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살다보니(60)-농아와 문맹이 되어 버린 프랑스 생활의 해프닝 작업을 시작한 첫날 중식은 내가 사겠다며 그들과 함께 후문으로 나오니 레스토랑(Restaurant)들이 많았다. 회사에서 필요할 때 쓰고 별도 정산하라고 준 돈이 있어 편히 쓸 수 있었다. 외부 레스토랑은 호텔에 비하면 가격이 저렴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작업원들과 커피를 한잔하러 그들을 따라갔다. 경비초소에 차단기가 걸쳐 있어 회사 경비초소로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차단기 옆으로 지나가는데 경비원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는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다. 함께 가던 직원들이 깜작 놀라며 경비원과 불어로 계속 이야기를 했다. 그곳은 벨지움 땅이었고 경비초소는 벨지움 출입국 관리소였다.
여권을 보더니 여기는 벨지움인데 이건 프랑스 여권이고 벨지움은 여권도 비자도 없는데 언제 어디로 어떻게 들어 왔느냐 는 것이다. 당시 한국 여권에 출입국이 기록되어 있어 내 여권은 프랑스만 갈수 있는 여권이었다. 벨지움은 여권도 비자도 없었다. 직원들이 평소에 하던 습관대로 무심코 벨지움 마을에서 중식을 하고 프랑스 마을로 건너가 모카커피를 즐기려 다 졸지에 불법 입국자가 된 것이다. 공장 후문은 벨지움으로 통했고 정문은 프랑스라는 것이다. 공장은 프랑스와 벨지움 국경선을 따라 프랑스에 있을뿐이지 종업원들은 두나라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곳이라고 한다.
출입국관리자는 불법입국자라며 서류를 작성케 했다. 당황한 마이스터는 페날티(Penalty)가 부과된다며 공장장에게 급히 전화를 드렸다. 공장장이 입국관리소에 협력을 부탁해서 출입국 관리소에 경위서만 마이스터가 불어로 대신 써 주고 내용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사인만 하고는 커피도 못 마시고 다시 공장 후문을 통해 프랑스로 돌아왔다. 마이스터는 이 공장에는 벨지움 인도 많고 마을이 프랑스와 벨지움에 이어져 있어 국경도시 마을 사람들은 자유롭게 왕복을 하는데 자기가 실수했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공장으로 돌아오니 오후에 돌아온다던 기중기공이 이미 크레인을 타고 클랙슨(Klaxon)을 울리며 내게 인사를 했다. 나도 손을 들어 답례를 하고 오후부터는 기중기가 가동되어 순조롭게 작업이 이루어 졌다. 저녁 일을 마치고 기중기공이 내려왔는데 여자였다. 청바지를 입고 기중기 조작실에서 클랙슨을 울릴 때는 남자로 알았는데 여자가 기중기를 운전하다니 난생 처음 보아 놀라웠다. 그녀에게도 연수정을 선물하며 일이 끝날 때까지 잘 부탁한다는 부탁을 드렸다. 작업이 착수되어 한결 마음의 여유를 얻었다. 본사와 뒤셀돌프 사무소에 전화로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하고는 편한 마음으로 가성비가 좋은 호텔 밖 마을 레스토랑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호텔 메뉴에는 영어가 보였는데 마을 레스토랑에서는 영어라 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메뉴 중에 그림 몇 개가 그려져 있는 데 그거조차 그게 어느 음식인지 알 수가 없었다. 종업원과 영어로 시도를 했지만 시골 식당은 불통이었다. 농아와 문맹이 따로 없었다. 지금까지는 이래저래 같이 식사를 해서 그들이 권하는 대로 먹었는데 혼 밥은 메뉴판이 불어 뿐이어서 완전히 문맹이 되어 메뉴를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얼마 안되는 출장비로 비싼 호텔에서만 장기간 식사를 할 수는 없었다. 섭외비로 갖고 온 돈은 내 몫이 아니다. 귀국 후 정산을 해야 될 돈이었다. 겨우 생각한 게 주변을 돌아보며 식사하시는 분들을 보고 같은 것으로 주문을 해서 이름도 값도 모른 체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손님이 없던 하루 저녁 어쩔까 생각하다가 슬그머니 장난기가 동해 그 날짜의 번호 메뉴를 주문했다. 달팽이 십여 마리가 스프에 잠긴 채 나왔다. 이게 그 유명하다는 달팽이 요리(Snail dish)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양이 너무 적어 배가 고플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다른 것을 추가하기에는 출장비가 너무 빠듯했다.
