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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5-21
남은 자의 도리 / 은혜목회정보
오늘 열왕기상 19장 15에서 21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남은 자의 도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14절을 보면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선지자로서 자기 혼자만 살아 남았을 때 한 말입니다. 엘리야는 살아남은 자로서 해야 할 도리가 있었습니다.
18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칠천명을 남겨두었다는 말은 남겨둔 사람이 있고 그들이 해야할 도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도리는 마땅히 지켜야될 원리 원칙을 뜻합니다.
이 말을 오늘 우리들의 입장과 비교해서 이야기해 보면 앞집에서 초상이 나서 사람이 죽어 나가고 옆집에서 사람이 죽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살아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 남은 사람들은 살아 남은 사람들로서의 해야 될 도리가 아직 남아 있기 까닭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두셨다는 말입니다.
'나야 젊으니 아직 살아있지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죽는데 젊고 늙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이 차례로 죽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는 차례가 있고 순서가 있어도 죽는데는 절대로 나이 순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를 불러가지 않으시고 이렇게 남겨 주신데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우리에게는 해야 될 도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 남은 자로서 해야 될 도리가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 사랑 (15-19)
하나님 사랑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살아 남은 우리가 해야 될 도리입니다.
한번은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 "왜 그러지?"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충성이라고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무조건 순종이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이 첫째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충성하려고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지도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 보다 먼저 해야 되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고 충성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지겨운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고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면 힘들어서 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 보십시오.
충성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충성하게 되고 순종하면서도 즐겁고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행적 사랑입니다.
요한 1서 4장 19절을 보면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먼저 사랑하는 것이 선행적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절대로 선행적인 사랑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에 대하여 응답하는 응답적인 사랑입니다.
어느 사랑이 더 큰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선행적 사랑이 더 큰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고 우리가 응답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것만 못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응답적인 사랑일지라도 귀하고 큰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15절에서 1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을 선지가 450명과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야 자신이 혼자서 겨루어 승리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참신이라는 것을 보기 좋게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되었으면 그 바알의 선지자들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칠천명 모인 무리 가운데 섞여 있습니까? 제단을 쌓고 장작을 쌓아 놓고 번제물을 올려 놓은 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드렸더니 불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바알의 제단에는 응답이 없었습니다.
불로 응답해야 참신인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가 참신이라고 하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참여했던 무리가 칠천명이었습니다. 이 칠천명은 조금 전에는 바알제단에 가서 참여하여 바알이 참신이 아닌가 하고 다시 하나님의 제단에 와서는 하나님이 참신이 아닌가 하여 왔다 갔다 하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줏대가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제단에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시는 것을 보고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 때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도망갈 것이지 왜 그 속에 숨어있습니까?
그 바알의 선지자들이 칠천명 가운데 섞여 있으면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기를 바랍니까?
절대로 내려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제단 하나님의 교회가 안 되기를 학수고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그 무리 가운데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이 말은 오늘날 광성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가리켜 줍니다.
전부 붙잡아 기손 시내로 데려다가 모두 처리해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합 임금의 왕후 이세벨이 엘리야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곳곳을 뒤져 잡아서 죽이려고 할 때 엘리야가 도망을 갔습니다.
도망을 가다보니 호렙산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왜?" "지금 선지자들은 다 죽었는데 왜 나만 홀로 남겨 두셨습니까?"라고 할 때 하나님은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그가 해야 할 사명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네가 해야 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너희 와 원수의 나라인 아람나라의 수도인 다메섹에 가서 지금 벤하닷 왕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살아 있는데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라"는 겁니다.
얼마나 무섭고 어려운 사명인지 아십니까?
남의 나라, 원수의 나라에 가서 왕이 있는데 또 다른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두번째로는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이스라엘 땅의 왕이 아합이 아니냐? 예후라고 하는 장수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워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는 것보다는 조금 덜하다 할지라도 아주 위험 천만한 일입니다.
