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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이야기 첫머리에서 스위스에서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은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인(UG Krishunamurti) 것으로 보입니다. 유지는 인도 사람이지만 유럽 여행중 부인과 이혼을 했고, 거지가 되어서 유럽 여기저기를 떠 돌다가 스위스 국경검문소에서 근무하는 여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그녀와 함께 살게 됩니다.
깨달음의 순간에 대해서 유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날, 면도를 하는데 면도가 되지 않고 면도기가 자꾸 미끄러졌다. 그러다가 거울을 자세히 보니 얼굴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후 죽을 뻔 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아는 지인이 이상하게 유지가 살고 있는 곳을 가고 싶더랍니다. 그래서 가 보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고... 이후 커피를 마셨는데 금방 마시고 커피 맛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 또 마시고.. 또 마시고 계속 마시다가 그녀에게 "당신처럼 커피 마시다가 생활비 바닥난다" 라는 핀잔을 듣게 되고..
아래 영상은 직접 유지 크리슈나무르를 만나 인터뷰를 한 온 최준식 교수가 말하는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LYxgLGRAys
길은 없지만 가야할 길 저자 최준식 교수...dayonha
17. 진리는 순수한 것이다...아이 앰 댓 (I AM THAT) 하권
M: 자네 돌아 왔구만, 어디 있었어? 뭘 보고 왔나?
문: 스위스에서 오는 길입니다. 거기서 깨달았다고 하는 분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 분은 과거에 요가를 많이 했고 많은 체험도 했답니다. 지금은 어떤 특별한 능력도 없고 지식도 없고 독특한 유일한 일은 감각과 관계된 것입니다. 그 분은 보는 사람과 보이는 것을 구분을 할 수가 없답니다. 차가 자신에게 돌진해 오는 것을 볼 적에 차가 자기에게 달려오는 건지 자기가 차에게로 달려드는 건지를 모릅니다. 아마 그 분은 동시에 보는 자와 보이는 자 모두인 것 같습니다.
그 둘이 하나가 되어서, 그가 보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기 자신으로 보이는가 봅니다. 몇 가지 베단타 철학에 관한 질문을 했을 때, "난 정말 대답할 수가 없어. 몰라, 내가 아는 건 내가 지각하는 모든 것과의 이 이상한 일체감뿐이야. 이렇게 되리라곤 정말 몰랐어"라고 하시더군요. 이 분은 전체적으로 아주 겸손한 분입니다. 제자도 없고 법좌에 올라가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이상한 상태에 대해서 말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뿐입니다.
M: 지금은 자신이 아는 것을 알고 있어. 나머지 모든 것은 끝났지. 적어도 그는 아직 말을 하는데, 아마 조만간 말도 그만 두게 될 거야.
문: 그리고 나서는 무엇을 하게 될까요?
M: 움직이지 않고 침묵을 한다고 해서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꽃은 전 우주를 향기로 가득 채우고 촛불은 빛을 밝혀 준다네. 이것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단지 그들이 존재함으써 모든 걸 바꿀 수가 있지. 타오르는 촛불을 사진으로 찍을 수는 있지만 빛을 찍을 수는 없다네. 자네가 그 사람을 알고 이름을 알고 외모를 알 수는 있지만 그의 영향은 알 수 없어. 그의 존재 자체가 활동이니까.
문: 활동을 한다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닙니까?
M: 누구나가 활동적이기를 원하지만 그의 활동은 어디서 생겨난 건가? 중심점이 없이 하나의 행동이 또 하나의 행동을 무의미하고 고통스럽게 끝없이 계속 낳아갈 뿐이야. 일과 휴식의 교대가 없어. 모든 움직임이 탄생하는 불변의 중심을 발견하게나. 바퀴가 중심축의 주위를 돌아가듯이 우린 언제나 중심축에 있어야지 주변부에서 돌고 있으면 안 돼.
