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신자들에게 아직까지도 생소하고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 바로 “계시의 종결”이라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성경계시의 종결을 말할 뿐 아니라 모든 계시의 종결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여 응답을 받는 것에는 새로운 계시의 내용이라고는 전혀 없고, 다만 우리의 필요를 따라 구하는 것에 대한 합당한 은혜가 주어진 것일 뿐이다.
이러한 계시의 종결에 대한 이해는 특별히 장로교회들이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의 가장 첫 번째 주제로서, 제1장 1항의 전체 취지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그 방식들(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던 방식들)은 이제 중단되었다.”는 문구인 것이다. 바로 그러한 취지에 따라 곧장 2항에서 성경(정경)의 목록과 함께 “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 되도록 주어진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의 신학에서는 공식적으로 계시의 종결을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라틴어 불가타본 성경의 수용과 성경 해석 방식에 대한 규정들을 곧장 제시하고 있는 것이 트렌트 공의회의 제4차 회기(1546) 제2교령이니,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모든 신앙을 복속시키는 것만이 성경과 관련한 그들의 관심이며, 오히려 로마 가톨릭 교회(공의회)의 권위에 의해 “기록된 책들뿐만 아니라 사도들이 그리스도 자신의 입에서 받아들이거나 혹은 이 사도들로부터 성령의 영감을 받아 손에서 손으로 전달된, 기록되지 않은 전승들 안에도 보존되어 있다”고 보며, 마찬가지로 “신앙과 행실에 관한 전승들도 그리스도 자신의 입 혹은 성령에 의해 발설되어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보존되어오는 것으로서, 정통 신앙 교부들의 모범을 따라 똑같은 애정과 존경으로 받아들이고 공경”(트렌트 공의회 제4차 회기 제1교령)하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기본적인 신앙의 근거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은 닫힌 신앙의 터전(정경 이외의 계시는 종결되었다는 입장) 가운데 있는데 반해, 로마 가톨릭 신자들(특히 사제들)은 여전히 열린 신앙의 터전(정경과 기록되지 않은 전승들이 동일하게 영감 된 말씀으로 보는 것 외에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의해 계시적 권위가 여전히 부여될 수 있다고 보는, 계시의 연속성의 입장)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이적이나 표적이 존중되고, 영감과 계시적인 양상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로마 가톨릭의 신앙 풍토이지 개신교적인 신앙 풍토는 아니다. 일부에서 이적이나 표적들의 지속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섭리”(providence)로 다루어 “비상섭리”(providentia extraordnrina)로 다룰 뿐, 그것이 계시로 연결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의 본성 가운데 있는 자연종교의 습성이 강력히 작용하여, 한국의 개신교 신앙은 이적, 은사 뿐 아니라, 소위 “직통계시”를 추구하는 광신자들(the fanatics)까지도 횡횡하며 활동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들은 종교개혁의 후손이기보다는 자연종교 안에서 로마 가톨릭의 종교와 얼마든지 일치할 수 있는 분파(a branch)의 모습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복구된 신앙의 계승자들인 개신교 신앙에 있어서의 독특한 특성인 계시의 종결의 개념은, 예배를 비롯한 신앙과 생활 전반에 대한 종결 개념으로 확장되는데, 바로 그러한 개념적인 이해를 배경으로 비로소 “개혁된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est reformanda)는 구호의 의미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니, 개혁된 교회가 끊임없이 개혁하는 신앙의 원리와 모습 또한 종결된 계시 가운데로 거슬러 오르는 것(Ad fontes)이다. 왜냐하면, 개혁할 신앙의 모든 원리와 모습들이 이미 성경 안에 있으며, 다만 그에 위배되거나 벗어난 모든 원리와 모습들을 되돌리는 것이 바로 끊임없는 개혁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양상이 개혁된 교회들의 “예배에 있어서의 규정적 원리”(the 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다.
예배에 있어서의 규정적 원리 가운데서는 예배의 모든 내용을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에 한정하며, 그 외의 것들은 모두 금지되는데,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2항의 마지막 문구대로 “이 모든 책들(구약과 신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 되도록,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 외에 다른 영감(Lux)은 없으며, 그것 외에 다른 법칙(Lex)은 없다. 일례로 이미 신약성경 안에 예배에 포함될 항목들까지도 언급되어 있는데, 고전 14:26절은 고린도 교회의 예배순서에 대해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특히 “찬송시”(psalmos)란 시편을 말하며, 당시에 고린도 교회가 부르던 찬송이 바로 시편송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사실 구약의 모든 시편은 운율이 있는 노랫말들이다. 구약시대의 시는 단순히 시문학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노랫말을 일컫는 것이다.
하지만 구약의 시편들이 노래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 노랫말들이 어떻게 불렸는지 그 곡조에 대한 정보는 현제로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고전 14:26절에서도 시편송을 언급하고 있으니 최소한 주후 1세기까지도 시편의 곡조가 전승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언제부터인지 시편의 곡조에 대한 정보는 전혀 남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왜 시편의 곡조가 사라져버리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단서 또한 성경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성경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시편 외의 노랫말들 가운데서다. 특별히 눅 1:46-55절의 마리아의 찬송, 눅 1:68-79절의 사가랴의 찬송, 눅 2:14절의 천사들의 찬송, 눅 2:29-32절의 시므온의 찬송 등이 대표적인데, 사도 바울은 골 3:16절과 엡 5:18-20절에서 이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고 구별하여 언급하지만, 이 또한 그 곡조는 알기가 어렵게 되었다.
사실 성경에 기록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에 있어 중요한 것은 가사이지 곡조가 아니다. 특히 신령한 노래로 분류되는 것들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하니, 누가복음에 언급된 노래들 외에도 수많은 노래들이 만들어지고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네 노래만 신약성경에 기록된 것은, 그 노랫말 자체의 신적 영감을 뒷받침 한다. 한마디로 신적으로 영감된 노랫말들만이 성경에 포함되어 전체 성경의 계시 안에 포함된 것(전체 성경의 취지에 부합하는 노래이므로)이다.
무엇보다 전체 성경의 일관된 취지는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그의 공생애뿐 아니라 그가 전하신 말씀들과 신적 작정 가운데서의 그의 본질(homo ousios) 전부를 일컫는다. 그러므로 히 1:1-2절에서 사도는 이르기를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했고, 더욱 10-12절에서 구약 시 102:25절 이하의 말씀을 인용하여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고 했다.
결국 구약과 신약의 목록 전체를 바탕으로 하는 계시의 종결에 대한 이해는, 장로교회들이 표방하는 개혁된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터전이며 개념이다. 그 안에서 신학과 신앙의 모든 세부와, 실천의 모든 영역들이 규정(regulation)되는 것이다. 비록 지금도 성경과 상관 없는 수없이 많은 규범적 원리(normative principle)들이 실행되고 있지만, 그런 것들은 전혀 불필요한 것들이거나 성경에 언급된 노래들의 곡조와 같이 사라지고 말 것들일 뿐이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으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