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4장 12-15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왜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요, 또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죽어 아버지께로 간다고 할 때 그렇게 가는 것은 너희도 나 있는 곳에 있게 하기 위함이고, 너희가 나 있는 곳에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소위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작도 예수 그리스도요, 과정도 예수 그리스도요, 끝도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길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진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셔야 합니다. 진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진리를 드러내셔야 합니다. 그 진리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생명 자체이신 그분의 생명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영원한 생명까지 보장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이라고 해서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자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치적 메시아를 소망하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분히 알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도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되면 하나님을 알았고 보았다고 할 수 있게 된다고 알리십니다.
이때 빌립이라는 제자가 아버지를 보여주시기를 간청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성부와 성자의 하나됨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셔서 당시 제자들 가운데 계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는데, 그가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단지 눈으로만 본 것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았지만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도 사실은 참되게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봐야 합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 믿음이 부족하다면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행하심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시기에 그 일을 통해 더욱 믿음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왜 중요한가? 앞으로 제자들이 해야 할 일 때문입니다. 그 일에 대하여 마태복음 28장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또한 사도행전 1장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승천하시기에 앞서 이 말씀을 하실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도 이와 관련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시는가? 특히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하시는가?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제자들이 스승과 같은 일을 하며, 스승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제자들은 스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사에서는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승이든 제자든 동등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스승이라고 할 때는 부족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분이십니다.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성을 취하셨지만 죄와는 전혀 상관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라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없다면,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부족함으로 가득한 제자가 어떻게 완전하신 스승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스승만큼만 해도 좋다고 여겨야 할 텐데, 어떻게 스승보다 큰 일을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실 때는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난 뒤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오직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온 유대, 사마리아, 더 나아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또 다른 보혜사, 즉 성령 하나님을 주시도록 구하겠다는 것이고, 성부께서 성령을 보내어 너희와 영원토록 함께 있게 하여 그 일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이런 내용은 이미 요한복음 7장에서도 알리신 바 있습니다. 38절과 39절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여기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은 참된 믿음에 따른 고백도 한 상태입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의 역사, 다시 말해 성령의 역사 없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고전12:3). 당연히 그들 안에는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정확하게 사도행전 1장 8절과 관련된 것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한다고 할 때 그들 안에 성령이 없는데 성령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은 계시지만 그들이 능력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성령의 가시적 임재가 특별히 사도들에게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2장에서 나타나는데, 4절에 의하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가시적인 임재가 그들에게 임함으로 인해서 다른 나라의 언어들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한번도 말해 본적이 없는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언어들로 말하는 모든 내용의 핵심은 21절에서 소개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누구든지, 다시 말해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가 구원을 받도록 하는 일이 사도들이 해야 할 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12절을 보시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여기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어떤 능력이라는 차원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내가 하는 일, 그보다 큰 일에 대하여 기적의 역사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기적의 역사로만 이해하면 제자들이 그리스도보다 더 큰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무엇을 의미하는가? 매튜 풀 주석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주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신 “큰 일들”을, 주님이 행하셨던 것들보다 더 큰 이적들을 가리키거나, 여러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사도들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성공적으로 전해서, 거의 온 세상이 그리스도를 믿어 복종하게 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즉 내가 하는 일, 그보다 큰 일의 핵심은 그의 복음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을 함에 있어서 때로는 능력을 베푸는 일도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처럼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일으켜 세우고 걷게 하는 일도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목적은 복음 전파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보다 큰 일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어떤 면에서 유대인 중심이라면 사도들의 사역은 마태복음 28장이나 사도행전 1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모든 민족, 다시 말해 예루살렘과 온 유다만이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일에 대하여 나보다 큰 일도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일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야지만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 승천이 있지 않고 이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런 말씀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한다고 할 때 그 일조차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베푸시는 것으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16절을 보시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지상의 모든 사역을 마치셨다고 해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고 난 뒤에도 여전히 완성을 위하여 일하시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아버지께 구하는 일이요, 그렇게 구함으로 또 다른 보혜사, 즉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같은 일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단회적인 사건으로 봅니다. 그러나 성령의 보편적인 사역에 있어서는 모든 신자에게 동일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4장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제자들로 제한되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런 역사가 모든 신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예수 그리스도보다 큰 일을 한다고 할 때 그 모든 일조차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것으로 있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사도들의 변화는 언제 있습니까? 사도들의 변화는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후입니다. 그 이전에는 3년 동안 주를 쫓아다니면서 주의 말씀을 듣고 놀라운 일도 보았지만 정치적 메시아로만 주를 대했습니다. 죽음과 부활 이후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행1:3). 3년 동안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좀 더 집중적으로 저들을 가르치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천하시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저들이 질문한 것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행1:6) 여전히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소망으로만 질문하더란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들 스스로는 변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승천 이후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성령을 보내시면서 그들의 생각이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뛰어난 일을 한다고 해서 그리스도보다 더 뛰어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 일의 주체가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언제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연히 그리스도보다 더 뛰어난 일을 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감소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감소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는 영광에 있어서도 전혀 감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말은 사도들이 그리스도보다 더 뛰어난 일을 했을 때에도 그들의 모든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처럼,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함과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복음과 관련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칭찬하실만한 모든 일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고 거기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 결과로 있습니다. 그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구한 결과 성령의 역사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선한 결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간구하심으로 말미암아 오는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에, 또 그리스도로부터 오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만, 그리스도에게만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어지는 13절을 보시면 이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비록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시지만, 그것도 지상에서의 모든 사역을 완성하시고 난 뒤 아버지께로 가시지만, 가신다고 해서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상에 가셔서도 일하시는데, 그의 중보 사역만큼은 계속된다는 것을 알리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한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나를 믿는 너희가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큰 일도 하게 되는데, 그 일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여 받는 방식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동참하게 하시는데, 동참하게 하는 방식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구하여 받도록 하는 방식인 겁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고 할 때 그 권능이 마치 사도들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있는 게 아닙니다. 