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정리: 2008.6.28(토)
04:30성삼재-05:00노고단-06:10임걸령-06:45노루목-07:00삼도봉-07:25화개재-07:55토끼봉-09:10연하천-11:40벽소령-중식-12:30출발-13:35선비샘-14:26칠선봉-16:00세석대피소(1박)
6.29(일)
05:00기상-식사-06:10출발-06:35촛대봉-07:40연하봉-08:10장터목-08:55천왕봉-10:30장터목-조식-11:00출발-12:40백무동
동료 6명과 지리산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구례구역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성삼재에 오르니 새벽 4시 반. 지리산 종주 출발과 함께 굵은 빗방울이 날리기 시작합니다. 시작부터 긴장과 함께 비장감마저 묻어납니다. 배낭 커버를 씌우고 재킷을 걸치고 대장정 시작.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하니 구례구역에서 함께 내린 팀들이 식사하고 있군요. 잠시 일행들을 기다리고 몸을 추스른 후 노고단 고개에 오르니 어둠이 벗겨지며 반야봉이 나타나 위로를 합니다. 후드득후드득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튕기며 돼지평전과 임걸령을 지나 노루목으로 향합니다.
삼도봉에 오르니 노고단 고개에서 반야봉을 봤던 거처럼. 노고단이 뒤로 많이 물러나 있네요. 잘 다녀오시라 손짓하며 배웅을 하는 듯합니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고 화개재를 지나 토끼봉을 오릅니다. 운무에 아름다운 풍광은 아쉽게도 그대로 묻힙니다. 간혹 강한 바람도 몰아칩니다. 지리산 샛길을 따라 홀로 산행 시 외롭기도 한때가 많았습니다. 또한, 두렵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래도 몹시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그때는 젊었으니까요. 이젠 나이가 들어서인지 홀로 지리산행을 떠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기름값도 많이 올라 더더욱 어렵고, 버스나 기차를 타고 훌쩍 떠나는 자신도 익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인O대 체육교육과를 졸업하고 신규발령을 받은 28세의 청년 박 선생은 키가 크고 탄탄하고 우람한 몸매에 강한 체력으로 초행길인 주능 길을 선두에서 잘도 헤쳐나갑니다. 교직에 초년병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떠나는 지리산행입니다. 그가 지리산 종주를 성공적으로 멋지게 끝내고, 앞으로 교직 생활도 자신감 있고 자랑스럽게 해나가길 바래 봅니다.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하니 중산리에서 출발한 대학생들이 취사장 안에 가득하여 발 디딜 틈이 없군요.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양보하고 떠난 후에야 추위를 떨쳐 버리며 간식을 먹습니다. 온몸은 젖어 체온이 내려가 이제 여름인데도 한기를 느낍니다. 우리는 벽소령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가르며 다시 힘을 냅니다. 권 부장님이 자꾸 뒤처져서 걱정됩니다. 2번의 지리산 종주와 서북능 종주 등 저와 여러 차례 지리산행을 했지만 이제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예년과 같지 않으십니다.
지리산 종주 구간 중 힘겨운 몇 곳이 있지만, 연하천에서 벽소령 구간이 은근히 지루하고 힘이 듭니다. 삼각고지를 지나 형제봉을 넘고 벽소령에 도착하니 박 선생과 이 선생이 벌써 도착해 있군요. 이 선생도 오십의 나이에 처음 지리산을 찾았습니다. 이번 지리산 종주를 통하여 그의 인생이 더욱 젊고 활기차지길 바래 봅니다. 라면을 끓여 모두 맛나게 식사를 합니다. 지리산에서 먹는 라면 맛은 시큰한 김치와 끝내줍니다. 비에 젖은 몸이 소주도 몇 잔 곁들이니 따뜻해지고 다시 또 힘이 솟습니다. 이제 지리산 종주 구간 중 제일 시간이 오래 걸리고 험난한 곳이 기다리고 있네요.
선비샘까지는 길이 순해 어렵지 않게 진행을 합니다. 선비샘에서 다시 목을 축인 후. 칠선봉을 향합니다. 고도를 차츰 높이며 힘겹지만, 조망이 터져 준다면 어느 정도 보상을 받겠지요. 최근에 지리산에서 비를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톡톡히 우중 산행을 경험합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을 땐 즐겨라. 이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저는 이 순간이 무척 소중하고 행복합니다. 세월이 좀 더 지난 후 오늘을 생각하면 얼마나 그립겠습니까.
