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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축복받기에서 축복하기로 전환된 삶>의 줄거리 :
하나님의 좋음과 하나님 주권의 살아 있음을 재발견한 야곱이 첫발을 내딛게 된 낯설고 어색한 세상. 이 세상은 선민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들어가 살아야만 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 들어가서 살게 되면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는 곳과 노는 물이 다르고 또한 가진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기존의 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서 기존의 세상에서는 전혀 가질 수 없었던 것을 가짐으로써 특이하게도 항상 다른 사람을 축복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축복받기에서 축복하기로 전환된 삶
(창세기 47:1~12)
1.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2. 그의 형들 중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
3.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4.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 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5.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6.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
7.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11.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12.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
본문에는 요셉을 찾아 애굽에 온 야곱의 가족들이 고센 땅에 머무르게 되는 과정과 야곱이 바로를 알현하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11절을 보면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이라는 지명이 언급됩니다. 라암셋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고센 땅에 세워진 성읍을 말합니다. 야곱 당시에는 없었지만 사람들이 편하게 이해하도록 모세 당시의 지명을 표기한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을 중심으로 ‘축복받기에서 축복하기로 전환된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접하는 많은 인물들은 현저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열두 사도로 바뀌었으며,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 또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선교하는 사도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체험한 자들의 행렬에 빠지면 안 되는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 어머니 리브가와 모의하여 염소 가죽을 입고 아버지 이삭 앞에 나와 자신을 에서라고 속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사건 자체는 비윤리적이지만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복음을 받아들임이 가능한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야곱은 축복받기에 목숨을 건 사람입니다. 환도뼈가 탈골되고 하나님이 한 번만 더 치시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자기가 복이라고 생각하는 세상 것들을 지켜내고자 하나님과 씨름하여 기어코 이겼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복을 정해놓고 받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오늘도 지구상 80억 인구가 축복받기의 과정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중에서 지독할 정도로 축복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지만, 본문에서는 축복을 해주는 자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급격한 변화가 요셉을 통해 일어난 것을 보았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요셉은 펄펄 살아서 이 땅에 내려와 역사하시는 하나님 주권의 상징이자 증거입니다. 야곱은 이 세상 것을 주체적으로 열정을 다해 추구해 왔습니다. 이러한 야곱에게 요셉은 이제까지 살아온 백삼십 년 인생을 험악한 세월로 규정짓는 계기가 됩니다. 쉽게 말해 ‘나는 전적으로 잘못 살았다. 하나님의 주권을 거슬렀기에 험악한 인생이 되었다.’라고 고백하게 하는 계기가 요셉입니다. 야곱으로서는 이제 여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으나 뒤늦게나마 어색하고도 낯선 세상 안으로 발을 딛게 됩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을 통해 증명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세상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살아지는 세상 안으로 들어가서 처음으로 한 일은 애굽의 바로에게 축복한 것입니다. 축복받기에 있는 힘을 다했던 야곱이 축복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요셉을 계기로 삼을 수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물놀이하듯이 흘러가는 삶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야곱에게는 여전히 이 세상 것이 좋아 보였을 것입니다. 또 이 세상 것을 주체적으로 추구하고 얻어내는 인격의 특징을 유지하였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야곱은 애굽의 궁정에 초대받았더라도 바로를 축복하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 야곱의 마지막 삶의 단계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바로가 야곱과 그 아들들에게 고센 땅을 삶의 터전으로 허락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합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살펴보게 될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요셉의 기근 정책이 소개됩니다. 이러한 내용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열거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요셉의 기근 정책이 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은 자신의 장지를 가나안 막벨라 동굴로 정하는 유언을 남깁니다. 47장에 기록된 이러한 네 가지 내용 즉 고센 땅을 허락받은 것,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는 것, 요셉의 기근 정책, 야곱이 자기의 매장지를 유언한 것은 하나님 주권의 흐름에 올라타는 삶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야곱 일가가 고센 땅에 정착하는 것과 야곱이 바로를 축복한 두 가지 내용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먼저 야곱 일가에게 고센 땅이 허락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꼭 지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을 삶의 터전으로 지정해 주십니다. 인류가 타락한 이후에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살아갈 곳으로 가나안 땅을 지정해 주십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선민의 자격 요건을 갖추게 하시기 위하여 준비 단계로 살아야 할 곳으로 고센 땅을 지정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신 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선민에게는 어떤 땅을 지정해 주셨을까요?
이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민이 어떤 자들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를 선민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죄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선민이란 죄 사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을 만큼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선민에게는 꼭 장소를 지정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가 승천하신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어떤 땅을 지정해 주신다는 것일까요? 선민은 십자가 예수님과 결합하여 ‘나는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라는 의식이 유지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육체를 입은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내 마음은 이제 십자가에서 육체를 벗고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라는 의식이 삶의 현장에서 유지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몸을 입고 있다는 자아의식이 유지되고 있는 선민들에게는 에덴과 가나안과 고센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들이 거하게 되는 고센 땅은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입니다. 선민은 땅에서 사는 동안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합니다. 이러한 하늘과 땅을 아우르고 있는 이상한 장소가 바로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의 현상입니다. 삼각형의 꼭짓점처럼 삼위 하나님이 일체 되시는 현상이 선민에게 지정해 주시는 가나안이며 회복된 에덴이며 고센 땅입니다.
