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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가야자료실 스크랩 제4의 제국 가야 2부 - 파형동기의 비밀
남전南田 추천 0 조회 66 14.10.17 16: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최인호의 역사추적 - 제4의 제국 가야

제2부 파형동기의 비밀

 

나는 또 다시 내 역사추적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인 대성동고분을 찾았다. 수수께끼의 왕국 가야의 비밀을 밝히는 열쇠가 여전히 대성동 고분에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발굴조사를 끝낸 고분은 흙이 덮인 체 말끔하게 정리돼 있었지만 다른 열쇠를 찾아야만 굳게 닫힌 제4의 제국 가야의 빗장을 열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성동 고분에서 내가 첫 번째로 발견한 열쇠는 동복이었다. 끊임없이 초원을 이동하는 기마민족들의 생활도구이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동복을 통해 나는 네이멍구의 오로도스 대평원과 중국의 동북지방을 답사했다. 추적을 끝낸 후 나는 송화강에서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이 기마민족의 후예임을 그리고 그 뿌리는 우리민족의 고향인 부여국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역사추적의 시작이었다. 대성동 고분에는 제2의 열쇠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열쇠를 확인하기 위해서 김해박물관으로 찾아갔다. 1998년에 개관한 김해박물관은 가야의 유물만을 전시하고 있는 전문 박물관이다. 진열된 총 1300여점의 유물들. 그러나 박물관의 다른 유물들은 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내 관심의 초점은 오직 대성동 고분. 그중에서도 13호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에 맞춰져 있었다. 제13호 고분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왜계의 유물이 6점이나 출토됐다. 지금까지의 역사적 학설을 뒤집어 버리는 충격적인 대사건이었다. 그것은 파형동기였다.

 

『NHK 뉴스 1991년 2월 9일

이곳은 한국 경상남도의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발굴현장입니다. 이 소용돌이 모양을 한 동제품은 이번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와 고분 시대의 유적에서 약 100점이 발견되어 방패 등에 붙이는 장식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파형동기, 네 개의 돌기가 바람개비처럼 휘감고 있는 그 독특한 형상으로 인해 바람개비형 동기라고도 불리우는 파형동기. 오직 일본에서만 100여개가 발굴된 전형적인 왜계 유물로 알려진 파형동기가 어째서 대성동 고분에서 6점이나 출토됐던 것일까. 그렇다. 파형동기는 내게 있어 새로운 역사추적을 시작하는 제2의 열쇠였다.

 

파형동기의 비밀을 추적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떠난 내가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야나가와의 실개천을 흐르는 선상에서 벌어진 전통적인 일본의 혼례장면이었다. 긴 막대기로 뱃사공이 천천히 배를 젓는 선상에는 새 신랑이 흰옷으로 온 몸을 가린 새색시 얼굴을 햇빛이라도 비칠까 붉은 일산으로 가려주고 있었다. 뜻밖의 이국적인 풍경을 맞이한 나는 마음속으로 신혼부부에게 축복을 빌어주었는데 훗날 인도에서도 똑같은 결혼장면을 맞게 되었으니 이번의 역사추적은 이방인들의 결혼에서 시작돼 결혼식으로 끝낸 허니문의 역사탐험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일본에서 첨으로 찾아간 곳은 요시노가리 유적. 야요이 시대 때 600년 동안 존속됐던 고대부족국가의 마을을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유적 공원이었다. 실제로 요시노가리에는 야요이시대 복장으로 옛날방식 그대로 살고 있는 현지인들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뭐 하고 계십니까?”

“초목 염색을 하고 있습니다. 노란색 액을 만들고 있습니다. 과거 사람들이 사용했던 방법을 참고로 하여 꼭두서니(풀의 일종)를 이용해 염색하고 있습니다. 참억새의 일종인데 카리야스(풀의 일종)라고 합니다. 여기서 노란색이 나옵니다. 이것은 보라색 원료로 여기서 보락색이 나옵니다.”

 

 

 

그러나 내가 요시노가리를 찾아온 것은 관광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요시노가리에서 나온 가장 중요한 유물을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일찍부터 벼농사가 시작됐던 이곳에는 각종 유물들이 출토됐는데 그중에서도 최고의 유물은 파형동기를 찍어내는 주형이다. 주형이 나왔다는 것은 거푸집에 청동을 부어 얼마든지 파형동기를 찍어낼 수 있다는 것이며 파형동기의 수요가 그만큼 많았다는 산 증거인 것이다. 과연 요시노가리 박물관에는 독특하고 강렬한 문양 도저히 2천 년 전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세련된 디자인의 파형동기를 찍어내는 주형이 깨어진 체 전시돼 있었다.

