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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조춘숙
말 씀 사무엘하 15장 24-34절
제 목 하나님의 사람들[16]
등산을 좋아하는 분들은 시간만 나면 산을 찾습니다.
가까운 산에 가는 분도 있고, 히말라야처럼 전문적인 산행을 즐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산의 높이는 다를지 모르지만 산을 찾는 마음은 동일할 것입니다.
낮은 산에 갈 때는 운동화에 간편한 옷을 입으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높고 암벽이 있는 곳은 등산화와 장비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등반은 충분한 훈련을 한 후에 산에 올라야만 안전할 수 있습니다.
에베레스트산은 8,850m로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이 산처럼 전문 산악인들이 오르는 산은 더 많은 시간과 훈련을 하면서 준비해야 합니다.
추락이나 동상등으로 사망할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보통 온도가 1000m당 5도 가량 떨어진다고 합니다.
산 정상의 온도는 영하 30-40도 이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 없이 오른다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땅에 솟아 있는 산도 높이에 따라서 이렇게 준비하는 것이 다릅니다.
가벼운 운동복차림으로 오를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철저하게 훈련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준비해야만 오를 수 있는 곳도 있습니다.
전문산악인이라 할지라도 혼자서는 정상에 오를 수 없습니다.
산이 높을수록 식량을 맡은 사람, 등반장비를 맡은 사람[포터], 정상에 오를 때까지 카메라로 정상을 향해 걷는 산악인을 찍는 카메라맨등 모두가 일을 분담해서 하나가 되어 움직여야 합니다.
정상에 올랐을 때 함께 고생한 사람들은 동일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고, 그것은 모두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만든 기쁨이 아니라 팀 전체의 열매이며 기쁨인 것입니다.
이 때 정상에 올라야 하는 사람이 산을 오르는데 마음을 쏟지 않고, 집안걱정을 한다든지, 장비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든지, 사람들과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다툰다면 오르기 전에 실패할 것입니다.
큰 산일수록 마음속에 있는 모든 근심과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 산을 정복하는데 집중해야만 정상에 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레스트산을 향해 걷는 그는 지금까지 세상에 쌓아 놓았던 모든 것 그러니까 가족이나 재산이나 명예 모두 것을 놓고 지금은 철저하게 스스로 혼자가 된 상태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15장에 나오는 다윗이 바로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하기 위해서 세상 것을 마음에서 버린 산악인과 같습니다.
하지만 산을 정복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음에서 버렸던 가족도 재산도 친구도 모두 다시 갖게 될 것입니다.
정상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지금까지 자신의 힘이었고, 또 힘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는 다윗이 그려져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세상의 욕심으로 만든 안경을 벗을 때만이 사랑 그 자체인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났을 때 얼마나 많은 욕심과 정욕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비밀입니다.
다윗이 만약 인간을 끝까지 의지했다면 아마도 압살롬의 반역은 성공했을 것이고, 그는 왕좌에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낮은 산을 오를 때는 준비가 필요 없지만 높은 산은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 것처럼, 다윗은 아들이 반역하는 큰 고난을 만나자 도리어 지혜롭고 명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난은 고통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형을 죽인 압살롬은 요압을 협박하여 다윗을 만나는데 성공했습니다.
집안에 격리되어 이년이 되도록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압살롬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쌓였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힘이 없어서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권력을 탐하게 되었고 반역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이 아버지를 굳이 만나려고 한 것은 그래야만 순진한 백성이 압살롬이 용서받았다고 믿을 것이고 그들을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용서는 압살롬이 반역하는데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아버지의 용서를 받은 그는 이제 백성의 마음을 얻는데 주력했습니다.
6절 무릇 이스라엘 무리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반역에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는 송사하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말을 들어주며 그들의 말이 옳다고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재판을 받는 사람들은 마음이 급하기 때문에 압살롬처럼 왕자가 자기들 편을 들어주면 그를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왕자가 도와준다고 하니까 고맙고 감사해서 손에 입을 맞추려고 하면 도리어 그 사람 손에 입을 맞추며 겸손함까지 보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백성의 마음을 다윗에게서 훔치는 그의 전략입니다.
송사나 재판을 하려는 사람에게 왕의 무능함을 슬쩍 전하면서 자기가 힘이 있음을 전하자 사람들은 모두 압살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성의 마음을 충분히 훔쳤다고 생각한 압살롬은 이번에는 다윗에게 자기가 외가에서 서원한 것이 있는데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하나님께 갚겠다고 하자 어떤 서원인지 묻지도 않고 다윗은 또 아무런 의심 없이 허락을 하였습니다.
10-11절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소리를 듣거든 곧 부르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그 때 압살롬에게 청함을 받은 이백명이 그 사기를 알지 못하고 아무 뜻없이 예루살렘에서 저와 함께 갔으며
헤브론으로 간 압살롬은 아버지인 다윗을 반역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 때 압살롬과 함께 헤브론으로 간 이백명은 압살롬의 계획을 알지 못하고 따라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역을 하기 위해 길을 떠난 압살롬이 신중하게 골라서 대동한 사람들이라면 고위관리였을 것입니다.
