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에 돌입할 당시, 이미 전함이 해전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상당부분 항공기와 항모 기동부대에게 잠식당해 있던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껏해야 25노트 정도가 고작인 구식전함들은(구식전함치고는 빠른 편이지만), 항모에 수반해서 작전을 펼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항공기의 호위 없이 단독으로 돌아다니기도 어정쩡한 상황이었죠. 전간기 동안 열심히 건조해둔 주력함들은 모두 하는 일없이 본국이나 트럭섬에 계류된 채로 호텔 노릇이나 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일본 해군은 그들 스스로가 진주만 기습을 통해 항모 기동부대의 위력을 입증했음에도 여전히 거함거포주의와 결전 교리에 매달리고 있었죠. 즉, 언젠가 미국의 대규모 전함부대가 항모들을 수반하고 나타날 때를 대비해서 주력함들을 온존해놓아야 한다는 발상을 갖고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함거포주의자들이 생각하기에 공고는 결전의 주력에 쓰기에는 부적합했으니, 이는 공고가 건조된지 30년이 가까운 노령함인데다 장갑이나 화력도 전함간의 포격전에서는 다소 불충분한 함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공고와 그 자매함들은 결전에 대비한 주력 목록에서 제외되었고, 다른 전함들이 항구에서 죽치고 있는 동안 "잃어버려도 크게 아깝지 않은 전함"으로써 태평양의 주요 전장을 이곳저곳 뛰어다녔습니다. 공고 급은 일본의 전함들 중 가장 많은 활약을 했고, 태평양전쟁동안에는 최고의 수훈함이었죠.(전함중에서)
[항해중인 공고 (1942)]
1941년 개전 당시, 자매함 히에이와 키리시마는 항모기동부대의 호위역으로 진주만 기습에 참가했고, 공고는 3번함 하루나와 함께 제3전함전대의 일원으로 말레이 반도 상륙부대를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기회가 닿았다면 P.웨일즈와 일전을 겨뤄볼 수 있었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웨일즈와 순양전함 레펄즈는 육상 공격기에 의해 격침되어버리고 말았죠. 이후 공고는 1942년 4월부터 나구모 중장의 제 1항공함대에 수반하여 인도양 작전에 참가했습니다. 1942년 6월에는 곤도 노부다께 중장의 지휘하에 자매함 히에이, 중순양함 아타고, 쵸카이, 묘코, 하구로 등과 함께 미드웨이 섬 공략부대로서 미드웨이 작전에 참가했으나, 제 1항공함대의 항모 4척이 모두 침몰당하는 등 해전은 대 패배로 끝났고 공고의 14인치 포가 불을 뿜을 기회는 없었습니다.
2) 과달카날 해역에서의 활약 공고가 비로소 제대로 활약을 한 것은 1942년 말의 과달카날 전역에서였습니다. 당시 과달카날 섬 주변의 제공·제해권은 몇 차례의 해전 끝에 미군의 손에 들어가 있었고, 일본군의 함선과 수송선들은 감히 대낮에 섬 주변을 항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성가셨던 것은 미군이 차지하고 있던 핸더슨 비행장과 부속된 비행대들이었는데, 이들 때문에 일본의 수송선과 전투함들이 대 피해를 입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 일본 해군의 주 행동패턴은, 일몰 후에 해역에 돌입하여 항공기가 뜰 수 없는 야간에 작전을 벌인 다음 해가 뜨기 전에 해역을 벗어나는 것이었죠.
