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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노동조합, 노조원 변동 | ||
| 노동조합(개) | 노조원(명) |
87년 이후 신규(1987년) | 5,141 | 880,000 |
전노협 창립 (1990년) | 602 | 193,258 |
민주노총 창립 (1995년) | 862 | 420,000 |
2) 노동자 정치 세력화 - 진보정당 건설
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쟁취된 대통령 직선제는 곧 바로 진행된 1987년 12월 13대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적용되었다. 87년 노동자 대 투쟁을 경과한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백 기완을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 독자출마 전술과 김 대중을 중심으로 한 비판적지지 전술 그리고 김 영삼과 김 대중을 대상으로 후보 단일화 전술로 나뉘면서 13대 대선 투쟁을 전개했다.
13대 대선 투쟁 이후 90년 민중운동 독자출마 전술을 택했던 흐름은 한겨레민중당과 민중의 당화 함께 90년 민중당을 창당했고 이후 민중당은 92년 14대 총선을 즈음하여 민중정치연합과 진보정당추진위원회로 분리가 된다.
이후 96~97 노동법 총파업을 전개한 민주노총은 1997년 15대 대선에서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 권 영길을 중심으로 국민승리21일 창당하여 대선에 임했으며, 이와는 다른 흐름으로 1998년 사회당 계열의 흐름이 청년진보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국민승리21은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을 창당하였고 민주노동당내 한 흐름이 2008년 진보신당을 창당하면서 분리 되었다. 진보신당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의석 획득 실패로 해산을 한 뒤 2013년 사회당과 통합하여 노동당을 재창당을 하였다.
한편 2008년 진보신당으로 분리가 된 이후 민주노동당은 새 진보 통합연대 그리고 국민 참여당과 함께 2012년 통합진보당을 창당했으나, 2012년 19대 총선 비례대표부정선거 사건으로 일부가 2012년 탈당을 하여 진보정의당을 창당했고, 이후 통합진보당은 2014년 박근혜 정권의 헌법재판소에 의해 정당 해산 결정이 나면서 강제 해산이 되었다.
3)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정치 방침
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정치방침은 아래 표2)와 같다.
표2)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정치방침 (대선중심으로) | ||||
시기 | 당선자 | 진보후보 | 선거방침 | 전국조직 |
87년 13대 | 노태우 | 백선본(백기완-사퇴) | 민중후보독자론/비판적지지론/후보단일화론 | 無 |
92년 14대 | 김영삼 | 백기완 | 전노협 다수안 ‘독자후보전술’ 중심으로 투표/전국연합의 결정 존중 | 전노협 |
97년 15대 | 김대중 | 국민승리21(권영길) | 배타적 지지 | 민주노총 |
02년 16대 | 노무현 | 민주노동당(권영길) | 배타적 지지 | 민주노총 |
07년 17대 | 이명박 | 민주노동당(권영길) | 배타적 지지 | 민주노총 |
12년 18대 | 박근혜 | 통합진보당(이정희-사퇴), 진보정의당(심상정-사퇴), 금속노조(김소연), 민주노총 울산(김순자) | 통합진보당 배타적 지지 철회/대선방침 無 | 민주노총 |
16년 8월 정책대대 17년 2월 정기대대 | 민주노총 중심의 선거연합정당 건설과 민중단일후보 전술 | 민주노총 | ||
17년 19대 | 문재인 | 정의당(심상정), 민중연합당(김선동) | 심상정, 김선동 지지 | 민주노총 |
87년 노동자 대 투쟁이 끝나자마자 새롭게 직선제로 대통령 선출방식이 바뀌었고 같은 해 12월 제 13대 대선 투쟁이 진행이 되었다. 13대 대선 투쟁은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백 기완을 중심으로 한 백선본 흐름과 김 대중을 중심으로 한 비판적지지 흐름 그리고 김 영삼과 김 대중을 중심으로 후보 단일화 흐름으로 나뉘어 진행이 되었다.
이후 92년에 진행된 14대 대선투쟁은 진보후보로 백기완이 출마를 했고, 90년 건설된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운동은 전노협의 안은 독자후보론이었으나 이후 전국연합과의 논의 과정에서 김 대중 지지로 전환되면서 대선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97년 15대, 02년 16대, 07년 17대 대선에서는 권 영길을 중심으로 한 국민승리21(이후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으로 대선투쟁에 임했으며 12년 18대 대선은 민주노동당의 후신인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을 철회하고 별도의 대선방침이 없는 상태에서 대선에 임했다. 이후 민주노총은 16년 8월 정책대의원대회와 17년 2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 중심으로 선거연합정당 건설과 민중단일후보 방침 안을 제출했으나 부결이 된 상태(김 태균, 2017)에서 17년 19대 대선은 정의당에 심상정과 민중연합당의 김 선동 후보를 지지하는 방침으로 대선투쟁을 전개한 바가 있다.