그런 관리들이 이백명씩이나 압살롬의 계획을 모르고 동행했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상나라처럼 권력구조를 가지고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다윗곁에서 그가 어떤 세월을 보냈고, 또 어떤 믿음으로 이스라엘을 통일시켰는지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반역을 꾀하자 아무 저항도 없이 압살롬편에 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라면 최소한 그들은 다윗을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이 다윗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이 서자 그들은 모두 압살롬에게 굴복하고 만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성도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아무 생각 없이 교회를 다니면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교회에서 세상처럼 힘의 싸움을 하게 됩니다.
목사와 장로와 성도간의 힘겨루기를 통해 더 큰 힘을 갖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은혜를 받지만 세상에 나가면 세상의 힘과 능력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을 하고 진리를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만 압살롬과 같이 세상의 권력을 갖기 위해서 반역하는 자리에 앉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권력이 있어서도 안 되고 성도간의 힘겨루기가 있어서도 안 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지 않으면 다윗을 몰아내고 압살롬을 세우는 잘못을 교회가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모르는 교인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모르는 교인들은 반드시 조심해야 하며 무조건 힘있는 자를 따르는 자 역시 조심해야 합니다.
다윗을 반역하는 일에 아무 생각도 없이 동참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은 사람의 육은 죽일 수 있겠지만 그의 영혼까지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육이 죽으면 영혼은 생존했을 때 가진 신앙에 따라서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토록 평안을 누리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귀한 내 영혼을 압살롬과 같이 악한 사람에게 아무 생각없이 맡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압살롬은 다윗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많이 모았습니다.
반역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서운함, 억울함, 불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은 세상의 마음이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력이 없습니다.
압살롬은 마음이 상한 사람들만이 자기편이 되어 줄 것을 알기에 송사나 재판을 하러 오는 사람들과 또 반감을 가진 아히도벨을 불러 힘을 키운 것입니다.
국가전복을 노린 사람들을 보면 늘 불만이 있습니다.
그 불만은 정변으로 이어지는데 자신들이 나라를 통치하면 지금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어둠속에서 세상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정말 올바른 정치를 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법대로 처리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역을 꾀한 사람들안에 이미 욕심과 불만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쏟아내기 전까지는 바른 정치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17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않는데 만약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를 잃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전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충만한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품어야만 믿음도 지킬 수 있고 하나님의 뜻도 펼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불만과 욕심으로 가득한 헌 부대에 포도주를 넣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 반역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부른 사람은 다윗의 모사였던 길로 사람 아히도벨입니다.
그는 다윗을 위해 열심히 전략을 짰던 모사였습니다.
그런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신하게 된 이유는 그의 손녀 밧세바 사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11장 3절에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고 말했고 사무엘하 23장 34절에 마아가사람의 손자 아하스배의 아들 엘리벨렛과 길로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아히도벨의 아들은 엘리암이고 엘리암의 딸이 바로 다윗이 남편 우리아를 죽이고 취한 밧세바였던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손녀사위 우리아를 죽이고 손녀를 취한 다윗의 악행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상대가 왕이기 때문에 대적할 수는 없었겠지만 우리아가 죽었을 때 아히도벨이 당한 슬픔은 상당히 컸을 것입니다.
그는 다윗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복수하기 위해서 압살롬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하지만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복수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인간이 갖는 복수심은 하나님께 죄가 되기 때문에 아히도벨이 다윗을 대적하기 위해서 압살롬에게 붙는 것은 또 하나의 죄를 짓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인간이 갖는 감정은 이렇게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압살롬에게 많은 백성들이 세를 더하자 다윗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다윗은 사악한 압살롬에게 자신과 아내들과 신하들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궁을 떠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후궁 열명을 궁에 남겨두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자신의 아내들이 백주에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길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후궁을 궁에 남기고 떠난 것입니다.
사무엘하 17장 22절에 압살롬은 다윗이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증거로 이스라엘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세상의 권력에 눈이 어두워지면 아버지의 아내인 후궁을 범할 정도로 인간은 악해지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복수하겠다는 생각만 하지 않았어도 살인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직접 치리하시는 은혜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궁을 버리고 아들에게 쫓겨가면서 그제야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그리고 가정을 올바로 다스리지 못했는지 정신을 차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모두 이루어지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시는 것은 무서운 심판을 그대로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어서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심판을 받을 때까지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윗에게는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해관계를 통해 인간관계는 맺어지는 법인데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손익을 따지는 관계를 떠나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종인 다윗을 섬겼습니다.
나그네가 되어 정처없이 길을 떠나는 다윗을 잇대가 따라 왔습니다.
그는 요압과 아비새와 동등한 장군이었고, 본국에서는 대단히 용맹을 떨쳤던 큰 용사였습니다.
다윗과 동행하겠다고 하자 다윗은 잇대가 곤경에 처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궁에 남을 것을 간청했습니다.
