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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랑의 노래
ㅡ내겐 동백꽃 같은 당신
“나는 술로 밤을 새운다.
술을 먹으며 너를 생각한다.
지금쯤 너는 어느 요정에 가서 소리를 하고 있겠지.
이 추운 밤에 홀로 술을 드는 나를 생각해보라.
사랑이란 억지로 식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지금 이 순간도 너를… 생각한다.”
이 글은『동백꽃』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유정이 명창 박녹주에게 반해서 쓴 연서의 일부다.
박녹주에 대한 김유정의 지독한 애정공세는 지금도 회자될 만큼 유명한 일화이다.
김유정은 주로 자신의 생활이나 주변 인물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토속어·비속어를 많이 썼고, 대표작으로『봄 · 봄』 『만무방』『동백꽃』등이 있다.
김유정은 아버지 춘식과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의 8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독과 빈곤 속에서 우울하게 자랐다.
고향을 떠나 12세 때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23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안회남과 친하게 지냈으며,
이때 김나이(金羅伊)로도 불렸다.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그만두었고,
1929년 고향 춘성군 신동면 실레 마을로 돌아왔다.
1930년 늑막염을 앓기 시작한 이래 평생을 가난과 병마에 시달렸다.
한때 금광에 손대기도 하고 들병이들과 어울려 무질서한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1932년 마음을 고쳐잡고 실레마을에 금병의숙을 세워 불우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1935년 '구인회'에 가담해 김문집·이상 등과 사귀었다.
1935~37년까지 2년 동안 단편 30여 편과 장편 1편(미완), 번역소설 1편을 남겼다.
29세 때 누나 집에서 결핵과 늑막염으로 죽었다.
1968년 춘천 의암호 옷바위 위에 시비가 세워졌다.
김유정의 생애 중에서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구미가 배출한 판소리 동편제의 거목 명창 박녹주 선생과의 사랑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기생 옥화를 연모하여 엽서를 계속 보내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하는 내용의『두꺼비』와 기생 나명주를 연모하여
사랑의 편지를 쓰는『생의 반려』등 김유정의 소설에 언급되어 있다.
▲ 명창 박녹주
명창 박녹주(朴綠珠)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반세기 넘게
우리나라 판소리 교육과 보존을 위해 평생을 바친 진정한 소리꾼이다.
박녹주는 1905년 경상북도 선산(현재 구미)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명이(命伊)이고 호는 춘미(春眉)이다.
12세 때 동편제의 명창 박기홍(朴基洪)의 문하에서
《춘향가》《심청가》단가《 대관강산》을 배웠으며 소리꾼으로 활동했다.
이후 서울로 이주하여 서울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서 소속되어 활동했으며
동편제의 명창 송만갑(宋萬甲)에게 단가 《진국명산》과 《춘향가》 《적벽가》를 배웠고
두 판소리 스승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서울에서 한남권번(漢南券番)에 소속되어 소리꾼 기생으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고
김정문에게서는 정통 동편제《흥보가》를 사사받았는데
특히 '제비노정기'와 '비단타령'을 잘 불렀다.
이후 박록주의 판소리는 정통 동편제 소리를 전승한 것으로
이후 조상현(趙相賢), 박초선(朴招宣) 등에게 전승되었다.
1964년에는 그가 불렀던 《흥보가》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그녀도 한때는 기생이었다.
권번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서는 창악계(唱樂界)에 입문하기 힘들었던 시절,
그녀 또한 예기(藝妓)로 손님들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1905년, 경북 선산군 고아면에서 박중근의 셋째딸로 태어난 박녹주는
14세 때 대구의 달성권번에서 시조와 소리 등을 배우며 기생수업을 받는다.
그리고 3년 뒤, 명창대회에서 만난 독립지사 남백우의 첩실로 들어가게 된다.
그녀보다 스물두 살이나 많았지만 소리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남 씨는
그녀의 재주를 알아보고 “너의 소리는 만인의 것”이라며 서울로 올려보내 출세 길을 열어준다.
그리고 1928년, 그녀 나이 스물셋에 한 풋내기 학생과 대면하게 된다.
그가 바로 김유정(金裕貞)이다.
