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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실패 없는 하나님 관계 요령>의 줄거리:
누구보다 하나님을 향해 열심이었던 바리새인들의 영성의 말로가 비참합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거듭된 저주의 충만함에 걸맞은 사람들로서 드러납니다. 이유는 하나님 관계 맺기 요령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정결법을 따라 손 씻는 정도라도 자기 마음을 씻기만 했어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더러움을 간과함은 악독이라 하십니다.
실패 없는 하나님 관계 요령
(누가복음 11:37~44)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실패 없는 하나님 관계 요령>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실패 없는 하나님 관계 요령’
하나님 관계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 관계를 실패할 일이 없게 만드는 요령이 오늘 말씀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요령(要領)이란 일반적으로 다소 부정적인 어감으로 사용됩니다. “저 사람은 정직하지 못하게 요령을 부린다.”라고 한다면 적당히 해서 넘기는 잔꾀를 부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전을 찾아보면 요령의 첫 번째 의미를 “가장 긴요하고 으뜸이 되는 강령”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요령은 본래 일을 함에 있어서 꼭 필요한 이치로 매우 좋은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저주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저주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요령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퍼부으시는 항목 하나하나가 사실은 우리에게서도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본문은 우리에게 무척 유익합니다. 당시에 바리새인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향해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 관계에 대한 바리새인의 시도는 완전한 실패로 판명이 납니다. 이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예수님께서 하신 저주의 항목마다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향해 퍼부으신 저주의 내용을 잘 살펴본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관계를 실패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요령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관계가 중요한 이유는 훌륭한 신앙인이 되기 위함은 아닙니다. 하나님 관계에서 실패가 없을 때 인생에도 실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에 실패가 없고, 부모자녀관계에 실패가 없고, 직장에서 동료들이나 상사와의 관계에 실패가 없게 됩니다. 부부관계가 실패하는 이유는 남편의 성격이 거칠고 아내가 못 되고 바가지만 긁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관계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자녀의 사이가 벌어지는 이유도 하나님 관계에서 실패한 결과입니다. 하나님 관계에 실패가 없다면 삶의 모든 관계는 제자리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대해 실패 없는 관계를 맺는 요령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관계에 돌입하였다면 이제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 관계를 실패 없이 맺어 가느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가장 긴요하고 핵심적인 이치로서의 요령이 존재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요령은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더러움을 확인하고 제거하면 됩니다. 이 일이 중단되지 않을 때 하나님 관계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들로 충성심을 보이고 열심을 보이고 어떤 일을 할지라도 마음의 더러움을 확인하고 씻어낼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관계는 무조건 실패하게 됩니다. 또한 여기에 위험성이 존재합니다. 바리새인처럼 마음의 더러움을 씻어내지 않고도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신앙과 영성적 삶에 있어서 큰 함정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마음이 더러워졌다면 하나님 관계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낼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마음을 씻을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씻는 것은 몸에만 해당한다고 여기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요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손 씻기는 중요한 일과가 되었습니다. 저도 하루에 손을 열 번은 씻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손을 씻는 정도만이라도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마음을 깨끗하게 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몸의 깨끗함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주일만 몸을 씻지 않는다면 무척 비위생적인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상태는 더 좋지 못합니다. 마치 평생 단 한 번도 목욕을 하지 않고 속옷만 갈아입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입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깨끗함을 위해서는 속옷을 갈아입는 것보다 몸을 씻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몸을 씻지는 않으면서 속옷만 갈아입고자 했던 것이 바로 바리새인의 마음상태였습니다. 이들은 깨끗함이 몸에만 해당하고 마음에는 해당이 안 되는 줄 알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부부관계가 풀리지 않는다면 마음을 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풀리지 않는다면 이 또한 마음을 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인해 부부관계가 나빠지고 일 관계도 망쳐버린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관계를 실패 없이 할 수 있는 요령만 있다면 삶에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르게 관계할 때에 이 세상은 하나님이 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시고 하나님이 행하실 때 실패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씻지 않고 하나님 관계가 틀어진 상태인 것을 모른 채 이런저런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애쓰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 없는 하나님 관계의 요령을 알면 모든 관계에서 실패는 사라집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며 그 요령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하여 점심 식사를 대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이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깁니다.