지금 피난길을 떠나는 입장에서 보면 잇대라는 장수와 육백명의 용사는 다윗에게 큰 힘이고 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의 생명을 먼저 소중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이 전쟁은 사람의 의지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결하셔야만 끝나는 전쟁임을 다윗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잇대를 자기의 힘으로 삼기를 포기하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궁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은 잇대는 인간이 위험에 처할 때 본능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과 정 반대의 말을 합니다.
21절 여호와의 사심과 내 주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무론 사생하고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사나 죽으나 왕과 함께 있겠다는 고백입니다.
지금 궁에서 나가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다윗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잇대는 다윗보다 하나님 때문에 이런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믿음안에서 세상의 일을 결정하는 잇대가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압살롬과 같이 악한 자라 할지라도 힘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압살롬의 편이 된 백성들과 손녀 때문에 마음이 상한 아히도벨을 본다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쪽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잇대는 인간의 감정보다는 하나님께서 누구와 함께 계시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결정하고 있습니다.
잇대라고 다윗의 죄를 모를 리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왕이기 때문에 잇대는 압살롬보다는 쫓기는 다윗을 선택했습니다.
잇대의 생각이 확고하자 다윗은 육백명의 군사와 잇대가 동행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아들인 압살롬은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고 블레셋장군인 잇대는 다윗을 지키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유대인들이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세상에서 불러내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노력은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지만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하지만 잇대가 다윗을 섬기는 것처럼 이방인인 우리들이 유대인이 버린 메시야를 주로 섬기는 행운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건을 보느냐 아니면 인간이 중심이 되어서 사건을 보느냐의 차이가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잇대처럼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귀한 성도를 보는 영적인 눈이 있기를 바랍니다.
24절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더니
사독은 다윗의 왕권수호에 많은 공을 세운 제사장입니다.
사독은 압살롬이 반역을 꾀하자 아비아달제사장과 레위사람들과 함께 언약궤를 가지고 궁을 탈출했습니다.
궁을 떠나는 다윗이 당연히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언약궤를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 성내로 가져가라고 하자 그들은 예루살렘궁으로 돌아가 반란이 끝날 때까지 궤를 수호하였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에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목숨을 걸고 궤를 수호하고 다윗을 도와줬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만이 이 전쟁을 끝내실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독에게 언약궤를 가져가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만일 내가 여호와앞에서 은혜를 얻게 되면 나를 인도하셔서 궤를 다시 보게 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지 않으시면 선히 여기시는대로 나에게 어떤 고난이 와도 감당하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만 의지하는 다윗의 마음이고 믿음입니다.
언약궤 때문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때 비로소 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진실 된 고백인 것입니다.
다윗은 사독을 다시 궁으로 보내면서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제사장 자리를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다윗은 사독도 언약궤도 모두 궁에 두고 길을 떠났습니다.
사독과 언약궤가 다윗과 함께 있었다면 어쩌면 백성들은 두려운 마음에 다윗을 배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미 자신이 올바로 서지 않으면 언약궤가 함께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고 세상의 욕심을 다 버린 다윗에게 하나님은 후새라는 모사를 붙여주셨습니다.
다윗이 감람산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아렉사람 후새가 자신의 옷을 찢으며 흙을 머리에 무릅쓴 채 다윗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후새는 다윗의 친구로써 왕이 정책을 결정할 때 바른 결정을 하도록 도왔던 모사였습니다.
다윗은 후새에게 너도 압살롬에게 가서 다윗을 배신하고 온 것처럼 하여 아히도벨이 어떤 모략을 펼치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을 알게 되면 사독에게 알려서 바로 자신에게 전할 수 있도록 하라고 작전을 지시하자 후새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다윗왕의 명령대로 궁으로 들어갔습니다.
만약 압살롬이 후새를 믿어주지 않으면 그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후새가 다윗과 맺은 인간관계는 하나님이 중심이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할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압살롬의 곁에 있는 뛰어난 지혜를 가진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도 사단의 모략을 실패하도록 만드는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이 성공하면 다윗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뛰어난 지혜로 사단의 모략이 늘 실패하도록 만들어 믿음을 지켜야 하고 생명을 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짧은 인생을 들여다보면 정말 많은 사건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를 돕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해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다윗이 새부대를 준비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돕고 싶어도 헌부대를 가지고 있으면 도와주실 수 없고, 믿음의 새부대를 가지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도우실 수 있도록 욕심과 자존심과 의로 채워진 헌부대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언약궤가 자신을 돕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여러분이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돕는 것 아닙니다.
사독이나 잇대나 후새처럼 세상의 힘을 가진 자들이 자신을 궁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여러분의 생명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나 물질이나 권력은 눈에 보이는 현상일뿐 하나님만이 여러분에게 참 생명을 주실 수 있으며 사단의 공격을 막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에베레스트산처럼 높아보일지라도 믿음으로 잘 준비하신다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언제나 고난의 산을 찬양하며 넘는 다윗처럼 승리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01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