한주내내 작업은 순조로웠다. 그들은 일본인들 못지않게 열심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 하는 것 같았다. 선진국의 생산성이 우리보다 높은 것이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작업복 차림으로 내가 서 있어서 가 아니고 스스로 공정표에 맞추어 세밀하게 잘했다. 그러다 보니 작업복으로 폼을 잡고 있는 자신이 쑥스러워졌다. 그래도 하루 종일 서서 작업하는 권선이 도면과 맞는지 체크하고 공정도 체크하며 시위를 하듯 서 있었다.
공장장도 며칠에 한번쯤 나오셔서 작업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공정도 체크했다 말을 듣지 못하니 무슨 말을 하는지 농아 신세는 여전했다. 지난 번 벨지움 일은 죄송하다고 사과를 드렸더니 나보고 한두주도 아니고 3개월이나 장기체재를 하려면 아예 벨지움 여권과 비자를 받는 게 낫다고 했다. 마을이 이어져 있지만 벨지움 쪽이 호텔시설이나 레스토랑이나 가성비가 좋다는 것이다. 그는 내게 애로사항도 물었다. 이때다 싶어 식당에서 불어 메뉴판을 영어로 번역을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드렸다. 저녁 퇴근 이전에 인근 레스트랑의 메뉴를 영어로 가필해서 보내주었다. 그날 저녁 자신 있게 메뉴판을 들고 식당으로 갔다. 식당 매니저는 사전에 서로 이야기된 듯 영어로 가필된 메뉴를 보며 친절하게 한두마디 영어까지 썩어가며 음식설명을 해 주었지만 포크(Pork)나 비프(Beef)외에는 음식설명을 들을 수준이 아니었다. 그저 출장비에 맞추어 가격표만 보며 매일매일 그가 추천하는 메뉴를 택했다. 그래도 호텔에 비해 저렴해서 출장비에도 조금씩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럭저럭 혼밥 문제는 해결이 된 셈이다. 주말이 되자 공장장은 유럽이 처음이라는 걸 알고 파리는 볼만한 게 많으니 투어라도 다녀오라며 열차시간표를 알려주었다. 그는 호텔도 벨지움 쪽이 가성비가 좋으니 차제에 파리에 하루 더 머물면서 한국대사관에서 벨지움 여권을 만들어오면 비자는 회사에서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작업이 끝날 때 까지는 쥬몽을 떠날 수가 없다고 대답했더니 역시 엔지니어 출신은 다르다며 웃었다. 요즈음 여권 같으면 벨지움도 무비자로 들어가지만 당시 한국 여권은 출입국이 기재되어 있지 않는 나라에서는 종이조각에 불과했다. 아마 그들은 이런 나라도 있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울며 겨자 먹기로 눈 앞에 가성비가 좋은 벨지움 마을을 두고 프랑스에서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말에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 호텔에서 빈둥거리며 멍하게 있는 것 보다 생필품이나 살까 해서 마을을 돌아다니다 미니 샵(shop)을 발견했다. 반갑게 들어가 호텔에 맡기던 세탁비라도 절약하려고 비누를 찾았지만 보이질 않았다. 