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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 아닌 일이면서도 어떤 이에 대한 미안함이 거의 평생 동안 가는 일이 있는데, 나는 김지선(48)씨를 생각할 때마다 그렇다. 87년 무렵 수배 중이던 김지선씨가 내가 일하던 연구소에 가끔 들르곤 했다. 성격이 조금 모호한 그 연구소는 주상복합건물의 45평 아파트를 사무실로 쓰고 있었으니 수배 중인 사람이 쉬어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어느 날 아침 김지선씨가 직원들이 모두 출근한 다음에야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로 화장실에서 나온 적이 있는데 사정을 잘 모르는 연구소 여직원들은 “예의 없는 사람”이라면서 자기들끼리 입을 비죽거렸다.
그의 일생을 규정한 어느 부활절 새벽
나는 ‘세상을 위해 자기 자신을 모두 내던진’ 노동운동가가 세속적 가치기준에 의해 욕먹는 게 싫어서 김지선씨에게 점잖게 잔소리를 했지만 김지선씨는 “그게 뭐가 중요하냐?”면서 기분 나빠했다. 당연하지… 노동운동을 하다가 수배된 활동가가 ‘오늘 잡혀갈지 내일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배가 있는 연구소에 들러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든 바람에 조금 늦게 일어났기로소니, 그게 무슨 대수랴. 그 뒤 15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일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김지선씨에게 미안했다.
78년 3월26일 부활절 새벽, 여의도 광장에는 50만의 인파가 모였다. ‘인파’-. 글자 그대로 ‘사람의 파도’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이라고 해서 이곳으로 오기는 했지만 그렇게나 많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계획대로 김지선씨를 비롯한 여성노동자 몇명이 연단 맨 앞쪽에 자리를 잡았지만,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서 제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이 예배를 지금 기독교방송(CBS)이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하고 있으니까, 누가 먼저 올라가든지 우선 CBS 마이크부터 잡아야 돼.” 전날 밤 여관에서 밤새 검토한 계획을 몇번씩이나 다짐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하든지, 아니면 말든지 빨리 결정합시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차라리 빨리 포기하기로 결정하면 마음이라도 편할 것 같았다. 잠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남영나이론의 김현숙 동지가 짧게 한마디 끊듯이 외쳤다. “갑시다!” 그 한마디에 여섯명의 여성노동자들은 용수철처럼 일어나 연단으로 올라갔다. 참 이상했다. 계단을 딛고 연단 위로 올라가는데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연단 위는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그 위에 앉은 사람만도 수백명이 넘어 보였다. 바로 앞에서 올라가던 김현숙 동지가 기도하고 있던 목사님 뒤로 돌아가더니 목사님을 왼쪽으로 밀치면서 수십개의 마이크 중에서 CBS 글자가 새겨진 마이크를 움켜잡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습니다!” “노동3권 보장하라!” 김현숙 동지는 목사님의 오른쪽에서, 김지선씨는 왼쪽에서 마이크에 대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원풍모방의 장남수 동지가 연단 한복판에서 마이크도 없이 온몸으로 절규하듯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 보였다.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려퍼진 시간은 30초 정도였을 것이다. 연단 위에서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끌려내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던 시간까지 합치면 3분 남짓 되었을까…. 김지선씨는 그때 처음 구속되어 6개월을 살았다.
열매크럽… 다이나마이트크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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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밑 소청도에서 태어난 김지선씨는 인천에 와 대성목재에서 처음으로 노동자 생활의 첫발을 디뎠다. “노동자가 된 계기가 뭐냐?”는 나의 질문에 김지선씨는 잠시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먹고살기 힘들어서”라고 짧게 답했다. 김지선씨의 그 표정에서 “하종강, 그것이 너의 한계야. 노동운동 20년 넘게 했다는 놈이 그래 노동자가 된 계기를 몰라서 물어보냐?”는 질책을 느꼈다면 그것은 순전히 나의 자격지심 탓인지도 모른다. 20여년 전 조화순 목사님 댁에서 ‘수배 중인 여성노동자’라고 처음 김지선씨를 소개받은 뒤, 나는 노동자들 앞에 서면 언제나 주눅이 들었으니까….
그 이후 김지선씨가 한 일들은 우리나라 현대 노동운동사를 단면으로 자른 듯 보여준다. 유동우씨의 책 <어느 작은 돌멩이의 외침>으로 잘 알려진 ‘삼원섬유’에서 김지선씨는 ‘공임투쟁’을 하면서 노동조합도 없이 파업을 벌였다.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였다. 그때 친구들과 함께 활동했던 소모임의 이름들- ‘열매크럽’, ‘조약돌크럽’, ‘다이나마이트크럽’…. 70년대에 노동운동을 한 사람들은 그 이름만으로 옛 생각에 한동안 마음이 젖는다. 그렇게 노동운동과 인연을 맺은 김지선씨는 83년 또다시 ‘인천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인천노동자복지협의회 사무국장, 인노련 부위원장 겸 사무국장,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 등을 거쳐 지금은 ‘사단법인 서울강서양천 여성의전화’ 회장 겸 부설 ‘가정폭력상담소’ 소장으로 일한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당연히 궁금해한다. 노동운동에서 어떻게 시민운동 영역이라고 불리는 여성운동으로 이전했는지…. 그러나 김지선씨의 경력을 조금만 자세히 보면 그 궁금증을 쉽게 풀 수 있다. 김지선씨의 과거 노동운동 행적과 현재 여성운동 사이에는 ‘인천여성노동자회’가 자리잡고 있다. ‘일하는 여성 나눔의 집’을 중심으로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김지선씨는 여성노동자들이 활동을 오래 하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기존의 노동운동이 전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고,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전문화화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동안의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자본과 권력에 대한 다양한 공격’이라는 이해만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그와 같은 협소한 시각으로는 여성노동자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은커녕 당장 우리 눈앞에 있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조차 혁파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할 즈음, ‘여성노동자회’ 외에는 별다른 진보적 여성단체가 없었던 인천에서 ‘민중연합 여성위원회’와 함께 ‘여성의 전화’를 설립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능력 있는 사람들을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법이어서 ‘인천 여성의 전화’에서도 운영위원과 부회장을 맡았고 나중에는 반상근으로 활동했다. 그 활동을 통해 여성문제 일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경로였다.
15년 전의 미안함을 풀다
김지선씨는 “사회주의에서는 여성 차별이 없을 것 같아?”라는 질문 하나로 나의 여성운동에 대한 짧은 소견을 깨우쳐주었다. 여성문제가 ‘자본주의의 모순된 억압구조’와 결코 무관하지 않지만 그게 전부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평생을 싸우겠다고 뻐기는 내 앞에 김지선씨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적과 마주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나는 15년 동안의 해묵은 미안함에 대해 얘기했다. 나의 ‘고백’을 듣고 나서 김지선씨는 “내가 그랬어? 지금이라면 안 그랬을 거야. 그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였을 거야. 그땐 생각의 폭이 좁았으니까…”라고 웃으며 말해주었다. 나는 15년 만에 미안함의 굴레를 벗어던졌다. ‘여성의 전화’ 사무실을 나와 비오는 거리를 우산을 받고 걷는데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발이 가벼워졌다. “사람이 좋아 운동을 시작했고 아직도 그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는 김지선씨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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