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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관람가 신춘극장
송규정 시조집
첫 시조집을 해산하며 … 송규정 / 4
평설 : 가야금에 노니는 옥수 … 김흥열 / 7
제1부, 봄비는 사랑을 열고
봉평 풍경 / 32
메모리얼 파크 / 33
코로나에 감금되어 / 34
코로나에 숨은 봄 / 35
산천화경山川花景 / 36
백목련의 기도 / 37
봄비와 목련 / 38
아침을 여니 / 39
봄비는 사랑을 열고 / 40
봄바람 연가 / 41
봄 앓이 / 42
봄 틔우는 소곡 / 43
앵도 처녀 / 44
봄 길에서 / 45
봄노래 / 45
오월의 젊은 초상 / 46
능소화 여인 / 46
제2부, 잔인한 사월이여
잔인한 사월이여 / 48
어버이날 / 49
오월의 아픈 기억 / 50
내 가슴 햇살이 들고 / 52
엄마라는 귀인 / 53
시부모님 무덤 이사 / 54
그대 봄 향기 속으로 / 55
은사님의 부음 / 56
망자의 한 / 57
자연의 법칙 / 58
외롭게 차린 제사상 / 59
시어머님 기일 / 60
사진 속 죽마지우 / 61
성묘 / 62
동문 부음에 울다 / 64
울지마 톤즈 / 65
밤 세상 / 66
무념무상의 세월 / 67
하세월 / 68
갈대의 순정 / 69
그리움의 늪 / 70
대보름날 / 71
정월 보름달 맞이 / 72
추석 피로도 / 72
그리운 막내아들 / 73
사모곡 / 73
결혼사진 / 74
몽유도원 夢流桃園 / 74
제3부, 묵향에 젖어
설한雪寒의 검단산 / 76
다산공원 정경 / 77
바람 / 78
석류 등화燈花 / 79
유월은 녹음실록의 계절 / 80
새벽녘 풍경화 / 81
팔월의 서막이 열리니 / 82
갈대 / 83
가을빛 추억 / 84
연꽃 / 85
가을 연밭 / 86
고독한 자아 / 87
조락의 슬픔 / 88
묵향에 젖어 / 89
고독한 시절 / 90
겨울 호수 / 91
첫사랑 첫눈이 오시네 / 92
겨울 길목 / 93
눈 내리는 밤 / 94
대나무 절개론 / 95
청령포 용의 눈물 / 96
풍경이 우는 산사 / 97
비 오는 밤에 / 97
파도 소리 줍는 텅 빈 가슴 / 98
설한의 겨울 산 / 98
겨울밤 상상화 / 99
봄의 화신 설중매 / 99
덜커덩 구르는 세월아 / 100
경안습지 연화 / 100
제4부, 희망의 해가 솟았다
신춘극장 新春劇場 / 102
행운목 / 103
일출의 희망가 / 104
멀어진 청운의 꿈 / 105
율동공원 호수의 서정 / 106
늦은 단풍놀이 / 107
새소리 / 108
겨울 단비 / 109
첫눈의 순교 / 110
산골 이야기 / 111
가을비 / 112
겨울 목련 / 113
가을 가로수 / 113
코스모스 들녘 / 114
만산홍엽 / 114
태초의 찬란한 여명 / 115
만추 / 115
동지 팥죽 / 116
겨울밤 / 116
새해를 맞으며 / 117
칡의 호시절 / 117
얼빠진 시간 / 118
희망의 해가 솟았다 / 118
제5부 무너진 일상 질서
역병의 벽을 넘어서 / 120
팬데믹 시대의 성탄 / 121
코로나 시대 제사 풍경 / 122
팬데믹 설맞이 풍속 / 123
비대면 강의 / 124
비대면 공연 / 125
변이 바이러스 비상 / 126
백신 접종 트라우마 / 127
무너진 일상 질서 / 128
미물의 생존 투쟁사 / 129
오미크론 침략 전쟁 / 130
불안한 삶 / 131
자가격리 행복 동거 / 132
공허한 비대면 / 134
염원은 초원을 달리고 / 134
내면의 목마름 소리 / 135
파도여 슬퍼 말아라 / 135
산화한 귀한 청춘 / 136
활공하는 저 기러기 / 136
제6부 너의 넋 별꽃에 얹는다
문학 지킴이 시조인 / 138
서투른 주말농장인 / 139
머윗대 들깨탕 / 140
여름 단비 / 141
특별한 여름나기 / 142
불면증 / 142
여름밤 새벽달 / 143
짐 싸는 여름 매미 / 143
황사 / 144
광풍 / 145
폭설 / 146
줄지은 태풍 하이선 / 147
폭우의 가르침 / 148
물 폭탄, 장맛비 / 149
태풍의 공포 트라우마 / 150
황망한 괴마, 돌풍 / 152
화마 산불 / 153
어리석은 집회 대란 / 154
태평가 에어쇼 / 155
러시아 정복 전쟁 / 156
6·25 전쟁 70주년 기념식 / 157
너의 넋 별꽃에 얹는다 / 158
고통의 벽 / 159
통곡의 빗소리 / 160
홍수로 위급한 국태민안 /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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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소개>
프로필
송규정 시조집
경기도 성남시 거주
시인, 문인화 작가, 문화예술교육사,
국악 강사, 정가 강사, 가야금 강사
동국대학교 문화에술대학원 한국음악 석사
국가무형 문화재 제41호 가사 이수자
소석가악원, 가악풍류회 대표
(사)문학그룹샘문 운영위원
(사)샘문학(구,샘터문학 운영위원
(주)한국문학 운영위원
(사)한용운문학 회원
(사)도서출판(샘문시선) 회원
(사)한국시조협회 회원
율동시회 회원
(수상)
2020 한국시조협회 시조 등단
2023 한국문학 시둥단(샘문)
대구예술제전국대회 정가 일반부 대상
(저서)
위대한 부활 그 위대한 여정 <한국문학시선집/샘문시선>
문학은 사랑입니다 <성남문화재단/책테마파크>
눈꽃 바람 벗어나기 <율동시회 동인지>
송규정 가사 음반
(공연)
송규정의 정가 개인 발포 12회
<성남아트센터앙상블씨어터, 국립민속박물관, 코우스)