세번째로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로 삼고 네 후계자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본문의 가르침을 보면 엘리야가 그런 사명을 새롭게 부여받은 후에 가장 일감이 가까이 있고 쉬운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즉 엘리사에게 찾아가 기름을 부어 선지자로 삼고 자신의 후계자로 세웠다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보면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명하시는 바가 많습니다.
그 명하시는 것들 중에는 엄청나게 힘들고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금 쉬운 일도 있고 별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일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정말 목숨을 걸지 않으면 못할 일이다'라고 할 수 있는 어려운 일부터 하려고 하면 '난 못해'라고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할 수 있는 쉬운 일도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가장 쉬운 일부터 시작을 했기 까닭에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보다 조금 더 어려운 예후에게 기름 붓는 일까지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가장 어려운 일 즉 아랍나라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 붓는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일은 목숨을 내 받쳐야 할만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그 일을 했는지 안했는지 기록이 없으므로 정확히 말 할 수는 없으나 엘리야의 예언을 듣고 하사엘이 벤하닷을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 일도 엘리야가 해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엘리야를 살려 남은 자가 되게 하신 것은 사명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아직도 해야 될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그 사명 중에 가장 쉬운 것부터 해나갔기에 전부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목숨걸고 충성하는 일부터 먼저 하라고 하면 힘들고 지겹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충성하라고 할 때 재미있고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 때에는 지겹고 힘들어서 못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조건 순종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이전에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못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일이 남은 우리의 해야 할 도리라는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70여세 되는 흑인 노파 하나가 백인교회에서 감사헌금을 받치면서 간증을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나는 60평생 이 교회를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하면서 간증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 동생 다섯 식구가 브라운이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종으로 있었습니다.
브라운이 파산을 하는 바람에 온 식구가 팔려가게 되었을 때 였습니다. 이상하게 이 교회만은 개방적인 교회가 되어서 어느 백인교회에서도 흑인을 받아 주지 않을 때 이 교회만 흑인을 받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교회를 다니는 교회 학교 학생이었습니다.
바로 이 교회 앞에 넓은 마당은 노예들을 사고 파는 노예 매매 시장이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에 나가는 교회 학교 학생이었으나 팔려 나가는 날은 마침 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가족이 끌려나와 팔려 뿔뿔이 헤어지는 날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불려나와서 노예 매매대 위에 올려 세워진 다음에 전부 옷을 벗기운 상태로 샅샅이 신체 검사를 한 후 목화밭으로 팔려갔습니다. 혼자 헤어져 팔려갔습니다. 통곡을 해야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어머니가 노예 매매대 위에 올라가더니 같은 절차를 통해서 전부 검사를 하고 이번에는 사탕 수수 농장으로 팔려갔습니다.
세번째로 오빠가 나와 철공소로 팔려갔습니다.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어린 소녀일지라도 얼마나 부끄럽고 무섭습니까?
" 하나님 저는 지금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날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 마침 예배를 마치고 나오던 목사님과 교인들이 그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기 우리 교회 학생 아니야?"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주머니를 털어서 그 어린 소녀를 사서 "이제 너는 자유다. 마음대로 살아라" 하면서 자유를 주었습니다.
하나님께 잠깐 동안 기도했는데 죽고 싶은 심정뿐인 나에게 간단한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 감사했습니다.
그 때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이 교회를 60평생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내가 60평생 결혼도 안하고 먹고 싶은 것 먹지 않고 입고 싶은 것 안 입고 모으고 모은 것이 70만불입니다(70만불이면 그 때 당시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받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거금을 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는 60평생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소녀가 하나님의 선행적 사랑을 받았다면 우리도 못지 않게 그 사랑 받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서 하나님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살아 남은 자의 도리입니다. 충성은 그 다음에 하십시오. 순종도 그 다음에 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것들을 기쁨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충성한다면 그것은 위선이요, 형식적인 것입니다. 힘들어서 하지 못합니다. 먼저 하나님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 째로 부모 사랑 (20)
성경은 부모에게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지 마십시오.
부모에게 효도하지 마십시오.
