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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루 현판 한시 이야기
이원걸(문학박사)
(영호루 현판 개요)
현재 영호루에는 52점의 현판이 걸려 있다. 여기에는 2점의 편액과 2점의 기문, 47점의 시판, 그리고 초대형 현판 1점이 있다. 2점의 편액은 공민왕의 친필인 ‘영호루映湖樓’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인 ‘영호루’이다.
2점의 기문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영호루금방찬서映湖樓金榜讚序〉,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영호루중신기映湖樓重新記〉이다.
초대형 현판은 1820년에 안동부사 김학순金學淳이 쓴 ‘낙동상류영좌명루洛東上流嶺左名樓’라는 글귀이다. ‘낙동상류’와 ‘영좌명루’가 두 개의 판에 네 글자씩 나누어져 있어 2점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마지막 부분에 글씨를 쓴 사람과 연도를 알리는 ‘경진지부김학순서庚辰知府金學淳書’로 보아 1점으로 봐야 한다.
47점의 시판을 시대별로 구분해보면 고려시대가 13점, 조선시대가 34점이다. 고려시대는 공민왕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 볼 때, 일본 원정길에서 돌아오면서 읊은 김방경金方慶의 시판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 김흔金忻을 비롯한 홍간洪侃, 우탁禹倬, 채홍철蔡洪哲, 신천辛蕆, 조간趙簡, 정자후鄭子厚, 정포鄭誧 등의 시판 9점은 공민왕 이전의 것이다. 권사복權思復, 이집李集, 전녹생田祿生, 정몽주鄭夢周 등의 시판 4점은 공민왕 이후의 시판이다.
조선시대의 시판으로는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이원李原, 류방선柳方善, 조효문曺孝門, 최수崔脩, 이석형李石亨, 김종직金宗直, 조순趙舜, 양희지楊熙止, 이현보李賢輔, 주세붕周世鵬, 홍언충洪彦忠, 김안국金安國, 정사룡鄭士龍, 권응정權應挺, 이황李滉, 권응인權應仁, 김극일金克一, 구봉령具鳳齡 등 20점은 조선전기의 인물들이다. 이정신李正臣, 여필용呂必容, 류여회柳汝懷, 강침姜忱, 홍우서洪禹瑞, 이인복李仁復, 이철보李喆輔, 한광조韓光肇, 홍의호洪義浩, 한홍유韓弘裕, 이집두李集斗, 오연상吳淵常, 김학순金學淳 등 13점은 조선 후기의 인물들이다.
이들 중 조간과 정자후는 복주목사를 지냈고, 이현보, 권응정, 이정신, 여필용, 홍우서, 이인복, 이철보, 한광조, 이집두, 오연상, 김학순 등은 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영호루 게판 한시 20수를 감상한다.
(영호루 현판 한시 이야기)
1) 복주 영호루에서 지음[題福州映湖樓] 김방경(金方慶)
산수는 모두 예전처럼 반기고
누대도 소년 시절 그대로일세.
아련히 고려의 유풍 전해오니
노래 부르며 원정행 수심 달래네.
山水無非舊眼靑 樓臺亦是少年情
可憐故國遺風在 收拾鉉歌慰我行
김방경은 1229년에 산원겸식목녹사 벼슬을 시작으로 1248년 서북면병마판관으로 부임했다.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에 임명되어 삼별초를 토벌하고 탐라를 평정하였다. 1274년 10월에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할 때 도독사로서 도원수 홀돈의 지휘 아래 고려군 8천 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1276년에는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280년 원나라로부터 중선대부·관령고려국도원수의 직임을 받았다. 1283년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로 벼슬을 마쳤고 첨의령으로 증직되었다.
이 시는 고려의 명장 김방경이 1274년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군을 이끌고 원나라 군사와 참전했던 사실에 근거한다.무장으로 일본 정벌의 국가적 임무를 수행하는 길에 영호루에 올랐다. 어수선한 정국과 달리 산천은 예전 그대로 그를 맞아주었다. 소년 시절에 이곳에서 노닐던 추억을 떠올리며 어지러운 국내외 정세 난국을 헤쳐가야 고민을 담았다.
영호루는 여전히 고려의 유풍이 전해지는 유서 깊은 곳이다. 소년 시절 노닐던 영호루의 모습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고려의 유풍을 따라 건재한 영호루를 보면서 과거 추억 회상과 내적 심리를 표현하였다. 내우외환의 국가적 시련 앞에서 일본 정벌의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내면의 불안 심리를 호탕한 노래 부르며 삭혀보려고 하지만 이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2) 영호루[映湖樓] 김흔(金忻)
십 년 전 꿈에 노닐던 곳
다시 찾아오니 풍광이 위로하네.
벽 위에 새겨진 아버님 필적 뵈옵고
어리석은 소자 만호로 중국 원행길 떠납니다.
十載前游入夢淸 重來物色慰人情
壁間奉繼嚴君筆 堪咤愚兒萬戶行
김흔은 김방경의 아들로 부친과 함께 고려를 위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산정도감판관을 거쳐 장군이 되었다. 1272년 부친을 따라 탐라에서 삼별초를 토벌하고 대장군이 되었다. 1274년 일본 원정 때 지병마사로 참가하였으며 진주목사를 지냈다. 1277년 북쪽 변방이 소란해지자 출정하였으며, 1282년에도 상장군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286년 지신사로서 삼사사, 이듬해에 동판밀직사사가 되었다. 1289년 만호로서 조정군을 이끌고 요양행성에 갔다. 1291년 판밀직사사, 1292년에 판삼사사, 1295년에 지도첨의사사, 1307년에 자의도첨의사사 찬성사가 되었다.
김흔은 1289년 만호 벼슬로 고려군을 이끌고 요양행성에 갔다. 요양행성은 ‘요양등처행중서성’인데, 원나라에서 설치한 행중서성이다. 이를 줄여 요양행성이라고 하였다. 지리상 위치는 현재의 중국 현재의 중국 동북 3성인 요령성·길림성·흑룡강성과 흑룡강 유역·우수리 강 동쪽 동해안 지역과 원의 동녕부와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던 한반도 북부 지역과 탐라군민총관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김흔은 영호루를 다시 찾아온 감회를 남겼다. 십 년 세월이 지난 뒤에 다시 온 영호루의 풍광은 변함이 없었고 고향의 어머님 품처럼 따뜻했다. 벽 위에 새겨진 부친 김방경의 시를 대하자 절로 경건함을 느낀다. 김흔은 만호 벼슬로 중국 원행길에 나서면서 부친의 시를 보는 순간 숙연해졌다. 무운장구를 빌며 영호루 탐방의 감회를 남겼다. 김흔은 어머니 같이 넉넉한 영호루에서 아버님 필적을 대하고 이역만리 중국을 향해 편한 발걸음을 옮긴다.