문: 그걸 실제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M: 마음에 하나의 상념이나 욕망이나 두려움의 느낌이 생겨나면 그냥 거기서 무관심해 버리게나.
문: 생각과 느낌을 억압하면 반작용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M: 난 억압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관심을 돌려버리라고 하는 거야.
문: 마음의 움직임을 묶어두려면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M: 그건 노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그냥 생각 사이의 틈을 바라보라구. 생각을 보지 말고 말이야. 여러 사람들 속에서 걸을 때 스치는 사람들 모두와 싸우지 않으며 그 사이의 길을 가는 것처럼 말이야.
문: 만약 제가 마음을 통제하기 위해서 의지를 사용한다면 에고를 강화할 뿐입니다.
M: 물론이야. 싸움이 낳는 것은 싸움일 뿐이야. 그러나 저항을 하지 않으면 저항과 만나지 않게 돼. 게임하기를 거절하면 거기서 벗어난 게 아니겠나?
문: 마음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M: 천 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실제로 시간은 전혀 요구되지 않아. 필요한 거라곤 아주 진지해지는 것뿐이지. 여기서는 의지가 바로 행동이야. 만약 진지해지면 얻을 수가 있어. 결국에 이건 태도의 문제야. 두려움이 없다면 지금 여기에서 깨닫는 것을 말릴 사이도 없어. 자넨 지금 삿되지 않은 존재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거야. 이건 아주 간단해. 욕망과 두려움과 또 이것들이 만들어내는 생각으로부터 등을 돌리면 그 순간 즉시 본연의 상태로 존재하게 되지.
문: 조건을 바꾼다거나 마음을 바꾼다거나 없앤다는 문제가 없습니까?
M: 전혀 없어. 마음을 그냥 내버려 두게나. 그걸로 모두 끝이야. 마음과 함께 가지 말아. 결국 자네의 법칙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들 마음대로의 법칙을 따라서 왔다가 가버리는 그러한 생각들과 별도로는 마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아. 자네가 거기에 관심을 보이니까 그 생각들이 자네를 지배하지 않나? 사탄에 저항하지 말라고 예수께서 하신 말도 바로 그거야. 악에 저항함으로써 그것을 강화시켜 줄 뿐이라네.
문: 예 이제 알겠습니다. 제가 할 일이라곤 악 같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해 버리기만 하면 되는군요. 그러면 그것은 저절로 없어지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일종의 자기암시 같은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M: 자기암시는 우리가 자신을 한 개인으로 선과 악 사이에 묶여 있을 적에 가동되는 것이야. 내가 요구하는 것은 그걸 그만 두고 깨어나서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야. 스위스에 머무르며 그 이상한 사람과 사귀면서 무엇을 얻었나?
문: 전혀 없습니다. 그의 체험은 제게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나 이해하게 된게 있다면 찾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여행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죠. 뭔가를 발견한다는 것은 자꾸 옮겨 다닌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M: 그렇지. 자네는 얻고 잃을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야.
문: 그것을 무욕(포기)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M: 포기할 거라고는 없어. 긁어모으기를 그만두기만 하면 돼. 주기 위해서는 가져야 하고 가지기 위해서는 취해야 한다네. 취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아. 포기를 한다는 것을 연습하게 되면 소위 영적인 자부심이라는 위험한 형태가 생겨날 수도 있으니 취하지 않는 것이 더 간단하지. 이처럼 재어보고 고르고 바꾸고 하는 것은 모두 영적인 시장에서 쇼핑을 하는 셈이야. 거기서 도대체 무슨 사업을 하고 있겠단 말인가. 무슨 장사를 할 셈인가? 장사를 하기 위해서 나온 게 아니라면 이처럼 선택을 위해서 계속 근심을 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안정되지 못하면 어디에도 이를 수가 없어. 사실 필요한 건 전혀 없는데 그걸 자각하지 못하도록 무언가가 막고 있는 거야. 그것을 찾아서 그것의 허위를 보도록 하게. 이건 마치 독약을 삼키고 물을 먹고 싶어서 갈증 때문에 고생하는 것과 같아. 왜 온갖 것을 마시는 대신에 독약을 없애 버려서 그 타는 듯한 갈증을 없애지 않나?