 

 

그러나 파형동기를 만드는 주형은 발견했지만 실제의 파형동기는 볼 수 없었다. 나는 모형이 아닌 실제의 파형동기를 보고 싶었다. 박물관의 쇼윈도 너머로가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그 감촉을 느끼며 파형동기가 뿜어내는 숨결을 직접 느끼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유물을 보호하기 위해 감싼 종이를 거둬내자 드디어 파형동기가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내 내손에 닿게 된 파형동기는 2천 년 전 고대인의 숨결을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나는 파형동기를 손에 올려놓고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 오랜 세월을 견디고 나와 만난 이 유물은 내 역사추적에 어떤 답을 전해줄 것인가? 고대인들에게 이 파형동기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을까? 이 파형동기를 만들어낸 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가모하라 히로유키 사가현립박물관 학예원

“야요이 시대 당시, 청동제 유품은 아주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부장품을 보면 어느 정도 신분이 높은 자의 무덤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파형동기가 어떤 주술적인 의미를 갖는다면 종교의 제사장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세 개의 파형동기는 모두 여섯 개의 바람개비 모양의 돌기가 붙여 있었는데 몸통 중앙에 갈고리 모양이 붙은 것 두 개와 갈고리가 없는 것 한 개로 다시 나뉘고 있었다.

 

“파형이라 불리는 회전하는 갈고리 모양의 기원에 대해서는 스이지가이설이 있습니다. 즉 오키나와 이남의 따뜻한 해역에서만 잡히는 스이지가이에 기원이 있다는 설입니다. 남쪽 바다에서 잡히는 귀중한 조개를 장신구나 펜던트로 사용하는 풍습이 야요이 시대의 규슈지방에서 유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람들이 남쪽에서 잡히는 불가사의한 조개, 특히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기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여러 유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날 밤 나는 후쿠오카로 돌아왔다. 파형동기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그 촉감을 느껴봤지만 나는 새로운 미궁에 빠진 느낌이었다. 그것은 파형동기가 오키나와의 따뜻한 바다에서 나오는 스이지가이 조개에서 유래됐다는 학예관의 설명 때문이었다. 후쿠오카의 강가에는 밤마다 포장마차를 성시를 이룬다. 나는 후쿠오카의 명물 포장마차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학예관이 말했던 그 불가사의한 조개 스이지가이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제2의 열쇠 파형동기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서 일본으로 역사추적을 떠나온 것이라면 이번엔 불가사의한 조개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오키나와로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나는 결심했다. 한편 이 무렵, 경성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우리나라 형질 인류학 사상 획기적인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김재우 경성대 박물관 학예실장

“지금까지 대성동 고분에서 4차에 걸쳐서 발굴해낸 인골들 중에 제일 양호하게 나온 인골입니다. 호수로는 57호분입니다만 앞서 말했듯이 57호분에서 순장당한 인골입니다.”

 

대성동 고분의 발굴 조사에서는 모두 30여명의 순장인골이 출토됐다. 잔존상태가 매우 좋지 않는 상태를 감안한다면 인골의 숫자는 더욱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성동 고분에서 30여명이 넘는 인골이 발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과학적인 분석실험을 진행했던 적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서울대 의대 서정선 교수와 김종일 교수는 2004년 8월 한국유전체 학회에서 김해 예안리 고분에서 출토된 인골을 분석한 결과 남방계라는 실험결과를 발표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두 학자는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인골을 구할 수 없어 안타까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경성대학교에서는 제57호 고분에서 출토된 네 개의 인골 파편을 두 학자에게 자료로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서정선 교수 서울대 유전자이식 연구소 소장

“생명진화의 역사는 시간과 공간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생명은 그 시간과의 싸움을 DNA속에 다 기록으로 남겨 놓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몇 천 년 전에 고분 속에서 사람의 뼈를 갖다가 잘 보관된 뼈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속에 아주 작은 미량의 DNA를 분석할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그 속에 시간과의 싸움에 대한 또 그 정보 자체가 그대로 다 보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새 이제 DNA의 기술이 아주 발달했기 때문에 결국은 죽은 사람의 DNA가 말을 하게 하는 사자의 DNA가 말을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사자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해줄 것인가?