이제까지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바리새인 또한 예수님을 마냥 반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랍비의 한 분으로 존경하여 식사를 대접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씻는 규율을 지키지 않으십니다.
바리새인은 성경에 기록된 율법 이외에도 율법을 더욱 세분화시키고 확장시킨 장로의 유전을 따랐습니다. 이 중에는 정결법이 있었는데 이 법에 따르자면 바깥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발을 씻어야 하고 음식을 먹을 때에는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집 밖의 나쁜 기운을 씻어낸다는 영적인 자각의 의미와 먼지가 많았던 팔레스타인 지역의 특성을 고려한 위생적 의미도 있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이러한 규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평소 같았다면 구태여 손을 씻지 않으실 이유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여겼다는 것은 분명히 손 씻을 물을 제공했음을 전제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을 향해 하시고 싶으셨던 말씀을 씻는 행위로 시작하고 계십니다. 일부러 손을 씻지 않음으로써 더러움의 문제를 부각시키셨고 이를 통해 마음의 더러움을 문제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신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깨끗함과 거룩함을 위해 애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열심이 완전히 과녁에서 빗나가 있었음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이들은 마음의 더러움으로 인하여 하나님 관계에 실패하였습니다. 모순적이게도 누구보다도 거룩함과 깨끗함을 위해 애썼으나 뿌리부터 썩어있었고 스스로 하나님 관계에서 실패자가 되기를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이 더러움의 문제는 참 상식적이지만 상식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않는 행동을 통하여 “너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을 씻고 발을 씻는다. 그런데 도대체 손 씻는 정도만큼이라도 왜 마음을 씻을 생각은 하지 않느냐?”라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몸의 깨끗함을 위하여 손과 발을 씻듯이 마음의 깨끗함을 위하여 마음을 확인하고 씻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이 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더러워진 마음을 돌아볼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겉만 깨끗하게 하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목욕은 한 번도 하지 않은 채 속옷만 갈아입으려는 모습과 같았던 것입니다. 차라리 겉으로도 더러웠다면 겉과 속이 모두 더러움에 걸맞은 상태이기라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러움 위에 깨끗함을 치장하고는 스스로를 깨끗하다 여기고 있었으니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바리새인의 겉과 속이 다름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또한 평생 목욕을 안 하고 사는 것과 동일한 상태에 놓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속옷을 갈아입을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들을 바라볼 때는 바리새인의 종교적 행위에 의한 영성의 말살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이들의 마음을 이토록 더럽게 만든 것일까요? 앞서 우리는 등불의 비유를 통해 의식이 마음의 공백을 비추는 눈이 될 수 있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몸을 어두운 방이라고 생각할 때에 눈은 등불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았습니다. 이러한 신체의 구조에서 눈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의식입니다. 우리가 두드러지게 느끼고 의식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부터 기운이 들어와서 마음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등불 비유의 요지였습니다.
한편 3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을 잔과 대접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도 등불 비유와 공통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빛이 방에 채워지듯이 잔과 그릇 또한 음식을 담기 위한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잔과 그릇에 대해 말씀하시며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탐욕이란 단순히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강탈하고 약탈하고 노략질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탈하고 노략질한 것으로 마음이 더럽혀지게 된 상태를 묵인하는 상태가 악독함입니다.
이 탐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누가복음 16장 14절에 제시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본문 41절을 보면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고 하신 것을 염두에 둘 때 여기서도 돈이나 재물을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 마음에는 하나님 이외에 어떤 것이 들어와도 더러운 상태가 됩니다. 마음에 들여놓기 위해서는 좋아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외의 것을 좋아하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좋아하여 마음으로 붙잡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실은 자녀는 부모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 것을 강도질한 것이고 약탈한 것이고 노략질한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담아서 좋아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본래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좋아해도 약탈과 노략질과 도둑질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이 되시고자 하시는 유일한 대상이시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를 좋아하여 마음에 담게 되었다면 하나님 장중에 있는 배우자를 도둑질하게 된 것입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에게서는 이렇게 좋아하는 것 중에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돈과 재물이었습니다. 마음으로 좋아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이외에 다 도둑질이고 강도질이고 약탈입니다. 그중에서도 바리새인이 1등으로 좋아해서 도둑질한 것이 돈과 재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제를 언급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마음은 돈과 재물을 좋아함으로써 더럽혀진 상태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고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에 담고 있는 돈과 재물을 없애기 위하여 구제에 써버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구제라는 행위에 목적을 두고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러움 때문에 하나님 관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구제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구제해서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이 아니라 구제를 통해서 돈과 재물을 마음에서 제거함으로써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다른 말씀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를 유익하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미워한다는 것은 원수를 마음에 담았다는 것입니다. 좋아해도 담은 것이고 미워해도 담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담은 시점에서 마음은 더러워지게 됩니다. 원수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곧 나의 주체성을 원수에게 적용시키려는 탐욕이고 노략질이고 도둑질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더러움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원수가 잘되느냐 못 되느냐가 아니라 내 마음에서 원수를 빼내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원수를 마음에서 빼내기 위해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저 원수에게 무조건적인 친절을 베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자기 집안 식구를 원수로 여기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가족은 사랑해서 마음에 담게 되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담게 되었기에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이번에는 사랑해서 마음에 담은 가족을 빼내기 위하여 원수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또한 목적은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함에 있습니다.