[과달카날 섬의 핸더슨 비행장]
이러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타개하기 위해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은 1942년 10월 3일에 「전함 주포에 의한 비행장 포격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비행장 제압작전」의 연구를 명했고, 이 연구의 결과로 나온 것은 「14인치 주포용 3식탄을 이용한 포격」이었습니다. 3식탄이란 당시 함대에 보급되기 시작한 대공사격용 산탄으로써, 내부에 900개의 소이자탄이 차있었고 시한신관을 사용하여 원하는 고도 (보통 약 1,000m)에서 폭발시킬 수 있었습니다. 폭발 시에는 20도의 원뿔 모양을 이루며 터지도록 고안되었고 탄피 자체는 폭약에 의해 파괴되어 산탄의 양을 증가시키도록 되어있었으며, 소이자탄은 약 0.5초 후에 점화되어 3,000도의 온도로 반경 5m의 화염을 일으키며 5초 동안 연소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핸더슨 비행장 포격 작전은 이 3식탄을 지상사격에 응용해서 넓은 비행장을 제압하는 병기로써 사용한다는 발상이었죠. 즉, 고속전함 부대가 야간을 이용하여 핸더슨 비행장으로부터 20km까지 접근한 다음 주포로 약 1,000발의 3식탄을 발사하여 항공기와 연료를 파괴하고 화재를 일으켜 비행장을 사용불능으로 만드는 것이 작전의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10월 6일 밤에 제3전함전대(공고&하루나)가 트럭섬 북부 지역에 대해 3식탄 사격 시험을 행했고 이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이 실험의 성공에 의해 자신감을 얻은 일본 연합함대 지휘부는 과달카날 섬 비행장 공략을 결정하고 10월 12∼14일의 3일간 핸더슨 비행장을 포격하기로 했습니다. 이들 중 공고는 하루나와 함께 13일 밤의 제2진 포격대로 참가하기로 되어있었죠. 10월 12일의 1차 포격대는 에스페란스 해전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비행장 포격이 좌절됐지만, 제2진인 공고와 하루나는 구축함 6척을 수반하고 예정대로 13일 밤 11시 30분에 핸더슨 비행장 인근 해역에 진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들은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속도를 18노트로 줄였고 70∼90분 동안 약 970발의 3식탄을 비행장에 발사했습니다. 포격은 활주로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끝부분까지를 차근차근히 으깨버렸고 비행장의 항공기 90대 중 48대를 파괴했으며, 탄약과 연료에도 불길이 옮겨져서 밤새도록 화재가 계속되었습니다. 이날의 포격은 대성공이었으며 비행장의 기능을 거의 정지 직전까지 몰고 갔다고 합니다.
[포격 다음날의 핸더슨 비행장 주변의 모습]
이처럼 과달카날 해역에서 공고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습니다만, 다른 자매함들은 그렇게까지 운이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11월 13일 새벽에 자매함 히에이가 과달카날 해전(전반)에서 대피해를 입고 그날 오후에 자침(혹은 항공기에 의한 격침)으로 생을 마감했고, 14일 밤에는 키리시마가 미국의 전함 워싱턴과 교전하여 15분만에 16인치 포탄 9발과 5인치 포탄 40발을 맞고 격침되었습니다. 특히 키리시마의 경우는 공고 급이 전함과 교전을 벌인 첫 사례로써, 이와 동시에 태평양전쟁의 시점에서는 그녀들이 전함과 포격전을 벌이기에는 적합치 않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죠. 「기습 + 8,000m 이내의 지근거리 + 워싱턴의 16인치 포」를 감안하더라도, 제대로 반격도 하지 못한 채 15분만에 일방적으로 주포탑과 상부구조물을 관통당한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 : 이 경우는 상대가 지나치게 강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
게다가 워싱턴과의 교전 이전에 키리시마와 중순양함들이 사우스다코타를 전투불능으로 만들어 놨음에도, 그 대부분은 유탄에 의한 소프트킬(Soft-Kill)이었고 주포탑과 지휘시설을 비롯한 중요 부분은 단 한군데도 관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일본 철갑탄에 문제가 있었음) 이제 공고 급은 화력이나 방어력 양방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고 더 이상 전함 제 1의 임무인 "전함간의 포격전"에는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3) 레이테 해전 그러나 공고는 본가의 일족들(라이온&타이거 급)처럼 그렇게 쉽게 퇴물로 전락하지는 않았습니다. 1943년 1월에는 과달카날 섬의 철수작전을 지원했고, 1944년 6월에는 하루나와 함께 제3전함전대에 속해서 마리아나 해전에 참가했죠. 