DNA를 추출하기 위해 두 교수가 인골을 수거하고 있을 그 무렵 나는 비행기 속에 앉아 있었다. 사가현박물관의 학예원이 말했던 불가사의한 조개 즉 스이지가이 조개를 확인하기 위해 오키나와로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비행기 창밖으로는 오키나와 본섬을 포함한 유큐열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오키나와의 풍광을 즐길 여유도 없이 나는 곧장 항구로 향했다. 스이지가이를 채취하는 모습을 한시라도 빨리 현장에서 목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오키나와 본섬에서 약 40km 떨어진 도카시키 섬 근처의 바다 나를 안내한 젊은 어부는 곧 바다 속으로 뛰어 들었다. 오키나와의 연안은 산호초로 유명하다. 산호초는 산호의 분비물이나 뼈 같은 물질이 쌓여 이루어진 석회질의 암초를 가르치는 것으로 바다생물사이의 공생관계를 유지시켜 풍부한 수산물의 원천이 된다. 특히 산호초 바다에는 수많은 조개류가 서식하고 있다. 조개들은 먼 바다인 외해와 가까운 바다인 내해에 따라 서식지의 차이를 보인다. 구모가이와 스이지가이는 내해에 서식하고 있어 채취가 용이했다. 어부가 잠수해 조개를 채집하는 동안 나는 배 위에 앉아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바닷물 속으로 잠수하는 어부의 모습과 바다 속에 만발한 산호초 그 사이를 떠도는 형형색색의 열대어가 손을 뻗으면 그대로 잡힐 듯 마치 수족관 속처럼 보였다. 그 수족관 속에서 젊은 어부는 모래 속에 몸을 감추고 있는 스이지가이를 귀신처럼 발견해 채취하고 있었다.

 

“이것이 스이지가이입니다. 예쁜 조개죠. 아직 살아있습니다. 안에 많이 있습니까? 숫자는 적습니다. 스이지가이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水) 자 모양이 두드러지죠. 이것과 닮은 것으로 구모가이란 것도 있기 때문에 좀 혼동되기 쉽죠. 구모가이는 여기에 몇 개의 뿔이 있어서 전부 여덟 개의 뿔이 있습니다. 맛있지는 않을 거예요. 별로 먹지는 않으니까요. 스이지가이는 수심 2~3m인 곳에 사는데 이렇게 모래땅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말이죠. 모래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습니다. 바닥에 붙어 있는 해초 같은 것을 잡아먹습니다. 크기는 대체로 이 정도이고요. 큰 것이 이 정도입니다. 안에는 손톱 비슷한 게 있습니다. 그것으로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죠. 구모가이도 여기에 손톱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마침내 나는 오키나와 바다 속에서 직접 채취한 불가사의한 조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이지가이가 물수자 모양을 한 조개라는 사실을 어부로부터 알게 됐던 것이다. 젊은 어부와 헤어져 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울창한 방풍림 사이를 걷던 중 나는 어촌의 한 가정집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나무 사이로 집 한 채가 보였는데 놀랍게도 방금 내가 보았던 스이지가이가 그 집 처마 밑에 걸려서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마루 위에 앉아서 신물을 보고 있는 주민 앞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건 뭡니까?”

“스이지가이입니다. 스이지가이, 한문의 물 수자와 닮아서 스이지가이라 부릅니다. 부적으로 쓰입니다.”

 

현지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스이지가이가 단순히 장식용으로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집안으로 들어오는 재앙을 물리치는 부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니......

 

요시카즈

“뿔이 있는 것은 강하다. 그런 의미라고 전 생각합니다. 뿔이 있는 것은 강한 것. 뿔이 있는 조개로는 스이지가이가 가장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스이지가이와 옛날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 섬에서는, 방언으로는 모모운나라고 합니다. 모모운나를 써주세요. 모모란 것은 소, 운나는 조개. 아마도 소의 뿔과 닮아서 모모운나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소의 뿔을 닮아 오키나와 말로 모모운나라고 불리우는 스이지가이는 축산은 물론 온 집안 구석구석에 부적으로 걸려 있었다. 스이지가이 뿐 아니라 비슷한 모양의 구모가이란 조개도 액막이로 함께 사용되는 사실 역시 놀라운 풍경이었다.

