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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코앞 죽음을 봐야 멈추는 생각하는 광기>의 줄거리: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내 삶에 대해서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큰 부조리와 광기는 다시 없습니다.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로서 살아서 알아서 사랑해서 앞서서 내 삶을 생각하시는 그 앞에서 내가 별도로 내 삶을 생각한다는 것은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광증만 멈춰도 너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코앞 죽음을 봐야 멈추는 생각하는 광기
(사도행전 27:1~26)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코앞 죽음을 봐야 멈추는 생각하는 광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코앞 죽음을 봐야 멈추는 생각하는 광기’
본문의 중심이 되는 말씀은 25절의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이 나오게 된 원인이 된 24절을 보면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 마치 신화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살펴볼 말씀은 신화도 아니고 태고적 전설도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 외에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순간도 빠짐없이 누구에게나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과의 차이점이 바로 이 부분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지만, 나는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사람과 말씀하시지 않는 사람을 따로 구분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다른 말씀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앞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으로써 선동과 부화뇌동과 군중심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유두고 청년의 죽음과 연관하여서 의학적 지식이나 과학적 지식 같은 객관적 데이터에 근거한 지식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내용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재료로 삼으면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는 다른 말씀이 무엇인지를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생각”입니다. 나의 생각이란 나 자신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는 동안 내게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게 됩니다. 간단히 말해 내가 생각을 한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정작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담긴 말씀은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한조각의 생각이 얼마나 엄청난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인지하지 못합니다. 지금 나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를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모든 생각이 담긴 말씀들은 차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살아서 알아서 사랑해서 앞서서 나의 모든 삶의 순간에 대한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하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부조리하고 반역적인 광기는 달리 없습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이 광기를 멈추는 것입니다.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기만 하면 됩니다.
생각하는 광기만 끊어지면 그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유 없는 평강이 주어집니다. 이 땅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삶의 구석구석까지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이러한 일들은 생각이라는 광기가 멈출 때만 가능합니다.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광기인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서 알아서 사랑해서 앞서서 나의 모든 삶의 순간을 생각하고 계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지독한 미친 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각하는 것에 지겨워하십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에 지쳐 하십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몸서리치십니다. 그 생각이 망하는 길로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상태가 실은 전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극히 일반적이고 상식적이라고 여기는 상태가 실은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까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얼마나 지독한 과정을 겪고서야 나의 생각을 멈추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지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생각을 하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상태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에요.
사도 바울을 호송하던 일행은 가이사랴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120km 떨어진 시돈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다시 터키의 남부지방 항구도시로 가서 이탈리아의 로마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터키 남쪽의 항구에서 출발을 했는데 강한 북서풍을 만나게 되었고, 그레데 섬 아래쪽으로 항해를 하여 간신히 미항이라는 항구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65km 정도 떨어진 뵈닉스로 가고자 하는데 순항한다면 반나절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당시는 10월 초였습니다. 지중해의 겨울바람이 혹독하기 때문에 11월부터 3월 초순까지는 항해 자체를 중지하였습니다. 지금이야 그런 일은 없습니다만 당시의 선박 형편에서 보자면 겨울 항해는 무척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아직 10월 초였기 때문에 서서히 위험한 시기에 접어드는 시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사도 바울은 미항에 머물러서 4개월간의 겨울을 보내기로 제안합니다. 그러나 선장과 선주와 백부장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바울 일행이 승선했던 배는 곡물을 실어 나르는 배였으리라 추측됩니다. 선주가 계약을 맺은 대상은 로마정부였기에 항해의 최종결정권도 승선하고 있는 로마 군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선장과 선주는 미항보다 뵈닉스가 겨울을 나기에 더 좋은 곳이라 여겼기에 백부장에게 옮겨갈 것을 제안합니다. 미항은 작은 촌락이었고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막을 수 있는 방벽이 없어서 추위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뵈닉스는 겨울바람을 막아줄 지형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미항에 비하면 번화한 도시였습니다. 뵈닉스까지는 불과 65km 정도로써 반나절만 항해하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백부장은 이들에게 찬성하여 뵈닉스로 가기로 합니다. 아직 본격적으로 위험한 시기는 아니었기에 조금만 위험을 감수한다면 앞으로 4개월간의 겨울을 편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지당한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알기로 작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자각하면서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그대로 전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들은 말씀이란 미항에서 겨울을 나도록 선장과 선주와 백부장에게 제안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바울이 전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작은 위험 때문에 겨울내내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상식적으로 당연히 누가 봐도 객관적이라고 하는 결론을 따라 미항에서 출발한 이들은 남풍을 만나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선장과 선주와 백부장은 자신들의 생각이 옳았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레데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일어나 배를 몰아붙였고, 결국 바울 일행이 탄 배는 해도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흑암 속에서 14일을 휩쓸리게 됩니다. 본문 17절에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스르디스란 지중해 연안에 존재하는 모래톱으로써 배가 한번 걸리면 빠져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배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 짐과 배의 기구들까지 다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하고서도 생존은 어려워 보였습니다. 20절에서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더는 살길이 없다고 확신할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들이 사도 바울의 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내용은 “나의 생각”을 멈추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14일 동안 끊임없이 몰아치는 광풍과 파도 속에서 모든 배에 탄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코앞에 죽음을 직면하고서야 자신의 생각으로는 목숨조차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말을 듣기 시작합니다.
