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와 성장
영화 <400번의 구타>, <인간합격>, <도쿄소나타>을 중심으로
2005115283 조한솔
“새는 알로부터 나오려고 싸운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은 아프라삭스라 불린다” 소설「데미안」의 유명한 구절이다. 나는 이 구절을 가장 좋아하고 항상 마음속에 새긴다. 이를 통해 탈주와 성장, 경계와 경계 허물기 등 인문학적으로 생각할 거리와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400번의 구타>를 처음보고 이 구절이 떠올랐다. 탈주는 성장을 동반한다. 경계에서 빠져 나왔을 때 비로소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고, 이런 인식의 변화를 통해 우리는 성장을 할 수 있다. <400번의 구타> 영화의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말이 나오는 마지막 장면의 트래킹쇼트는 이러한 탈주를 이미지로 명확하게 드러낸 명장면이기에 사람들의 머릿속에 가장 남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나는 그래서 영화들을 통해 성장의 시작인 ‘탈주’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내가 처음 영화과에 온 것은 하나의 탈주였다. 흔히 말하는 좋은 대학가서 좋은 직업을 가지는 하나의 ‘레일’위에서 벗어나 전혀 알 수 없는 세계로 들어온 일탈. 지방의 특성상 문화 예술 관련한 정보나 직업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할 수 없었기에, 영화과를 간다는 선택은 하나의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일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영화과에 와서 나는 시스템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많이 했었고, 관련 영화를 즐겨 봤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성 또는 주체적 삶, 개인의 일탈들이 나에게 쾌감을 주었고, 나 역시 그러한 작품들을 만드는 고민들을 즐겨왔다. 이렇게 영화를 하는 과정에서 인상 깊게 만난 감독이 ‘구로사와 기요시’다. 나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들이 현대 인간의 단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400번의 구타>와 연관을 지어 생각하고 싶은 작품은 <인간합격>과 <도쿄소나타>이다.
<인간합격>은 몸은 성장했지만 성장하지 못한 청년(소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유타카는 14살 때 고통사고를 당해 24살에 깨어난다. 마음은 14살인데 몸은 24살이다. 10년동안 세상도 많이 달라져 혼란스럽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사고전과 같은 점은 하나도 찾을 수 없다. 자신을 돌보는 것은 아버지의 친구이고, 예전 친구들과 노는 것도 다르다. 여기서 주인공에게 주변사람들이 요구하는 ‘성장’은 사실 긍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성장을 멈춘 것으로 보이는 14살의 자신의 환경으로 되돌리려는 노력들이 의미 있게 보인다. 흩어진 가족들을 모으고, 공터에 목장을 건설하는 그의 노력은 <400번의 구타>의 앙투안의 여러 가지 행동들과 겹쳐진다. 사회는 항상 급변하고, 그 속도를 맞춰야하는 개인은 한순간이라도 그 성장을 멈추면 도태된다. 이 도태는 다른 의미의 ‘탈주’이다. 이 도태라는 ‘탈주’는 사회가 요구하는 성장에 반한다는 아이러니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나에게 안타까운 지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주인공의 죽음을 통한 경계 넘기를 통해서 다시금 그것을 뒤집는다. 주인공의 죽음을 때문에 모인 사람들의 롱쇼트는 결국 사회가 요구한대로 성장한 현대인이 전혀 ‘성장’하지 않은 것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쿄소나타>는 회사의 해고되었지만 가장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그 사실을 숨기는 가장, 가족들의 관심 밖에서 항상 외로움을 느끼는 엄마, 미군이 되려고 하는 큰 아들, 기성세대의 위선과 거짓을 싫어하고,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막내 아들 켄지. 이 네 명의 탈주와 그를 통한 개개인의 성장 및 가족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데, 영화의 많은 부분이 <400번의 구타>의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켄지의 교실에서 만화책을 돌려보다 걸려 생기는 선생님과 대립 장면은 <400번의 구타> 초반의 성인 잡지를 돌려보는 교실의 모습과 같고, 후반에 켄지가 무임승차 후 경찰에게 잡혀서 구치소로 들어가기 전에 사진을 찍는 장면 역시 앙투안이 소년원 비슷한 곳에 들어가기 전 사진을 찍는 것과 같다.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 켄지가 각각 탈주를 하는 후반 시퀀스 역시 <400번의 구타>의 마지막 앙투안의 탈주 트래킹쇼트와 닮아있다.
내가 주의 깊게 보는 부분은 이 탈주 부분인데, 이 탈주 시퀀스가 변주되는 부분들의 차이를 생각하면 매우 재미있다. 어머니는 집에 침입한 도둑의 인질로 벗어나기 쉽지 않았던 집에서 나온다. 그 도둑은 평소 자신이 갖고 싶었던 차를 훔쳐 타고 왔다. 이때 어머니는 자신의 갖고 싶던 차로 인해 탈주를 시작하며 중간에 자신의 남편과 마주치고는 그 결심히 확고해진다. 도둑과 함께 간 곳은 바로 바닷가이다. <400번의 구타>에서도 바닷가는 앙투안이 탈주 이후 마주친 새로운 경계였듯이 <도쿄소나타>에서도 이 바닷가는 어머니가 탈주 후에 마주친 경계인데, 어머니는 그 바다를 향해 들어간다.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말을 되뇌면서 말이다. 도둑은 그런 어머니를 구해주고 해변가 오두막에서 밤을 새운다. 다음날 어머니가 일어났을 때 오히려 같이 있던 도둑이 없고, 밖에는 그가 차와 함께 바다로 향한 바퀴자국만 있다. 이 부분은 살짝 위트가 있다. <400번의 구타>에서 앙투안의 마지막 표정처럼 그 바퀴자국은 나한테는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아버지의 탈주의 결말은 사고를 통한 죽음이고, 아들은 무임승차로 인한 범죄자가 된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들은 마치 탈주가 하나의 환상이었던 것처럼 다음날 다시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는다. 탈주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바는 사실 그간 작품들에서 집요하게 의문을 던졌던 주제하고 맞물린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대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부품처럼 살아가는 개인들이다.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쉽지 않고 오직 벗어나는 방법은 미치거나, 범죄자가 되거나, 죽는 것이다. 과연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지만 <도쿄소나타>에서는 자그마한 희망을 보여준다. 인물은 탈주 후에 자신 스스로 경계 짓던 것을 허무는 식으로 조금의 성장을 했고, 그 성장을 통해 가족은 다시 하나가 된다. 마지막으로 켄지가 치는 피아노의 선율은 듣고 있으면 앞으로 이 가족이 전보다는 나은 관계가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
사회가 거대해 지면서 인간은 주체적인 삶을 살기 힘들어졌다. 나도 영화과에 들어오면서 하나의 틀을 깼지만 이내 다시 새로운 다른 틀에 부딪히게 된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도의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라든지, 장남으로서 가족 안에서의 역할, 등등 말이다. 나의 현재의 욕망은 감독이 되고 싶은 것이지만 주변 상황들은 쉽게 나를 놔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반복 속에서 고민하고 탈주하고 성장해가는 내 모습이 삶을 차이를 만들어 내고 이러한 차이가 내가 살아가는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