"아! 오늘 참 은혜가 된다. 내 시아버지, 시어머니 안 죽고 잔소리만 했었는데 효도하지 말고 공경하지 말라고 하니 오늘 살수가 났다. 참 은혜가 된다"라고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지 마시고 부모를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지 않고 효도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지겹습니까?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는데 공경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부모를 사랑해 보십시오.
공경을 왜 못하겠습니까?
효도를 왜 못하겠습니까?
부모를 사랑해야 합니다.
공경하려고 하기 전에 사랑, 효도하기 전에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0절을 보면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 중의 하나는 '엘리사를 찾아 기름을 부어 선지자로 삼고 네 후계자로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제일 먼저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엘리사가 지금 소 열두 겨리로 밭을 갈고 있습니다. 자기가 찾아 온 뜻을 이야기하고 기름을 부어 선지자로 세우고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부름 받은 엘리사의 첫 마디가 "선생님! 나의 부모에게 먼저 가게 해 주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하고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누구를 가장 먼저 생각하고 누구에게 제일 먼저 찾아갑니까?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누구에게 제일 먼저 이야기를 합니까?
제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부모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부모를 찾아갔습니다. 부모에게 제일 먼저 말했습니다.
'입맞추게 하소서'라는 말씀은 입만 맞추고 오겠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이런 사명을 부여받았으니 그 사연을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고 아버지, 어머니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허락을 받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너를 불러 세우셨으니 가야지"
그렇게 부모님과 작별하고 오겠다는 말입니다. 그 만큼 부모를 먼저 찾아가고 부모에게 먼저 말했습니다. 부모를 생각하고 부모를 먼저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효도하기 전에 부모를 먼저 사랑하십시오. 살아 남은 자의 도리가 바로 부모 사랑입니다.
제 아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한번은 "아버지"하고 부릅니다.
그러더니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표정을 보면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왜 그러지?"
"아버지!"
"이야기 해봐"
"엄마는 나에게 주고 아버지는 다시 장가를 가면 안돼요?"
이때 "아니다"라고 하면 아들 녀석이 이해를 못해서 낙심을 할 것이고, "그러자"하면 안되기 까닭에 "좀 두고 생각해 보자"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줄런지 말런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 어린 아들이 '어머니를 나에게 달라'고 했는데 왜 그런지 아십니까?
공경하겠다는 뜻입니까?
효도하겠다는 뜻입니까?
그 나이에는 공경도 모르고 효도도 모릅니다.
단지 어머니가 그렇게 좋다는 것입니다.
천하에 누가 예쁘다 누가 예쁘다 해도 내 어머니가 최고로 예쁘다는 것입니다.
최고로 좋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만 나와 함께 있으면 다른 여자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공경 이전에 사랑입니다.
효도 이전에 사랑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게 되면 공경과 효도는 어렵지 않고 쉽습니다.
기쁘고 재미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엘리사를 보십시오.
그렇게 좋은 일이 있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부모를 먼저 생각했고 부모를 먼저 찾아갔고 부모에게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그 만큼 부모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살아 남은 자의 도리가 부모 사랑입니다.
세번째로 이웃 사랑 (2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혼자 살도록 지으시지 않고 어울려 살고 더불어 살도록 지으셨기 까닭에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더불어 살고 어울려 살 때 사이 좋게 사는 경우도 있고 사이가 아주 나쁘게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끝이 중요합니다.
사이가 나쁘게 살아오다가도 헤어질 때 끝을 좋게 하고 헤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 다시 모여서 더불어 살게 될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럴 적에 끝이 좋으면 그 사람을 찾게 되고 생각하게 됩니다.
끝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이 좋게 지내다가도 끝이 나빠 보십시오. 다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찾지 않습니다.
그 후에 다시 만나 함께 더불어 살고 어울려 살게 되면 얼마나 어색해 지는지 아십니까?
끝이 좋아야 합니다.