3) 영호루[映湖樓] 홍간(洪侃)
삼월의 풀빛 짙은 강남땅
영가 고을 강산에 안개꽃 피었네.
원님의 문장은 사령운 같고
비취색 미인들 우물에 핀 연꽃일레라.
草長江南三月天 永嘉山水好風煙
文章太守謝康樂 珠翠佳人玉井蓮
홍간이 남긴 작품은 고려와 조선조의 저명한 문학비평가들로부터 아름답다는 평을 받고 있다. 고려 시대 이제현은 ≪역옹패설≫에서 “그가 시 한 편을 지어낼 때마다 어진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 그 시를 좋아하여 서로 전해가며 외웠다”고 평했다. 그의 시가 뛰어나서 당시에 이미 많은 독자층을 확보했고 널리 애호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조선 시대 허균도 ≪성수시화≫에서 그의 시가 “아름다우면서도 맑고 곱다”고 평했으며, 홍만종도 ≪소화시평≫에서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허균이 뽑아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선집을 밤새워 읽고 “이인로와 홍간의 시가 제일 좋다”며 극찬했다.
당시 대부분의 시인이 모두 송나라 시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홍간이 당나라 시를 배운 것이 높이 평가하였다. 허균은 홍간의 “〈나부인>·<고안행> 등의 작품이 매우 뛰어나다.이는 성당盛唐의 작품과 같다”, 홍만종은 “당조唐調를 깊이 얻어 송나라 사람의 기습氣習을 벗어났다”고 평가하였다.
홍간의 미적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 작품 전체에 화사하고 명랑한 시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꽃피고 새우는 춘삼월 강남땅의 안동 고을에는 풀빛이 눈부시도록 짙다. 골짜기마다 아기 진달래·복숭아·살구꽃이 만발한 꽃 대궐을 이룬 ‘나의 살던 고향’이다. 평화롭고 희망이 가득한 복된 안동 고을 풍경이다.
훈훈한 봄바람은 시인의 마음을 더욱 들뜨게 하였다. 이곳에 남겨진 원님들의 편액 글솜씨는 사령운에 버금간다고 칭찬했다. 비취색 낙동강 물굽이와 영호루의 미적 조화와 바람과 안개가 멋스럽게 어울린 장면을 포착하였다. 당시 영호루 앞 낙동강에는 뱃놀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비들과 배에 올라 시를 읊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운 치장이 시인의 시선을 고정시켰다. 낙동강 물 위에 현란한 연꽃이 피었다. 영호루 앞의 잔잔한 낙동강 흐름은 연못과 같고 미인들의 알록달록한 옷치장은 연꽃으로 피어났다. 비취색 낙동강 물빛과 다홍색 연꽃 빛깔이 섬세한 조화를 이룬다. 영호루 앞 낙동강은 뛰어난 작가를 만나 이처럼 곱게 장식되었다.
4) 영호루[映湖樓] 우탁(禹倬)
여러 해 영남에서 호탕하게 노닐어봤지만
영호루 좋은 경치가 가장 사랑스러워.
방초 짙은 나루터에 나그넷길 나뉘고
수양버들 우거진 언덕에 농가가 있네.
바람 잦은 수면에 안개 서렸고
해 묵은 담장 머리에 이끼 무성해라.
비 그친 들판에 격양가 들려오고
솔가지 삭정이에 찬 이슬 맺혔네.
嶺南遊蕩閱年多 最愛湖山景氣加
芳草渡頭分客路 綠楊堤畔有農家
風恬鏡面橫烟黛 歲久墻頭長土花
雨歇四郊歌擊壤 坐看林杪漲寒槎
우탁은 ‘역동선생’이라 일컬어진다. 그는 영해사록이 되었을 때 영해의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 신사를 과감히 철폐하였다. 1308년에 감찰규정이 되었을 때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통간하자 백의 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렬히 간한 대쪽 같은 선비였다.
우탁은 이내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다. 이러한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은 여러 번에 걸쳐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이려고 하였다. 이에 우탁은 다시 벼슬길에 나가 성균좨주成均祭酒를 끝으로 하여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고향으로 내려온 우탁은 예안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이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깊이 연구해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우탁은 향토 산수애호가였다. 영남 고을마다 펼쳐진 수많은 명승지가 있지만 한국 유학의 본산인 안동 고을 수려한 낙동강과 영호루의 미적 자태에 매료되었다. 녹음방초 한창인 시절에 나루터를 주목하였다. 나루터 주변의 작은 길까지 그려내었고 이어 수양버들 사이로 비치는 농가의 서정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점차 이동되어 잔잔한 낙동강 수면에 신비롭게 서린 안개의 풍광을 포착하였다. 오래된 담장 머리 무성한 이끼까지 세밀하게 시에 담았다. 이러한 시각적 이미지 전개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격앙가’에서 급반전된다.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린 지 50년이 되었을 때이다.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자 평민 차림으로 거리에 나섰다. 한 노인이 길가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한 손으로는 배를 두들기고 또 한 손으로는 땅바닥을 치며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우물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고 사니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帝力于我何有哉]”라고 노래를 불렀다. 이는 정치의 고마움을 알게 하는 정치보다는 그것을 전혀 느끼기조차 못하게 하는 정치가 진실로 위대한 정치라는 의미이다.
태평 시절에 부르는 이 노래는 이내 ‘숲’·‘삭정이’·‘찬 이슬’의 시어 배치로 다시 청각·촉각적인 감각을 느끼는 시로 탄생되었다. 우탁의 산수 자연 애호 미학과 사실주의적인 안목의 집중과 감각적 시어 선택을 통해 미적 구조가 고조되었다.
5) 영호루[映湖樓] 정자후(鄭子厚)
누대 세운 시적 안목과 들인 공도 많으니
구름 자귀 달 도끼로 다듬어도 이보다 못하리.
하늘 위 횡취각에 오른 것 같으니
그 누가 나를 태청가에 오르게 했는가.
봄 강물 포도주처럼 푸르게 불어나고
석양빛 철쭉꽃에 붉게 비치네.
돌아가길 기다리는 수레가 벌써 가까이 왔고
이따금 나무 위엔 까치가 깍깍 우짖네.
起樓詩眼費功多 月斧雲斤亦未加
自訝登臨橫翠閣 誰敎飛上太淸家
春江綠漲葡萄酒 夕照紅酣躑躅花
待過已知軒蓋近 樹頭時有鵲槎槎
정자후는 고려 충숙왕 때 복주목사를 역임했다. 그는 익재 이제현·급암 민사평과 함께 개경의 철동에 살았다. 그는 수많은 고려 후기의 문신들과 교유하며 많은 시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그의 주옥같은 작품을 후대에 남기게 해줄 후손이 없었기에 문집으로 전해지지 못했다. 서거정의 《동문선》에 그가 남긴 시 세 수가 전해진다.