송규정의 정가와 가악풍류회의 어올림 공연 28회
서울가악희, 한국전통가곡진홍원, 국내외 공연 다수
(사사)
국가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보유자(고, 이양교 선생)
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남창가곡 보유자(고, 홍원기 선생)
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여창가곡 보유자(고. 김덕순 선생)
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보유자(이동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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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첫 시조집을 해산하며
내겐 시인이란 말이 수줍고 어색합니다. 아직은 기력이 짧고 글의 구성이나 메타포와 반전의 미, 측면 등에서 부족함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녀 시절엔 문학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중, 고 시절에 늘 도서관에 가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사회에 나와서는 너무 바쁜 직장 업무에 책을 읽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이 각박하게 살아야 했고 겨우 겨우 짬짬이 가야금만 할 수가 있었습니다.
결혼 후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가야금을 더 연마하려 가곡 인간문화재 홍원기 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산조를 하시는 게 아니고 이왕직 아악부 5기 가야금 전공으로 정악만 하셨습니다. 가야금 정악을 공부하던 중 얼마 후 공연을 보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지금의 아르코 대극장이었는데 첫 프로그램을 선생님께서 하시는데 신선이 구름 타고 올라가는 신비와 환희의 너무 감동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노래는 남창가곡 우조 초수대엽 “동창이 밝았느냐…” 였는데 우리나라 음악이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 이튿날 공부하러 가서 선생님께 노래도 공부하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그래서 여창 가곡 15곡 전 바탕을 여러 번 반복 공부하면서 경제京制 시조, 가사, 가야금 정악을 모두 공부하고, 남 여창 가곡 반주까지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시조 형식에 대한 국문학적 이론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공연과 교육으로 바삐 살다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집안에 칩거하면서 그립던 고향을 수십 년 만에 찾게 되듯 시조와 시를 찾게 되었습니다.
소녀 시절의 맑은 감성은 퇴색하고 어휘도 잃어버렸지만, 주섬주섬 낯선 해변에서 조약돌을 줍듯이 시어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수십 년 고시조로 가곡과 시조를 부르고 강의를 하게 되어 시조는 익숙했지만 시조 창작은 어려웠습니다. 독자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시조를 쓰고 싶은 염원은 언제일까요?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경주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서툰 문필로 많이 부족하지만, 첫 시조집을 낼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정성을 다해 도와주시고 지도편달을 해주시고, 특히 평설까지 해주신 스승님, 김흥열 사단법인 한국시조협회 전 이사장님께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2023년 8월경에 사단법인 샘문그룹 계열 주식회사 한국문학에서 주최하고 샘문그룹이 주관하였으며 서울특별시, 중랑구, 샘문뉴스, 대한민국예술원(이근배), 국제펜한국본부(손해일), 한예총(김소엽) 외 23개 단체 및 기업이 후원한 <한국문학상> 공모전에 <코로나에 희생된 영혼들 영전에 외 2편>을 <시부문>에 응모하여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하는 영광을 과분하게도 안았습니다. 이 한국문학상은 1966년 김동리 선생이 창간하여 이근배 선생에게 물려주고, 이근배 선생이 샘문그룹 이정록(지율, 샘터) 선생에게 물려준 저명한 문예지 <한국문학>과 저명한 문학상 <한국문학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불쑥 도전하여 당선되어 등단하여서 모든 게 실감이 안 나고 얼떨떨했는데 이제야 정신이 든 것 같습니다. 더욱더 겸손하게 정진하라는 채찍으로 여깁니다.