4) 현장조직운동
87년 노동자 대 투쟁의 과정에서 형성된 현장 활동가들의 조직은 노동조합 민주화 또는 민주 노동조합 건설을 위한 노조 민주화 추진 위원회(이하 노민추)였다. 이후 노민추는 87년 노동자 대 투쟁을 경과하면서 ‘기업별 단위의 현장조직(87년) -> 기업별 현장조직 협의체(96년) -> 전국적 수준에서 현장조직(07년)’으로 발전(김 태균, 2016) 발전해 왔다.
전국적 단위의 활동가 조직의 분화는 1998년 금속연맹 홈페이지에 익명으로 올라온 글을 통해 공론화 되었다. 이 글에서는 권 영길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을 중심으로 정 갑득, 배 석범, 이 석행, 강 승규, 차 수련 등으로 대표되는 흐름은 ‘국민 파’로, 이 갑용, 유 덕상, 조 돈희를 중심으로 한 흐름은 ‘현장 파’로 그리고 단 병호, 양 경규, 채 운석, 심 상정을 중심으로 한 흐름은 ‘중앙 파’로 지칭을 하면서 현장조직인 ‘국민 파’, ‘중앙 파’, ‘현장 파’로 분화 되었다고 칭하고 있다.
아래 표3)와 같이 87년 노동자 대 투쟁의 과정에서 성장한 선진적 활동가들은 ‘현장 파’를 중심으로는 1996년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2007년 「현장실천・사회변혁 노동자 전선」으로 ‘중앙 파’의 경우 2003년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 연대」로 그리고 ‘국민 파’의 경우 2001년 「민주노동자전국회의」,「노동운동발전정책연구소」와 2008년 「현장실천노동자연대」를 출범시키면서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해 왔다(김 태균, 2016).
표3) 이념별 전국 단위 현장조직의 출범 | |||
| 현장파 | 중앙파 | 국민파 |
1996 |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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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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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동자전국회의 |
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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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운동발전정책연구소 |
2003 |
|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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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 현장실천・사회변혁 노동자 전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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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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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실천노동자연대 |
이러한 ‘국민 파’, ‘중앙 파’, ‘현장 파’ 현장조직은 이후 민주노총을 비롯한 주요 연맹 산별 임원 선거에서 각축전의 주체가 되었고 전노협과 민주노총으로 이어지는 조직발전전망과 ‘노동해방’ 또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 등 노동조합운동론에 있어 지속적으로 대립이 되었다. 특히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비롯한 노사정위원회 등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민주노동운동의 참여여부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이 되기도 하였다.
3. 30년의 성과 뒤에 가려진 한계
1) 한국 민주 노조운동의 조직발전 논쟁
① 전노협 건설 과정에서 나타난 조직발전 관련 논쟁
87년 노동자 대 투쟁이 마무리 된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민주노조운동이 총 집결체인 전국 조직 건설에 총 매진하게 된다. 이러한 역동적 움직임이 지역・업종 노동조합 전국회의를 거쳐 90년 전노협으로 그리고 95년 민주노총 출범으로까지 이어졌다.
조직발전전망을 둘러싼 내부 논쟁은 우선 90년 전노협의 건설 과정에서부터 나타났다. 이때 제기가 되었던 논쟁은 ① 노총민주화론, ② 제2노총 건설론, ③ 전노협 건설론 으로 압축된다. 3가지 주장중 ① 노총 민주화론을 제외하면 ② 제2노총 건설론과 ③ 전노협 건설론은 노동조합의 새로운 전국적 질서체를 건설한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만 어떠한 질적 조직을 건설 할 것인가에 있어 차이를 보였단 논쟁이다.
② 제2노총 건설론은 연맹체 건설론으로 기존 한국 노총과 같은 수준의 연합체적 질서를 즉각 건설하자는 주장이었는데, 이 주장은 노동조합을 경제투쟁의 조직으로 간주(김 승호, 1991)하거나 혹은 변혁적 정치투쟁만을 위한 조직으로 규정(허 영구, 2007)하는 극우 혹은 극좌적 모습을 보였다. 이에 반해 ③ 전노협 건설론은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조직체로 가기 전 과도기적 단계로 전노협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90년 전노협의 건설로 이어졌다.
② 전노협의 ‘전투적 노동운동론’ 관련한 논쟁
90년 1월 22일 전노협의 창립일은 노태우 중심의 민주정의당과 김 영삼 중심의 통일 민주당 그리고 김 종필 중심의 신 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합당한 날이기도 하다. 전노협 출범에 따른 정치권의 대응은 바로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창당하는 것이었다. 한편 자본은 전노협 건설 직전인 89년 12월에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상공회의소,한국무역협회,중소기업중앙회 등 경제관련 5개 단체가 모여 경제인단체협의회를 구성하여 대응을 모색하였다.