정자후의 문예 미학적 감각이 빛나는 영호루 시이다. 누대 위에 게판된 한시들의 수준이 대단히 높다는 정평을 하였다. 이러한 시를 선별해서 게시한 공로를 치하하면서 아름다운 영호루의 건축미를 칭송하였다.
누대에 오른 시인 정자후는 도교에서 신선이 산다는 횡취각에 올라온 듯하다고 감탄하였다. 아울러 도교에서 천상의 신선이 산다는 전각인 태청가에 오른 것과 같다고 했다. 전반부에서는 영호루에 오른 감상을 천상 세계를 차용하여 시인의 자유로운 시적 발상을 표출하였다. 천재 시인에 의해 영호루는 천상의 누각으로 극찬이 되었다.
후반부에서 이 시의 매력은 더욱 섬세히 드러난다. 봄철에 낙동강 물이 불어나 비취색 포도주를 연상케 하였다. 후일 이육사가 읊었던 ‘청포도’의 그 푸르고 영롱한 포도주 빛의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는 광경을 담았다.
천재 시인은 영호루 앞을 조용히 흘러가는 ‘낙동강’을 ‘청포도주’로 표현하였다. 붉은 낙조가 철쭉에 비쳐 철쭉은 그 자체의 붉은 색상에 더욱 멋스럽게 배색이 되었다. 청색과 홍색의 조화와 맛깔스러운 시상의 배치로 시의 미적 수준을 높였다. 길 떠나길 재촉하는 덜컹덜컹하는 수레바퀴 소리와 함께 까치 울음은 청각 이미지 표현이다. 시인의 유려한 필치로 낙동강과 영호루는 그 품격을 한 층 더 높여졌다. 상상과 현실의 공존과 감각적 시 표현으로, ‘낙동강’은 ‘맛난 청포도주’로, ‘영호루’는 ‘천상의 누각’으로 탄생되었다.
6) 영호루[映湖樓] 신천(辛蕆)
영호루 좋은 경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니
나보다 더 명승을 탐하는 이 있으랴.
백 리길 뽕나무 숲에 주막집 있고
푸른 소나무 관가를 빙 둘렀네.
어둑한 강 비 내리고 풀빛은 하늘로 이어졌고
박꽃 핀 나루터 초가지붕 굴뚝에 연기 오르네.
이 누대에 올라와서 시 한 수 읊지 못한다면
시인으로 풍채 없기는 마른 나무 삭정이 같다네.
此樓佳致說無多 摘勝探奇莫我加
百里桑陰藏野店 四山松翠護官家
江頭雨暗連天草 巷口烟深出屋花
只解登臨如黙黙 詩人沒彩也如槎
신천은 과거에 급제하여 1314년 3월에 선부직랑이 되었다. 그는 안향의 문인으로, 1319년 6월에 총랑으로 있으면서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극렬히 주청하여 스승을 문묘에 종사케 하였다. 1326년에 지공거가 되어 이달중 등을 발탁하였다. 1339년 12월 판밀직사사의 벼슬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 안동의 영호루, 청주의 공북루, 통천의 총석정을 읊은 시가 있다. 삼척팔경 가운데 한 부분을 읊은 〈와수목교〉와 평해의 경치를 읊은 〈요곽장천여고리〉 등의 시가 전한다.
시인은 고려의 산수를 퍽 사랑하였다. 실제로 그가 전국을 답사하면서 남긴 기행 한시가 이를 대변해 준다. 영호루에 오른 그의 가슴은 뛰었다. 강과 조화를 이룬 누대의 경관에 압도되었다. 자신보다 명승을 탐하는 이가 없을 만큼 일가견을 가졌다고 선언하면서 영호루의 빼어난 경관에 새삼 경탄했다. 이어 안동 고을의 향토색 짙은 전원적 서경을 그려내었다. 길게 뻗은 뽕나무 숲에 자리한 주막집, 푸른 소나무가 관가를 두른 정경도 놓치지 않았다.
어둑한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잔잔하던 강에 비가 내린다. 누대 위에서 이를 바라보는 시인은 감상에 젖는다. 저 멀리 눈이 시리도록 푸른 풀이 지평선까지 한없이 펼쳐져 있다. 검은 구름 색상에 이어 푸른 풀빛 색상을 표현함으로써 시상의 흐름을 반전시켰다.
시인의 예리한 시선이 나루터 초가지붕 위 박꽃에 꽂혔다. 낙동강을 오가는 뱃사공과 행인들이 북적대고 초가지붕에 하얀 박꽃이 피고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평화로운 안동 고을 풍경을 자세히 그렸다.
이 좋은 누대에 올라 시 한 수 못 지으면 시인의 자격이 없다며 일침을 가한다. 시의 전반에 감수성 예민한 시인의 섬세한 감각과 회화적 시상이 적절히 배합되어 순수 서정시의 매력을 살려내었다. 독자는 이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평온한 안동 고을의 풍경을 떠올리며 영호루에 가보고픈 충동을 느끼게 한다.
7) 영호루[映湖樓] 정포(鄭誧)
서둘러 말 타고 몇 고을 지나가다가
석양 무렵 벗과 함께 다시 누에 올랐네.
귀양을 왔지만 산수를 좋아하니
힘든 일 지나가니 새삼 세월 빠름이 놀랍네.
희미한 등잔불 깜빡이는 외로운 여관의 밤
처마 곁 낙엽 소리에 고향 생각 간절한 가을밤.
이별한 후 서로 그리워하는 맘 일어나
하늘가 어여삐 흘러가는 은하수를 올려다본다오.
鞍馬怱怱閱數州 夕陽携水更登樓
謫來未厭湖山好 事去空驚歲月遊
半壁殘燈孤館夜 傍簷疎樹故園秋
欲知別後相思意 天際長江袞袞流
정포는 1326년에 18세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예문수찬이 되어 원나라에 표를 올리러 가다가 원나라에서 귀국하던 충숙왕을 배알하여 왕의 인정을 받고 그 길로 왕을 따라 귀국하여 좌사간으로 발탁되었을 만큼 총명했다. 충혜왕 때 전리총랑에서 좌사의대부까지 올랐다.
성품이 강직하여 충혜왕의 폭정을 서슴지 않고 직간하였다. 이에 미움을 받아 면직되었다. 무고까지 당해 현재 울산인 울주로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오랜 세월 동안 지내면서 시를 지으며 세월을 보냈다. 그는 불행하게도 37세의 어린 나이로 병이 들어 죽었다.