실제로 원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가족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하나님 관계가 실패하지 않은 상태가 유지될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상대해 나가실 것입니다. 원수도 원수 나름입니다. 원수가 셋이라면 그 셋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모두 다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원수에게는 왼쪽 손으로 건드리시고 두 번째 원수는 오른쪽 손으로 건드리시고 세 번째 원수에게는 발로 차실 수도 있습니다.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관계가 성공적이 된 다음에 가족들을 만나는 상황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바리새인에게 구제하라고 하신 말씀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관계가 온전해질 때에 내게 주어진 돈과 재물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해 나가실 것입니다. 구제하실 수도 있고 다른 식으로 쓰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더러움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더러움이 하나님 관계를 실패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몸과 옷이 더러워져서 깨끗함을 의식하게 될 때만이라도 마음의 깨끗함을 의식하여 확인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라도 할 때 하나님 관계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관계가 실패하지 않으면 부부관계 부모자녀의 관계, 직장에서의 관계를 비롯한 육체로 맺는 어떠한 관계도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은 그토록 열심히 하나님을 향하여 매진하였습니다. 이들처럼 열심일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로 2000년 역사 이래 그 누구도 바리새인처럼 하나님 관계에 열심인 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열심이 헛된 일이었습니다. 정작 마음의 더러움을 확인하고 씻는 일에 실패하였기에 완전히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탐욕입니다. “이것만 가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여기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의 그물을 찢고 노략질하고 강도질하고 약탈하는 짓입니다. 이러한 바람을 가질 때에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확인하고 씻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대신 세상을 좋아하게 된 나를 결코 인정하거나 묵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나를 인정하고 묵인하는 것이 악독함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손을 움직여서 일할 때 때가 묻을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손을 씻듯이 그러한 마음은 씻어야만 합니다. 더러워진 마음에는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없음을 깨닫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따라가서 그 보혈로 마음을 씻는 것입니다.
세상을 좋아하여 탐욕을 부리는 나는 악독으로 넘어가기 전에 주님의 십자가로 넘어가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은 자가 될 때 하나님만을 좋아할 수 있는 부활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외에 좋아하는 대상이 생기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걱정하고 슬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를 빼앗는 악독함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에 대해 아무리 슬퍼해도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지 않으십니다. 반대로 자녀가 형통하여 기뻐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악독함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안 벌리면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이것이 악독함입니다. 하나님 대신 돈을 좋아하게 된 나를 묵인해서는 안 됩니다. 악독으로 넘어가기 전에 돈을 좋아하던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만 좋아할 수 있는 부활의 자리에 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돈에 관련된 문제들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맺는 모든 관계는 제자리를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에 대한 저주를 통하여 바리새인과 우리에게 하나님 관계의 요령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본문 이후를 보면 결국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간단한 요령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 관계에 실패가 없는 자들이 됨으로써 이 세상에서 몸으로 맺는 모든 관계 또한 실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씻는 목욕탕이 되어주셨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이외에 무엇인가를 좋아하게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도둑질을 하고 약탈을 하여 마음이 더러워질 때마다 악독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시고, 영혼의 목욕탕인 주님의 보혈이 흐르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활의 자리에 도달하여 깨끗한 마음으로 아버지만을 좋아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모든 관계가 아버지의 주권 아래에서 평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