88년 취임과 동시에 노태우 정권은 민주노조운동의 지도부 구속, 파업 사업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 전노협 건설을 준비하는 사업장에 대한 업무조사와 ‘문 목사 방북 사건’을 빌미로 반공 이데올로기 공세를 동원하여 전국조직을 건설하고자 하는 민주노조운동을 탄압해 왔다. 이러한 노태우 정권의 탄압으로 인해 많은 사업장이 전노협에 탈퇴를 하거나 가입을 유보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노태우 정권의 폭압적 탄압에 맞선 민주노조운동의 대응은 ‘투쟁을 통한 돌파’였다. 90년 상반기 현대중공업노조의 골리앗 투쟁과 KBS 노조의 방송민주화 투쟁 그리고 이 투쟁을 엄호하고 지지하기 위한 전노협의 90년 5월 총파업 투쟁이 바로 노태우 정권의 폭압적 탄압을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했던 의지였다.
전노협의 ‘투쟁을 통한 돌파’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정권의 민주노조운동 탄압은 극에 다 달았으며, 이는 전노협 출범을 전후로 해서 88년 80명에서 89년 611명으로 그리고 90년 492명, 91년 515명으로 구속 노동자의 수가 급증한 것만 봐도 확인이 가능하다. 곧 이어 91년 2월 박창수 열사의 옥중 살해 사건, 4월 명지 대 강 경대 열사 살해사건 등이 잇달아 터지면서 91년에 이어 92년 민주노조운동을 상대로 한 노태우 정권의 폭압적 탄압은 극에 이르게 된다.
89년부터 91년 그리고 92년까지 이어지는 노태우 정권의 전노협을 상대로 한 폭압적 탄압에 대한 원인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때의 원인이 전노협의 ‘노동해방, 평등세상을 앞당기는’ 또는 ‘비타협적 투쟁노선’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87년 노동자 투쟁의 성과로 결성된 전노협은 ‘노동해방’으로 표상되는 분명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노협은 활동과정에서 투쟁성을 원칙으로 견지하려 하였다(김 진균, 1995). ‘전투적 조합주의’로 불리는 전노협의 정체성은 바로 노사협조주의에 대한 거부, 전투적 투쟁 기풍으로 요약(조 효래, 2002)될 수 있는데, 91년~92년 전노협을 상대로 한 노태우 정권의 폭압적 탄압의 원인이 바로 ‘노동해방’ 혹은 ‘전투적 조합주의’로 표현되는 전노협의 정체성이 원인이라 비판하면서 전노협이라 불리는 민주노조운동의 노동조합운동론에 대한 노동운동 위기론이 전개되었다(김 진균, 1995)
노태우 정권의 전노협 탄압에 대해 전노협의 ‘전투적 조합주의’를 “엘리트주의적이고 분파주의적이고 이념상 관념적 급진주의로 운동 상식 상 전투적 투쟁 일변도”라고 정의하면서(정 승국, 1992) 전노협 스스로의 과도한 전투성 때문에 스스로를 고립시켰다고 비판을 했다.
이에 반해 전노협의 전투적 투쟁방식은 전노협 자체의 선택이기 보다는 구조적 환경에 의해 강요된 불가피한 투쟁이었고 다른 대안을 찾기 어려웠다는 점(김 진균, 1995)등을 들어 전노협의 투쟁성을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 등이 있었다. 전노협의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후 민주노총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으로 이어진다.
③ 전노협의 금속산별, 민주노총 건설 논쟁
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지노협을 통한 전노협 가입, 업종회의로의 조직, 대공장 노동조합으로의 결합 등 3가지 경로를 통해 전국적 연대 단위 조직을 건설해 갔다. 지노협 중심으로 한 흐름은 90년 전노협으로, 업종협의회는 90년 업종회의로, 그리고 대공장 노동조합은 90년 후반 주요 대공장 단위노조 위원장 선거에서 민주파가 당선되면서 흐름의 구체성을 띄었다.
전노협은 92년 금속산업노조 조직발전방안 관련한 논의에서 전노협 중심으로 한 ‘전노협1안’과 전노협, 업종회의, 대공장 중심으로 한 ‘전노협2안’이 대립되면서 이후 대산별-소산별 논쟁으로 이어진다(표4 참조).
