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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고린도전서 1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로새서 3:14)
1. 능력주의의 우상 : 은사가 사랑을 대체할 때의 참상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종교는 바로 '능력주의(Meritocracy)'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탁월하게 해내느냐, 얼마나 많은 지식과 자본을 소유했느냐에 따라 인간의 등급을 매기는 비정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의 파괴적인 철학이 교회의 문턱을 넘어와 거룩한 신앙의 영역마저 오염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종 영적인 '능력'과 '은사'를 신앙의 성숙과 동일시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합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낸 고린도 교회는 영적 은사의 전시장과도 같았습니다. 방언이 터져 나왔고, 병 고치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심오한 신학적 지식과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의 열정이 넘실거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그 화려한 종교적 성취를 향해 찬물을 끼얹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너희의 그 모든 것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이 얼마나 무서운 선언입니까? 인간의 내면은 참으로 교묘하고 부패하여서, 심지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극단적인 구제와 헌신조차도 '나의 영적 우월감'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이 결여된 능력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는 폭력이 됩니다. 사랑이 빠진 지식은 형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만하게 짓밟는 무기가 됩니다. 영국의 위대한 강해 설교자 G. 캠벨 모건(G. Campbell Morgan)은 통찰했습니다. "사랑 없는 은사는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침묵하며 희생할 때, 그것은 우주에서 가장 웅장한 설교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이루었는가(Doing)'로 평가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Being)'로 평가받습니다. 사랑은 성취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성령의 압도적인 공급과 충만을 통해 우리 내면의 본질이 십자가의 형상으로 빚어지는 존재론적 변화, 바로 그 자체입니다.
2. 마크로뒤메오(Makrothumeo) : 영혼의 영토를 넓히는 오래 참음
바울은 이 사랑의 해부학을 시작하며, 사랑의 첫 번째 특징으로 감정적인 뜨거움이나 황홀경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은 선언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우리는 사랑을 낭만적이고 달콤한 감정의 교류로 축소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에로스적 감정은 호르몬의 장난처럼 피어올랐다가 상대방이 내 기대에 어긋나는 순간 차갑게 식어버리는 휘발성 강한 기체와 같습니다. 진짜 사랑은 상대방의 연약함과 죄악이 나의 자아를 찌르고 들어올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여기서 '오래 참고'로 번역된 헬라어 **‘마크로뒤메오(Makrothumeo)’**는 '크다, 길다'라는 뜻의 '마크로스'와 '호흡, 마음, 진노'를 뜻하는 '뒤모스'의 합성어입니다. 직역하면 '마음의 폭을 넓게 가지다, 분노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를 악물고 분노를 참아내는 억압적인 인내가 아닙니다. 마크로뒤메오는 타인의 가시 돋친 언어, 나를 향한 오해, 반복되는 어리석음조차도 흡수해 낼 수 있도록 내 영혼의 맷집을 키우고 마음의 영토를 끝없이 넓혀가는 능동적이고 처절한 수용(Acceptance)입니다.
이 마크로뒤메오의 절정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조롱하고 못 박는 자들을 내려다보시며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찢겨진 심장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마크로뒤메오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숨통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끊어졌을 것입니다. 이 거대한 십자가의 오래 참음이 오늘 성령을 통해 내 안에 마르지 않는 공급과 충만으로 부어질 때에만, 우리는 꼴 보기 싫은 형제를 향해, 나를 찌르는 배우자를 향해 마침내 마음의 공간을 열어젖힐 수 있습니다.
3. 권리의 포기 :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랑의 성품은 '내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와 힘의 포기'로 이어집니다. 바울은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고전 13:5)"라고 쐐기를 박습니다.
현대 사회는 자기주장의 시대입니다. "내 권리를 찾으라", "부당함에 분노하라", "나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라"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논리로 무장된 채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서조차 누가 더 옳으냐를 따지며, 내가 상처받은 만큼 반드시 되갚아 주어야 한다는 지독한 에로스의 복수극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아가페의 사랑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그 지독한 인정투쟁을 멈추게 합니다. 아무리 내가 신학적으로 올바르고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연약한 지체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고 무례함으로 나타난다면, 사랑은 기꺼이 그 '정당성'마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자기의 유익(My own way)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 삶의 중심에 앉아있던 거대한 자아(Ego)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십자가의 예수를 모시는 처절한 영적 혁명입니다.
우리가 화를 내고 성내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계획, 내 명예, 내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의 생명이 유한하며,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는 자는 더 이상 타인을 향해 핏대를 세우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하늘 보좌의 모든 권리를 버리시고 벌거벗은 채 십자가에 달리신 그 '케노시스(자기 비움)'의 성품이 곧 우리의 일상에 스며드는 진짜 사랑입니다.
4. 가장 좋은 길, 모든 것을 묶는 온전한 띠
골로새서 3장 14절은 선포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인간이 아무리 탁월한 은사를 발휘하고, 엄청난 봉사의 실적을 쌓아 올린다 해도, 그 영혼을 묶어주는 사랑의 띠가 없다면 그 모든 성취는 바람에 흩어지는 모래성에 불과합니다. 사랑은 구원의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 신앙의 심장 그 자체이며, 우리가 창조주의 형상을 회복했다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증거입니다.
존경하는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과 사역의 현장을 정직하게 돌아봅시다. 우리는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목 아래 형제를 향해 무례한 칼날을 휘두르지는 않았습니까? 사역의 탁월함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느라, 정작 내 곁에서 피 흘리고 있는 지체의 신음 소리를 외면하지는 않았습니까?
가장 위대한 신앙은 높은 산에 올라가 불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자리에서 나를 짜증 나게 하는 사람을 향해 한 번 더 인내하고(마크로뒤메오), 내 권리를 포기하며 부드럽게(온유) 응답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나 수양으로 도달할 수 있는 윤리적 목표가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오늘 내 안에 성령의 충만하심을 통해 폭포수와 같은 공급과 충만으로 흘러 들어올 때에만 맺히는 거룩한 열매입니다.
은사와 능력을 갈망하던 고린도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이 제시한 이 '가장 좋은 길(The Most Excellent Way)'을 결단하십시오. 화려한 종교적 성취를 내려놓고, 십자가의 모루 위에서 우리의 모난 성품이 깨어지고 다듬어지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의 눈빛과 언어, 그리고 모든 일상의 관계 속에서 예수를 닮은 진짜 사랑의 향기가 피어나, 죽어가는 세상을 살리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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