사도들은 늘 주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물론 성경은 모든 부분에 있어 묻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을 고쳐 걷게 하신 일만 보더라도 기도해 보고 일으킨 역사가 아닙니다. 저 사람을 고칠까요, 고치지 말까요 기도해서 묻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사도들은 그들의 힘과 능력으로 일으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일으킨 사도들을 주목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 즉 모든 능력은 위로부터 오는 줄 알았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한다는 것은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한다고 할 때 그 일의 주체가 그리스도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들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여 받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무엇을 구하든지’라는 말은 아무 것이라도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 안에서만 구하는 것으로 제한됩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것으로 제한이 됩니다. 내 욕심대로 구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여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제한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함으로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행보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할 때 그의 모든 걸음은 오직 말씀을 이루는 것으로만 있었습니다. 말씀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만 순종하는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은 구하든지 내가 행하는 그 일도 아버지의 뜻에만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아버지가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구하든지’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본이 되어 구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집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욕심대로 아무렇게나 구해서는 안 되고, 말씀 안에서만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지상에서만이 아니라 천상에서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그가 천상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신다고 할 때 어떻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것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겠습니까? 그의 중보는 하나님의 것만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성경을 통해 알리신 바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십니다. 또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고자 하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구해야 할 것도 일시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 자신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은 이런 측면에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제자들의 힘과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닙니다.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는 것은 제자들에게 힘과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권능은 제자들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용하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 하나님께 기도하여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비록 중생한 자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 없이는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생한 자라도 중보자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점과 흠도 없이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불완전한 자가 어떻게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이 불완전함을 생각해서 스스로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해 내기도 합니다. 스스로 보속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길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길, 저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여 받는 것도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그저 기도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는 형식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은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것만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친히 보이신 본을 따라서만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할 때, 그것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할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 그것을 주십니다.
그러면서 15절 말씀을 하시는데,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맥락으로 보자면 뜬금없는 말씀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지만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일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일을 함에 있어서 기도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라, 더욱 기도하라는 것이 문맥으로 볼 때 더 매끄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15절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15절이 앞에 있는 구절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독립된 구절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아무런 의미 없이 말씀하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12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보다 더한 일도 한다고 말씀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도 포함되지만 복음 사역이 초점입니다. 이 복음 사역을 함에 있어서 제자들은 언제나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여 받아 행하는 자로 있습니다. 복음 사역의 주체가 그들 자신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이때 복음 사역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내용만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승천하기에 앞서 마태복음 28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여기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신 말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주께서 가르쳐주신 모든 계명입니다.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다만 오늘 본문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복음을 통하여 가르쳐야 할 내용이지만, 먼저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켜 행하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요13:34).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요13:35).
그러므로 제자들의 의무는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척도가 무엇인가 할 때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사랑하는 자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 된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로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 참된 신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 자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야 할 자들이 너희라면 너희는 먼저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하는데,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소위 명령하시면 그 명령을 우리 스스로가 행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물음에 우리의 정직은 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 할지라도 우리 안에 부패성이 있는 이상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수준의 순종을 우리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이후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자신의 의지를 신뢰합니다. 자신의 의지가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기 전에는 늘 자신의 의지를 의지합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만한 수준이 이르지 않았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의 명령의 수준이 낮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은 최고 수준을 요한다면 중생된 우리의 수준은 이제 막 최하 수준에서 벗어난 정도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말씀에 앞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13:36) 지금은 따라올 수 없는데 후에는 어떻게 해서 따라올 수 있다고 하시는가?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즉 성령이 임하시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시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13절의 방식은 결코 단회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여 받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여 받습니다. 주의 이름에 합당한 것을 구하여 받습니다. 주의 이름에 합당한 것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계명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나 스스로 계명을 지킬 수 없지만, 주께 구하여 받을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지만, 우리는 주께 구하여 받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 그 일을 위하여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명령의 형식일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구하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구하여 받는 일에 있어서도 우리가 원인으로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받도록 하시는 것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때문임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주의 계명을 지켜야 할 것도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고 말씀하시면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지만, 이후 많은 부분 하나님의 율법의 뜻을 밝히시지 않습니까? 너희는 이렇게 배웠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고 하면서 본래 율법의 의미,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율법의 의미를 밝히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는 것은 특별히 제자들,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그분이 주체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내놓고자 하시는 것은 주를 참되게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랑의 결과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 있는 겁니다. 이 일을 우리에게 명하시는 방식으로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도 아십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할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께 구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를 믿는 자로서 주께서 행하신 그 발자취를 따를 수 있도록 우리는 늘 구하면서 주를 따라 가야 합니다. 참된 신자의 자리는 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즉 신자의 자리는 내가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주를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를 뒤따르면서 주께로부터 구하여 받아서 행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주께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주께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 것처럼 우리 역시 주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서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