이때 저를 인도해주셨으며 영감을 주시고 지도편달까지 해주시고 이번 시조집 <윤문 감수>를 해주신 사단법인 문학그룹샘문 이사장 이정록 교수님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그리고 이번 시조집을 출간하는데 기획, 디자인, 편집, 유통, 홍보를 해주시는 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주신 <샘문시선> 에디터 및 출판 관계자 여러분께도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끝으로 저와 함께 여창가곡, 정가, 가야금 등 문화예술 활동을 같이하는 동료 및 선후배 여러분과 시조, 시 창작 활동 및 문단 활동을 같이하시는 문우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리며, 이번 시조집이 출간할 때까지 응원을 아끼지 않은 저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이 지면을 빌어서 전하며, 이 출간에 기쁨을 같이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2024년 3월 23일
素石 산방 서재에서
송 규 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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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설>
가야금伽倻琴에 노니는 옥수玉手
- 김흥열(시인, 한국시조협회 이사장)
1. 시작하며
먼저 素石 송규정 시인의 작품집 관람가 신춘극장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시인은 시조 창작 이전에 이미 다중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1968년도에 가야금에 입문 한 이래 수십 년간 ‘가야금, 정악, 여창 가곡, 가사. 시조창’을 해 오신바 지금은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무형문화재 제41호”로 이수자 자격을 획득하고 많은 문하생을 지도하고 계시다.
뿐 만 아니라 2009년부터 문인화를 시작해서 지금은 상당한 경지에 오른 작품을 생산하고 계시다. 시조時調의 입문은 2020년 <봉평 풍경>이라는 작품을 (사)한국시조협회 「시조사랑」 계간지에 발표하면서 시조에 등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년간 시조창을 해오긴 했어도 직접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렇게 시인은 “정가, 문인화, 문학의 시조”의 3분야를 모두 섭렵하신 분이라 하겠다. 무엇보다도 전통예술을 보존하고 전수한다는 예술가로서 남다른 애정, 의욕과 책임감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달성하기 어려운 분야이다.
시조는 일반 시와는 다르게 동전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언어창작 예술이다. 즉 작품에 반영되고 있는 예술성과 전통이라는 정체성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어려운 분야이다. 특히 현대 시조에 있어서 표현의 다양성을 예술적으로 살려내면서 전통을 지켜내야 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시조는 우리 민족의 전통 시詩 양식이므로 자유시에 익숙해진 우리는 정체성을 벗어난 작품을 생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조 역시 내면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감정을 다듬고 잘 엮어서 3장 6구라는 정해진 틀 속에서 빚어내야 하기 때문에 자유시보다는 매우 그 작법作法이 까다롭다 하겠다.
뿐 만 아니라 각 장의 독립성, 연결성 완결성을 추구하면서 종장에 이르러 화자의 결의나 각오를 현재형 술어로 마감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 있어 창작을 더욱 어렵게 만들기는 하나 이러한 점이 바로 길이 보존되고 전승되어야 할 전통예술의 가치라는 것을 새삼 인식할 필요가 있다. 노래는 귀로, 그림은 눈으로 보며 그 감미롭고 아름다움에 취하는 것이지만 시조는 글자 행간에 박힌 이미지를 심어놓아야만 독자는 보이지 않고 들을 수 없는 화자의 감정을 찾아내 진주처럼 빛나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북송北宋의 화가 곽희郭熙는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시화일체詩畫一體라고 했다. 즉 그림은 소리 없는 시이고 시는 형체 없는 그림이라고 했다. 북송 말기의 <적벽부>로 유명한 시인 소식(동파) 역시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 “詩中有畵 畵中有詩“ 라고 했다. 이 말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시는 읽으면서 그림의 모양이 떠올라야 한다는 얘기로 시조의 작품 역시 독자가 읽으면서 그림을 선명하게 그릴 수 있도록 ”詩中有畵“로 지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얘기다. 이를 관념의 연합이라 한다. 관념연합觀念聯合은 하나의 관념이 관련되는 다른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심리 작용이다. 따라서 사람의 외모가 꽃이라고 한다면 사람의 내면은 향기가 있어야 하고 이 향기를 글로 표현한 것이 시조가 아닐까 한다.
이번에 출간되는 작품집 관람가 신춘극장에 수록된 작품들은 하나같이 송규정 시인의 내면에서 발산되는 곱고 순박하고 그윽한 향기로 채워져 있다. 이번 작품집 특징 중 하나는 ‘코로나19’라는 암울한 터널을 지나오면서 느낀 감회의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작가의 답답한 마음이 시조라는 분화구를 통하여 분출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전통예술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정체성”을 살려내야 한다. 이를 무시하면 전통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게 된다. 이제 소석素石 송규정 시인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그의 시 세계와 내면의 향기에 취해볼까 한다.