고센 땅은 광활하고 비옥한 나일강 삼각주에 접한 지역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삼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연상시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은 세 꼭짓점을 이루어 일체가 되어 계십니다. 그 일체 되심에 우리의 인격이 사위를 이룹니다.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에 참여하는 상황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몸을 입었다는 의식을 유지하는 선민이 되면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삼각형의 한 꼭짓점이 되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과 더불어 일체가 되어 계십니다. 우리 마음이 그 삼각주를 터전 삼아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일가가 머물게 된 고센 땅이 결과적으로 어떤 효과를 발휘하게 될까요? 본래 애굽은 광활하고 비옥한 나일강 삼각주를 기반으로 한 농업이 중심이었습니다. 따라서 목축업보다는 농업이 우대되었고, 목축업을 하는 자들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게 취급되었습니다. 주석을 보면 심지어 외모상으로 열등한 자들이 주로 목축업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또한 농경에는 소가 필요했기에 소를 잡아먹는 것을 불경하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애굽 사람들은 목축업을 하는 자들을 부정하게 여겨 거리를 두고자 했습니다. 고센 땅은 분명 좋은 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야곱의 일가를 애굽 사람들과 격리하고 분리하는 장소가 됩니다. 애굽 안에 있었으나 애굽의 선진문명과 문화가 흡수되기 어려운 고립된 장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지만,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차단된 터전에서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마음을 주지도 않으며, 세상 사람들의 참여도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세상 속에서 격리된 장소가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의 땅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들이 선민입니다. 이러한 선민은 마음에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과 하나 됩니다. 다만 여전히 몸은 이 땅에 남아있습니다. 이 몸은 성령님이 장갑으로 끼시고 아버지의 뜻과 계획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 땅과 하늘을 아우르는 삼각주인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이 우리가 들어가 살아야 할 마음의 부동산이자 삶의 터전입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세상을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이루시는 삼각형 안에서만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삶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이 삼각형은 세상 사람 누구도 알지 못하고 참여할 수도 없는 땅입니다.
그렇다면 고센 땅으로 상징되는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의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야곱이 바로를 축복한 사건을 통해 그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기존에 마음이 육체를 입고 살던 때는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위해 축복받기를 경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예수님을 입은 자라는 의식을 갖고 난 후에는 축복하기의 달인으로 살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7장 7절을 보면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리사랑 치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리사랑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치사랑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축복은 내리 축복은 있어도 치 축복은 없습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축복할 수는 있어도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축복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바로를 만났을 때의 상황은 어떨까요? 야곱은 바로 앞에서 ‘애굽의 일인자 바로시여 만수무강 하옵소서.’라고 말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적인 기원이지 축복은 아닙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복을 빌어줄 수 있는 위치에 서기 위해서는 바로보다 높아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 월등한 축복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타인을 축복해 줄 수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사람이 음식을 권할 수 있듯이, 축복의 맛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기원은 기껏해야 자기가 아는 수준에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윗사람도 익히 아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자기가 좋다고 여기는 일을 빌어주는 것이기에 진정한 축복의 의미와는 동떨어진 일입니다. 진정한 축복이란 축복을 받는 사람이 그 의미를 알 수도 없습니다. 그 정도로 높은 수준의 복을 빌어주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 높은 복을 아는 사람이어야 상대가 아직 모르는 복을 빌어줄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인 줄도 모르는 높은 수준의 복을 알게 될 사람으로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아브라함에게만 진정한 복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만인을 위한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만인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자가 된 것입니다.
축복받기에 열을 올리며 살던 야곱의 입장에서 바로의 궁정은 세상의 좋음이 전부 모인 자리였습니다. 야곱으로서는 맛도 못 본 좋은 것들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입장이었다면 야곱은 바로를 축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재선에 성공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을 축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가진 막대한 재산과 권력 앞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민으로서 트럼프 대통령이 맛본 적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트럼프 대통령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갖고 누리는 진정한 복을 트럼프 대통령은 맛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바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형편으로 보면 야곱은 가나안의 헤브론을 떠나온 거지와 같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양 떼 몇 마리를 끌고 와서 바로의 호의로 고센 땅에 정착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반면 바로는 애굽 땅 전체의 주인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흔히 미국의 대통령을 전 세계 대통령이라고 부릅니다. 일개 서울 시민이 전 세계 대통령이라는 트럼프를 축복하는 것과 같은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전 세계 대통령이라고 부를만한 트럼프가 누리는 부와 권력과 세상의 가치는 막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도 맛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어느 정도로 누리고 사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 권력의 위치에 서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너는 내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사건을 통해 나의 선민으로 택함을 받은 자다. 나는 이제 네 마음이 살아야 될 고센 땅을 지정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아야 될 고센 땅이란 창조주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에 의해서 형성된 삼각주입니다. 이러한 고센 땅에 거하는 선민들의 특징은 축복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자들을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선민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를 입은 사람들이 복으로 여겨 추구하는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민이 세상 사람들을 이길 정도로 복을 많이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조차 맛본 적 없는 축복을 주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 것만 맛있다고 고집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세상 것을 달라고 씨름하는 얍복강가의 야곱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이요 증거인 요셉을 만나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족하다고 말하며 이 세상을 향해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습니다. 족하다는 말에는 ‘이 세상에서 축복받기는 이제 끝났다. 이 세상에서 축복 지키기는 이제 끝났다. 더 이상 이 세상 것은 어떤 것도 축복받기를 원치 않겠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통해 소개된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색하고 낯선 세상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습니다. 야곱은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재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세상 것을 축복으로 받기 위하여 달려가던 시절에는 하나님이 세상 것을 주시기도 하시고 지키시는 분으로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요셉을 통해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영광의 조명을 받으셔야 하며 유일한 좋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낯설고 어색한 세상에 들어가면 내 마음의 주체성은 영광의 하나님께 몰입될 수밖에 없고, 이 세상에서 몸을 입고 사는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 수 없습니다. 이제 요셉에게서 나타났던 것처럼 육체로 살아야 되는 삶이라는 배는 하나님 주권의 강물에서 두둥실 떠오르는 뱃놀이가 됩니다.