그리고 1944년 10월 20일에는 전함 야마토, 무사시, 나가토, 하루나와 중순양함 아타고, 다카오, 쵸카이, 마야, 스즈야, 쿠마노, 도네, 지쿠마, 묘코, 하구로 등과 제1 유격부대를 형성하여 레이테 해전에 참가합니다. 제1 유격부대의 목표는 보르네오 섬의 브루나이를 출발하여 시부얀해와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과하여 레이테만에 돌입하여 수송선단과 상륙부대를 괴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출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타고와 마야가 잠수함의 뇌격을 받아 격침되었고, 그후 미군 함재기의 공습을 받아 무사시가 격침되고 많은 함정들이 피해를 입는 등 항해는 참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미군 항공기의 공습을 받은 일본함대. 가운데의 전함이 공고]
이후 몇 차례의 반전 기동을 거친 후 제1 유격부대는 거의 무방비 상태인 레이테만에 돌입할 뻔하지만 도중에 유격부대 지휘관 구리다 다케오 중장의 어이없는 후퇴 결정이 내려졌고, 레이테 해전은 참가 함선의 반수를 상실했다는 피해를 입은 채 종료되었습니다. 이때 공고는 미국의 호위항모 갬비어 베이에 포격을 가했지만 귀환 중에 미군 함재기의 공습을 받고 지근탄에 의한 피해를 받았죠. 공고는 10월 28일에 만신창이의 함대와 함께 브루나이 정박지에 귀환했고 살아남은 함선들에 대해 긴급수리가 시행됐지만, 공고를 포함한 대부분은 본토의 도크에 들어가서 완전 수리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이때 공고가 입은 피해는 꽤 심각했는데, 지근탄에 의해 함교 부근에서 중반부까지의 우현 현측에 균열이 생겼고 연료탱크에서 계속 기름이 흘러나오는 형편이었습니다. 또한 우현 함미 부근의 지근탄이 스크류 하나를 망가뜨리는 바람에 속도도 느려져 있었죠. 이런 상황 외에도 이미 레이테를 포함한 필리핀 전역의 제해·제공권을 연합군이 장악한 탓에 브루나이 정박지 역시 계속해서 심한 공습을 받아 휘하의 함선을 차례차례 잃어간다는 형편이었으므로, 한시라도 빨리 일본의 모항으로 귀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4. 공고의 최후
1944년 10월 16일에 드디어 야마토와 나가토, 공고의 전함 3척을 포함한 함대의 본토 귀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들 전함 3척을 호위하는 것은 겨우 제2 수뢰전대의 경순양함 1척과 구축함 4척, 제31 구축대의 구축함 2척뿐이었습니다.(그나마 제31 구축대는 대만까지만 동행하기로 되어있었죠) 당시의 남지나해가 이미 미국 잠수함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함 3척을 호위하는데 호위함이 겨우 7척밖에 없다는 것은 명백히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구축함은 필리핀 작전의 지원에 동원되어 더 이상 여유가 없기도 했고, 함대의 지휘관 역시 이상할 정도로 상황을 낙관적으로 판단하여 더 이상 호위함의 부족을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본토 귀환함대는 10월 16일에 브루나이 정박지를 출항하여, 경순양함 야하기, 전함 공고·야마토·나가토의 순서로 단종진을 짜고 양측에 구축함을 배치한 형태로 18노트의 속력으로 북상했습니다. 그 사이 대만에서는 미군 항모 기동부대의 습격이 있었고 이것에 걸리지 않도록 함대를 약간 서쪽으로 향하여 대륙측에 가까운 항로를 선택했습니다. 그후 가장 경계해야할 바시 해협(대만과 필리핀 사이의 해협)을 태풍으로 파도가 거칠어졌을 때 돌파하였고, 이 시점에서 31구축대의 구축함 2척을 대만으로 분리했습니다. 함대는 이미 항해길의 절반을 지났고 가장 위험한 곳도 지나쳤으며, 본토에 도착하는 것도 하루 이틀의 문제인 지점에 도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방심은 위기를 부른다고 했던가요? 귀환함대는 바로 이 시점에서 미국 잠수함의 뇌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공고를 격침시킨 SS-315 시라이온]
이 귀환함대를 습격한 잠수함은 제3함대 소속의 「시라이온(Sea Lion)」으로써 함장은 E.T.리치 중령이었습니다. 시라이온은 지금까지 부설함 시라타카호를 격침한 적도 있는 숙련 잠수함이었는데, 이 시기에는 바시 해협 동방을 초계권으로 정해서 상선 사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시 해협을 지난 귀환함대는 그대로 북상하였고 이 시점에서는 잠수함보다도 오히려 부근을 떠돌고 있을 미 기동부대의 공습에 경계하면서 대만과 중국 사이의 대만해협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전투대형은 경순양함&전함의 단종진 위에 구축함 하마카제와 유키카제, 단종진 동쪽에 이소카제와 우라카제가 위치한 형태였죠. 거친 바다의 위에 부상한 채 추적을 계속하던 시라이온은 원래는 선두의 야하기를 겨누고 있었지만, 도중에 거대한 쪽으로 목표를 바꾸고 2번함인 공고에 대해 2,700m의 거리에서 6발의 어뢰를 발사했습니다. (시간은 1944년 11월 21일 오전 2시 56분) 몇 분 뒤에 나머지 3개의 어뢰를 발사하였고 그것들은 60초 뒤에 명중했습니다.