2. 작품 감상
흰 물결 너른 벌판
비경인가 선경인가
흐르는 바람결에
나부끼는 옷자락은
한 아름 쏟아지는
달빛에 눈이 부신 노래다
- 「봉평 풍경」 전문
이 작품은 시조시인으로 입문하기 위해 처음으로 선보인 작품이다. 우선 봉평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다. 장돌뱅이 허생원과 동이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달밤의 산길을 배경으로 설정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부자 상봉의 모티프를 한 폭의 수채화처럼 엮어낸 그 장면이 떠오른다. 소석 시인 역시 소설 못지않게 시조 작품 속에 그림이 있도록 작품 구성을 잘하였다고 본다. 3장 6구 12소절의 전통적인 방식이 그대로 살아 있는 시조의 전형으로 균제미均齊美가 돋보인다. 초장, 중장, 종장이 각각 독립적이면서 연결성, 완결성이 완벽하게 짜여 있다. 특히 종장에서 ‘나부끼는 옷자락이 눈부신 노래라’ 비유한 것은 절창이라 할만하다. 대개 초심자는 ‘~ 같은, ~처럼’ 등등 직유법을 도입하겠지만 시인은 이미 은유법을 동원함으로서 그 시적인 맛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이 작품 안에는 그림이 있고 노래가 있고 향기가 묻어 있다.
먼 훗날 자그마한 흔적 하나 남기고자
먹물에 붓을 잠겨 화선지에 앉힌 숨결
붓 길에 영혼을 싣고 무아지경 빠져든다.
젊음의 힘찬 필력 손을 뗀 노년에도
먹물에서 도를 찾아 여유를 갖다보면
늘어진 한 겹 난 줄기서 고고함을 배운다
-「묵향에 젖어」일부 인용
이 작품은 화가의 여유와 시인의 감성이 듬뿍 배어 있는 작품이다. 둘째 수, 중장 “먹물에 붓을 잠겨 화선지에 앉힌 숨결” 같은 표현 역시 절창絶唱이다. 시인이 종장에서 ‘무아지경’에 빠져든다고까지 하는 표현을 보면 작품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얼마나 몰입하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예술의 경지는 아마도 이러한 무아지경에 이르는 길임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셋째 수에서도 먹물에서 도를 배우고 붓끝으로 쳐낸 한 줄기의 난 잎에서 고결함과 순수함과 우아함까지 배운다고 한다. 이 작품은 연시조임에도 시조의 정체성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뚜렷이 나타난다. ‘먹물의 도道’라는 말도 평범한 말 같지만 내재 된 사유의 세계는 한없이 넓기만 하다. 이 작품은 우아미優雅美와 긴장미가 돋보인다.
창문을 열어보면 나무 끝 맑은 바람
참새는 노래하며 아침 햇살 물어 다가
싱그런 라일락 향에 반짝반짝 섞고 있다.
맑은 샘 길어 올려 탁한 호흡 씻어낸 뒤
청명한 시안詩眼으로 새날의 문을 열면
소중한 인생의 하루가 보석처럼 빛나겠지
-『아침』전문
이 작품은 작가의 상상력이 동원된 작품이다. 시조는 화자의 상상력을 요구받는 분야이다. ‘참새가 아침 햇살을 문다’든지 ‘라일락 향에 반짝반짝 섞는다’와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다. 상상력은 공상이나 망상과는 달라서 독자에게 맛깔스런 묘미를 전달하게 된다. 둘째 수 중장에서 ‘청명한 시안詩眼으로 새날의 문을 열면’ 그날 하루의 삶은 보석처럼 빛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의인화가 잘되어 있다. 의인화는 시조의 가장 중요한 창작 포인트 중 하나이다. 고시조 대부분이 사물을 의인화하여 독자로 하여금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게 만든다. 자유시와 변별력을 갖게 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세상은 허구한 날
소음으로 가득하여
이 몸은 매일매일
심신이 피곤하다.
영혼이 가출해버린 요즘
무심만이 웃자란다
- 「무념무상의 세월」 전문
무슨 연유로 영혼이 가출한 세상에서 무심으로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다음 작품에서도 나타나듯이 코로나19로 인한 고통 때문일 것이다. TV를 켰다 하면 코로나 소식이다. 많은 인명을 앗아갔으며 아직도 코로나와의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다. 노령층일수록 바깥출입을 억제해서 코로나에 노출되지 말아야 한다. 하루하루가 답답하고 우울할 뿐이다. 게다가 세상은 언제나 소란하고 요란하다. TV에서도, 라디오에서도, 모바일 폰에서도 열기만 하면 소음의 공해가 봇물처럼 터진다.
인류의 문명이 발전할수록 소음공해는 점점 커진다. 여의도 공해는 우리를 짜증나게 만들고, 보이스 피싱 같은 사기 범죄는 불안하게 만들고, 묻지마폭력은 공포에 떨게 하고, 그러니 화자가 말한 대로 영혼이 가출해 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이 작품은 우리 사회를 고발하는 작품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지분知分을 모르고 과욕을 부리는 탓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다.
