무하는 의사들도 많고 40년 역사의 재미한인의사협회도 이렇게 시작했다고 들었다.
유럽에는 특히 주재원으로 온 가족들이 많아서 한인사회의 경제적인 어려움이 미국보다는 덜하고, 맞벌이보다는 어머님들이 주부로서 아이들을 기르는 경우가 많다. 일반화한 나의 생각이지만 미국의 2세들보다 한국어가 더 능통하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어도 미국보다는 인종차별이 훨씬 덜 한 느낌이다.
의대를 나와 영국 NHS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2세 의사들이 미국에 비해 수가 적다. 의사생활 10년 안팎의 젊은 의사들이 결성한 재영한인의사협회는 올 해 네 번째 '건강의 날' 행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여러 분과에서 한국어로 1세대를 위한 의학정보를 나눠 드렸다.
인구비율로 보면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유대인 다음으로 큰 디아스포라(이민자 집단)다. 세금도 많이 내지만, 무료 의료의 모든 혜택을 언어 장벽때문에 못 누리는 1세대 분들을 위해 더 많은 힘을 합쳐야 하고, 의학사전에 나오지 않은 지역별로도 다른 증상 언어를 더 배워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필자는 버밍엄의대를 졸업(2002년)한 후 노팅엄대학병원 외과 Teaching Fellow (2008∼2012년)를 거쳐 2012년부터 현재까지 노스 트렌트 지역 Higher General Surgical Training에 재직하며, 재영한인의사협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