 

 

오키나와의 최초의 통일왕국이 형성된 것은 15세기. 이때 왕국의 이름은 류큐이며 왕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규정된 슈리성이다. 메이지유신 직후에 일본에 합병됐지만 그 이전까지 독자적인 왕국형태를 지닌 체 고유한 문화를 간직하며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왕조 때부터 염직물, 칠기, 악기 등 특산물을 교역한 무역국이었지만 대표적인 특산품은 스이지가이를 비롯한 조개였다. 이 조개들은 해양실코로드를 통해 일본 본토는 물론 우리나라까지 수출됐던 것이다. 오키나와산 조개들이 어떻게 외국으로 수출됐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매장문화재센터를 찾았다. 센터 안에는 과연 오키나와에서 나온 토기 파편과 같은 유물들과 조개로 만든 팔찌 귀고리 같은 장신구 그 껍질의 화려함으로 나전공예로 사용됐던 야광조개로 만든 숟가락 등 수많은 조개의 유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특히 내 시선을 강하게 잡아당긴 것은 조개의 길이란 해양실크로드였다. 이 조개의 길을 통해 스이지가이는 일본으로 건너가 파형동기의 원형이 됐으며 그 뿐인가 조개의 길을 통해 오키나와의 조개문화는 우리나라의 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기시모토 요시히코 오키나와 현립매장문화재센터 조사과장

“특히 야요이 시대가 되면 규슈의 호족들이 오키나와에서 나는 대형 권패(卷貝), 이를 고호우라, 이모가이라 부르는데 이 조개로 만든 팔찌를 좋아했습니다. 오키나와는 이 조개를 규슈에 수출하여 그 대신 쌀, 철제품, 유리옥 등이 오키나와로 들어옵니다. 이러한 규슈와 오키나와의 교역을 총칭하여 ‘조개의 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나는 오키나와의 바다가로 나가 보았다. 나는 지금까지 파형동기의 원형이 오키나와산 조개라는 학설을 믿고 이곳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스이지가이는 오키나와 말로 소 조개인 모모운나다. 모모 즉 소는 오키나와만의 고유 동물이 아니다. 소는 예로부터 신성한 동물로 숭배됐던 인도에서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스이지가이를 부족으로 삼는 풍습은 오키나와 이전에서 오키나와 이전의 바다에서부터 흘러들어온 해양문화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그곳이 어디인가. 나는 오키나와 이전의 바다, 그 이전의 바다, 그 미지의 바다가 어디인가를 가늠해 보기 위해 아득한 수평선 저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 무렵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네 개의 인골을 분석하는 실험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연구팀은 우선 이 인골에서 미토콘드리아 유전물질 즉 DNA를 추출해 전체 염기 서열을 분석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 내에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기관으로 자체적으로 유전되는 DNA를 갖고 있다. 이 DNA는 어머니를 통해 유전되는 특성을 갖고 있어 유전학계에서는 가계조사나 인류계통 조사에 활용하고 있다.

 

* 미토콘드리아 DNA : 어머니에게서만 물려받아 돌연변이율이 높고 교차가 일어나지 않아 인류 진화과정 중에 일어난 돌연변이의 정보들을 분석함으로써 인류 조상을 추적할 수 있음.

* 케임브리지 표준염기서열 : 영국케임브리지 연구소에서 최초로 밝힌 표준 염기서열.

 

염기서열은 흔히 개인이나 대상마다 다르기 때문에 기준이 되는 서열과의 차이로 표시하는데 미토콘드리아 DNA 경우에는 케임브리지 염기서열을 기준으로 한다. 이 비교과정을 통해서 대성동 고분의 인골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초정밀한 미세한 작업은 마침내 중요한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역사적인 순간이 바야흐로 초읽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오키나와에서 돌아온 나는 경주의 분황사를 찾아갔다. 분황사 탑은 흙이나 돌로 벽돌 모양을 모방해 만든 전형적인 모전석탑으로 서기 634년 선덕여왕 3년에 축조됐다. 1915년 이 모전석탑을 해체 수리할 당시 제2층과 3층의 탑신 사이에서 사리장신구가 봉납된 석함이 발견됐다. 이 사리함과 더불어 해체 수리 당시에 특별한 물건들이 출토됐다. 우선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남해의 심해지역에서 나오는 이모가이 조개와 특별한 봉양품이 발견됐는데 이 공양품들은 모두 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문명제품인 철제가위와 바늘, 금동제장식조각, 바늘통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남해산 이모가이 조개였다. 조개 중 하나는 당장이라도 말띠꾸미개로 사용될 수 있는 가공된 조개껍질이었다.