문: 저는 이 세상을 없애 버려야 합니다.
M: "나는 시공 속의 한 개인이다"라는 느낌이 바로 독약이야. 어떻게 보면 시간 그 자체가 바로 독약이지. 시간 속에서 모든 것들이 끝나고 새로운 것이 탄생해서 또 다시 삼켜진다네. 시간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다음엔 뭘 할거야? 다음엔 뭔가라고 초조하게 묻지 말게. 시간을 벗어나서 시간이 세계를 삼키는 모습을 보게나. 그러면 아마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 시간의 본성이구나, 내버려 두자 이건 나와 상관없다. 나는 연소되지도 않고 연료를 모을 필요도 없다."라고 말하게 될 거야.
문: 목격할 사물들이 없이 목격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M: 언제나 목격할 뭔가가 있게 마련이야. 사물이 없더라도 그것의 부재를 아는 건 있게 되지. 바라보는 것은 자연스럽게 아무런 문제가 없어. 문제라면 과도한 흥미 때문에 자기동일시가 생겨나는 것이 문제야. 자신이 빠져 있는 것을 실재한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야.
문: "내가 있음"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것입니까? 가공의 개념입니까? "내가 있음"이라는 것이 관찰자인가요? 관찰자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M: 순수하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고 때묻지 않은 것이 참된 것이며, 때 묻고, 뒤섞이고 뭔가에 의존하는 덧없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지. 말에 속지 말게. 말 한마디가 여러 가지 모순된 의미들을 지닐 수도 있어. 즐거움을 추구하고 즐겁지 않은 것을 기피하는 "내가 있음"은 제대로 보는 것이야. 그러나 자신이 지각하는 것 속에 말려드는 것은 개인이야. 목격자는 멀리 떨어져 움직이지 않고 손이 닿지 않게 서 있게 된다네. 그래서 참된 것의 전망탑이 되는 거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속에 잠재하는 자각이 눈에 보이는 것들과 접촉하는 점이라네. 목격자가 없다면 우주가 있을 수 없고 우주가 없다면 목격자도 있을 수 없어.
문: 시간이 세월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목격자는 누구입니까?
M: 시간을 넘어선 지칭할 수 없는 존재이지. 아주 빠른 속도로 원운동을 하는 불타는 장작불은 불타는 원으로 보여. 움직임이 멈추면 원이 사라지고 불길도 머무르게 되는 것이야.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있음"은 움직임 속에서는 세계를 창조하고, 멈춘 상태에서는 절대자가 된다네. 자넨 마치 전기횃불을 들고 복도를 걸어가는 사람과 같아서 불빛 속에 보이는 것만 볼 수 있지. 나머지는 어둠 속에 잠겨 있게 된다네.
문: 만약 제가 세계를 투사하고 있다면 제가 그걸 바꿀 수도 있겠습니다.
M: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러나 자신과 그것을 동일시하기를 그만두고 그 너머로 가야 해. 그리되면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힘이 생기지.
문: 제가 바라는 것은 자유로와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M: 두 가지를 알아야 해. 어디에서 벗어나고 싶은 건지, 자신을 묶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말일세.
문: 왜 선생님은 우주를 부정하고 싶어 하십니까?
M: 나는 우주에는 관심이 없어. 그냥 그대로 있든가 없어지든가 마음대로 하라고 해. 나는 나 자신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네.
문: 만약 선생님께서 세계의 너머에 계신다면 선생님은 세계에 대해서 소용이 없습니다.