그는 일찍부터 최해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이곡과 친하였다.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서도 정추와 이색이 또한 가까이 교유하였다. 특히 그의 한시는 유배지에서 지은 것이 많다. 이색이 쓴 <설곡시고서>에서는 그의 시를 두고, “맑으면서도 고고하지 않고 고우면서도 음란하지 않다. 말이 아담하고 심원하여 시속말은 한 자도 쓰지 않았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남용익은 ≪호곡시화≫에서 정포는 ‘섬미’로 묘경에 달했다는 시평을 하고 있다. 그는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다. ≪동문선≫에 전하는 27편의 한시와 표전, 청사, 축문 등 12편 문장들은 질이나 양적인 측면에서 그의 문학적 위상을 충분히 알 수 있게 한다.
고려의 명문장가인 정포가 귀양객으로 영호루를 지나다가 읊은 작품이다. 석양빛 찬란한 누대에 벗들과 함께 올라서 경관을 감상한다. 귀양을 하는 어려움 속에 세월이 빨리 지나감을 느끼며 감회를 남겼다. 나그네 향수가 짙게 반영되어 있다. 등잔불 아래 나그네가 고향을 그리워한다. 자신의 신세 불우에 따른 불안 심리도 반영되어 있다. 문득 그리운 이가 떠올랐다. 만날 수 없는 아픔을 저 하늘가에 잔잔히 흐르는 은하수를 보며 달랜다. 견우와 직녀 전설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련한 천상의 전설을 떠올리며 여로서정을 담았다. 여성 어조의 섬세한 터치로 작가의 힘겹고 여린 내면세계를 표현했다.
8) 영호루[映湖樓] 권사복(權思復)
가는 곳마다 누대 있고 명승지도 많지만
이 누대에 오르니 풍경 감상의 마음이 더해지네
언덕 너머 서남길에 갈대꽃 피어있고
뽕나무 우거진 마을에 두서너 농가 보이네.
세 글자 공민왕의 어필이 금빛으로 비치니
한 구역 신선 경관에 어필까지 빛나네.
어릴 때 강변의 버들가지 꺽어들고 놀았는데
늙어서 돌아와 봐도 예전 그대로일세.
到處樓臺摘勝多 此樓贏得賞心加
蒹葭岸外西南路 桑枯村中數四家
三字御書金照水 一區仙境錦添花
早年攀折江邊柳 老到歸來尙來槎
권사복은 공민왕 대에 활약한 안동 출신의 인물이다. 정당문학 백문보의 문인으로 당대 걸출한 문인 김구용·이숭인·이무방 등과 동문수학하였다.
한반도 어디를 가도 아름다운 풍경과 고적들이 많건만 안동 고을 영호루의 풍경은 여느 곳과 다름을 자부하였다. 언덕 너머 곱게 핀 갈대꽃 길과 뽕나무 우거진 농가의 전원적인 서정을 담았다. 공민왕 친필의 휘호가 빛나고 이 구역은 신선들이 노니는 경관이라고 흥분했다. 그 어릴 적 노닐던 곳을 다시 찾아왔건만 영호루는 멋과 신비를 간직하면서 그를 정겹게 맞아준다. 향토 문인 권사복이 남긴 한시 몇 수를 소개한다.
방안[放鴈]
높은 하늘에 마음대로 날 수 있는데
어이하여 논밭에 내려왔다가 위기 맞는가.
이제부터 하늘 저 멀리 날아가서
몸을 온전히 하며 살찌기를 구하지 말지니.
雲漢猶堪任意飛 稻田胡自稻危機
從今去向冥冥外 只要全身勿要脾
기러기가 세인들이 사는 곳에 내려왔다가 위기를 맞는 것을 보고 풍유적 수법으로 경계하였다. 일신의 몸을 살찌우기 위해 논밭에 내려왔다가는 큰 변을 당하기에 부디 먼 창공으로 높이 날아가서 이러한 화를 피하길 당부하였다.
병인삼월병후제[丙寅三月病後題]
병이 해마다 깊어 가매 사는 일이 귀찮아
날 가는 줄도 모르는데 봄도 지나가고 마네.
지는 꽃이 창 안에 날아드니
가지 끝 붉은 꽃이 듬성함을 알겠네.
病與年深生事微 不知日去況春歸
落花飛入軒窓裏 始覺枝頭紅自稀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사이 봄이 모두 지나감을 애석해하였다. 늦봄의 바람이 불고 꽃나무 가지에 붙어 있던 마지막 꽃잎이 창안으로 들어와 병든 시인을 위로한다.
9) 영호루[映湖樓] 전록생(田祿生)
북쪽의 경치 조망하니 첩첩 산봉우리
높은 누대에 오른 나그네 시름은 더 깊어지네.
중선은 부를 지어 고향 땅이 좋다고 했고
강령은 고향 그리워하면서도 가질 못했네.
내 시름마냥 한들한들 수양버들 춤추고
난리 뒤에 백목련 꽃봉우리 막 맺혔구나.
이 강물 모두 봄 술로 변케 하여
들이켜서 가슴 응어리 씻어내고파.
北望景華疊嶂多 樓高客恨轉承加
仲宣作賦非吾土 江令思歸未到家
楊柳自搖愁裏縷 辛夷初發亂餘花
若爲江水變春酒 一洗胸中滓與槎
전록생은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제주사록·전교시교감을 역임했다. 원나라 정동향시에 급제하였다. 1347년 정치도감 의정치관으로 백문보와 함께 기삼만을 옥사시켜 원나라 사신에게 국문당하였다. 1357년 기거사인으로서 간의 이색, 사간 이보림·정추 등과 함께 염철별감의 폐단을 상소하였다. 1361년 전중시어사를 거쳐 전라도 안찰사로 나갔다. 같은 해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한 공신으로 좌상시가 되었다.
1364년 감찰 대부로서 원나라에 다녀와서 계림윤·밀직제학이 되었다. 1367년 경상도도순문사, 1371년 동지공거·대사헌을 거쳐 1373년 정당문학으로서 우왕의 사부가 되었다. 이듬해 개성부사·문하평리 등을 거쳐 추충찬화보리공신이 되었다. 1375년 간관 이첨·전백영 등이 북원의 배척과 이인임의 주살을 청했다가 투옥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도중 죽었다.
전록생은 북쪽 봉우리를 감상하고 영호루에 올라 남다른 감회를 남겼다. 중국의 유명한 문인인 중선과 강암이 객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던 고사를 떠올렸다. 등루부는 왕찬이 형주의 당양현의 성루에 올라 가슴 속의 뜻을 펴지 못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가을의 정취에 기탁해 지은 작품이다.
왕찬은 불안정한 시국, 오랫동안의 타향살이에 대한 고통과 향수, 그리고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싶으나 길이 열리지 않고 자신이 재주를 가지고 있음에도 기회를 만나지 못한 울분 등을 〈등루부〉에서 “멀리 고향을 떠나온 슬픔 탓에 눈물이 한없이 흘러 멈출 길 없네.[悲舊鄕之壅隔兮 悌橫墜而弗禁]”고 했다.