 

 

말은 그 당시 가장 중요한 운송수단이자 최고의 전쟁무기였다. 그러므로 말의 엉덩이 부분에 장식품으로 남해산 이모가이 조개를 사용했다는 것은 말을 타고 나가는 전투에서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부적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조개문화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조개팔찌와 같은 장신구와 조개로 만든 화살촉, 사람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조개탈을 봐도 우리나라에도 조개의 길을 통해 다양한 해양문화가 전파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서울의대의 서정선 교수와 김종일 교수는 실험결과를 발표했다.

 

김종일 교수 서울대 유전자이식연구소

“57번 A의 순장자의 같은 경우는 자기가 천염기상 정도를 분석했는데 그 중에 케임브리지 표준염기서열과 비교했을 때 약 일곱 개 정도의 변이가 발견됐습니다. 그래서 그 변이를 가지고 저희가 현대 한국인과 몽골인을 약 200명 전 유전자분석을 한 것을 비교해 봤을 때 이 사람과 가장 비슷한 변이를 가진 사람이 누군가 표시해 봤더니 한 sample이 전체 7개 중 6개가 일치하는 sample이 있었습니다. 그 sample을 가지고 그 sample은 미토콘드리아를 다 가지고 있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분석해 봤을 때 결과가 M7으로 나왔거든요. M7이라고 하는 것은 저희가 알고 있기로는 남방계로 분류돼 있습니다. 옛날에 아프리카를 나와서 중동을 거쳐서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서 남쪽아시아로 이동한 것이 M7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M7하고 일치한다는 것은 이 분이 남방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구요. 재미있는 것은 저희가 최근에 타밀(인도남부)사람 한분을 저희가 서열을 분석한 적이 있는데 그분하고 이 서열을 비교해보면 굉장히 유사합니다. 전체 7개 중에서 역시 6개가 일치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고대인골이 고대인도 타밀계에서 온 사람일 가능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김종일 교수의 설명은 전문적인 내용이어서 이해하기 어렵다. 그 내용을 그림으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57호 고분에서 출토된 한 순장자의 경우를 보면 케임브리지 표준서열과 비교할 때 약 7개 정도의 변이를 보인다. 그 7의 변이를 한국인과 몽골인 200명의 유전자 분석과 비교해 보니 여섯 개의 일치하는 sample이 있었다. 그 sample은 M7으로 불리우는 남방계 유전인자. 최근 인도 타밀 사람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이 사람과도 서열이 굉장히 유사해 전체 7개의 변이중에서 역시 6개가 일치한다는 획기적인 내용인 것이다.

 

서정선 교수

“결국 북방계와 남방계가 같이 가야지 고분에 병존하고 있다는 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므로 어느 정도 허왕후에 그러한 얘기들이 아주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니구나 하는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알게 되지 않았나 그러나 이걸 가지고 섣불리 어떤 재미로 할게 아니라 이것이 이젠 하나씩 하나씩 정확하게 증명해 나가는 그런 계기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파형동기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 일본을 거쳐 오키나와와 경주를 답사했던 나는 김해시에 있는 수로왕비 능을 찾았다. 일단 추적을 재정비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수로왕비 허황후. 삼국유사에 의하면 허황후는 인도의 야유타국에서 건너온 이방인으로 기록돼 있다. 이때가 서기 48년 7월. 허황후는 붉은 돛배를 타고 깃발을 휘날리며 바닷가에 도착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이 기록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인도가 지리적으로 너무 멀어서 과연 2천 년 전에 수개월이 걸리는 험한 대항을 건너서 금관가야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시간적 공간적 이유 때문인 것이다. 그 뿐인가. 허황후가 건너올 때 싣고 왔다는 파사탑. 삼국유사에 의하면 왕비가 해신의 노여움으로 풍랑을 만나자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게 하니 그제야 무사히 항해에 금관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는 진풍탑인 것이다. 그러나 학계의 불신으로 이 파사석탑 역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이 파사탑 역시 역사적 가치가 전혀 없는 무용지물에 돌덩어리에 불과하단 말인가. 아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미 오키나와의 바다에서 조개의 신앙이 바다 건너의 바다에서부터 조개의 길을 따라 건너온 해양문화임을 깨닫지 않았던가. 소조개 즉 스이지가이를 부적으로 하는 신앙이야말로 2005년 현재 2억 마리의 소를 보유하고 있는 인도에서 비롯된 숭배신앙이 아닐 것인가. 또한 두 교수 역시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인골이 인도사람의 DNA의 유전인자와 거의 일치한다고 증언하고 있지 않는가. 가자, 나는 새로운 역사추적의 결심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잊도록 하자.

