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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7일 수요일
성동구청 신우회 예배 설교
시리즈 주제: 하나님의 경륜 8
제목: 그리스도인의 소명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29~30
https://youtu.be/5fJtKsfThAY?si=r6lI3ryP93L-0PA8
설교 목적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예수님 시대에 제자로 산다는 것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길에서 좇았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 모든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응답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즉, 소명을 이해하고 그 소명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나는 이번 설교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무엇인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로마서 8장을 통하여 좀더 설명하고자 한다. 이 설교를 통해서 나와 신우회원들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임을 다시금 깨닫고 마음을 바로잡고 그 부르심에 성실히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을 결단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 개요
1. 기억상실 – 무엇을 잊었나?
2. 소명의 이유 – 왜 부르시나?
3. 의롭게 영화롭게
***
1. 기억상실 – 무엇을 잊었나?
지난 주에 저는 기억상실증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자주 잊어버리는 경험을 하면서 저의 본분이나 삶의 목적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반성해 보았습니다. 제가 잊어버린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제가 과거에 내렸던 중대한 결정이 무엇이었나를 되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청춘시절에 제 삶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한 것과 결혼을 결심한 것, 그리고 마흔살이 넘어서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떤 결심을 할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저에게 중대한 결정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가 되었고 가정을 이루었고 한 교회를 맡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대한 결정을 했을 때, 그때 제가 하나님께 어떤 약속을 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열아홉살 때 주님께 제 자신을 드리기로 결단한 것은 화학공학을 전공하고 있었지만 그 전공으로 생계를 잇지 않을 것을 의미했습니다. 진로가 다를 것을 예상했습니다. 결혼을 할 때도 반대하는 처갓집 식구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교회처럼 거룩하고 경건한 가정을 이룰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절박할 때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꼼수가 숨어 있음을 이제 깨닫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개척할 때도 한 영혼에 대한 관심과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제가 잃어버린 것, 또는 제가 잊어버린 것은 무엇이었나를 계속 생각해 봅니다. 그 서원을 잊었습니다. 그런데 그 서원을 할 때 저는 어떤 것을 약속했던가, 어떤 심정이었던가? 그것을 잊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제가 하나님 앞에서 드린 약속과 심정과 그 초심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되찾기를 소원합니다.
예수께서는 영적으로 잠든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요한계시록 2:4~5).
2. 소명의 이유 – 왜 부르시나?
목회자와 공직자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두 직종의 사람들에게는 소명의식을 요구합니다. 공직자의 소명의식을 함양하는 강연이 있고 목회자를 비난하는 말 중에는 소명의식을 잃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명의식이 무엇입니까? 소명의식은 부름받은 것을 늘 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소명(召命)은 부름받은 것이니까요.
공직자는 누구로부터 부름을 받았나요? 공직자를 부른 사람은 공직자의 생계를 책임져 주겠지요? 누가 공직자의 생계를 책임지나요? 국가가 책임집니다. 그러므로 공직자는 국가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공무원의 급여나 월급을 녹봉(祿俸) 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공직자에게는 소명의식을 요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국가의 부름을 받은 사람임을 기억하라는 말이겠지요.
목회자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목회자에게도 소명의식을 요구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 목회자가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늘의 부름을 받아서 일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기대는 모두 소명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소명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소명의식은 희미해진 것 같습니다. 공직자나 목회자가 자신의 일을 소명으로 인식하기보다 직업으로 인식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직업을 영어로 말할 때 보통 잡(job)이라고 부르거나 아큐페이션(occupation)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직업과 관련하여 말할 때, 무슨 일을 하십니까? 또는 어떤 일에 종사하고 계십니까?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직업이 있습니다. 목회자나 공직자도 수많은 직업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소명의식을 요구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가리키는 별도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우케이션(vocation)입니다. 이것은 천직이나 성직 또는 소명으로 번역됩니다. 그 어원이 부르다(vocare)라는 라틴어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비추어 보면, 목회자나 공직자에게만 소명이 해당한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목동이었고 다윗과 모세도 목동의 일을 하다가 지도자가 되었으며, 많은 여성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십니다. 이사야의 글을 보면,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고 만인을 초대하십니다. 예수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마태복음 11:28)
공직자나 목회자가 소명의식을 상실하고도 얼마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처리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사는 것도 하나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공직자나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 것을 인식하고 그 부르심에 맞게 생활하는 사람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명, 곧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떤 것이고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3. 의롭게 영화롭게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29~30
여기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소명, 그리고 그 소명의 과정과 목적이 소개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불러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을 자기 아들로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맡아 관리하고 다스리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설명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로마서 8:16~17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모든 것을 맡아 관리하고 다스리게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동반자이며 동역자이며 상속자이며 아들들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론입니다. 죄란 이 본분을 망각하고 피조세계를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다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이 말은 오늘날 이상기후로 기후위기를 느낄 때마다 언론이나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하는 말과 같습니다. 사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맡아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결국 이 피조세계가 인간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최근에 저는 유튜브 영상으로 바다물개를 도와주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뜰채를 가지고 물개를 덮쳐서 포획했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을 옥죄고 있는 그물을 하나씩 끊어주었습니다. 눈물겨운 장면이었습니다. 사람은 피조물을 신음하게도 하고 노래하게도 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을 어떻게 그 아들의 형상을 닮도록 이끌어 가십니까? 하나님은 계획에 따라 사람을 부르시고 그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설명할 때 예정과 소명, 칭의와 영화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실 때 이런 절차를 밟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결국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저도 오랫동안 이런 배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구절을 새롭게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부르셔서 어떻게 하셨나요?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과 베드로,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의롭게 된다는 것과 영화롭게 된다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의롭게 된 사람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부르시고 그 의로운 사람에게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실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의롭게 하신 후에 그에게 장차 그들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큰 민족이 되고 출애굽할 것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이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그의 부인 마리아가 낳을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의롭게 된다는 것, 의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을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자기의 정혼녀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그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사실 그는 이 사실을 몰랐을 때는 신사적으로 조용히 관계를 정리하려고 생각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마리아를 부정한 여인이라고 처벌해 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을 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이 진실을 계시하셨을 때 의로운 사람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리아를 데려와 돌봐주었습니다.
그렇게 만삭의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에 가서 인구조사를 합니다. 여관을 구하지 못해 마구간에서 해산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 부부에게 동방의 박사들이 옵니다. 목자들도 들에서 천사들로부터 들은 소식을 전해줍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서 의로운 사람 요셉은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주님, 제가 여기까지 순종했습니다! 저는 조용히 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깊은 뜻이 여기에 있었군요!
이와 유사한 심정을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디모데전서 1:12~14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을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바로 그처럼 귀한 뜻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귀한 이유는 영전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귀한 뜻을 그 마음에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화롭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마음에 품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수고로운 일을 완수함으로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도 아내와 아기를 끝까지 돌봄으로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도 자신의 십자가를 앞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3~24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 우리가 그 귀한 뜻을 품게 되었을 때 우리는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정성을 바쳐 그 뜻을 완수할 때, 그것은 진정한 영광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 서는 연습을 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주님 앞에 있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뜻을 받았다면 그것을 완수할 수 있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오늘도 무사히’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에서 기도하는 아이는 사실 사무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오늘도 무사히’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서를 보면 그 아이 사무엘은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사무엘상 3:10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