처음도 좋고 끝이 좋으면 더 좋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사를 보면 이웃관계가 참 좋았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1절을 보면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평소에도 이웃과 더불어 얼마나 사이좋게 지냈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엘리야를 좇아가야 하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사랑했고 다정스러웠던 이웃들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소 한 겨리라면 두 마리가 아닙니까?
한 마리를 가지고 모자랐는지 두 마리를 잡아 농기구 전부를 장작으로 하여 고기를 삶았습니다.
나누어 먹고 아주 사이좋게 헤어졌습니다.
끝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여러분들은 이웃을 위하여 얼마나 베풀어 보았습니까?
이웃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던 엘리사는 끝도 너무 너무 좋았습니다. 처음도 이웃 사랑 나중도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은 결단코 밑지는 장사가 아닙니다.
이번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 중에 평양에서 내려와 워커힐에 머물렀던 조주경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김일성 대학의 수학 교수입니다. 워커힐에 머무르는 동안 전화가 왔습니다.
"조주경씨 맞습니까?"
"맞습니다. 누구신지요?"
"내가 홍순영이요"
"야! 네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50년만에 이름 석자를 대니까 네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냐고 하면서 그렇게 반가워했습니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홍순영씨는 한양대학교의 교수로 있다가 지금은 명예 교수로 있는 분입니다. 이 두 분은 6·25사변 때 똑같이 서울대학교 학생이었습니다. 붙잡혀서 인민군대에 끌려갔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대구 옆에 있는 팔공산 전투까지 참여를 했다가 국군의 반격을 받으면서 조주경이 부상을 크게 당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홍순영씨는 너는 너대로 살던지 죽던지 나 몰라라 하고 그냥 가 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같은 학교 동기요, 친구가 죽어 가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들쳐업고 때로는 끌어안고 힘들게 일주일을 걸려 안동까지 후퇴하여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홍순영씨는 도망가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이 조주경 친구는 거기서 치료를 받고 다시 인민군대에 복귀하였고 북에 가서 김일성 대학에 교수가 되었습니다. "조주경씨에게는 당신이 생명의 은인이군요" 이렇게 물었을 때 홍순영씨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아닙니다. 조주경이는 나 때문에 살아난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내가 얼마나 조주경의 도움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나를 살려준 사람도 역시 조주경입니다"
"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게 부상당한 친구를 업고 이끌고 다니다 보니 나도 함께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내가 도망을 갈 때 인민군대한테 몇 번이나 걸렸는지 모릅니다. 피투성이가 된 자신에게 뭐라고 그럴 때마다 부상병으로 위장을 했습니다. 그러면 보내 주어서 무난히 도망가서 살았습니다. 결국은 내가 조주경을 위해서 고생했고 조주경을 위해서 헌신했더니 그 덕을 보고 저도 살았습니다"
여러분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웃을 위하여 손해 보는 것은 결국은 손해가 아니라 나도 덕을 보게 되더라는 뜻입니다.
이웃을 위한 희생은 바로 나를 위한 희생이요, 이웃을 돕는 것은 바로 나를 돕는 일이요, 이웃을 살리는 일은 나를 살리는 일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사는 이웃에게 처음도 좋았고 나중도 좋았습니다. 살아 남은 우리가 해야 할 도리는 이웃을 돕는 일이요, 이웃을 위하는 일이요, 이웃에게 베푸는 일입니다. 베푸는 것은 손해 되는 일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희생이요, 나를 위한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베푸는 것도 돕는 것도 하지를 못합니다. 만약 한다면 위선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남은 우리들이 해야할 일의 세 번째는 이웃 사랑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를 살려 두신 이유는 남은 자로서의 사명이 있고 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며 순종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충성과 순종은 쉽고 재미있습니다.
두 번째로 부모 사랑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해야 되고 부모님을 공경해야 되지만 공경과 효도 이전에 부모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효도와 공경이 지겹지 않습니다. 재미있고 쉽습니다.
세 번째로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에게 봉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사랑하면 봉사는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이웃 사랑은 살아 남은 우리가 해야할 도리입니다.
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