표4) 전노협 금속산별 조직발전 논의 | |
전노협1안 | 전노협2안 |
민주노조 진영의 전체적인 조직발전이 전노협에 의해 주도되고 주체적으로 수행되어야한다는 것을 기조로, 전노협의 확대 강화 사업 제시, 산별노조 건설과 관련해서는 참관하고 교류하는 노조의 확대 등으로 지노협의 발전을 통해 전노협을 강화시킨 다음 그 성과를 토대로 업종분과를 산별연맹으로 발전시키자고 제안. | 전노협의 주도성에 집착하지 말고 전노협 미 가입 중간노조를 폭넓게 포괄하는 민주노조 진영의 총 단결 조직을 조속히 건설할 것을 제안. |
이러한 전노협의 금속산별 논의는 전노협 2안)을 중심으로 전노협은 금속일반으로 대공장은 조선 산업 노동조합 협의회와 자동차노동조합총연맹으로 구분되어 전노협 출범 당시 독자적으로 움직였던 현총련과 함께 95년 민주노총 출범에서 소산별(연맹)중심의 민주노총 건설로 이어진다.
민주노총의 조직발전 방안 관련한 쟁점은 전노협(노동해방, 전투적 노동운동론)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 건설과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이하 전노대)를 중심으로 총 노선을 하향평준화를 중심으로 민주노총을 건설하자는 주장(김 태균, 2016)과 함께 전노대를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 건설로 귀결이 된다.
④ 노동운동론과 맞물려 전개된 조직발전전망 논쟁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조직체 건설 관련한 논쟁은 노동운동론과 맞물려 진행이 되었다. 표5)처럼 노동운동론에 있어 전노협의 ‘노동해방’과 ‘전투적 조합주의’ 비판 흐름이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으로 그리고 전노협 건설 과정에서 ‘제2노총 건설론’으로 금속산별 조직발전 논의에서는 전노협의 중심성을 부정하는 ‘전노협 2안’으로, 민주노총 건설에서는 ‘소산별(연맹)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 건설안’으로 모아졌다.
표5) 전국적 조직발전방안 관련한 흐름 | ||
| 노동해방, 전투적조합주의 |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론 |
전노협 건설 | 전노협 건설론 | 제2노총론 |
| ⬇ | ⬇ |
91~92 전노협 위기론 | 불가피한 상황 | 전투적 조합주의가 위기 |
| ⬇ | ⬇ |
금속산별론 | 전노협1안(대산별) | 전노협2안(소산별) |
| ⬇ | ⬇ |
민주노총 건설 | 전노협 확대강화론 | 전노대 확대강화론 |
2)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과 비리파의 결합
민주노총 임원 선거는 ‘현장 파’, ‘중앙 파’, ‘국민 파’가 표6)처럼 한편으로는 독자후보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연합후보를 구성하여 선거에 임했으며 ‘국민 파’가 ‘비리 파’와 연합하여 민주노총 임원을 독점하는 형태로 민주노총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표6) 민주노총 임원 선거 관련 현장조직 분포 | ||||||
기 | 대 | 위원장 | 임기 | 후 보 | ||
현장파 | 중앙파 | 국민파 | ||||
1 | 1 | 권영길 | 95.1.~97.2 | 통합 | ||
| 배석범 | 97.2~98.2 | 직무대행 |
|
| |
| 단병호 | 98.2~98.3 | 비대위원장 |
|
| |
2 | 2 | 이갑용 | 98.3~99.9 | 이갑용 |
| 정갑득 |
| 3 | 단병호 | 99.9~01.1 |
| 단병호(중앙파+국민파) | |
3 | 4 | 단병호 | 01.1~01.8 | 유덕상 | 단병호 | 강승규 |
|
| 허영구 | 01.8~02.4 | 직무대행 |
|
|
|
| 백순환 | 02.5~02.8 | 비대위원장 |
|
|
|
| 유덕상 | 02.8~04.1 | 직무대행 |
|
|
4 | 5 | 이수호 | 04.2~05.10 | 유덕상 | 이수호(노연+전국회의) | |
| 전재환 | 05.10~06.2 | 비대위원장 |
|
| |
| 남궁현 | 06.2~06.2 | 비대위원장 |
|
| |
6 | 조준호 | 06.2~07.2 |
|
| 조준호(노연+전국회의) | |
5기 | 7 | 이석행 | 07.2~08.9 |
|
| 이석행(노연+전국회의) |
| 진영옥 | 08.9~09.2 | 직무대행 |
|
| |
| 임성규 | 09.2~09.3 | 비대위원장 |
|
| |
8 | 임성규 | 09.3~10.1 |
|
| 임성규(노연+전국회의) | |
6 | 9 | 김영훈 | 10.1~12.11 | 허영구 |
| 김영훈(노연+전국회의) |
|
| 백석근 | 12.11~13.3 | 이갑용(좌파노동자회) |
| 채규정(전국회의), 신승철(노연) |
7 | 10 | 신승철 | 13.7~14.12 |
|
| 신승철 |
8 | 11 | 한상균 | 14.12~현재 | 한상균(노동전선) 허영구(좌파노동자회) | 전재현 정용건 -기타 |
95년 출범과 함께 한 민주노총 1기 임원은 업종회의(권영길), 전노협(양규헌), 대공장(권영목)의 통합지도부였다. 지도부는 통합되었으나 통합정신과는 무관하게 96-97 총파업 투쟁의 과정과 그리고 이후 국민승리21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을 주장하면서 91-92년 전개되었던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 즉 노동운동론 관련한 논쟁을 일방적으로 마무리 하였다.