자꾸만 돌아다니니 점원이 도와주려고 다가와서 불어로 말하는데 나는 계속 클리닝, 소프(Soap)라고 했지만 그도 나도 마찬가지 농아가 된 셈이었다. 하는 수 없이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로 빨래하는 시늉으로 양손을 비볐더니 그는 액체가 든 통을 주었다. 요즈음 말하는 바디 워시(Body wash)였다. 처음 호텔 샤워룸에서 비누를 찾다가 없어서 그게 무언가 손을 씻어보니 비누였다. 액체비누를 처음 사용하면서 미끈미끈해서 편하긴 한데 좀 덜 씻겨진 것 같아 여러번 다시 씼었다. 하지만 호텔것은 아주 작은 병이라서 프랑스에는 고체비누가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걸로 양말, 팬티정도는 빨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왔다. 이럭저럭 한달이 지나고 작업도 눈에 보이게 제조한 코일이 쌓여져 갔다. 작업원들 과도 친해져서 아쉬운 대로 영어와 바디 랭귀지로 의사 소통을 하며 조금씩 어울렸다. 점심시간이 되면 그들은 후문으로 나가 가성비가 좋은 벨지움 레스트랑을 이용하지만 난 여권이 없어 정문으로 나가 프랑스에서 혼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격주로 한번꼴은 그들과 프랑스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했다. 작업능률을 올리기 위해 일이 끝날 때까지 그럴 생각이었다. 한번은 그들이 중식을 사지 말고 부인들을 동반해서 저녁을 한번 사달라고 해서 그러자고 마이스터와 약속했다. 회장님이 서양은 한국과 달리 여자들이 남자를 움직이니까 연수정을 부인들께 주면서 설득해야 휴가 중에 작업을 시킬 수 있다던 생각이 나서 부인들을 달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피식 혼자 웃음이 나왔다. 그들은 저녁에는 출입국 관리자가 없으니 벨지움 쪽이 가성비가 좋다고 추천했으나 또 한번 불법입국자가 될 수는 없어서 프랑스 쪽에서 하기로 했다.
레스트랑에는 제법 큼지막한 룸이 예약되어 부인들을 동반해서 모였다. 그런데 모두들 정장을 했고 부인들은 가슴이 다 들어나 보이는 무도 복이었다. 그러면서 선물한 연수정 목걸이를 해서 눈길을 끌었지만 눈을 들면 부인들의 젖 무덤이 눈에 꽂혀 눈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무척 당황스러웠다. 함께 연수정 목걸이를 한 것은 아마 내게 보여주는 예의인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유럽여인들은 연수정을 자수정만큼 좋아한다는 회장님의 말씀이 또 떠 올랐다. 기중기공도 그날은 평소 입던 청바지대신 프랑스 전통 복장인지 잘 꾸미고 나왔다. 모두들 50대 초중반의 여인들이지만 여자들은 꾸미기에 달렸다고 무도복을 입으니 뚱뚱한 여인들도 예뻐 보였다. 거기에다 눈도 크고 피부도 희고 머리칼라도 다양해서 이색적이었다. 다들 짝을 맞추어 앉았는데 기중기공만 혼자이어서 자연적으로 내 옆에 앉게 되었다. 그들은 흥겨운듯이 대화를 나누지만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그들 얼굴만 쳐다보면서 웃을 때는 같이 웃어야 하니 무척 힘들었다.
