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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18-19 (주여 주여)
성경본문 : 다니엘 8: 18-19
18. 그가 내게 말할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어 깊이 잠들매 그가 나를 어루 만져서 일으켜 세우며
19. 가로되 진노하시는 때가 마친 후에 될 일을 내가 네게 알게 하리니 이 이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일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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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성희목사
어느 불신자가 교회에 친구 따라 놀러 왔습니다. 예배 시간에 목사님은 “우리 다같이 ‘주여 삼창’하고 통성으로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온 성도들이 일시에 “주여, 주여, 주여”하더니 우뢰소리 나듯 기도를 합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서 이 사람은 놀라서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까 기도할 때 교인들이 ‘죽여, 죽여, 죽여라던데 누굴 죽이라고 그렇게 소리치는 거냐?” 예수님을 재판할 때 주님을 “주여 주여” 해야 할 텐데 당시의 사람들은 “죽여 죽여” 했습니다.
지금도 “주여 주여”해야 할 사람들이 “죽여 죽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가장 사랑도 많이 받고 ‘주여 주여’ 해야 할 사람이 그 사랑 다 망각하고 ‘죽여 죽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우리 자신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주여 주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죽여 죽여”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주여 주여”가 진심입니까? 아니면 위선이며 가식입니까?
“주”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예배 속에서 의미 있게 사용되는 말이며 신성의 고백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다가 말씀에 의지하여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신성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말입니다.
“주”란 말은 주인 혹은 주님이란 뜻입니다. 때로는 알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위엄의 호칭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가는 도중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땅에 엎드려져서 “주여, 누구시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는 아직 예수님을 확실하게 몰랐지만 위엄의 존재인 것을 알았기에 “주여”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2:45에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입니다. 다윗은 예수님 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영적으로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합니다. 다윗이 있기 훨씬 이전에 계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는 “주여”라는 말이 494회 나옵니다. 많이 등장하는 이 말에는 독특한 뜻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16에는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만주의 주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불러야 할 분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타난 “주여 주여”의 의미를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기 바랍니다.
첫째, 최후의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부를 소리입니다.
마태복음 7:22에는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시인하므로 믿음이 완성됩니다.
로마서 10:10에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합니다. 입으로 시인하고 불러야 하지만 그러나 마음에 없는 입으로 부름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의 실천이 없는 고백, 마음에 없는 입술의 부름을 예수님은 책망하십니다. 자기의 입술로만 부르는 소리는 공중에 떠도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마음에는 없으면서 입술로만 하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3:13에는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주이다”, “내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옳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의미 없이, 생각 없이 하는 것을 막으십니다.
시간이 갈수록 입만 교인인 사람이 늘어갑니다. 무늬만 신자이며 이름만 그리스도인인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마 시간이 갈수록 이런 신자가 늘어나게 되고 진실한 사람은 보기가 드물어질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은 잘한다고 합니다. 말도 잘한다고 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합니다. 말 잘하는 것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고 말만 잘 하니 문제입니다. 일반인들도 말은 잘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사랑해” 하면서 이혼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사랑해” 한번도 안하지만 이혼 안하고 잘 삽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랑해” 한번도 안하지만 “이혼해”는 용감하게 합니다. 우리의 사랑도 말로만 하지 말고 진심으로 해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 젊은이들을 보면 말을 잘 해요 “사랑해”하는 말은 우리가 자랄 때는 어색해서 못하던 말인데 요즘은 너무 쉽게 합니다. 드라마의 대사를 유심히 들어보세요.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말은 잘하지만 진심이 있습니까? 정말 잘 안할 때만큼 사랑도 더 많이 하나요?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요한일서 3:18에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립 서비스’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혀로는 잘 하지만 실제로는 잘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당신의 입으로 예수님을 찬양하면서 마음속에 세상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래 전에 한국 선교사이셨던 권세열(Fred Kinsler) 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그분은 성경구락부를 만들어서 많은 수고를 하신 분입니다. 그 분의 아들이 지금도 미국장로교한국선교부에서 미국 장로교회와 한국교회와의 관계를 위해 일하고 계신 권오덕(Arthur Kinsler) 목사님이십니다. 아버지 권세열 목사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셨지만 미국 로스앤젤레스 가까이에 있는 은퇴 선교사 사택인 ‘웨스트민스터 가든’에 계셨습니다. 한국 이민교회에 가셔서 설교도 많이 하셨는데 한국어와 영어, 이중 언어로 설교할 때가 많으셨습니다.
한번은 제가 있던 교회에 오셔서 설교하시면서 “성경에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오늘 부득이 제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어떻게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을 날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어떻게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올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어떤 분은 아무 의미 없이 “할렐루야”를 합니다. 전화 받아도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아무 때나 “주여”를 남발합니다. 어떤 분은 아무 생각 없이 “아멘”을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죄요, 외식입니다. 루터는 “아무런 의미 없이 암송되는 주기도문은 최대의 순교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딴 생각하면서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의미 없이 되어지는 모든 것이 선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태복은 15:8에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고 하였습니다. 입술과 가슴의 사이가 얼마나 먼지 아십니까? 만나지 못할 만큼 멀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가식적인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외식 혹은 위선은 배우의 가면을 의미합니다. 옛날 로마의 극장 배우들은 모두 남성들이었답니다. 극 중에 여자의 역이 필요하거나 어떤 특별한 역이 필요할 때면 마스크를 쓰고 나왔습니다. 가면을 쓴다는 말은 여기서부터 나왔습니다. 위선자라는 말은 연극에서 어떤 역을 맡아 일시적으로 가면을 쓴 사람을 의미하기 위해 쓰여 졌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묵상’에서 “위선자는 의의 도를 갈망하기보다 오히려 의의 면류관을 갈망한다. 그의 욕구는 그리스도를 닮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위선자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가를 말해 줍니다.