95년 통합지도부를 구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론 관련해서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이 민주노총 1대 지도이념으로 등장 한 이후 98년 2대 임원은 이갑용(현장 파)이 당선되었다. 이후 3대에 중앙파와 국민파의 연합후보로 단 병호 후보가 당선되고, 이후 4대는 ‘현장 파’, ‘중앙 파’, ‘국민 파’에서 전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중앙 파’의 단 병호 위원장이 당선된다. 이후 2004년 제5대 국민파의 이 수호 위원장 당선 이후, 6대 노연과 전국회의의 조 준호가 7대 노연과 전국회의의 이석행이 그리고 8대 노연과 전국회의의 임 성규가 9대 노연과 전국회의 후보인 김 영훈, 10대 국민파의 신 승철까지 당선이 되면서 2004년부터 2014년까지 10년의 민주노총의 역사를 비리파인 노연과 전국회의가 연합한 국민파가 장악했다. 최초의 전 조합원 직선제로 치러진 11대 위원장에는 현장파의 한 상균이 당선이 되면서 10년의 국민파의 독주의 끝을 내릴 수가 있었다.
민주노총의 선거 과정에서 특이한 점은 자본가 계급으로부터 선거자금을 받은 ‘비리 파’가 노연이라는 조직을 구성하여 2001년부터 지속적으로 ‘국민 파’ 현장조직인 전국회의와 연합하여 후보를 구성하여 선거에 임하고 당선이 되어 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2001년 4대 민주노총 임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노총 일부 연맹 위원장들은 수도권 모처에 모여 강 승규 민주택시노조 위원장을 추대하는 모임이 있었다. 결국 이 추대는 ‘국민 파’ 현장조직인 전국회의의 이석행과 연합해 출마를 했으나 ‘중앙 파’의 단병호가 당선이 되면서 낙선을 했다. 이후 이 모임은 노동운동전략연구소(이하 노연)를 결성하고 이후 민주노총 선거에 ‘국민 파’ 현장조직인 전국회의와 함께 연합해서 표6)에 나와 있듯이 10년의 민주노총의 역사를 만들어 갔다. 노연은 강 승규의 비리사건에서 확인이 되듯이 자본가로부터 민주노총 선거 자금을 지원 받아 전국회의와 함께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민주노총의 참여를 둘러싼 논쟁 및 산별노조 건설 논쟁에서 일관 되게 사회적 합의주의 참여 및 소산별론 등을 주장하면서 민주노총 10년의 역사를 비리와 개량으로 점철시켰다.
3) 사회적 합의주의 참여 여부 논란 속에 민주노총의 위기
① 한국 사회 사회적 합의주의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그리고 국가가 결합한 노・사・정 사회적 협약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합의주의의 태동은 연구자에 따라 다양하지만 근대 국가 수립 이후 1920-30년대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에 의해 유일정당의 전일적 정책 조정과 사회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도입되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이 호근, 2003). 한국 사회에서의 사회적 합의주의는 1993년과 94년 두해에 걸쳐 진행된 노・경총 임금합의를 그 첫 출발이라 할 수 있다(장 혜경, 2017). 노・경총 임금합의 이후 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 그리고 1998년 1월부터 출발한 노사정위원회 그리고 2004년 사회적 협약이 있다(표6 참조).
표6) 사회적 합의주의 관련 주요 일정 |
▶1993년 노・경총 임금 합의 ▶1994년 노・경총 임금 합의 ▶1996년 4월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 ▶1998년 1월 1기 노사정위원회 ▶1998년 2월 6일「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90개항) 체결 ▶1998년 6월 2기 노사정위원회 ▶1999년 6월 노정합의 ▶1999년 9월 제3기 노사정위원회 출범 ▶2004년 2월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55개항) 체결 ▶2007년 4월 제4기 노사정위원회 출범 ▶2009년 2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민정 합의문」 체결 ▶2017년 5월 일자리위원회 ▶2017년 8월 경제사회발전 노사정위원회 |
이중 한국 민주노조운동이 사회적 합의주의 참여 관련한 논쟁이 전개된 것은 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이하 노개위)와 96년 1기 노사정위원회, 04년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이하 사회적 협약)’ 이였다.