함께 식사가 끝나고 헤어지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직원들이 갖고온 바이올린과 트럼펫 을 울리면서 테이블 옆 빈자리는 부부들의 댄스홀로 변해졌다. 이게 서양에서 파티라고 하는 거구나 생각하면서 신기하게 보고 있는데 마이스터가 기중기공과 함께 나오라고 재촉을 했다. 춤이라고는 평생 추어 본적이 없다며 사양했지만 막무가내로 끌려 나갔다. 기중기공은 자기가 리드를 하겠다며 따라 하라는 시늉을 하며 양손을 잡고 이리저리 움직여서 발자국을 따라 열심히 움직였지만 무도복을 밟을까 봐 진땀이 났고 눈 앞에 어른거리는 풍만한 젖가슴이 스쳐 갈 때는 깜작깜작 놀랐지만 향수를 뿌렸는지 서양여인의 체취는 나쁘지 않았다. 한 장막이 지나고는 레코드를 틀어 놓고 한두 쌍씩 나가 춤을 추고 다른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장단을 맞추었다. 그런데 부인들이 한 분씩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 춤을 추자는 것인데 고통스러웠다. 한국에서 춤을 배우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마이스터는 본래 호스트와 한번씩 춤을 추는 게 예의라며 그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라며 그들에게 응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 중에는 할머니도 있었지만 그런대로 날씬한 여인들도 있어 개미허리 같은 여인들은 한번 안아보고 싶었지만 그보다 파티복을 밟을까 피부접촉이 이루어 질까 봐 주의를 하느라고 진땀만 흘렸다. 옷을 밟지 않으려고 자꾸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니 풍만한 가슴 골이 그대로 보여 더욱 당황스러웠다. 키가 큰 여자는 더욱 그랬다. 무도복을 입은 서양여인들을 최측근에서 체험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들은 동양에서 온 작은 사람이지만 부담없이 대해 주었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서양의 파티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지만 서양 파티를 체험하고 있는 것인지 체험당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춤은 당시 동양인에게는 바람둥이가 여자들을 유혹하는 행위로 알았지만 서양사람들에겐 생활의 활력소 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그들에게는 즐거움이었지만 내게는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지나고 그들과 하이 파이브를 외치면서 각자 헤어졌다. 마이스터 부부는 오늘 즐거웠다면서 내일부터 더 열심히 일 할 거라면서 호텔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날 밤 평생 처음 겪어본 파티장의 장면들이 떠 올라서 잠이 오질 않았다. 그들은 자그마한 동양인을 어떻게 보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날엔 집사람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럭저럭 작업은 잘 진행되는데 갑자기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회장님 전화라고했다. ‘야, 안 부장 잘되고 있지?’ 카랑카랑한 회장님의 목소리였다. 그러면서 국제 검정회사와 세심에서 수리한 모터는 보증을 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보증을 받으려면 전동기를 다시 보내어 공장에서 완전 조립하여 시험해야 한다는데 자네 견해는 어때?’하셨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뭇거리며 '여기서 코일을 만들어 현지에서 조립하는 것도 되지만 로터를 갖고 올 수 있다면 여기서 시험을 완벽하게 할 수 있어 더 좋다’ 고 대답을 드렸다. ‘알았어. 아마 며칠사이에 국제검정회사가 찾아갈 거야, 협의를 잘 해봐’ 라고 말씀을 하셨다.
며칠 뒤 세심(Cesim)에서 연락이 왔다. 파리에서 회의를 하자는 것이다. 역시 보증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현장을 떠날 수 없으니 쥬몽으로 오라고 했다. 세심에서는 국제검정회사가 이탈리아가 되어 비행기 로 파리로 오는데 하루 잠깐 다녀가라고 했다. 그 다음날 공장장에게 세심에서 파리에서 회의 차 오라고 해서 자리를 비운다고 했더니 알고 있다며 자기 직원과 함께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면서 이번 기회에 벨지움 여권을 만들어 오는것도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보증문제에 대해서 이미 공급자 측간에 많은 이야기가 진행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외자부에 문의를 했더니 외자부는 국제검정회사가 이미 검정을 했고 이 모터는 수리를 했으니 보증을 못하겠다며 세심과 함께 사인해서 문서를 보내왔다고 했다. 그럼 내일 회의에서 내가 어떻게 주장하면 되냐 고 물었지만 내일 결정하지 말고 분위기를 보고 다시 연락하자는 것이다.
