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눈썹차양 하는 엄마
이영백
1949 기축년 사월 해 길고긴 날이었던 열이틀에 엄마와 나는 처음 이 세상을 만났다. 엄마는 마흔넷에 날 낳으려던 날 천연두 마마를 앓았다. 그 후 엄마는 곰보가 되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를 낳아 길러 준 고마움을 늦은 나이가 들어서야 이제 알게 되었다. 참 형광등의 수준이다.
엄마는 열 자식 낳아 기르며 논밭농사와 길쌈으로 평생 고생만 하였다. 특히 자식을 많이 낳아서 손과 다리는 관절염이 왔다. 늘 신경통 하얀 알약을 복용하였다. 수시로 베틀에 올라앉아 허리춤을 묶어야만 하였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와도 종일 베틀에서 내리지 못하고 매일 두석 자씩 베를 짰다. 날줄 그 작고 가는 한 올 바디로 치면서 아팠음에도 씨줄 늘려 베를 차곡차곡 짜내는 것이다.
초교졸업 후 서당에 가서 공부하였다. 아버지 개똥교육철학이 참 싫었지만 표현도 못하고 혼자만 속 끓이다가 강의록으로 중학교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뭔가 부족하여 시험 치러서 장학금은 받았지만 학자금이 없다. 해결방법은 스스로 돈벌이할 뿐이다. 아버지가 무서워 집에도 못 들어가고, 큰 누나 집에 얹혀서 아침밥과 잠을 해결하였다. 점심과 저녁은 스스로 돈 벌어 해결하였다.
한 번 집에 갔다가 아버지에게 잡혀 가방을 빼앗기고 책은 부엌 잿더미 속으로 던져졌다. 엄마는 부리나케 책을 끄집어내어 책가방에 주워 담아 울타리 사이로 내어 주었다. “공부 하려거든 집에는 다시 오지마라.” 아주 부드러운(?) 말 한 마디를 나에게 명령처럼 내리었다. 참 무정하다. 내가 몹쓸 전염병에라도 걸린 것인가? 흐르는 눈물은 감당할 수조차 없다. 울음도 참고 속으로 울어야 하였다.
어린 나는 기가 찼다. 눈물을 훔치며 돌아서는 나를 보지 않으려고 엄마는 고개마저 돌렸다. 그렇게 헤어져 일 년을 채웠다. 아르바이트는 무엇이라도 모두 하였다. 가정교사, 봄에는 편지쓰기 어려워하는 어른들께 글 써드리기, 여름시작이면 모내기 일당벌이로 막일도 하였다. 가을이면 타작일 돕기, 겨울시골에는 일이 없다. 가정교사 일자리뿐이다. 이런 일로 세월 보내었음에도 아버지와 만남이 무서웠다. 엄마 만나러 가기도 어려웠다. 공부 때문에 홀로 버려진 고아이다.
신학문하려는 데 못하게 한 아버지의 원망은 뼈에 사무쳤다. 엄마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니 속수무책이다. 엄마는 병약한 막내가 신학문 한다고 나가 돈 벌고, 공부하려는 자식을 늘 마음으로만 그리워하였다.
엄마는 매일 집 뒤 높은 언덕에 올라앉아 혹시 막내가 하마 돌아올까 기차역에서 내려오는 들판 논둑길을 바라보았다. 햇빛에 눈 시리면 눈썹위에 손으로 가려 멀리 바라보는 모습인 “눈썹차양”하고 기다렸다고 돌아가시기 전에 고백처럼 들려주었다. 공부가 무엇이기에 왜 엄마는 눈썹차양 하고 막내를 기다렸을까?
첫댓글 엽서수필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