 

 

무굴제국의 황제 샤자한이 지은 붉은 성. 만약 천국이 지상에 있다면 바로 ‘이곳이다’라고 노래한 붉은 성을 둘러보는 동안 나는 망막한 절망감을 느꼈다. 도대체 인도대륙 어디에서부터 역사추적을 시작해야 할 것인가? 인도로 온 이상 내 역사 탐험은 허황후가 출발했다고 전해 내려오는 야유타 즉 아요디야 지방에서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밤늦게 출발하는 야간열차는 마침 6.25 전쟁시절 난민을 가득 싣고 떠나던 피난 열차처럼 혼잡했다. 간신히 자리를 잡자 열차는 곧 출발했다. 아요디아는 인도의 바다로부터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내륙지방. 현재는 라마가 태어난 서원을 두고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유혈사태를 버리고 있는 분쟁지역의 하나다. 밤 열차는 캄캄한 어둠을 뚫고 미지의 대륙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아요타국. 당나라 고승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아요타국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요타국은 농업이 번창하고 꽃이나 과일이 풍성하다. 불교 가람이 백여 개나 되면 힌두 신을 모시는 사원도 십여 군데가 있다. 사라유 강가에는 여전히 힌두 사원이 신기루처럼 서 있었다. 사라유 강가에서 내가 찾아온 것은 허황후를 기념해 만든 공원. 가락 중앙 종친회에서 만든 이 가락공원에는 이곳 아유디아 지방이 허황후의 유허지 즉 허황후의 탄생지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기념비를 참배하기 위해 아요디아 지방으로 찾아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기념비공원의 순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현재 아요디아의 왕손 미쉬라의 궁을 방문하는 것이다. 미쉬라는 작가인 자신의 아들을 소개했다. 그가 출간한 책들을 보며 비록 언어는 다르지만 낯선 이국땅에서 같은 작가로써 우리는 따뜻한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이분은 누군가요?"

“할아버지의 아버지, 빠르나푸 나라야느 싱 왕입니다. 이쪽은 여왕이고 이름은 자가 다바 데비입니다. 왕이 이 궁전을 만들었습니다. 아요디야의 왕과 여왕입니다.”

 

 

미쉬라는 이 궁을 만든 증조할아버지인 왕과 왕비를 소개했다. 접견실 다른 한편엔 허황후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마치 허황후가 자신의 할머니의 할머니 아요디야 왕국의 어머니인 듯......

 

미쉬라 아요디야 왕손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냥 허구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서로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그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사실인 것 같습니다.”

 

미쉬라와 환담을 나누던 나는 테이블 위에서 문득 낯익은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놀랍게 오키나와에서 봤던 구모가이였다. 나는 오키나와에서부터 간직하고 있던 조개를 꺼내 비교해 봤는데 크기만 다를 뿐 정확히 일치하는 구모가이 조개였다. 미쉬라는 그 조개가 수백 년 전부터 자신의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던 장식품이라고 말했다. 미쉬라와 헤어져 성을 나온 나는 아요디야의 시장을 산책했다. 시장거리는 활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미쉬라의 거실에서 봤던 바로 그 조개를 팔고 있는 상점을 발견했다. 진열장 위에는 내가 오키나와에서 봤던 조개들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이 조개를) 상크라고 부릅니다.”

 

인도에서는 조개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입김을 불어 조개 나팔의 악기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 가게 앞에 상품으로 진열된 조개들은 오키나와에서 봤던 바로 그 조개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나는 가게 주인에게 이 조개를 언제 부는지 물어보았다.