죽음 앞에서야 하나님의 생각이 전달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들이 뵈닉스로 가겠다는 생각은 특별히 죄질이 고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상 속에 주어지는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나의 생각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생각들이 실은 정상이 아닙니다. 쉬지 않고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나의 생각”이 없어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지독한 과정이 필요한지가 바로 본문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14일 동안 계속된 광풍과 파도로 인해서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였습니다. 살기 위해서 배의 모든 짐과 기구를 버렸지만 끝내 죽고 말 것이라 여기게 되자 비로소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십자가 생활화의 구체적인 내용이 제시됩니다. 바로 이러한 심정으로 십자가 생활화를 하라는 것입니다.
배에 타고 있던 200명이 넘는 사람들은 14일간 광풍과 파도 속에서 흑암에 덮인 상태였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살기 위해 온갖 생각을 다 짜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목숨을 구원하기 위한 단 하나의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이 죽음을 코앞에서 보는 이 경험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의 죽음을 코앞에서 보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은 십자가라는 배를 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흑암과 광풍과 파도에 시달리며 14일간 굶주리며 죽음을 맛보는 모든 과정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기준으로 삼아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십자가 생활화를 해나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삶에 대한 나의 생각이 죽는 자리입니다. 나의 생각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듣고 미항에서 머물기를 제안하였던 사도 바울은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자처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곧 “나의 생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은 자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생각에 대해 죽었기에 하나님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은 사도 바울에게만 주어졌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배를 탔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각은 동일하게 주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제외한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못했어도 사도 바울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사도 바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미항보다 뵈닉스의 조건이 더 낫다는 생각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머릿속에서는 객관적 판단에 의한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겨울을 나기에 미항보다 뵈닉스는 모든 조건에서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미항과 뵈닉스까지의 거리는 불과 65km 정도였습니다.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고 순풍이라도 불어주면 반의 반나절이면 충분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굳어져가는 동안에 미항에 머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생각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할 때까지 14일의 기간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들의 생각은 평범했고 지극히 당연했고 상식적이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정상적이고 평범하게 여겨지는 생각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지독하게 광기어린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에 대해 쉬지 않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보일 수 있는 가장 지독한 부조리이며 광증입니다. 이것을 멈춰야만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고 하나님의 생각은 전달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광기를 멈추는 유일한 길은 내 죽음을 코앞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20절에서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의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죽음을 코앞에서 보게 되고서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의 의미와 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이유는 십자가가 나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죽음을 볼 때만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광기는 멈춰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삶에 대한 “나의 생각”은 죽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것은 “지금 내가 처한 삶의 환경과 문제에 대해 나는 죽은 사람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할 때에 나의 생각은 세상에 대해서 죽습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생각이 살아납니다. 이때 예수님의 승천은 화살표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따라 생각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늘로 올라가 예수님이 아버지를 마주보고 계시는 상황에 함께 참여하여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내 생각이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하여 생각이 살아나서 승천이라는 화살표를 따라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가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부활의 자리에 이르러 승천이라는 화살표를 따라 하늘로 가는 의식의 작용 없이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생각이 죽는 것이고 미친 짓이 죽는 것입니다. 내 삶에 대해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생각하고 계신 하나님 앞에서 내 생각을 주장하는 것은 지독한 광기입니다. 이 광기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생각이 살아났으면 승천하신 예수님을 화살표 삼아서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의식 속에서 이 과정을 겪으며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를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제 삶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삶에 대한 저의 생각은 죽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다시 살아난 생각을 갖게 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화살표 삼아 하늘로 올라가 주님 안에서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만을 기억하게 하시고, 아버지만을 소망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가지고 계신 생각들이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나는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뿐인데 마음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평강이 주어지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생각이 죽고 나면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여러분께서 직접 눈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삶의 모든 구석구석마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생각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나의 생각을 죽이는 것뿐입니다. 삶에 대한 나의 생각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나의 생각은 나의 죽음을 코앞에서 볼 때 끝이 납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죽음이 기정사실이 될 때 비로소 나의 생각도 죽게 됩니다.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 14일 동안을 시달렸으니 영락없이 죽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코앞에 보는 상태에서 비로소 생각은 멈추게 됩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유라굴로 광풍의 14일간이 주님의 십자가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나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죽은 자다.”라고 고백할 때 생각의 광기는 멈춰지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생각이 다시 살아납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을 화살표 삼아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찾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 기도는 골방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 시장에서, 직장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끊임없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며 생각하는 광기를 죽이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유라굴로 광풍의 14일간을 십자가에 넣어주셔서 나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코앞의 죽음을 보게 하심으로 스스로 삶을 생각하는 광기를 멈추게 하시고, 이대로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오늘도 광기의 흑암이 걷힌 광명의 세계를 오늘 하루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