▲ 소설가 김유정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외로운 성장기를 보낸 그는
품 안에 늘 어머니 사진을 가지고 다녔다.
1928년 봄 김유정은 목욕탕에서 막 나오던 어머니를 닮은 박녹주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날 이후 심한 가슴앓이를 하며,
그때의 기억을 자신의 소설속에 회고한 바 있다.
“어디 사람이 동이 났다구 거리에서 한 번 흘낏 스쳐본,
그나마 잘났으면이어니와 쭈그렁 밤송이 같은 기생에게 정신이 팔린 나도 나렸다.
그것두 서로 눈이 맞아서 달떳다면야 누가 뭐래랴마는
저쪽에선 나의 존재를 그리 대단히 여겨주지 않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 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 달 동안 썼다.”
- 소설 <두꺼비> 中에서
스무 살 청년의 뜨거운 구애
이후 유정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연서를 띄운다.
그 내용이 어찌나 민망했던지 녹주는 오는 편지마다 북북 찢어버렸다.
그러던 중 ‘그래도 한 번 정도 만나보는 게 어떠냐’는 친구의 말에,
내심 궁금한 터라 가정부를 통해 전갈을 보냈다.
방으로 들어선 유정은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이었다.
녹주는 “자신은 남편이 있는 몸이니
학생도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유정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나”라면서
“사랑을 하면 공부도 더 잘할 수 있다”며 막무가내였다.
녹주는 안 되겠다 싶어 쌀쌀맞은 태도로 내쫓아버렸다.
그날 이후 유정의 편지는 협박조로 돌변했다.
게다가 녹주에 대한 칭호도 ‘선생님’에서 ‘당신’으로
최후에는 ‘너’라는 반말로까지 바뀌었고,
종국에는 혈서(血書)를 보내기에 이른다.
‘너는 기어이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오늘 너의 운수가 좋았노라.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린 지 3시간.
만일 나를 만났으면 너는 죽었으리라’ 라는 내용의 혈서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협박 편지를 보내고 일주일 뒤 박녹주의 가마를 스토킹 한뒤
“네가 원하는 것은 결국 돈이었구나”고 윽박을 지르고 도망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식겁한 박녹주는 사건이 벌어진 다음날
김유정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서 “저는 나이도 돈도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단지 당신에게 마음이 가지 않았던 것도 제 잘못입니까?” 라며
타이르고 돌려 보냈는데 그것이 김유정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한다.
김유정이 죽은 후 김유정의 방에는
녹주 너를 사랑한다는 내용의 혈서가
쓰여 있었고
김유정의 장례식을 치룬 직후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안회남이 술에 만취한 채로 박녹주의 집에 나타나서
“당신이 박녹주요?
친구는 당신이 죽인거요. 죽을 때 까지
당신을 잊지 못하고 갔소!”라며 원망했다고 한다.
다음은 명창 박록주가 <한국일보>에 1974년 연재했던
「나의 履歷書」 중 일부를 발췌했다.
김유정과 사이에서 일어났던 실제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다.
나의 이력서 15
24살 되던 1928년 봄.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8도 명창대회가 열렸다.
조선극장은 지금 종로세무서 위편에 있었는데
단성사 우미관과 함께 당시 3대극장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전국의 명창들이 모두 출연하다 시피한 이공연에서
나는 재창 삼창의 ‘앙코르’를 받아 인기가 대단했다.
그런데 이 공연을 본 수많은 사람 가운데 두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한사람은 전 부통령 김성수(金性洙)씨의 아버지 (生父)이신 김경중(金暻中) 영감이었고,
다른 한사람은 그때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학생 김유정(金裕貞)이었다.
두 번째 나를 찾은 사람은 나중 「봄봄」「소낙비」등 주옥같은 소설을 쓴 김유정이었다.
몸으로 찾아온게 아니라 편지를 보냈다.
겉봉에 ‘박녹주 선생님’이라고 한글로 단정히 써 있었다.
“나는 조선극장서 선생이 소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인기를 끄는 것이 정말 기뻤습니다.
나는 당신을 연모(戀慕)합니다.
나는 22살의 연전(延專)학생이오.
고향은 강원도 춘천이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돌아기시고 안 계시오.