 

“아침에 기도할 때 불고 신 앞에 기도할 때 붑니다. 제사할 때도 붑니다.”

 

 

아요디아는 힌두교의 성지답게 거리 곳곳에 신전이 있었다. 상인들을 위한 소규모의 신전이었는데 나는 그 속에서 놀랍게도 조금 전에 봤던 조개를 발견했다. 조개를 들고 있는 신의 이름은 비슈누 그 순간 나는 조개 나팔을 불었던 상점 주인이 기도할 때 신 앞에서 분다고 말했던 그 신이 다름 아닌 비슈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슈누 신. 힌두교에서 브라마, 시바와 더불어 3대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비슈누 악을 몰아내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지상에 부활한다는 미래의 신 도덕의 복구자이자, 사랑과 평화의 신으로 알려진 비슈누는 한손에는 수레바퀴 다른 한손에는 조개를 들고 있다. 비슈누가 들고 있는 차크라 즉 수레바퀴는 태양과 진리를 상징하며 다른 한손에 들고 있는 샹카(조개)는 인류 최초의 나쁜 기운과 악을 물리치는 천상의 나팔소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마다 샹카를 부는 것은 힌두교의 오랜 전통인 것이다.

 

가야 차란 인디라 간디 연구센터

“샹카는 바다에서 온 것입니다. 샹카는 달이 뜨는 바다에 존재합니다. 비슈누는 바다에 있습니다. 바다를 지킵니다. 샹카를 불면 아주 중요한 소리가 납니다. 이 소리는 매우 큰데 파문을 만들어냅니다. 다른 악기는 그런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진동과 공간 속의 파문을 상징합니다. 그것이 샹카입니다. 샹카를 단순하게 악기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샹카는 공간 속의 파문을 만들어내는 악기입니다. 또한 샹카의 소리는 악한 힘을 없어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갠지즈 강변 연안에 있는 고도 바라나시. 인도사람은 누구나 살아생전에 한번은 이곳에 순례를 해야 한다는 신앙을 갖고 있다. 이곳은 인도 최대의 성지다. 성스러운 강 갠지즈와 만나는 계단을 가타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신과 인간이 만나는 성소다. 의식의 시작은 조개나팔을 부는 것이다. 이 샹카의 소리는 지상에 넘쳐흐르는 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우주의 대기를 정화시킨다. 종소리와 더불어 등잔의 불을 밝힌 사제들은 성화와 더불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것은 신에게 바치는 열정의 표현이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갠지즈 강의 신에게 경배를 올린다. 제사가 끝나면 사람들은 꽃잎의 작은 촛불을 하나씩 얹진 꽃불을 갠지즈 강에 띄워 보내며 자신의 소원을 빈다. 다음 생에서는 더 좋은 생으로 태어나기를

 

제사의식이 끝난 후 나는 숙소로 돌아오다가 우연히 거리에서 코끼리를 앞세운 행렬과 마주쳤다. 행렬은 마차에 탄 신랑이 신부를 맞으러 떠나는 것이었다. 김수로와 허황후의 결혼도 이와 같이 신명나는 축제였을까. 음악에 맞춰서 격렬하게 춤을 추는 인도 여인의 모습은 허황후의 이국적인 모습과 닮아 있지 않을까. 나는 문득 역사탐험을 시작했을 때 우연히 일본에서 봤던 전통적인 혼례장면을 떠올렸다. 이번 역사탐험의 시작과 끝이 이처럼 결혼식 장면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그렇다. 김수로왕과 허황후은 2천여 년 전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결혼을 올리지 않았던가.

 

다음날 새벽 나는 다시 갠지즈 강가에 나가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갠지즈 강에 뛰어 들어 몸을 씻고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인도사람들은 갠지즈 강에서 몸을 씻으면 모든 죄가 소멸되고 다음 생애는 보다 더 나은 생을 부여 받는다고 믿고 있다. 갠지즈 강물은 인간의 죄를 씻어주는 정화수이자 영혼불멸의 영생을 약속하는 성수였던 것이다. 그 한편에서 젊은 사제 하나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샹카를 불고 있었다. 태양이여 솟아라. 조개나팔 소리는 그렇게 온 우주를 향해 울려 펴지고 있었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옛 시인의 노래처럼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먹고 이 기상의 모든 나, 모든 전쟁, 모든 증오, 모든 탐욕, 모든 어두움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댄 얼굴로 고운 해야 솟아라.