작가는 주제를 “무념무상”으로 하였으나 그렇게 맘을 먹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로 ‘나무는 가만히 있고 싶으나 바람이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내가 조용히 살고 싶어도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나를 가만있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요당하며 사는 세상이 되었다.
후두둑 봄바람에 꽃잎이 휘날리듯
수많은 귀한 목숨 코로나가 데려가네
임종을 못 하는 가족 애통해서 어쩌나!
-「잔인한 사월이여」일부 인용
코로나에 대한 기억은 우리 모두에게 트라우마(trauma)로 남아 있다. 전 세계 인류에게 닥쳐온 재앙이었다. 지금도 완전히 극복된 상태는 아니지만, 당시에 비하면 정상으로 되돌아온 느낌을 받는다. 이 외에도 코로나에 대한 작가의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한 작품은 상당히 많이 있다.
30여 편의 작품에서 코로나에 대한 감정이 묻어 있다. 「산천화경」에서는 숨 막히는 공포를, 「고독한 시절」에서는 단절된 사회활동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공허한 비대면」에서는 비대면 공연에서 느끼는 허탈을,
「무너진 일상 질서」에서는 깨진 삶의 일상을, 「코로나의 생존 투쟁사」에서는 기근이나 전쟁보다 두려운 우리의 미래를 걱정하는 등등 수많은 작품에서 재앙처럼 닥쳐온 코로나 시대의 삶을 가슴 아프게 그려내고 있다.
소석 시인은 그분의 경력에서 말해 주듯이 대중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예술가이다. 그런데 이 코로나로 인해 어울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니, 누구보다도 답답하고 원망스러웠을 것은 틀림없다.
작품 「잔인한 사월이여」이란 말은 T.S.얼리엇의 시 “황무지”에서 시작된 말이다. 시의 첫 구절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시어로 시작된다. 당시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유럽 전역의 황폐해진 삶이나 정신적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묘하게도 우리나라에서도 4월은 아픈 달로 인식된다. 제주 4․3 사건, 4․19 혁명, 세월호 침몰 등의 사건이 4월에 발생하였다. 특히 우리나라는 과거에 보릿고개가 시작되는 달이 4월경이다. 어찌되었건 4월은 우리에게도 잔인한 달 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4월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오는 연약한 새싹의 고통도 4월에 절정을 이룬다. 그 연약한 몸으로 땅을 헤집고 나오는 고통 역시 우리가 겪는 고통 못지않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는 작품이다.
이런 아픈 계절에 코로나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작가의 말처럼 꽃잎이 지듯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이웃은 말할 것도 없고 부모의 죽음마저도 지켜보지 못한 시기였고, 어떤 행사도 결혼식마저도 못 하게 하던 단절의 시기였다. 배우가 관객 없는 무대에서 공연할 때 그 무력함, 고독, 허탈함은 계절이 바뀌어도 바뀐 줄 모르는 단절된 공간이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것처럼 슬픈 현실은 없을 것이다. 작가의 이런 심정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스러운 삶이었다는 점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수줍어 홍조 띠는
새악시가 오셨는가
잎새 뒤 반짝이며
빨간 진주 달고 왔네
풍화를
감내한 찬미 햇살 아래 도도하다
- 「앵도 처녀」 전문
이 작품은 종장에서 매우 희망적이다. 추운 겨울을 이겨낸 뒤에 보석처럼 매달려있는 앵두는 아름답다. 그러나 작가는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도도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계절의 변화에 따른 당연한 자연의 이치가 아니라 모진 풍파를 감내했다고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람도 세파를 극복해 내고 소망한 바를 얻을 때 그 삶은 아름답고 힘차게 느껴진다. 이러한 삶은 찬미가 분명하다. 우리의 삶도 저 앵두처럼 험난한 풍파를 반드시 극복해 내고 결실을 얻어내야 하겠다는 화자의 강력한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작품 역시 절제미節制美와 우아미, 균제미가 뛰어나다.
깊은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 맞은 새벽
늙으면 모든 일상
비정상 되어가나
차라리
달빛과 벗해 풍류라도 즐길까
- 「불면증」 전문
불면증은 대개 생활 습관이나 환경적 요인 또는 신체적, 심리적 요인에 의해 밤잠을 깊이 못 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현상이다. 지금 화자의 불면증은 코로나로 인한 단절의 삶에서 비롯된 심리적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작가의 일상적 리듬이 무너져서 생긴 불면증일 것이다. 화자의 말대로 몸을 뒤척이며 고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달빛과 어울리거나 달빛을 관중 삼아 노래 한 소절 뽑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야 막힌 가슴이 뻥 뚫릴 것이다.
신라 경문왕이 임금 자리에 오른 뒤에 귀가 나귀의 귀처럼 커진 비밀을 복두쟁이가 대밭에 가서 외치자, 그 뒤부터 바람이 불면 대밭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났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지금 작가의 심정은 복두쟁이만큼이나 답답하다. 달빛이라도 잡고 한판 놀지 않으면 마음의 병이 생길 지경이다. 대밭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나는 것처럼 달빛 고운 날에는 작가의 목청이 달빛에 실려서 들려올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화자의 답답한 심정이 유감없이 잘 발휘된 작품이다.