회의 날이 되어 쥬몽 슈나이더의 영업부장(Sales manager)과 함께 파리로 갔다. 달반전에 입국할 때는 정신이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고색창연한 파리시가지가 눈에 들어와 내가 프랑스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의는 세심본사에서 열렸다. 국제검정회사와 주 서플라이어인 세심과 모터 메이커인 쥬몽슈나이더 사람들이 모였다. 회의는 세심 측이 리드하면서 국제검정회사부터 입장 설명을 했다. 그는 이태리인으로 발음이 딱딱해서 같은 영어지만 듣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들은 신품을 검정했기 때문에 자기들 임무는 끝났다는 것이다. 수리품의 기기 보증은 메이커가 하는 것이라고 한발 뒤로 물러섰다. 강력한 쪽은 세심이었다 그들도 영어를 구사하지만 불어식 영어발음이라 듣기에는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나 천천히 이야기 해달라며 하나씩 하나씩 짚어 나갔다. 본질은 회장님 말씀대로 검정회사는 신품을 이미 검정을 했으나 수리 품은 검정대상이 아니다는 것이고 공급처인 세심은 수리품은 수리품으로 보증하지 신품으로 보증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보다 더 겁나는 것은 수리 후 시운전 중에 발생하는 것은 포스코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메이카인 쥬몽 슈나이더는 주 서플라이어인 세심의 말에 짓눌려 의견 표시를 별로 하지 않았다.
나는 무슨 말이냐고 제품을 공급하던 중 발생한 사항이라 이 제품은 포스코에 인계된 제품이 아니지만 포스코가 급해 수리해서 쓰는 것만 해도 양보하는 것인데 당연히 보증을 해야 된다고 몇 번이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 같으면 아무 말없이 갖고 가서 수리해서 보증할 것이다. 그러니 유럽업체가 일본에 밀리는 것 아니냐? 면서 슬쩍 그들의 심경까지 건드렸다.
회의는 팽팽한 의견 대립으로 결론을 유도할 수가 없었다. 유럽사람들은 회의록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내가 영어회화능력이 부족해서 들은 것은 내 노트에 적은 것뿐이라며 회의 중에 못들은 게 있으면 노트에 추가해서 쓰고 사인을 해 달라고 했다 그들은 내가 쓴 내용보다 훨씬 많이 썼다. 나는 그 내용을 하나 하나 확인하고 마지막 결론은 본사와 의논해야 되겠다고 핑계를 대며 아무것도 결론을 내지 않고 다음 날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날 저녁 세심에서 안내해주는 호텔로 함께 갔다. 룸에 화장실도 샤워실도 없었다. 세심에 이런 호텔에서 어이 자느냐고 컴플레인을 했더니 포스코 연수생들이 싼 호텔을 원해서 이곳에서 머물러서 한국말도 조금 통하고 샹제리제 거리도 가까워 야경도 볼만하다고 했다. 내가 파리에 관광하러 왔냐고 말하며 화나는 표정을 짓자 호텔을 옮겨주겠다고 했다. 다른 호텔로 가려고 나가면서 정문의 별을 보니 2개였다. 세상에 포 스타 파이브 스타는 들어 보았어도 투 스타 호텔이라니 솔직히 공용화장실과 욕실을 쓰던 한국의 옛날 여관이었다.
새로 간 곳은 수리스타 호텔이었다. 중심가에서 좀 떨어진 것 같았지만 룸에 샤워실과 화장실은 있었다. 하지만 호기를 부렸다. 너희 GM이 와도 이런 곳으로 안내할 것이냐고 물으면서 하룻밤이니 여기서 자겠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 연수생들이 그런 곳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측은한생각이 들었다. 저녁에 본사에 회화실력이 부족하니 뒤셀돌프 소장의 도움을 청했다. 회장님은 ‘자네 생각은 어때 보증을 안 받으면 안되나?’ 하셨다. ‘메이커의 신용이 있으니 문제는 없겠지만 로터가 낙하 중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의 피해도 생각해서 받는 게 안전하다’ 고 보고 드렸다. 회장님은 ‘야, 그러면 보증이 문제가 아니야, 3기준공이 안되는 거다. 그러니 품질면도 납기와 같이 완전하게 처리하라’ 고 하셨다. 내일회의에 뒤셀돌프 소장과 함께 그 방안을 모색해 보라고 하셨다.