 

인도를 떠나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바닷가를 찾기로 했다. 허왕옥이 아요디아에서 갠지즈 강을 거쳐 항해를 떠난 인도양의 바다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닷가의 어촌에서 나는 뜻밖의 풍경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조개입니까? 예 조개입니다. 왜 걸어놓았죠? 신성하기 때문에 걸어 놓았습니다. 우리 가게를 지키기 위해서 걸어 놓았죠.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관습입니다.”

 

가게를 지키기 위해서 신성한 조개를 걸어 놓았다는 상점 주인의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과연 어촌의 가게마다 조개장식들이 부적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전혀 낯설지는 않았다. 이미 오키나와의 어촌에서도 집으로 들어오는 재액을 물리치기 위해서 조개를 부적으로 매달아 놓은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바다, 인도양의 바다. 하늘의 상제로부터 꿈에 공주를 보내어 김수로의 배필로 삼게하라는 천기를 받은 아유타의 국왕. 아버지의 명을 받고 허왕옥이 떠난 인도양의 바다. 그 바다는 마치 해신의 노여움을 받은 듯 성난 파도로 술렁이고 있었다. 일찍이 인도의 시승 타고르는 노래했다.

 

아늑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가없는 하늘 그림처럼 고요한데

물결은 쉴 새 없이 남실거립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소리치며 뛰놀며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길 없는 하늘에 바람이 일고

흔적 없는 물위에 배는 엎어져

죽음이 배 위에 있고

아이들은 놉니다.

 

타고르의 시를 떠올린 순간 나는 문득 우리들의 인생은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아득한 나라의 숨바꼭질처럼 느껴졌다. 2천 년의 세월도 역사도 허왕후도 가야도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서 벌어지는 한 바탕의 모래성을 쌓는 소꿉장난이 아닐 것인가. 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와 같은 영혼의 바닷가에 서서 문득 파도의 소리를 들었다.

 

파도는 내게 2천 년 전의 신화를 바람의 소리를 빌어 들려주었다. 바다를 건너 김수로의 짝이 되라는 아버지의 명을 받은 허황옥은 고국 아요타를 떠나 바닷가로 나간다. 해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서 파사탑을 싣고 떠난 허황옥은 붉은 돛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넜다. 도중에 태풍을 만나기도 하고 성난 파도를 만나기도 했으나 파사탑의 도움과 천지신명의 보살핌으로 마침내 상제가 점재해 주었던 금관가야국 해안에 무사히 도착하게 된다. 수로왕의 명을 받고 미리 망산도에서 망을 보며 기다리던 신하들은 가야국으로 들어오는 붉은 돛배를 발견하자 불을 피워 연기로 신호를 올린다. 이 소식을 들은 김수로는 크게 기뻐하며 직접 행차에 장막을 치고 왕비를 기다린다. 공주가 왕이 있는 행궁에 이르자 왕이 몸소 나가 맞이해 장막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혼례식을 올린다. 신방에 든 대륙의 아들 김수로와 바다의 딸 허황옥은 서로가 서로를 운명처럼 부둥켜안는다. 두 사람은 함께 수레를 타고 궁궐로 돌아와 이로써 아요타의 공주 허황옥은 금관가야의 정비가 되는 것이다. 이때의 장면을 가락국기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로부터 나라와 집안이 잘 다스려지고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였으니 명령이 엄숙하지 않아도 권위가 있었고 정치가 엄격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졌다.”

 

인도에서 돌아온 나는 김해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분산성에 올라 낙조를 바라보며 파형동기의 비밀을 추적하는 역사탐험을 끝냈다. 이미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동복의 열쇠로 김수로왕의 대륙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면 제2의 열쇠 파형동기를 통해 조개의 신앙이 비슈누의 샹카로부터 조개의 길을 따라 전파된 해양문화임을 확신했다. 또한 대성동 고분에서 나온 인골을 분석한 서정선, 김종일 교수의 가야인의 DNA속에 인도인의 형질이 포함됐다는 연구결과는 허왕후가 인도에서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결정적인 신빙성을 부여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가야는 대륙문화와 해양문화의 합작품임이 밝혀졌으며 가야야말로 고구려, 백제, 신라와는 전혀 다른 제4의 제국인 것이다.

 

# 저작권은 한국방송 KBS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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