형님과 누님이 있는데 나는 지금 누님집에 있읍니다.
주소는 바로 옆동네인 봉익동이오.”
처음에 나는 무슨 편지인지 잘 몰랐다.
연모(戀慕)라는 말의 뜻을 한참 새겨본 뒤에야 대강 짐작이 갔다.
도로 편지를 부쳐 버렸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 편지가 다시 돌아왔다.
‘레코드’ ‘재키트’에 찍혀있던 내 얼굴 사진을 곁들여서.
사실 나는 처음에 김유정이가 다른 박녹주를 나로 착각한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때 서울에는 굉장히 예쁜 ‘박녹주’라고 이름이 같은 화초기생이 있었다.
처음엔 그 사람인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 사진으로 해서 의문이 가셨다.
그로부터 김유정은 매일 한통의 편지를 보냈다.
아침마다 우체부가 김유정의 연애편지를 갖다놓았다.
내용은 항상 비슷했다.
'나는 당신을 연모하니 저를 사랑해 주시오'가 이야기의 전부였다.
“간혹 길가에서 나는 당신을 보았소.”
“정말 밤에 본 당신은 아름답더이다.”
“목욕을 하고 오는 자태는 정말 이쁘게 보였노라.”
“나는 그 길가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오.” 등 차마 눈뜨고 못볼 구절도 있었다.
나는 오는 편지마다 북북 찢어 버렸다.
내 동생뻘 밖에 안되는 것이 연애를 한다니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 친구인 원채옥이는 그래도 한번 정도 만나보는게 어떠냐고 했다.
나도 사실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는 가정부를 보내서 오라고 했다.
채옥이는 다락에 숨어서 이야기를 엿듣기로 했다.
나는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 보료 위에 장침을 괴고 그를 맞았다.
대학생복을 입은 김유정이 방으로 들어왔다.
휜칠한 키에 잘생긴 편이었다.
담요에 앉자마자 나는 다그치듯이 물었다.
“당신이 김유정이오.”
“그렇습니다.”
“어쩔려고 나에게 그런 편지를 했소.”
“어쩔려고가 무슨 말이요. 편지를 받아보지 않았소.”
그는 상당이 당돌했다.
눈초리가 부리부리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연모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는 대담하게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다.”고 대답했다.
나는 소리하는 사람인데 학생과 어떻게 연애할 수 있는가하고 슬쩍 떠봤다.
김유정은 “학생과 소리하는 사람이 사랑해서 안된다는 규정이 어디에 있소.” 하고 대들었다.
사랑이란 국경이 없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사랑한 뒤에는 어쩔 생각이냐는 질문에,
그는 서슴지 않고 “결혼하는 겁니다.”고 응수했다.
나는 점잖게 남편있는 몸이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그는 “그것도 알고 있다. 그는 진짜 남편이 아니잖은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고 다부지게 대답했다.
나는 그것은 당신 혼자의 생각이오, 나로서는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해줬다.
지금은 학생이니까 열심히 공부한 뒤
나중 훌륭해지면 그때 사랑해 주겠다고 타일렀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사랑을 하면 공부를 더 잘할 수 있다고 자기 나름의 이론을 펴기도 했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그만 가보라고 쌀쌀히 굴었다.
그러나 김유정은 액자에 붙어 있는 사진 한 장을 주면 가겠다고 버텼다.
그 당시는 사진을 준다는 것은 모든 것을 허락한다는 뜻.
나는 끝내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쫓아버렸다.
그 다음날에 온 김유정의 편지는 완전히 협박조로 바뀌어 있었다.
나의 이력서 16
내가 훗날의 소설가 김유정(金裕貞)과의 연애 소동을 자세히 쓰는 것은
이상하게도 이 사건이 그 당시 자세히 알려졌었기 때문이다.
박녹주와 연전(延專) 학생 사이에
연문(戀文)이 있다는 소문이 장안에 요란히 퍼졌었다.
거의 쫓다시피해서 김유정을 보낸 다음날,
그는 분한 듯이 협박조의 호소를 편지에 적고 있었다.