② 김영삼 정권의 노사관계개혁위원회(1996년- 이하 노개위)
96년 김 영삼 정권에 의해 제기된 노개위는 공무원, 교원 노동조합의 합법화, 복수노조 인정, 3자 개입 금지 철폐 및 정리해고제, 파견제, 변형 근로 도입을 주된 내용(장 홍근, 2017)으로 노동법을 개정하는 의도였다. 96년 4월 김 영삼 정권에 의해 제기된 노개위는 5월 곧 바로 민주노총이 참여한 상태에서 1차 회의가 시작 되었다.
이때 민주노총이 대통령에 제안 한 뒤 한 달 만에 노개위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권 영길이 주창한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때문이었다. 국민파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은 정책참여 및 사회개혁투쟁과 병행해서 제기가 되었는데 이 때의 ‘정책참여’와 김 영삼 정권의 노개위 제안이 맞아 떨어지면서 민주노총이 자연스럽게 노개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노개위는 정리해고제, 파견제, 변형근로제 등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노동자 계급과 대립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대립의 과정이 민주노총이 10월 노개위 불참선언, 11월 재참여 결정, 다시 12월 불참 결정 및 총파업 선언으로 이어지는 행보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 영삼 정권의 노개위에 대한 민주노총의 참여는 “참여 - 불참 - 재참여 - 재 불참과 총파업 선언”으로 이어졌고 이후 12월 26일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의 날치기 통과에 맞서 96~97 총파업 투쟁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권 영길 중심의 ‘국민파’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이 김 영삼 정권의 노개위로 표현되는 사회적 합의주의와 맞닿았고, 96~97 총파업투쟁 과정에서 타협전술이라 할 수 있는 수요파업의 전환이라는 타협적 모습을 보였다(이 은숙, 1997).
③ 김 대중 정권의 1기 노사정위원회(1998년-)
97년 11월 IMF구제금융 신청 이후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 받는 조건으로 긴축정책과 구조조정 중심의 자유화 정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김 상조, 1997). 김 대중 정권은 취임과 동시에 IMF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1기 노사정위원회를 제안하는데 이에 민주노총은 참여를 결정하고 98년 1월 제1기 노사정위원회가 출범을 하게 된다.
이때 민주노총 지도부의 상황은 96~97 노동법 총파업 투쟁 이후 다가오는 대선 투쟁을 위해 권 영길 위원장이 사임을 한 상태이고 곧 이어 양 규헌 수석 부위원장도 일신상의 사유로 사임을 해서 일반직 부위원장이었던 ‘국민 파’의 배 석범 부위원장이 수석 부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아 민주노총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을 때였다. 배 석범 직무대행체제의 민주노총은 김 대중 정권이 제안한 제1기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여 같은 해 2월 6일 정리해고제 및 근로자파견법 제정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사・정 잠정합의를 하고 이 잠정합의안을 2월 9일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 상정하게 된다.
한편 현장조직의 흐름은 96년 12월 출범한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가 98년 1월 10차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를 통해 ‘총파업 조직을 위한 공동 실천 단’을 구성하고 ‘노사정위원회 탈퇴하고 지체 없는 총파업 투쟁으로 생존권을 사수하라’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민주노총의 노・사・정 참여 및 잠정합의안의 부결을 결의한 상태였다.
2월 9일 민주노총의 대의원 대회에서 노・사・정 잠정합의안을 가결 시키려는 ‘국민 파’의 배 석범 직무대행 체제와 잠정합의안 부결 및 노・사・정 위원회 탈퇴를 요구하는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를 중심으로 한 ‘현장 파’ 조직들의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결국 잠정합의안은 부결(유 범상, 2005)이 되고 배 석범 직무대행 체제는 사퇴를 하고 단 병호를 중심으로 한 ‘중앙 파’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총파업을 결의하지만 결국 비상대책위원회는 총파업을 철회하고 임원 선거로 돌입하는 과정을 가지면서 제1기 노사정위원회에 관련한 논쟁은 마무리가 된다. 한편 김 대중 정권은 2월 국회에서 정리해고제 2년 유예 조항 삭제, M&A에 의한 정리해고제, 근로자 파견제를 중심으로 한 노동법을 개정한다.
④ 사회적 협약-노・사・정 대표자회의(2004- 이하 사회적 협약)
04년 1월 민주노총 4기 임원선거에 ‘국민 파’의 이 수호와 ‘비리 파 노연’의 연합후보인 이 수호- 이 석행 후보조가 당선이 된다. 또한 일반 부위원장에도 강 승규를 포함한 김 지혜, 이 혜선, 오 길성, 신 승철 등 ‘국민 파’와 ‘비리 파 노연’ 연합으로 구성된 “전국회의-노연” 연합 지도부가 구성됨으로써 민주노총 최초로 4기 임원은 ‘국민 파’와 ‘비리 파 노연’의 연합 단독 지도부를 구성하게 된다. 이 수호 집행부는 당선이 됨과 동시에 노・사・정 위원회 복귀를 선언하고 이를 2005년 개최 예정인 33차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 상정하겠다고 선언을 하였다.