M: 있지도 않은 세계를 염려하지 말고 엄연히 존재하는 자아를 불쌍히 여기게. 꿈속에 빠져서 자네는 자신의 본성을 잊어버렸다네.
문: 세계가 없다면 사랑을 할 장소가 없습니다.
M: 바로 그래. 존재라든가 사랑 혹은 아름다움과 같은 개념들은 모두가 다 진리가 이 세계 속에 비춰진 거야. 진리가 없다면 비춰질 그림도 없지.
문: 세상은 온통 바람직한 물건들과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세계가 없다고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M: 바람직한 것은 그걸 바라는 사람들에게 맡겨두라구. 자네의 욕망을 움켜 잡는데서부터 주는 쪽으로 흐름을 바꾸면, 주고 나누는 마음이 외부세계에 관한 관념을 마음으로부터 씻어줄 걸세. 오직 순수한 사랑의 방사만이 남아서 주고받기를 넘어선 상태로 머무르게 될거야.
문: 사랑을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 둘이 필요합니다.
M: 사랑 속에서는 하나조차 없는데 둘이 있을 필요가 뭐가? 사랑은 분리와 구분을 거부하는 것일세. 단일성을 생각할 수 있으려면 먼저 이원성을 만들어야 해. 진정코 사랑을 한다면 "사랑하오"라는 말은 하지 못해.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둘이 있어야 하거든.
문: 자꾸만 저를 인도로 오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의 생활비가 싸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인상이 풍부하고 다양하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뭔가 더 중요한 요소가 틀림 없이 있습니다.
M: 영적인 측면이 있어. 인도에는 안과 밖의 구분이 적어. 여기서는 내면을 바깥으로 표현하기가 쉽지. 통일 된 생활을 하기가 더 쉬워. 사회가 그처럼 억압적이지가 않으니까.
문: 그렇습니다. 서구에서는 온통 타마스와 라자스뿐입니다. 여기 인도에는 조화와 균형 즉 사트바가 더 많습니다.
M: 그런 속성들을 넘어갈 수 없나? 왜 사트바를 선택했나? 어디에 있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머무르고 그런 속성들을 염려하지 말게.
문: 제게는 힘이 없습니다.
M: 그건 자네가 인도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걸 보여줄 뿐이야. 진정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잃어버릴 수가 없어. 만약 자신의 본성에 충분히 토대를 갖추고 있으면 장소가 바뀐다고 해도 별 차이가 없지.
문: 인도에서는 영적인 생활이 쉽습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그렇지가 않고 훨씬 더 많이 환경에 적응을 해야 합니다.
M: 왜 자신의 환경을 만들지 않나? 세계라는 건 자네가 거기에 두는 만큼의 힘밖에 없어. 극복하게. 이원성을 넘어가고 동서양을 달리 생각하지 말게나.
문: 아주 비영성적인 환경 속에 있을 때에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까?
M: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모습 그대로 머무르고 바깥의 경계에서 벗어나서 지켜보도록 하게.
문: 집에서는 불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거의 이해를 못하거든요.
M: 본성을 알고 나면 문제가 없어. 부모를 기쁘게 해 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돈을 많이 벌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이 마찬가지야. 그러니 환경에 따라서 그냥 움직이면 되는데 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진실 그대로를 따라서 행동하게나.
문: 그건 아주 대단한 상태가 아닙니까?
M: 아니야.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지. 자넨 지금 그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것이 대단하다고 부르는 거야. 그러니 먼저 두려움에서 벗어나게나. 두려워할 게 없다는 것을 잘 봐야지. 두려움이 없어야 초월상태로 들어갈 수가 있어.
문: 아무리 노력해도 두려움이 없어지진 않습니다.
M: 공포가 없는 상태는 두려워할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야. 사람들로 복잡한 거리를 걸어갈 적에는 그냥 사람들 곁을 지나갈 뿐이야. 어떤 사람을 쳐다보기도 하고 혹은 흘깃 보기도 하지만 멈추지는 않지 않나? 장애를 만드는 것은 멈추기 때문이야. 계속 움직이게. 이름과 형태를 무시하고 거기에 집착하지 말아. 집착은 곧 굴레니까.