“주여 주여”란 말의 내면에는 자기 명예와 자기 자랑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의 자랑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자신의 공적이며 자신의 능력입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공적을 과시하려고 하는 것이지 주님을 높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자를 주님은 책망하시고 권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도덕률을 실천하고자 할 때 최소한 두 가지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와 외식입니다. 외식에는 신앙에 대한 책임과 도덕적 의무는 무시하고 경건한 채 하는 말뿐인 신앙이나 피상적 신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꼭 “주여 주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 의미 없이 “주여 주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지 않는 것도 배격하시고, 의미 없이 하는 것도 배격하십니다.
한 젊은이가 대중 연설과 웅변술을 배우려고 소크라테스를 찾아왔습니다. 젊은이는 위대한 철학자에게 소개되는 순간 유창한 말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말에서 지혜의 핵심부를 도무지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말하는 젊은이의 입을 막았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자네에게는 수업료를 두 배나 받아야 할 것 같네”. 이 젊은이는 불평을 했습니다. “수업료를 두 배나 받는다고요? 대체 왜 그런 거죠?” 그 때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자네를 훌륭한 지도자로 만들려면 자네에게 두 가지 원리를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야.
첫째는 혀를 자제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네. 그리고 나서야 혀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걸세.” 인격은 말에 있지 않습니다. 설득은 말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4:20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합니다.
둘째, 주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거짓무리들의 소리입니다.
마태복음 7:23에는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고 합니다. 이들은 남의 이름을 도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보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거짓을 주님은 경계하십니다. 흔히 고위 직위를 사칭해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청와대의 아무개가 잘 아는 사람이라고, 친척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대통령의 아무개라고 합니다. 이런 고위 직위를 사칭하는 것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명성황후’ 같은 드라마를 보면 일본 공사가 고종에게 고개를 숙이고 “전하, 평안하시옵소서”라고 인사합니다. 그들의 말은 예의를 지키는 듯이 보이지만 아닙니다. “전하”라고 하면서 깍듯하지만 내면은 수심입니다. 동물의 마음입니다. 음흉하고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이런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4:24에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는 영의 시대입니다. 앞으로의 시대는 영의 시대입니다. 이런 영의 시대에는 거짓 영이 활개를 치게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주여 주여”할 것입니다. 다른 누구보다 거짓 선지자들의 “주여 주여”소리가 더 클 것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는 “주여 주여”도 안 할 것입니다. 자기가 주님이니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자기에게 “주여 주여” 하게 할 것입니다.
시편 101:7에는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 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고 합니다. 잠언 12:12에는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가 진실하시고 거짓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거짓을 싫어하십니다. 거짓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존 프란트는 우리는 하루에 40번 거짓말 한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나는 아닌 것 같은데요. 이 말은 거짓이 일상이라는 말입니다. 거짓말을 한마디 하면 지탄을 받고, 거짓말을 한 권하면 작가가 되고, 거짓말을 한 페이지 하면 당선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거짓이 난무하고 고자질과, 비난과, 헐뜯기가 곧 극성을 부릴 것입니다. 지방 선거에 우리 모두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임해야 할 것입니다. 거짓에 속지 말기를 바랍니다.
“주의 이름으로” 이들은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도 행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하는 일은 참 좋은 일이지만 의미 없이 주의 이름을 도용하면 거짓이 됩니다. 주님의 일에도 거짓으로 외식으로 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다음 주일은 거짓의 죄에 대한 설교를 할 테니 다음 주일까지 마가복음 17장을 한번 읽어보시고 오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 설교를 시작하면서 “자 여러분, 마가복음 17장을 읽어보신 분 손 들어주시겠습니까?” 했더니 거의 다 손을 들었습니다. “마가복음은 16장밖에 없습니다. 이제 설교를 시작해 볼까요?” 하면서 설교를 시작하였답니다.
우리 속에는 위선, 거짓, 가증, 이런 것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고 정결과 진실과 깨끗한 영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거짓으로 부르는 “주여 주여”가 아니라 정직하고 간절한 부름이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120:2에는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라고 시편의 기자는 말합니다. 이 말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혀는 우리의 생각입니다. 말은 우리의 사고입니다. 거짓을 마음에서 멀리해야 입술이 깨끗해집니다.
거짓된 입술, 간사한 말, 음란한 생각, 불의한 혀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말의 진실과 마음의 정결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다니엘 9:19에는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다니엘의 간곡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종말적 기도입니다. 최후의 기도입니다. 목숨을 건 기도입니다. 이런 간절한 “주여” 부르짖음이, 간절한 기도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사람에게도 “씨”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네 가지의 씨는 ‘솜씨, 맵씨, 말씨, 마음씨’입니다. 이 씨를 가지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씨를 잘 뿌려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씨를 가지고 있으면 거룩하게 됩니다. 거룩한 사람은 이 네 가지 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씨들은 생활에서 뿌려지고 열매를 맺습니다.
또한 이 씨들은 믿음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솜씨, 믿음의 맵씨, 믿음의 말씨, 믿음의 마음씨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참 부럽지 않습니까?
거짓이 없는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많이 부르고, 주님의 응답을 듣고, 주님의 축복 가운데 한 주간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