비대면 무관중이 낯설게 막을 열면
교감은 길을 잃고 공명은 허기지고
눈앞에 꽉 찬 빈자리 눈빛조차 닫혀 있다
-「공허한 비대면」전문
이 작품 역시 비유가 뛰어나다. 초장에서 무관중이 막을 연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종장 “꽉 찬 빈자리”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시적인 맛을 더욱 실감 나게 살려내고 있다. 역설법이나 반어법은 시적인 맛을 더욱 첨가하는 재료 중 하나이다. 반어법은 문장이 틀린 데는 없으나 화자가 말하는 의미는 반대이고, 역설법은 문장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문장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의미심장한 바가 포함 되어있는 수사법이다. 말하자면 기의記意가 내재 된 기법이다.
한편 종장 말미의 마감이 현재형 술어이다. 과거에 발생 된 일이지만 현재형 술어로 마감하여 그 생명력을 무궁케 하고 있다. 시조의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소절이나 구가 흐트러지지 않음은 물론이고 각, 장마다 독립성과 연결성을 잘 유지하고 있는 단시조의 전형典型이라 할만하다. 시조에 입문한 지 오래된 사람도 이런 작품을 생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황급히 떠나보낸
시월의 끝자락에
창밖의 가로수가
오색으로 곱디곱다
나 몰래
어느 화가가 고운 붓질하고 가셨나
- 「만추」 전문
이 작품도 쉬우면서도 그 정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작품이다.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화가가 있다면 그는 아마도 조물주일 것이다. 초장의 표현도 매우 아름답다. ‘황급히 떠났다’고 말하지 않고 마치 화자가 계절을 보내듯이 ‘떠나보낸’이라고 함으로서 말의 묘미를 새롭게 만드는 말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곽희가 말한 시중화詩中畵는 바로 이런 글을 보고 말한 것이 아닐까. 긴장미緊張美와 우아미가 잘 드러나 있다.
아직은 먼 봄소식 빈 가지에 들어 있다
혹독한 겨울나기 수십 성상 도가 텄나
겁 없이 솜털 꽃심을 치켜들고 당당하네
- 「겨울 목련」 전문
시인치고 목련에 관한 작품을 안 써본 이는 거의 없을 정도로 봄의 대명사처럼 읽히는 봄꽃이다. 이 작품 역시 초장에서부터 그 솜씨가 범상치 않다. 빈 가지에 들어 있는 봄을 발견하는 것은 시인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봄을 품은 가지가 희망을 북돋우며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라고 다독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숨은 봄은 어김없이 그 가지에서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의인화가 잘된 작품이다. 의인법은 우리의 삶을 반영하는 시작법詩作法이다.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시조라고 할 수 없다. 시조는 우리의 삶을 사물에 빗대서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인법이 동원되지 않는다면 시조는 무미건조하여 이미 오래전에 생명을 다,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같으면 디지털카메라로 찍어내는 것보다 더 자세히 사물을 그려낼 수는 없으나 아무리 사진기가 사물을 잘 찍어낸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정까지는 찍어내지 못한다. 이런 점에 미루어 볼 때 곧 시조는 설명문이나 묘사문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종장 후구의 ‘당당하다’라는 표현 역시 정의롭고 희망적이다.
오욕에 찌든 흔적 말끔히 씻으려고
임 소식 기다리듯 창가를 서성인 날
때아닌 하얀 매화가 가지마다 피고 있다
새봄이 올 거라고 속삭이는 위로의 말
목마른 낙엽 위로 꽃들은 피어나고
어머니 자장가 인양 소록소록 노래하네
- 「첫사랑 첫눈이 오시네」 전문
첫눈이 내리는 모습에서 작가는 벌써부터 봄을 기다리고 있다. 화자가 말하는 봄은 그냥 자연의 순환에서 오는 그런 봄이 아니라 마음의 봄이다. 무엇인가에 갇혀 있는 느낌, 억압되고 있는 심적 부담을 떨쳐버리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식물을 억압하는 것은 추위나 기후 등 자연적 환경일 것이고 화자의 마음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아마 코로나 같은 역병 또는 사회적 요인일지도 모른다.