문: 만약 어떤 사람이 제 얼굴에 따귀를 때리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M: 자네 성격에 따라서 반응을 하면 그만이야.
문: 그런 건 불가피한 일입니까? 저와 세계는 한심하게도 지금과 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건가요?
M: 장신구의 모양을 바꾸고 싶은 보석상은 먼저 그것을 형태가 없는 금으로 녹인다네. 이와 마찬가지로 세 이름과 형태가 탄생하려면 먼저 자신의 원래 상태로 돌아가야 해. 부활을 위해서는 죽음이 필수적이지.
문: 선생님은 언제나 넘어서는 것, 거리감 있게 바라보고 홀로 있을 것을 강조하십니다. 또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시는데 그 이유가 뭡니까?
M: 자기 자신의 원래 상태가 옳은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그른 거야. 나머지 모두는 조건에 따른 것이고, 자네가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고 싶어 하는 것은 뭔가 행동의 근거가 필요하기 때문이야. 자네는 언제나 어떤 일을 하려고 쫒아 다니는데, 몇 가지의 특정한 가치에 기초해서 어떤 결과를 노리는 개인적인 동기가 있는 행동은 행동하지 않은 것보다 더 나빠. 왜냐하면 그 열매가 언제나 쓰기 때문이지.
문: 자각과 사랑은 하나인가요?
M: 물론이야. 자각은 동적인 것이고, 사랑은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지. 자각은 움직임 속의 사랑이야. 사랑 그 자체로 몇 가지 가능성들을 실현할 수가 있지만 사랑에 의해 촉발되지 않은 것들은 가치가 없어. 사랑이 창조에 우선하는 것이니 사랑이 없다면 단지 혼돈만이 있을 뿐이지.
문: 자각 속의 행동이 어디에 있습니까?
M: 자네는 조직적인 사고방식에 아주 물들어 있구만. 움직임과 불안과 동요가 없으면 그걸 행동이라고 부르지 않는군. 혼돈은 움직임을 위한 움직임과 다르지 않아. 진정한 행동은 장소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변형을 시키지. 장소의 변화는 단지 운송(transportation)에 불과해. 가슴의 변화야말로 행동이지.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활동성은 행동이 아니야. 행동은 숨겨져 있고 알려지지 않고 알 수도 없는 것이야. 알 수 있는 것은 열매에 불과해.
문: 하나님이 바로 모든 걸 행하는 분이 아닙니까?
M: 왜 바깥의 행위자를 끌어들이나? 세계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재창조한다구.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 일시적인 것을 계속 얻어나가는 끝없는 과정이야. 행위자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자네의 이상일세. 자신의 이미지대로 하나님을 창조한 거야. 자기 마음이 필름을 통해서 세계와 그 세계에 원인과 목적을 부여하는 하나님을 그려낸 거지. 이 모든 것이 상상에 불과하니 거기서 벗어나도록 하게.
문: 세계를 순전히 정신적인 것으로 본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만져질 수 있는 세계의 현실은 너무나도 확실한 것 같습니다.
M: 그처럼 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 바로 상상력의 불가사의함이야. 자네가 독신일 수도 있고 결혼을 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자네는 상상력의 노예인가 아닌가? 어떤 결정을 하든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자네가 하는 그 일은 언제나 사실로 행세하는 상상에 근거한 거야.
문: 여기 지금 제가 선생님의 앞에 앉아 있습니다. 이 중 어느 부분이 상상입니까?
M: 모두가 다 상상이야. 심지어는 시간과 공간조차도 상상이야.
문: 그러면 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M: 나도 존재하지 않아. 모든 존재라는 것은 상상에 불과해.