“.... 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척 하는거요
보료위에 버티고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김유정이 나한테 죽이겠다고 협박편지를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김유정이 나를 부른 칭호(稱號)도 금새 금새 달라져 갔다.
처음에 ‘선생’이라고 하더니 ‘당신’이라고 변했고
나중에는 ‘너’라고 자기 부인을 칭하듯이 불렀다.
“너는 기어이 내손에 죽을 것이다.”
“오늘 너의 운수가 좋았노라.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린지 3시간. 만일 나를 만났으면 너는 죽었으리라.”
이러한 협박편지가 들어온 것은 그해 즉 1928년 겨울 쯤이다.
그전까지는 흔히 ‘당신’이란 말을 썼다.
그해 여름에 나는 元山의 삼방저수지로 피서를 갔다.
피서가 목적이 아니라 김유정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였다.
한달만에 돌아왔는데 돌아온 그날 제꺽 편지가 날아들어 왔다.
알고보니 김유정은 내가 서울서 없어지자 사방으로 내 종적을 찾았다고 한다.
“당신이 없어진다고 해서 나의 사랑이 식을리 있소.”하고 시작한 그 편지는
그동안 무척 보고 싶었다고 하소연하고 있었다.
한번만이라도 내 사랑을 받아달라고 했다.
여름이 가고 초가을이 되자 김유정은 혈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봉투를 뜯어보면 피묻은 편지가 눈에 확 들어와
나는 겁을 먹고 다 보지도 못한채 버리곤 했다.
가을이 되면서 부터는 툭하면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절대 만나주지 않았다.
그는 마루에 혼자 쓸쓸히 앉았다 가곤했다.
이렇게 되자 元山 南씨나 성북동 김경중(金暻中) 영감도 다 알게 됐다.
장안에 이 비정상적인 「러브스토리」가 파다하게 퍼져 갔다.
추석이 되자 김유정은 친구를 통해 선물을 보내왔다.
선물은 양단 치마저고리 한 감이었다.
나는 도로 보냈다. 이번에는 편지와 함께 왔다.
“내가 성의로 보내는 것을 당신이 받지 않는다면 정말 좋지 않을 것이오.”
문투가, 받지 않으면 무슨 일이든 벌이겠다는 식이었다.
겁이나서 받아두었다.
겨울이 되자 그의 편지는 비장(悲壯)해져 갔다.
“나는 술로 밤을 새운다.
술을 먹으며 너를 생각한다.
지금쯤 너는 어느 요정에 가서 소리를 하고 있겠지.
이 추운 밤에 홀로 술을 드는 나를 생각해 보라.
사랑이란 것은 억지로 식어지는 것이 아니다.
뭣과도 바꿀 수 없다.
지금 이 순간도 너를 생각한다.”
가끔 김유정의 연애편지 이야기를 하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너무했지 않느냐고 나의 태도를 엿보곤 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했다 싶다.
그러나 그 당시 김유정은 나이 어린 일개 학생에 불과했다.
그저 동생뻘 밖에 안된다는 생각만 들었었다.
후에 그가 유명한 소설가가 되고,
소설 한편 한편이 서정이 넘쳐 흐르는 아름다운 것이었다는 것을 듣고 나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후회감을 느끼기도 했다.
25살이 된 1929년의 설(元旦)에도 선물을 갖고 실랑이를 했다.
그는 양단저고리, 조그마한 금반지, 가죽신, 털장갑을 친구들 통해 가져왔다.
나는 지난번같이 보내 버렸다.
이번에는 그가 들고 왔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이걸 안받으면 네가 더 불리할 거야. 알아서해!.”하고 을러댔다.
그는 싸갖고온 보자기를 방에다 풀어놓았다.
나는 당신이 무슨 돈이 있는데 그런 것을 사오느냐고 무시하는 조로 타일렀다.
그러자 김유정은 발끈 화를 낸다.
“너는 너무 건방져.
내가 정히 이런다면 나에게도 생각이 있어.
나는 자존심도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아?”
나는 어디다 반말을 하며 대드냐고 했지만 그는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사랑에는 나이가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 일 없단 말야.”하고 쏘아주었다.
김유정은 더 할말이 없었던지 마루에 멍청히 앉아 있었다.