칠선봉에서 영신봉 구간은 계속 고도를 높여야 하고 제법 긴 철계단이 기다리고 있고, 두어 개의 나무계단에 올라서야 영신봉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긴 철계단은 조급함을 버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오르는 게 좋습니다. 캉. 캉. 쇳소리를 내며 철계단을 오르는데 앞서가는 동료들의 뒷모습이 상당히 힘들어 보입니다. 영신봉에서 세석산장으로 내려서는 길은 촛대봉과 평원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데 오늘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입니다. 노고단에서 10시간 동안 계속 비를 맞고 여기까지 걸었습니다.
세석 대피소에 내려서니 적막강산입니다. 취사장에는 먼저 도착한 다른 1팀이 젖은 옷을 말리며 이른 저녁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휘발유 버너에서 나오는 푸른 불빛이 매우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배낭을 한곳에 정리한 후, 먼저 버너 3개를 켜서 물을 끓이고 찌개 코펠을 올려놓고 프라이팬에 고기를 굽기 시작합니다. 바삐 오가는 젓가락 손짓을 통해 지금의 시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의 노고를 위로하며 서로 잔을 주고받습니다. 그동안 물론 같이 사이좋게 근무하고 있지만, 오늘따라 동료들이 안아주고 싶도록 더욱더 사랑스럽습니다. 잠시 후 2팀 정도가 취사장에 도착하여 자리를 잡으니 축축한 분위기의 취사장도 제법 후끈 열기가 납니다.
오늘 고행의 산행은 며칠. 아니 몇 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해가 긴 초여름인데도 어둠이 일찍 찾아 왔네요. 오후 6시도 못 되어 대부분 대피소 자리를 배정받았습니다. 다행히 따끈하게 난방을 해주어서 대피소 방은 온기가 있습니다. 모두 옷을 갈아입고 젖은 옷과 비품을 말리느라 분주합니다. 많은 산님이 몰리지 않아 그래도 여유가 있습니다. 대충 정리하고 대피소 밖으로 나오니 빗줄기는 가늘어졌지만, 흐르는 운무와 함께 을씨년스럽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대피소 앞마당이 산님들이 모여 입추의 여지가 없을텐데 오늘은 너무나 고요합니다.
다시 들어와 침상에 누웠지만 잠이 올 리가 없지요. 그러나 벌써 옆 침상에는 코 고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립니다. 그 소리마저 사랑스럽고 감미롭습니다. 다음날. 오전 5시에 기상해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칩니다. 비는 그치고 안개 입자가 흩어져 시야가 뽀얗습니다. 촛대봉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연하봉을 향하는 길에는 가스가 걷히기도 하여 약간의 조망을 열어줍니다.
장터목 대피소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취사장 앞에 모두 배낭을 모아 놓고 맨몸으로 천왕봉을 향합니다. 그래도 정상주를 빼놓고 갈 수야 없지요. 육포와 함께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습니다. 지리산 집중호우로 인한 입산 통제가 풀려 아침 일찍 중산리를 출발한 안내 산악회 팀들이 천왕봉을 숨 가쁘게 오르고 있네요.
천왕봉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한참을 머물다 장터목으로 하산을 합니다. 텅 빈 장터목 산장에서 여유가 있게 점심을 지어 먹고 하동 바윗길로 하산합니다. 역시 입산 통제 풀린 백무동에서 장터목을 향하는 안내 산악회 팀들이 줄지어 오르고 있습니다.
망바위부터 체력 좋은 박 선생과 호흡을 맞추어 선두로 쭉쭉 빼기로 합니다. 하산 주를 마실 곳과 버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지요. 참샘에서 2명의 산님과 인사를 나누고 하동 바위에 이르니 이틀 동안의 많은 비로 곳곳이 물바다입니다. 작은 계곡뿐만 아니라 등산로도 장난이 아닙니다. 백무동 민박 촌에 이르니 날씨가 비로소 맑아지고 사위가 벗겨집니다. 지리산 날씨 심술 궂네요.
한 시간이 넘게 지나서야 도착한 종주 팀원들을 격려하고 하산 주를 돌리며 축하 파티를 합니다. 시간도 여유가 많아 남원으로 나가 목욕도 하며 피로도 풀고 남원시청 대성식당 해물탕집으로 이동해 우리의 지리산 종주를 자축하며 맛난 저녁과 얼큰하게 술을 걸친 다음 남원역으로 갑니다. 짧았던 이틀 동안의 여정이 꿈만 같습니다. 오랫동안 저는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