문: 있음(being)이라고 하는 것도 상상입니까?
M: 모든 걸 채우고, 모든 걸 넘어서 있는 순수한 존재는 제한 된 존재가 아니야. 모든 제한은 망상이고 오직 제한되지 않은 것만이 참된 것이지.
문: 선생님께서 저를 보실 적에 무엇을 보십니까?
M: 자네가 자기 자신을 있는 것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을 보지.
문: 저 같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릅니다.
M: 모든 투사의 전체가 마하 마야, 즉 거대한 환상이라고 불리는 거야.
문: 선생님께서 자신을 보실 적에는 무엇을 보십니까?
M: 어떻게 보는 가에 달렸어. 마음을 통해 볼 적에는 무수한 사람들을 보지만 마음 너머로 볼 때는 관조자를 본다네. 관조자의 너머에는 진공과 침묵이 펼쳐지고 있지.
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M: 왜 무엇을 위해서 계획을 세운단 말인가? 그런 질문들은 근심을 나타낼 뿐이야. 관계라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야. 내적인 자아와 평화롭게 머무르게 되면 모든 사람과 평화로워질 거야. 자네 자신이 발생하는 일의 주인이 아니며,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에서가 아니라면 미래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게나. 인간관계는 계획될 수가 없어. 그것은 너무나도 풍부하고 다양하니까. 그냥 이해하고 냉정하게 모든 자기추구로부터 자유로와지게나.
문: 확실히 저는 발생하는 일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노예라고 봐야 되겠지요.
M: 주인도 노예도 되지 말고 떨어져 있게나.
문: 행동을 회피하라는 뜻입니까?
M: 행동을 회피할 수는 없어. 다른 모든 일처럼 그것도 그냥 발생하는 것이지.
문: 제 행동들은 제가 통제할 수 있습니다.
M: 해보게나. 그러면 곧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될 걸세.
문: 저는 제 의지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습니다.
M: 의지를 아는 것은 단지 행동을 하고 나서 뿐일세.
문: 저는 제 욕망들과 행해진 선택과 결정들을 기억하고 그에 따라 행동합니다.
M: 그러면 자네의 기억이 결정하는 것이지. 자네가 결정하는 것은 아니야.
문: 저는 어디서 개입됩니까?
M: 자네는 거기에 관심을 줌으로써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
문: 자유의지 같은 건 없나요? 뭔가를 바랄 자유가 없습니까?
M: 아니야, 자네는 지금 욕망을 강요받고 있는 거야. 힌두교에는 자유의지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에 해당하는 말도 없어. 의지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고정시키고 구속을 시키는 거라네.
문: 저는 제 한계를 선택하는 데에 자유롭습니다.
M: 먼저 자유로와야 해. 세상에서 자유로우려면 세상을 벗어나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과거가 자네와 자네의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네. 자넨 지금 발생한 일과 있어야 할 일 사이에 묶여 있어. 그건 운명이나 업이라고 부르는 거야. 자유라고 부르진 말게. 우선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가서 사랑의 가슴 속에서 움직이게나.
문: 나타난 것 속에서 무엇이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입니까?
M: 그런 건 없어. 그것을 찾기 시작하는 순간 드러난 것들이 해체되기 시작해. 만약 자네가 마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불쏘시개로 불을 뒤적일 때 불쏘시개를 태우는 것처럼 즉시로 마음을 넘기면 넘어가게 될 걸세. 드러난 것을 조사하는 데에 마음을 사용해. 껍질을 쪼아 먹는 병아리처럼 되게나. 껍질 밖의 인생에 대해서 사색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지만 껍질을 자꾸 쪼아대는 것은 병아리를 해방시켜 주지. 이와 비슷하게 잘 탐구하여 마음의 모순과 부조리를 드러내어 내면에서 깨뜨려 버리게.
문: 껍질을 깨려는 갈망 그것은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M: 보이지 않는 것에서 생겨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