한편 노무현 정권은 04년 9월 26개 업종으로 제한되어 있던 파견 노동 허용 범위를 무제한으로 확대하고 사용기간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하겠다는 발표를 한다.
민주노총 이 수호 집행부는 9월 10일 개최된 32차 민주노총 대대에서 “정부의 비정규직 개악 안이 철회되지 않으면 노사정대표자회의와 관련한 일체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약간의 입장변화를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최된 민주노총의 2005년 1월 20일 개최된 33차 대의원 대회에 자동 상정된 사회적 교섭 참여의 건은 노무현 정권의 노동법 개악 안이 국회 상정이 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별 논의 없이 유예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 수호 집행부는 2005년 2월 1일 개최된 35차 대의원 대회에서 사회적 교섭 참여의 건을 상정 했다가 조합원들이 단상을 점거하고 신나 및 분말 소화기를 뿌리면서 반대를 하며 논란이 지속되다가 결국 정족수 미달로 대의원 대회가 유예 되었다.
한편 현장조직은 1998년 8월 17차 대표자회의를 끝으로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가 해산을 한 뒤, 2004년 “사회적 합의주의 노・사・정 담합 분쇄를 위한 전국 노동자 투쟁 위원회(이하 전노투)를 구성하여 노・사・정 담합 반대를 외치면 투쟁을 전개하고 있을 때이다. 전노투는 2004년 11월 14일 동국대학에서 개최된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에 1천 여 명의 노동자가 참여하는 독자집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2월 1일 민주노총 34차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서 사회적 협약 참여 건이 유예된 이후 ‘중앙 파’ 현장조직인 전진은 2월 22일 대의원 대회를 앞두고 “민주노총 2.22대의원 대회에 대한 <전진>의 입장”이라는 성명서을 통해 민주노총의 사회적 협약 참여에 대해 반대 입장을 제출했다. ‘중앙 파’ 전진 이외에도 민주노총 중앙위원 연 서명으로 민주노총의 ‘사회적 협약'에 대한 반대 입장을 제출하였고 전노투 또한 반대 입장과 더불어 2월 22일 대의원 대회 직전인 20일 긴급 논의 제안을 하 상태였다.
애초에 2월 22일 소집되었던 대의원 대회가 연기되어 3월 15일 개최되었으나 마찬가지로 ‘사회적 협약’ 관련한 안건이 처리가 무산되었다. 이날 대의원 대회는 사회적 교섭 안 승인건과 함께 위원장 신임의 건도 함께 논의가 되었고 사회적 교섭 안 승인이 무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원장이 사퇴를 하지 않고 대의원 대회를 마무리 하였다.
3월 15일 대의원 대회 무산 이후 민주노총은 3월 17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위원장 책임 하에 노・사・정 대표자회의에 참여하고 노・사・정 교섭 방침 관련해서는 추후 대의원 대회에서 승인여부를 결정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대의원 대회 논의 안건인 사회적 교섭 관련 안건을 위원장 직권으로 결정함으로써 노동자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하게 된다.
이 수호 집행부가 노・사・정 대표자회의 참여 관련해서 대대 결정 사항을 부인하고 위원장 직권으로 결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① 이 수호 집행부가 민주노총 최초로 ‘국민 파’와 ‘비리 파’인 노연의 연합 단독 집행부라는 점과 함께 ② 사회적 교섭에 반대했던 ‘중앙 파’ 전진의 임 성규 의장이 3월 9일 매일노동뉴스와의 인터뷰을 통해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가능했다. 결국 이러한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정을 근거로 이 수호 집행부는 4월 5일 개최된 3차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여를 하게 된다.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서 3회나 무산 또는 부결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원장 사퇴를 부인하고 위원장 직권으로 노・사・정 대표자회의에 참여했던 이 수호 집행부는 결국 2005년 11월 강 승규 수석 부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비리 파 노연’의 비리 사건이 공개되면서 총 사퇴를 하면서 마무리가 된다.
4. 87년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등장과 함께 노동현장을 둘러싼 노자간의 대립
1) 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자본과 정권의 노동통제전략의 변화
87년 노동자 대 투쟁은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급부상과 함께 노사관계를 규정하는 노동법 체계의 현실적 부 조응이 드러나면서 노동법의 재개정과 함께 자본과 정권의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한 대 노동정책에 대한 전면적 전환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또한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현장에서의 자본의 축적 과정에서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손 정순, 2009). 87년 이전의 자본축적 전략이었던 권위주의적 노동통제로는 더 이상 안정적인 자본축적이 불가능함을 확인하고, 노동현장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자본과 정권에게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노동현장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이 전면화 되는 시기는 바로 87년 노동자 대 투쟁 직후이다(이 종선, 2001).