계절이 바뀌어 봄이 오면 온갖 만물이 소생하듯이 화자의 마음도 갇혀 있어야만 하는 상태를 벗어나 맘 놓고 활동하고 싶은 마음의 봄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이 첫눈은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켜 아늑하고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마치 엄마의 품처럼. 그래서 화자는 지금 눈 오는 소리를 엄마의 자장가로 환치하여 들으며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짧은 인생 많은 재능 필요한 곳 다 주시고
민들레 꽃씨처럼 흩뿌리고 가신 영혼
십 년 후 활짝 핀 꽃을 들고 고국 땅을 밟으셨네
-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 일부 인용
<울지마 톤즈>는 고 이태석 신부를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신부는 아프리카 “수단”에서 희망을 살려낸 한국의 슈바이처이다. 어린 새싹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악기를 가르치며 희망을 싹틔웠고 의술을 베풀어 병든 이를 구제했다. 이태석 신부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평생을 그들과 함께하신 선구자이다. 무지와 가난에서 그들을 구하고자 오직 사랑과 희망만을 뿌리신 분이시다. 필자도 그 영화를 보면서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이 꽃피는 것을 보았다. 육신과 영혼을 모두 내주고 떠난 지금 아프리카 그 오지에는 생명의 소중한 꽃이 피고 열매 맺으며, 허기진 배를 채워줄 희망찬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아마 천국에서 그곳의 평화와 윤택해진 삶을 보며 빙그레 웃으실 것 같다.
사회적 거리두기 천륜마저 갈라놓나
핏줄 이은 혈육들을 보고파도 못 만나니
쓸쓸히 모시는 차례 조상님께 송구하다
우울증 걸린 설이 마음을 도려낸다
정성을 다, 하지만 몸마저 불편하여
걱정이 앞장을 선다, 설레던 맘 옛말이고
- 「팬데믹 설맞이 풍속」 전문
코로나라는 괴물이 세상을 바꿔놓았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윤리나 도덕이 필요하다. 즉 인륜과 천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이러한 질서가 파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사례四禮, 즉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매우 중요시 여겨왔다. 그러나 이 사례마저도 꺼리거나 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작가 입장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난처한 일이 되고 보니 우울증에 걸릴 만도 하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습관으로 일상화된 행동양식을 하루아침에 바꾸어 버리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비단 작가뿐 아니라 누구나 상당한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종장에서 도치법을 활용하여 화자의 걱정하는 마음을 강조하므로 시조에서 요구하는 종장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고 강하게 살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먼 훗날 역사성과 시대상을 반영한 좋은 작품이 되리라 본다.
천년의 푸르름만 고고하게 채워 두고
하늘을 우러르며 선비충절 지켜낸다
무심한 세월의 변절을 지켜내는 절개여
- 「대나무 전개론」 전문
초장에서 ‘천년의 푸르름만 고고하게 채워 두고’라는 표현이 매우 돋보인다. 대나무가 천 년을 살건, 살지 않건 그것은 중한 것이 아니다. 대나무의 빈 줄기에 푸르름을 고고하게 채워 둔 것을 보는 화자의 안목이 돋보인다. 대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충절의 대명사이다. 화자가 말하는 푸르름은 청빈 또는 청렴일 것이다. 공직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이 청렴의 정신으로 지절을 지켜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시류에 따라 절개가 변한다면 그것은 절개가 아니다. 그런 사고는 변절일 뿐으로 사익을 앞세우기 때문에 생겨난다. 세월이 변하든 사회가 변하든 선비의 지절은 언제나 청빈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고즈넉한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적막과 고요 아래 정감 이는 산골 마을
은하수 흐르는 하늘엔 달빛 가득 고여있다
별빛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밤하늘에
집 집마다 문풍지를 뚫고 나온 정담들이
차가운 산골의 정적을 사랑으로 덥는다
- 「산골 이야기」 전문
시골의 정경을 잘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별빛 쏟아지는 시골의 밤 풍경은 너무나 아름답다. 누군가 말했다. 달빛에 물이 들면 신화가 이루어지고 햇볕에 녹이 슬면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둘째 수 중장에 ‘정담들이 문풍지를 뚫고 나온다.’라고 했다. 얼마나 시적인가? 종장에도 ‘차가운 산골의 정적을 사랑으로 덮는다.’라고 표현하여 산골의 고요한 모습을 그림처럼 그려냈으며 오순도순 나누는 얘기를, 가족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음을 눈으로 보듯 환하게 그려놓았다. 필자 역시 시골 태생이라 눈 오는 밤이면 군고구마를 먹으며 호롱불의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추억이 새삼 떠오른다.
산 위에 떠 오른 달 냇물에도 떠 있는데
나뭇가지 앉은 달은 누가 또, 보냈는가
코로나 몽땅 태우려 달집 들고 왔구나
- 「정월, 보름달 맞이」 전문
어릴 적 추억이 살아나는 느낌이다.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마다 달집을 태우면서 소원을 빌었다. 이러한 행사는 주민들의 공동체적 단결과 화합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초장과 중장은 사뭇 철학적이다. 같은 달이지만 하나는 산 위에 있고 또 하나는 물속에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그러나 화자는 각각 다른 존재로 인식하듯이 문장을 꾸며낸다. ‘나뭇가지 앉은 달은 누가 또 보냈느냐’며 짐짓 자연의 경이로운 모습을 묻고 있다. 코로나에 시달리는 중생을 구제하려 보름달이 ‘달집’을 들고 왔다고 말한다. 이는 화자의 간절한 소망이다.