그 다음날 회의는 뒤셀돌프 소장이 주로 발언했다. 그는 금속전공이라 전기 사항에 대해 협의해 가며 대응했다. 우리는 ‘내가 여기 온 목적도 포스코 3기준공일에 맞추려고 온 것인데 메이커가 품질을 보장해 주지 않으면 요행만 기다리느냐’ 며 품질보증을 재삼 촉구했다. 메이커는 그럼 파손된 로터를 반송해주면 완벽하게 재시험해서 출하하겠다고 한발 뒤로 물러섰다. 만에 하나 잘못될 경우 포철의 3기 준공은 물 건너 간다는 압박에 포스코가 로터를 반송하는 방안을 검토키로 하고 야간에 본사와 협의 후 다시 만나기로 했다.
저녁에 뒤셀돌프 소장은 ‘한식을 먹어본 지 오래지?’ 하며 파리의 한국식당을 안내했다. 오페라 좌 앞에 있는 ‘르 아브르 서울’집이었다. 한국의 초대 미스 코리아 강여사가 사장이라고 했다. 그녀는 50대가 넘었지만 미스 코리아 답게 아름다웠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그녀에게 파리에 한국인이 하는 호텔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한국인이 하는 곳은 변두리이고 엣펠 타워 근처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호텔과 제휴가 되어있어 자기들이 소개하고 한국사람이 많이 이용한다며 예약을 해 주었다. 오늘은 회의가 끝날 줄 알고 쥬몽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아침에 체크아웃을 하고 나온게 다행이었다. 택시를 타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호텔로 갔다. 엣펠 타워 바로 옆이라 조명이 되어있는 엣펠 타워를 처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호텔은 우선 프론트부터 일어가 통했다. 4-스타로 현재 묵고 있는 3-스타나 가격은 별차이가 없는데 시설은 월등해서 진짜 호텔에 온 것 같았다. 거기다가 르 아브르와 제휴가 되어있어 활인까지 해 주어 차이가 거의 없었다.
저녁에 본사와 통화했다. 뒤셀돌프 소장은 어차피 비용은 해상운송 손해보험에서 부담할 것이니 로터를 프랑스로 옮기자고 보고 드렸다. 회장님은 한참 생각하더니 내일아침에 결심해 주겠다고 전화를 끊으셨다. 모처럼 동창과 만나 한식도 하고 호텔라운지에서 우리말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더니 가슴속의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 이튿날 아침 회장님은 ‘네가 전문가니 네 결심대로 하라면서 단 공기는 8월 말을 초과해서는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뒤셀돌프 소장도 ‘네가 무슨 책임을 다 덮어쓸 거야?’ 하면서 메이커 안대로 가되 공기는 못 박자고 했다.
그 날회의는 쉽게 끝났다. 우리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단 공기를 맞추기 위해서 항공운송을 요구했지만 어차피 해상운송 손해보험에서 부담할 비용이었다. 국제 검정회사도 유럽의 다른 포스코 설비들을 검정하고 있어 별도 비용 없이 다시 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일본처럼 그런 내용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회의록은 아무것도 없었다. 난 또 '포스코는 서플라이어 요구대로 로터를 반송하고 서플라이어는 수리후 제품보증을 신품과 같이 보증을 하기로 합의한다'고 must를 넣어 품질 보증 내용을 내 노트에 쓰고 각자 사인을 요구했다. 각자가 사인 한 그 노트 쪽지를 복사해서 나누어 주면서 '이게 일본식 회의록'이라고 웃으며 헤어지는데 세심에서 한마디 했다.
일본은 서로 못 믿어서 회의록을 쓰지만 유럽은 말로 합의한 것은 다 지키는 신뢰성이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또 한바탕 크게 웃으며 쥬몽 슈나이더 공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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