싸가지고온 선물을 갖고 어서 돌아가라고 했으나 영 대답이 없었다.
무슨 깊은 생각이라도 잠긴 듯이 눈동자마저 멍청한채 앉아 있었다.
사실 나는 이 무렵 그가 폐렴에 걸렸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초라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누구는 동정이 사랑으로 간다지만 나의 경우는 그러지를 못했다.
생각 끝에 바쁜 일이 있다면서 먼저 나가 버렸다.
일보는 할멈에게 김유정이 돌아가면 알려달라고 했다.
한시간이 휠씬 넘어서야 연락이 왔다.
이제야 김유정이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돌아갈때까지 김유정은 처음 앉아 있던 그 자세로
움직이지도 않고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괜히 불쌍해졌다.
방에는 그가 가져온 선물꾸러미가 여전히 풀어진 채 널려 있었다.
그런 며칠뒤 김유정은 원한이 서린 편지를 보내왔다.
“...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天香園)으로 간 것을 보고
문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았다.
만일 그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슴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나는 몸이 오싹해졌다.
편지는 ‘잉크’로 쓴게 아니라 혈서였다.
이후에는 외출도 삼가고 나갈 때는 휘장내린 인력거를 타고
남바위를 얼굴까지 푹 내려써서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나의 이력서 17
김유정(金裕貞)에게 너무 박정했다는 후문이
그가 내 주위를 떠나간 뒤 1929년 가을께다.
그리 소식이 없더니 만 6년뒤에
「소낙비」란 소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로 중앙일보에 동시 당선이 됐다.
그의 사진을 보고 그가 단순히 학생이 아니고
문학청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또 그때 그는 병(病)이 깊어져 무절제한 생활과 함께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그의 기억이 추억으로 바뀌어 가면서
박정했던 후회가 실타래처럼 이어지곤 했다.
자서전에서는 언급된 바 없지만,
김유정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지인에게서 들은 그녀는
그날 선약되어 있던 모든 일정을 전부 취소한 채
온종일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말 한마디 없는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아마도 김유정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연민에서 오는 아픔의 표현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일생 동안 소실로만 살다가 한점 혈육도 남기지 못한 그녀도
만년에는 가난과 잦은 병고에 시달리다 쓸쓸하게 임종을 맞았다.
지인에 의하면
생전에 여러번 김유정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해줬던 것에 대한
깊은 회한과 탄식을 거듭했다 한다.
경춘선을 타고가다 보면
춘천 못가 ‘김유정역’이 있다.
그곳에 가면 김유정의 생가와 기념관이 복원되어 있고
김유정이 못다이룬 ‘미친 사랑의 노래’에 대한
아쉬움과 옛날의 추억을 돌아볼 수 있다.
‘김유정역’은 1939년 경춘선 개통 당시부터 신남역으로 불리다가
2004년에 김유정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춘천 출신의 소설가 김유정을 기리는 뜻에서
우리나라 철도 역사상 최초로 역에 사람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김유정역을 빠져나오면 왼쪽 편으로 과거의 폐역이 있는 곳까지
산책로가 조성된 ‘유정이야기숲’이 있다.
입구에는 사임당 드라마를 찍은 추억의 장소로 기록이 남겨져 있다.
김유정 소설에 나오는 ‘동백꽃’을 회상할 수 있는 노란동백꽃길도 조성해놓았다.
‘‘기다림이란 희망의 나무에 시간과 약속의 물을 주는 것’’
산책 중에 이런 문장을 만나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색에 빠져보는 것도 괜찮을 법하다.
첫댓글 SP시대의 <판소리 여류명창 2>
* 박록주
1.진국명산 02:29
2.귀불귀 03:03
3.대관강산 03:14
4.춘향집 가리키는데 02:30
5.이별가 06:10
6.동풍가 03:06
7.심청하직 02:56
8.선인 따라가는데 03:14
9.심청수제 05:32
같은 고향분인데
전혀 들어본적이 없어서
자꾸만 뒤적이고 돌아보는 이야기요
박록주님
Audio Short title:
SP시대의 판소리 여류 명창들
4 Autor/sonst. Pers.:
배설향, 김소향, 박소춘, 조농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