집에만 박혀있어 봄 온 줄도 몰랐어라
평소에 눈길 거둔 화단을 살펴보면
새 생명 아릿한 모습 날 반기며 웃고 있다
목련이 만개한 줄 오늘에야 보았어라
우아한 하얀 자태 두 손 모아 간구하면
하늘도 감동하시고 우리 청을 들으실까
홍매화 백매화에 동백꽃과 진달래꽃
꽃 천지 화려해도 역병의 위협으로
가슴에 두려움 가득, 봄맞이할 여유 없네
- 「코로나에 숨은 봄」 전문
이 작품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생각난다. 이 말의 유래는 왕소군王昭君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당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 <소군원>에서 시작되었다. 어떤 처지나 상황이 때에 맞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 봄이 와도 외출이 제한되고 집안에서 생활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춘래불사춘이란 말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잘못도 없이 가택연금 상태로 살아야 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세태를 적절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첫수 종장에서 ‘아릿한 새 생명이 반기며 웃는다.’라는 표현만 봐도 작가의 심정을 잘 알 수 있다. 셋째 수에서는 온갖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며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지만, 마음은 그 광경을 즐겨 볼 여유가 없는 것이다. 세 수로 된 연시조이지만 각, 수마다 독립적이면서 주제와는 그 상像을 동일하게 그려내고 있다. 연시조에서 간과하기 쉬운, 소위 말하는 ‘옆길로 빠지기’가 전혀 없이 완벽하게 연시조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살려냈다. 한 편, 각 수 역시 장의 독립성, 연결성, 완결성을 잘 유지하고 있어 시조의 정체성을 모두 완벽하게 살려낸 작품이다.
목마른 산천초목 맑은 비로 몸을 씻고
엊그제 생을 마친 떨어진 빈자리를
새움은 반짝거리며 그 아픔을 다독인다
봄날의 그늘 아래 그리움을 감싸 안고
각색의 철쭉꽃들 꽃 틔울 날 고대하다
꼭 다문 봉오리들이 빗방울에 입을 여네
- 「봄비는 사랑을 열고」 전문
이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독자는 힘이 불끈 솟을 것 같다. 떨어진 꽃은 죽음이 아니라 변한 모습이다. ‘생을 마친 빈자리’를 ‘새움이 다독인다.’ 했으니, 꽃은 열매로 모습을 바꿨을 뿐이다. 봄비는 화자가 말한 대로 신비의 손길이다. 거칠고 딱딱한 껍질을 뚫고 나오는 새움을 볼 적마다, 푸나무들이 제각기 조물주가 준 능력대로, 꽃 피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신비로움을 느낀다. 분명 보이지 않는 손길이(invisible hand)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드가 밝힌 경제 이론이 아니라도 우리는 자연 현상에서 이같이 보이지 않는 손을 종종 발견한다. 봄비는 꼭 다문 입을 열게도 하고 풀잎에 파란 물을 들게도 하고 각양각색의 물감으로 다양한 색의 꽃잎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신비의 손이다. 봄비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신력神力을 지니기도 하였다. 봄이 오면 작가의 바람대로 힘들고 지친 이에게 꽃피는 희망의 계절이 될 것이 확실하다.
3. 마치며
지금까지 주마간산 走馬看山 격으로 작품을 살펴보았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시조의 정체성을 제대로 살려낸 작품들로 짜여 있으며, 몇 작품에서 밝혔듯이 시조 미학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의 절제미節制美, 균제미均齊美와 우아미優雅美, 긴장미緊張美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시조 미학의 정수들은 작가의 등단경력에 비춰 볼 때 많은 노력을 했다는 증거이며 너무나 잘 된 작품들이 즐비하다. 이렇게 시조 창작을 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보니 가곡이나 시조창에 이미 익숙해진 바도 있겠지만 문인화를 그리면서 터득한 형상화 방법을 작품창작에 반영시켰기 때문일 것이라는 짐작을 해본다.
시조는 기표記標(시니피앙:signifiant)와 기의記意(시니피에;signifie)로 직조된 언어예술이다. 기의보다 기표에 주의가 집중되기 마련인데 송규정 시인의 작품은 귀로 감지할 수 있는 말이 의미하는 것인 기의가 매우 돋보인다. “청구영언”의 발문을 쓴 정래교는 “노래를 글로 쓰면 시가 되고 시를 관악기와 타악기에 얹으면 노래가 된다.”라고 했다.
시인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시詩를 관현악기에 얹어 노래를 해오셨으니 내면의 감정을 글로 쓰는 일은 어쩌면 남보다 쉽게 깨우쳤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말마디가 곱고 기품이 있고 순수하다. 독자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어 사랑받으리라는 확신한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셔서 시조계의 한 획을 남기시길 간절히 소망하며 다시 한번 관람가 신춘극장 작품집 출간을 축하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