이와 함께 중선도 앙양루에서 고향을 그리워하여 〈등루부〉를 지었다. 두보의 〈야우〉라는 시를 보면, “추우면 무협으로 나가 취하면 중선루를 떠나리라.[天寒出巫峽 醉別仲宣樓]”고 했다. 강암도 객지에서 불우하게 지내면서 이와 같은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지었다.
전록생은 시대적 어려움 속에 객지를 배회하면서 영호루에 올라 중국 역대 문인들이 읊었던 〈등루부〉를 떠올리며 동일한 감회에 빠져들었다.
그의 시름과 무관하게 버들가지 한들거리고 시대 통증을 알 까닭 없는 백목련이 활짝 피었다. 호기가 넘치는 시인은 낙동강 푸른 강물을 다 끌어와 자신의 가슴에 응어리진 상처와 답답함을 모두 씻어내 버리고 싶었다. 가슴 가득한 호기를 펼칠 수 없는 모순 현실에 대한 울분을 토로했다. 좌절과 상실감을 응축하면서 내면에 간직한 웅대한 포부를 맘껏 펼칠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염원하였다.
10) 안동 영호루[安東映湖樓] 정몽주(鄭夢周) 일본에서 돌아와 지음[回自日本作]
동남으로 여러 고을 두루 다녔지만
영가의 경치가 제일 아름다워라.
고을이 산천 형세 가장 좋은 곳에 있어
출신 인물들로 장군과 정승도 많다네.
논밭에 풍년 들어 곡식들은 넉넉하고
봄날 누대에 꾀꼬리 울고 꽃 피었네.
오늘 밤 다 가도록 술에 흠뻑 취하리
만 리 길 배 타고 온 이 몸일세.
閱遍東南郡縣多 永嘉形勝覺尤加
邑居最得山川勢 人物紛然將相家
場圃歲功饒菽粟 樓臺春夢繞鸎花
直須酩酊終今夕 萬里初回海上槎
정몽주는 추밀원지주사 정습명의 후손으로, 부친은 정운관이다. 모친 이씨는 난초 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에 그의 초명을 ‘정몽란鄭夢蘭’이라 했다. 뒤에 정몽룡鄭夢龍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다시 정몽주鄭夢周라 고쳤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되면서 성균박사에 임명돼 ≪주자집주≫를 유창하게 강론하여 당시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던 이색으로부터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았다.
그는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척하는 데에 반대해 뜻을 같이하던 이성계를 찾아가 정세를 엿보고 돌아오던 중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의 시문은 호방하고 준결하며 시조 〈단심가〉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다.
1375년경에 왜구가 자주 우리나라 영토를 침범하여 피해가 심해졌다. 정몽주는 조정의 명을 받들어 보빙사로 일본에 보내져 국교의 이해관계를 잘 설명해 일을 무사히 마치고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구해 돌아왔다. 보빙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 영호루를 방문한 소감을 다뤘다.
동남 여러 명승 가운데 영호루의 풍광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안동은 훌륭한 인물과 장군을 비롯한 재상들이 많이 태어난 곳이라고 했다. 논밭 가득한 곡식과 태평을 알리는 꾀꼬리 울음소리와 온갖 꽃이 활짝 핀 안동 고을 꽃동네를 담았다. 말미에 먼 일본 여정을 다녀온 그의 심회가 담겨있다.
11) 영호루[映湖樓] 정도전(鄭道傳)
하늘 날던 용이 가지고 놀던 반짝이는 구슬이
멀리 영가 고을 낙동강 영호루에 떨어졌네.
밤에 구경할 때 촛불 켤 일도 없으니
신기한 광채가 물가를 쏘아대네.
飛龍在天弄明珠 遙落永嘉湖上樓
夜賞不須勤秉燭 神光萬丈射汀洲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제도의 개혁을 통해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이 된 정치가이다. 1370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1383년 이성계를 찾아가 세상사를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었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일으킬 때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워 밀직부사가 되었다.
1392년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살해되고 반대 세력이 제거되자 조준과 함께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해 조선왕조를 열었다. 이후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정벌도 추진하였다. 이방원을 전자로도 보내고 이방번을 동북면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이방원 세력의 기습을 받아 방번·방석 등과 함께 살해됐다.
정도전은 영호루를 미적으로 극대화하여 ‘하늘에 노닐던 용이 떨어뜨린 구슬’로 형상하였다. 굳이 밤에 촛불을 켤 일도 없다. 그 영롱한 여의주가 신비한 광채를 물에서 연이어 쏘아대기 때문이다.
시적 구도의 규모가 매우 크다. 여느 시인처럼 영호루 주변 경관이나 안동 고을 풍경을 묘사하는 부분은 전혀 없다. 전설상의 동물인 용이 여의주를 물고 천상과 천하를 오르락거리며 노닐다가 여의주를 안동 고을 영호루 앞 낙동강에 떨어뜨렸다. 여의주는 신기한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되어 영호루에는 밤에도 신비한 불빛이 찬란하다.
12) 영호루시[映湖樓詩] 권근(權近)
나그네 길에 누에 오르니 감회도 많은데
이리저리 떠돌다 머릿결은 실처럼 희어졌네.
바다 밖 외국에서는 고국이 그리웠는데
고향이라 돌아와도 내 집도 없구나.
백 척 높은 난간 빈 공중에 떠 있고
임금님의 내린 글씨 금빛으로 찬란하네.
긴 강은 멀리 은하수와 맞닿아있으니
당장 배 띄워 노 저어 가고 싶어라.
客裏登臨感歎多 倦遊贏得鬢絲加
海天流落空懷國 鄕郡歸來未有家
百尺危欄浮碧落 九重宸翰耀金花
長川逈與銀河接 直欲迢迢一泛槎
권근은 1368년에 성균시에 합격하였다. 이듬해 급제해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했다. 1393년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렸다.
출사하여 예문관대학사·중추원사 등을 지냈으며 개국원종공신으로 화산군에 봉군되었다. 정종 때는 정당문학·참찬문하부사·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의 혁파를 건의하여 단행케 했다. 1401년에 좌명공신 4등으로 길창군에 봉군되고 찬성사에 올랐다. 1402년에 지공거, 1407년에는 최초의 문과중시에 독권관이 되어 변계량 등 10인을 뽑았다.
하륜 등과 《동국사략》을 편찬하였다. 이색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의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박상충·이숭인·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대표적 저서를 들면,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이다. 《입학도설》은 훗날 이황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나그네로 객지를 유람하다가 영호루를 찾은 감회를 표현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풍상을 겪은 탓에 머리카락은 백발이 되었다. 외국에서 지내는 동안 고국이 그리웠고 고향 안동에 대한 향수는 남달랐을 터이다.