야곱은 이제 영광의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의 주권이 이끌어가시는 삶이 살아짐을 뼛속까지 느끼고 알았습니다. 이러한 야곱이 애굽의 바로 앞에 섰습니다. 바로는 온 세상의 가치를 다 가졌지만, 야곱은 바로가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함을 보았습니다. 바로의 마음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본 사람의 특징은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영광의 하나님은 마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백의 마음이 곧 우리의 영입니다. 이제 야곱은 바로의 영이자 공백의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궁정을 돌아보면 모든 좋은 것이 가득했고 애굽 전체가 바로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봅니다.
바로의 비어있는 마음을 볼 수 없다면 축복 해줄 수 없습니다. 복을 빌어줄 수 있었던 것은 복을 받을 자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여전히 이 세상 것을 복이라고 생각한다면 바로의 궁정에 들어가서 무엇을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축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바로를 마주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없음을 봅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제 영광의 하나님이 없으면 마음을 채울 길이 없음도 알고 있습니다.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알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되는 중에 다 쓰임새를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어떤 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이로부터 높은 자와 낮은 자가 결정됩니다. 축복을 해주는 큰 자와 축복을 받는 작은 자가 결정됩니다. 가장 큰 복의 맛을 본 사람만이 축복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특징은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복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세상 것이 어디까지 없어도 마음이 만족하고 괜찮은가를 보는 것이 큰 자를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세상 것이 없으면 없을수록 그런데도 괜찮고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평안하고 평안한 정도가 아니라 기쁨이 넘쳐난다면 그 사람은 모든 자를 축복해 줄 수 있는 큰 사람입니다.
우리는 축복받기를 원하거나 많은 축복을 긁어모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아예 축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복 받기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바둥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을 주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내가 기뻐하고 만족하고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세상 것은 필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것이 필요 없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복을 줄 수 있는 높은 자이고 큰 자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것이 없어도 기쁨이 유지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라고 보십니까? 남편이 돈을 못 벌어와서 번듯한 아파트 하나 없는 것이 불만이라면 너무 작은 자입니다. 십자가 가족 중에도 일식당에서 접시 닦으며 고시원에서 혼자 사는 분이 계십니다. 그래도 선민으로서 예수님의 몸을 입었다는 의식이 유지되는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각주인 고센 땅에 머물면서 영광의 하나님만을 추구하고 산다면, 우리나라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재벌들까지 다 이분께 가서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고시원에 살아도 대통령에게 축복을 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높은 자만이 낮은 자에게 축복해 줄 수 있습니다. 선민은 높은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높아지고 싶어서 높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었다는 의식 없이 사는 세상 사람들이 상상도 못하는 맛의 축복을 알고 있기 때문에 높은 자가 됩니다. 십자가 가족들이 모일 때는 다 똑같지만, 고시원에 사는 형제가 세상에 나가면 누구보다도 높은 자입니다. 대통령 앞에서, 판검사 앞에서, 대학 총장 앞에서, 대기업 재벌들 앞에서, 야곱이 바로를 축복했듯이 축복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선민은 예수님의 몸을 입었다는 의식을 켜놓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선민들이 맛보는 영광의 하나님을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복을 빌어주는 복의 근원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목말라하는 세상의 복을 같이 추구하며 경쟁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 주권의 강물에 의해서만 흘러가는 인생은 낯설고 어색한 세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목말라하는 복을 같은 대열에 서서 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축복을 해줄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자격은 예수님의 몸을 입고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마주할 때입니다. 아무쪼록 축복받기의 삶을 전전하던 모습을 벗어나 예수님의 몸을 입은 하나님의 장자라는 의식을 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영광의 하나님을 갖지 못한 모든 자들을 축복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는 이 장면이 우리 여생의 매일 매일의 장면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