공고에 명중한 것은 6발 중 2발로써(4발이라는 설도 있음) 좌현 함수부근과 2번 연돌 부근의 좌현 현측이었습니다. 그 직후에 뒤에 발사된 어뢰 3발이 나가토의 함수를 스쳐 지나가서 단종진 동쪽의 우라카제에 1발이 명중했습니다.(우라카제는 이 어뢰로 굉침되었음) 공고는 어뢰 2발에 피격당해 좌현 연료탱크가 일부 파손되었지만, 보일러는 아직 충분한 증기압을 제공하고 있었고 16노트로 순항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함대 수뇌부도 공고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고, 얼마후엔 회피기동을 중지하고 다시 본래의 침로를 유지하였죠. 승조원들도 부포나 기관총으로 함 주변의 해상을 소사하다가 이윽고 활동을 중지하였고 비번인 사람은 침대로, 당직근무중인 사람은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승조원이 눈치채지 못했지만, 당시 함의 하부에서는 좌현 함수 부근과 기관실 부근의 침수가 멎지 않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지휘부가 공고의 피해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여 16노트의 속도를 유지하라고 지시한 덕분에, 이미 피격으로 인해 약해져있던 함수의 격벽이 전방에서 밀려드는 수압을 견뎌내지 못하고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한 상태였죠. 공고의 승무원들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함이 좌현으로 14도까지 기울어진 때였고, 그제서야 함내의 응급 수리반이 침수구역으로 달려가 방수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수리반이 보편을 설치하여 구멍을 막으려고 했지만 함수 수선부 하에 생긴 구멍은 수압으로 인해 점점 더 넓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미 보편 정도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공고는 일단 지그재그 항해를 멈추고 속도를 12노트까지 떨어뜨려 수압의 압력을 낮췄습니다만, 침수는 멎지 않았고 좌현으로의 경사도 느리지만 서서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수리반이 정밀 조사를 실시한 결과, 최초 피해조사 때에 함정의 손상을 상당히 낙관했던 것과는 달리 약해진 격벽 틈새나 느슨해진 리벳 및 각종 파이프 연결부 등을 통해 물이 쉴새없이 스며들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공고가 건조된지도 이미 32년이 지난 시점이었으므로 어느 정도 리벳이 헐거워진다거나 수밀장치가 완벽히 작동하지 않는 부분 등이 있었던 것이죠.
이 시점에서(4시 40분) 공고를 함대로부터 분리시키고 이소카제와 하마카제의 호위하에 대만으로 회항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공고의 속도는 간신히 10노트를 넘기는 상황이었고 이 속도로는 항구에 도착하기까지 6시간이나 걸린다는 상황이었죠. 게다가 이때 이미 함체의 경사는 40도를 넘고 있었으며 함수는 물에 잠겨 침로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함장은 수리반을 제외한 전 승조원을 우현으로 이동시켰고 오전 5시 18분에 공고는 드디어 항행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공고가 너무 많은 침수를 당한데다 해면의 상태까지 거칠었던 이유로 구축함에 의한 예인도 불가능했으며 결국 시마자키 함장은 배를 포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곧바로 "전원 상갑판에 오르라"는 명령이 발령되었고, 경사가 60도에 달한 시점에서 "전원 퇴함"의 명령이 발령됐습니다. 이때 시라이온은 아직도 공고를 추적하고 있었고 어뢰의 재장전도 이미 종료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시라이온이 다시금 뇌격을 가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전 5시 24분, 승무원들이 한참 퇴함하고있을 때 갑자기 함의 앞부분이 붉게 빛나더니 곧바로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과 함께 공고는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원인은 경사가 진행되면서 1번 포탑의 탄약고에서 주포탄 몇 발이 흐트러지면서 충돌하고 곧 유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고가 침몰한 곳은 대만의 기륭 항 북서쪽 60해리의 지점이었고, 생존자는 포술장 이하 겨우 237명이었습니다. 함장 이하의 나머지 승무원 1,300명은 함과 운명을 같이해야 했던 것입니다.
5. 마치며...
공고는 일족 최후·최강의 후손으로써, 종가의 라이온 일족들이 1차대전에 참가하여 갖은 수난을 당했을 때 그곳에서 한발짝 비켜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전후에 일족들이 쓸모없는 구식전함으로 취급받아 퇴출당했을 때도 그녀는 새로운 자매들과 후손들과 함께 영광된 함대의 일원으로써 당당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어쩌면 공고는 자신만은 "비운의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비록 태평양해전에서 가장 활약한 전함이 됨으로써 제대로 활약해보지 못하고 사라졌던 일족들의 명예는 회복했어도, 세월 앞에 약없다고 할런지 아무리 장갑을 두르고 개장을 해서 "전함"이라는 이름을 칭해도 그녀는 결국 1차대전 시기 구식전함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고가 최후를 맞이할 때 일어났던 "유폭"은 참으로 얄궂은 운명의 장난일지도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