이어 영호루의 미적 품위와 낭만 서정을 담았다. 높은 난간의 누대 위용과 공민왕 친필을 소개하였다. 길게 흐르는 낙동강이 하늘의 은하수와 맞닿아있다고 하면서 은하수 강에 배를 띄워 은하수 강으로 노를 저어 가고픈 마음으로 가슴이 뛰었다.
13) 영호루[映湖樓] 류방선柳方善
내 평생 표표히 유람도 많이 했지만
이제 누에 오르니 더욱 흥겹다네.
천 리 밖 외로운 몸 긴 귀양살이
칠 년간 죽을 고생하고 또 집을 떠나네.
난간에 의지하여 술 깰까 한하노니
그 누구와 취한 채 갓을 던지고 꽃을 딸까.
앉은 채 강물 보니 더욱 운치 있으니
무엇 하러 거추장스레 배 띄우고 유람하랴.
吾生漂泊遠遊多 今上高樓興轉加
千里一身長去國 七年萬死又離家
倚欄最恨醒臨水 落帽誰期醉採花
坐瞰蒼波殊有味 何須怪怪學浮槎
류방선은 12세 무렵부터 변계량·권근 등에게 학문을 익혀 일찍부터 글재주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1405년에 국자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409년에는 부친의 옥사로 인한 연좌가 되어 청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영천으로 다시 유배지를 옮겼다. 1415년 풀려나 원주에서 지내던 중 참소로 인해 다시 영천에 유배되었다가 1427년에 풀려났다.
그는 오랜 유배 생활을 했지만 평소 쌓은 학행이 인정을 받아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천거될 수 있는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로 추천이 되어 주부에 천거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사양하였다.
특히 유배생활 중에는 유배지 영천의 명승지에 ‘태재’라는 서재를 지었다. 그리고 당시에 유배를 왔거나 은둔하던 이안유·조상치 등의 문사들과 학문적인 교분을 맺었다. 주변의 자제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이보흠 등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그는 정몽주·권근·변계량을 잇는 영남성리학의 학통을 후대에 계승시키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원주에서 생활하는 동안 서거정·한명회·권람강효문 등의 문하생을 길러내었다. 아울러 그는 시학에 뛰어난 문인으로 평가를 받았다.
이 시는 류방선이 영천에 유배되었다가 원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다시 영천으로 유배지를 옮긴 무렵에 지은 것이다. 소탈한 작가의 내면세계가 그려져 있다. 긴 세월 동안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다시 유배길에 오르는 처량한 신세 한탄과 여로서정이 드러난다.
술에 흠뻑 취해 꽃을 따고픈 마음을 표현하였다. 영호루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니 그 자체만으로도 멋스럽기에 구태여 배에 올라 흥을 누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14) 영호루[映湖樓] 이석형李石亨
누대에 오르니 물빛과 산색이 더욱 짙고
비 그친 저녁 햇빛 받은 경치도 좋구나.
길 한쪽엔 여기저기 절이 있고
아침저녁으로 농가에 흰 안개 피오르네.
다행히 태평 시절에 태어나 고운 풀을 찾고
전조를 향해서는 낙화를 물어보네.
돌이켜 이 몸에 날개가 돋혀난다면
곧바로 은하수에 뗏목을 띄우리라.
水光山色上樓多 雨過斜陽景更加
一路高低禪客院 自烟朝暮野人家
幸生昭代尋芳草 爲向前朝問落花
還使此身生羽翰 直看雲漢掛雲槎
이석형은 1441년에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어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던 수재였다. 이내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집현전부교리에 임명되어 14년 동안 집현전학사로 재임하면서 집현전의 응교·직전·직제학을 두루 역임하였다. 집현전응교로 재임한 1447년 문과 중시에 합격했다. 왕명으로 진관사에서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 사가독서로 학문에 전심전력하였다.
1457년 판공주목사, 이듬해 첨지중추원사, 한성부윤이 되었다. 1460년 황해도관찰사, 이듬해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경기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62년 호조참판을 거쳐 7년 동안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1466년 팔도도체찰사를 겸해 호패법을 철저히 조사해서 밝혔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승습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70년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지성균관사를 겸했다. 1471년에는 좌리공신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집현전학사로 있을 때 《치평요람》·《고려사》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석양 무렵 소나기가 지나간 산수는 곱게 반짝인다. 주변에 절과 농가의 모습이 퍽 정겹다. 태평시절 조선에 비해 망해버린 고려에 대한 회고의 서정도 묻어난다. 문득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날개가 돋혀 곧바로 은하수까지 배를 저어가고 싶다.
15) 영호루[映湖樓] 김종직金宗直
지는 해 쓸쓸한 기운이 주렴에 어리어
누에 오른 이 마음 시름도 많다네.
출렁이는 물결은 은하수에 닿았고
덜컹대는 수레는 집을 향하네.
모래톱을 비추는 북두의 별빛
들에서 스며 오는 혜란화 향기.
달 밝은 밤 고려의 흥망을 다시 생각해 보니
재두루미 우는 소리 간장을 끊네.
落日簾旌灝氣多 倚樓愁思亂交加
逶迤湖水秋通漢 轂轆柴車夜向家
光射汀洲星斗額 香生林簿蕙蘭花
月明更想前朝事 惟有鶖鶬呌斷槎
김종직은 1453년에 진사, 1459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462년에 승문원박사 겸 예문관봉교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감찰이 되었다. 경상도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거쳐 1476년에 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이어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하여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했다. 이들 사림들이 당시 훈척 계열의 비리를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당황한 유자광·정문형·한치례·이극돈 등이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1498년에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김종직도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과 관련되어 부관참시당했다.
김종직의 그러한 절의정신이 제자들에게까지 전해져 사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 영수가 되었다. 그는 고려 말 정몽주·길재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하여 후일 영남사림의 종장이 되었다. 김종직은 문장·사학에도 두루 능했다. 절의를 중요시하여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갔다.그의 도학사상은 제자 김굉필·정여창·김일손·유호인·남효온·조위·이맹전·이종준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쳐 영남사림파의 종장이 되었다.
김종직은 석양 무렵 영호루에 오른 시인은 감상에 젖어 들었다. 나그네로 이 누대를 찾은 복잡한 내심을 비친다. 아득한 물길 끝을 바라보노라니 물결이 은하수까지 이어져 있다. 덜컹대며 지나가는 수레바퀴 소리는 생생한 삶의 현장 스케치이다. 시각과 청각적 심상의 조화로운 표현을 느낄 수 있다.
점차 시간이 흘러 어둑어둑한 밤이 되었다. 모래 벌에는 강물에 북두칠성이 곱게 반짝이고 들판에서는 혜란화 향기가 날아온다. 이 역시 시각과 후각적인 조합이다. 회고적인 시상으로 마무리했다. 휘영청 밝은 달이 오른 영호루에서 시인은 지난 고려조의 흥망성쇠를 되돌아보며 감상에 빠졌다. 재두루미 울음 소리는 그의 마음을 더욱 애닯게 하였다. 다양한 수사력을 동원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제고한 작품이다.
16) 영호루 시에 차운하며[次映湖樓] 이현보李賢輔
어려움 당했을 때 영호루에 올랐던 적 많았는데
분에 넘치는 벼슬을 받고 다시 또 왔네.
글 배우던 향교엔 옛 자취 그대로 남아 있고
역마을 머무는 곳에 주인이 살고 있네.
동분서주하며 지내느라 이미 늙었지만
청산은 예전 같아 눈에는 꽃이 피네.
긴 숲 멀리 흐릿하게 뵈는 옛 나무들
삽 십 년 동안 반은 삭정이가 됐구려.
落魄登樓歲月多 重來非分印章加
黌堂負笈留遺蹟 驛里居停有主家
白首東西身已老 靑山今古眼添花
長林遠樹渾依舊 三十年來半作槎
농암 이현보는 1498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역임했다. 1504년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됐다. 이 때에 서연관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안동에 유배됐으나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었다. 이어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다.
1523년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후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역임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됐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는 홍유달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김안국·정사룡·조광조·이황·황준량 등과 교유하였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시를 지으며 한가롭게 보냈다. 저서 《농암집》이 있다. 작품으로 〈어부가漁父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농암가〉·〈생일가〉 등의 시조 작품 8수가 전한다. 자유로운 자연에 돌아와 도의를 즐기는 세계를 표현하였다. 강호생활의 흥취를 더하여 당대 유학자들에게 고려의 속요와 차원이 다른 새롭고 신선한 노래로 받아들여졌다.
이외에 5편의 부와 다수의 한시를 남겼다. 영남 사림파에게 영향을 주어 영남가단을 형성하게 했다. 농암은 시조 작가로서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조선 초기 시가에서 조선 중기 시가로 발전하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였을 뿐만아니라 교량 역할도 수행하여 조선 시대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 문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한국문학사상 강호 시조의 주요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농암은 내외적으로 시련을 당했을 때 영호루에 올라 아프고 시린 마음을 달랬다. 만년에 분에 넘치게 안동부사로 부임하였다. 향교의 예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유풍을 이어가고 역마을의 풍경도 시에 담았다. 오랜 세월 바쁘게 내우외환을 겪어 백발의 노인이 되었고 시야도 흐려지며 눈동자도 흐릿해져 버렸다.
길게 뻗은 예전에 즐겨 보았던 나무도 이제 많이 자라나서 자신처럼 고목이 되어 여기저기 마른 가지들이 흐릿하게 보인다. 나무의 절반이 삭정이가 된 듯하여 시인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삭정이처럼 여위어가는 시인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며 애상에 젖었다. 노년을 맞아 다시 찾아온 영호루 감회를 담은 작품이다.
17) 영호루[映湖樓] 김안국金安國
湖山歲晩客懷多 牽晩風流興轉加
落日鳴鐘何處寺 淡烟疎雨幾人家
歌催郢雪飄餘曲 笛弄江梅落後花
醉倚欄干頻送目 小船漁火繫枯槎
호수 언덕에서 맞은 세모에 나그네 회포 많은데
늦게 즐긴 풍류의 흥취가 더욱 더해가네.
저녁 무렵 저 멀리 절에서 울리는 종소리 들리고
흰 안개 내려 비 오는 사이로 인가가 보이네.
초나라 표여곡을 부르기를 재촉하고
강가 매화에 앉은 눈을 희롱하며 피리 부네.
취한 채 난간에서 먼 곳을 보니
고기 잡는 작은 배의 불빛이 반짝반짝.
김안국은 조광조·기준 등과 함께 김굉필의 문인이다. 도학에 통달하여 사림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1501년 생진과에 합격했다. 1503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등용되었다. 이어 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에는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장령·예조참의·대사간·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각 향교에 《소학》』을 학습케 권했다. 아울러 농업과 풍속 교정에 필요한 《농서언해》·《잠서언해》·《이륜행실도언해》·《여씨향약언해》·《정속언해》 등의 언해서를 간행하여 계몽 사업을 펼쳤다. 각종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벽온방》·《창진방》 등을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그리고 향약을 시행토록 추진하여 교화사업에 주력하였다.
1519년에 다시 한양으로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한가롭게 지냈다. 1532년에 다시 기용되어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41년 병조판서 때에 천문·역법·병법 등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였다. 물이끼[水苔]와 닥[楮]을 화합시켜 는 털과 같은 이끼를 섞어서 뜬 종이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만들어 보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다. 중국문화를 수용하여 이해하기 위해 평생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이 뛰어나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세모에 영호루 언덕에 오른 나그네 서정을 표현하였다. 일행들과 함께 고즈넉한 풍류를 즐기고 있자니 흥취가 더해간다. 저녁 시간이 되어 멀리서 절간 종소리가 울려 나그네 심금을 자극한다. 겨울비가 내리고 뿌연 안개 사이로 인가가 조망된다. 객지에서 맞는 세모 정서와 여로 서정이 더해져 초나라 표여곡 부르기를 재촉한다.
그 사이 강가에 눈발이 나부끼고 심금을 울리는 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시인의 문학적 감수성이 발휘되었다. 취한 채 난간을 부여잡고 강물 위로 시선을 돌렸다. 낙동강 어부들의 야간 조업 광경을 말해주는 불빛이 반짝이는 정경을 담았다.
18) 영호루[映湖樓] 권응인權應仁
南州奇勝此偏多 綠樹陰濃景特加
淸磬出林鳴野寺 淡烟橫浦起漁家
半邊殘照披雲葉 一陣輕風疊浪花
江上晩凉堪濯熱 弄波鷗渚擬浮槎
남쪽 고을 명승이 여기 다 모였나
푸른 나무 그늘 짙어 보기 더욱 좋구나.
숲속 절에서 청아한 종소리 울려 오고
고운 안개 낀 포구엔 물고기 잡는 집 몇 채.
반변천 석양은 구름 조각 사이로 비치고
한 무리 바람결에 꽃물결 겹치네.
서늘한 강물은 무더위를 씻어내고
강에 노니는 갈매기는 물에 뜬 뗏목 같구나.
권응인은 16세기 초에서 임진왜란 직전까지 활약한 인물로, 퇴계의 제자이며 시문에 능하였다. 서류 출신이어서 서얼 출신은 벼슬에 재한을 두는 것에 얽혀 벼슬은 겨우 한리학관 벼슬에 머물고 말았다.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1562년에 일본 국왕의 사신이 나온다고 했을 때 누구를 선위사로 하여 응접하게 하느냐는 문제가 거론되었다. 조정에서 “전 한리학관 권응인은 글을 잘하여 그에게 필적할 만한 사람이 드물다. 지금 본도에 있으니 청컨대 관찰사에게 글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역마로 달려 선위사의 행차에 끼어 좌우에서 일을 도와 급한 일을 구하는 자격으로 보냈으면 한다.”라는 의견이 나오자 명종은 이를 윤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권응인은 송대의 시풍이 유행하던 당시의 문단에서 그는 만당 시풍을 받아들여 큰 전환을 가져오게 했으며 시평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국내에서는 남명 조식을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꼽았으며 중국에서는 소동파의 시가 가장 우수하다고 평하였다.
문인 권응인에 대한 정평은 1725년에 정진교가 올린 상소문에서 ‘조선조에 걸출했던 서얼 출신 문인을 열거하는 가운데에 박지화·어숙권·조신·이달·정화·임기·양대박·김근공·송익필 형제·이산겸·홍계남·유극량·권정길 등과 함께 거론’될 정도였다. 《어우야담》·《기문총화》·《자해필담》 등에 그와 청천 심수경에 관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시인은 영호루의 빼어난 경관에 감탄하였다. 남쪽 고을의 명승을 여기에 모두 모아둔 것 같다고 하였다. 누대 주변에 잘 자란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었고 누대와 미적인 조화를 이룬다. 가려진 숲속에서 절간의 맑은 종소리 울리고 안개 피오르는 포구에 어부집 몇 채도 정겹다.
반변천 위로 석양빛이 곱게 물들고 바람결에 강의 물결이 꽃무늬처럼 장식되었다. 섬세한 시인은 강 위에 펼쳐진 작은 움직임까지 모두 녹화하듯 모두 담아내었다. 서늘한 강물 위로 부는 바람은 누대 위 지친 나그네의 심신을 상쾌하게 하였다. 강물 위로 둥둥 떠다니는 물오리와 철새는 뗏목과 같다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19) 영호루[映湖樓] 이황李滉
나그네 시름 비 만나 더한데
가을 바람 부니 더욱 심란하여라.
홀로 누에 올랐다 해져야 돌아오니
술을 마시며 집 그리움 잊는다네.
은근히 벗을 불러 돌아가는 제비는
쓸쓸히 정을 품고 때늦은 꽃을 향하네.
한 곡조 맑은 노래 숲속에서 들리나
이 마음 어쩌다 마른 삭정이 되었나.
客中愁思雨中多 况値秋風意轉加
獨自上樓還盡日 但能有酒便忘家
慇懃喚友將歸燕 寂寞含情向晩花
一曲淸歌響林木 此心焉得似枯槎
퇴계 이황은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웠다.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했다. 1527년 향시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였다.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 해에 진사회시에 급제하였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 153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혔다. 1543년 10월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 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였다.
1546년에 고향 낙동강 상류 토계리에 양진암을 짓고 독서에 전념하였다. 1548년에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 이해가 충청감사가 되어 오는 것을 피해 부임 전에 자청해서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 중 안향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서적·학전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짓고 심성 공부에 주력하던 중 1552년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1556년 홍문관부제학, 1558년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사양했다. 1543년 이후부터 관직을 사퇴했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1560년 도산서당을 지었다. 이후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명종은 예를 두터이 해 자주 이황에게 출사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황의 명망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이황을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며 간절히 초빙하였다. 이황은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올렸다. 이어 어린 선조에게 《성학십도》를 저술하여 올렸다. 1570년 노환을 겪다가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고 한 뒤에 단정히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였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로 집행되었지만 산소에는 퇴계의 유언대로 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가을철 나그네 서정을 그렸다. 복잡다단한 시대를 살아갔던 시인은 수심이 가득할 때 홀로 영호루에 올라와 시름을 달랬다. 해가 진 뒤에야 누대에서 내려왔을 만큼 영호루는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곳이었다.
나그네 시름과 고향 집에 대한 그리움을 술로 달래는데 벗을 불러서 함께 돌아가는 제비 한 쌍을 보며 부러움을 느낀다.
그때 숲속에서 청아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시인에게 그에 응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경관이 빼어난 영호루에서 나그네 서정과 향수를 담은 작품으로 선비 학자의 품격이 함축되어 있다.
20) 영호루를 지나가다가 차운하며[過映湖樓次韻] 구봉령具鳳齡
성안의 명승이 낙동호에 많으니
임금님 지난 곳에 좋은 기상 더하네.
금자현판 은하수에 그림자 지고
붉은 기와 우연히 누각을 비추네.
누대 떠난 객은 천추의 학이 되었고
피리 소리에 매화 지고 오월 꽃 피네.
선비들 해마다 강 위에 모여 즐기니
이곳 사람 다투어 뱃놀이 구경하네.
府城名勝洛湖多 鳳輦經過氣像加
金牓影搖銀漢界 朱甍光拂太淸家
樓中客去千秋鶴 笛裏梅殘五月籠
冠盖年年江上會 路人爭指泛仙槎
구봉령은 1546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6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예문관검열·봉교를 거쳐 홍문관정자에 이르렀다. 1564년 문신정시에 장원하였다. 이어 수찬·호조좌랑·병조좌랑을 거쳐 1567년에 사가독서하였다.
이후 정언·전적·이조좌랑·사성·집의·사간을 거쳐 1573년에 직제학이 되었다. 이어 동부승지·우부승지·대사성·전라관찰사·충청관찰사 등을 거쳐 1577년 대사간에 오르고 이듬해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의·형조참의를 지냈다. 1581년 대사헌에 오르고 이듬 해 병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구봉령은 한때 암행어사로 황해도·충청도 등지에 나가 흉년과 기근으로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하였다. 당시 동서의 당쟁이 시작될 무렵이었으나 중립을 지키기에 힘썼다. 시문에 뛰어나 기대승과 비견되었다.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혼천의기〉를 지었다. 만년에 정자를 세워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안동 고을 명승이 낙동강 일대에 즐비하다. 공민왕의 몽진 역사가 스민 곳이어서 좋은 기상이 더해지고 하사한 친필 현판도 빛을 발한다. 금빛 글자가 은하수 빛과 닿아있고 붉은 기와는 누각을 비추고 있다.
누대를 다녀갔던 셀 수 없이 많은 시인들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의 남긴 시문은 게판이 되어 남아 있다. 역사를 회고하는 회고 서정이 반영되어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 매화가 지고 오월의 꽃은 떨어진다. 선비들이 해마다 이 누대에 올라 멋진 풍광을 즐기거나 선유를 즐기기 때문에 안동 고을 주민들은 매년 그 풍류놀이를 즐긴다. 멋과 풍류의 안동 고을 주민 생활풍속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