새로운 자본축적 전략 즉 노동시장유연화를 통한 잉여가치의 극대화 구조를 형성하기 위한 ‘신 경영 전략’은 표7)에 나와 있듯이 ① 노동조합의 정책 변화, ② 노동시장 유연화, ③ 기업문화운동, ④ 노동과정에서 노동자 참여 유도 등으로 나타났다(김 태균, 2017b).
표7) 신 경영 전략(경영합리화) | |
노동조합 | ① 노동조합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무노조주의 혹은 노조배제주의 ② 노동조합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나 경영자 주도의 종속적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하여 노동조합의 각종 활동에 개입, 지배를 시도하는 지배/개입 전략 ③ 노동조합을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고 조합의 자주적 활동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협력을 이끌어내는 전략. |
노동시장 | ① 정규직 : 능력주의 인사제도의 도입 확대 △ 성과급 도입 △ 능력급 도입 △ 직책과 직위 분리를 통한 승진단계 확대 인사고과의 강화를 통하여 경영자/관리자에게 고과/사정 권한을 강화 피고과자가 되는 노동자 내부에 경쟁을 강화 노동력의 수량적 유연성을 확대하기 위하여 △ 외주 및 사내 하청, △ 임시직 및 파트타임 근로자, △ 계약직 등의 확대 ② 비정규직 ; 고용 확대 |
기업 문화 | 기업문화전략은 기업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노동자들에게 기업이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하는 다양한 규범과 가치, 규율을 내면화하도록 노동자들의 인지적/규범적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제반 활동을 말함. △ 기업의 공식 홍보/교육부서가 주관하는 공식적 홍보/선전/교육 활동과, △ 각종 서클 활동 등 공식 업무영역 이외의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인사/노무 담당 부서 주관), △ 가족관계/지역 주민 관계 등 기업 조직 밖의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 등. |
노동과정 | 노동력의 유연한 이용을 가능하게 하는 다기능화 및 배치전환의 활성화, 작업과정 중 근로자의 정신적 참여를 이끌어냄을 뜻함 △ QC, △개선․제안활동, △TPM 활동 등 |
2) 개량주의를 동원한 자본과 정권의 대 노동정책 - 민주노조운동의 타협적 운동 경향
자본과 정권의 대 노동통제전략의 기본적인 목표는 노동현장에서 무한정한 자본축적을 위한 항상적이고도 안정적인 노사관계 구축이다. 87년 노동자 대 투쟁으로 급성장한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존재는 바로 자본과 정권의 이러한 기본적인 목표에 대한 전술적 전환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자본과 정권의 대 노동통제 전략이 ‘권위주의적 노동통제 전략’에서 ‘신 자유주의적 노동통제 전략’으로 전환을 꾀할 수밖에 없었다.
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변화된 자본과 정권의 대 노동정책은 다음 두 가지로 압축되면서 안정적 자본축적 구도를 가지게 된다. 첫 번째는 노동현장에 대해 노동시장유연화를 주 내용으로 하는 직접적 신자유주의적 ‘신 경영 전략’ 도입이며, 두 번째는 간접적 ‘신 경영 전략’의 도입 방법인데 ‘비리 파’를 중심으로 개량주의자들을 동원한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또는 주요 대 공장 상층부 중심의 타협적 노사관계 구축을 통해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고 ‘신 경영 전략’에 대한 민주노조운동의 대응 즉 총 파업 투쟁을 교란 시키는 정책이었다.
그 결과 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급성장한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자본과 정권의 독점이윤에 의해 배양된 개량주의에 의해 ① 노동운동론이 타협적 노선으로 ② 사회적 합의주의 참여 여부로 논란을 야기했으며, ③ 총 파업 투쟁이 교란되고 ④ 노동현장의 공동화 현상이 노골화 되었다.
3) 노동현장을 둘러싼 노자관계
노동현장을 둘러싼 노자간의 관계에 있어 자본은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의 권력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면서 잉여가치를 극대화 하려 하고 반면 노동자들은 자신의 이해를 중심으로 자본가를 상대로 한 투쟁을 극대화하려 한다(김 영수, 2003).
현장 권력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 관계 이외에도 노동자 계급 내부에서의 비적대적 관계라 할 수 있는 노동조합과 현장조직간 관계도 존재한다. 노동조합과 현장조직 간의 관계는 자본주의 체제 내 조직이라는 점에서 노동조합이 한계를 가지지만 노동자 조직 중 가장 대중적 조직이라는 점과 함께 노동조합의 한계를 극복할 현장조직으로 조직된 선진 활동가들의 역할이 현장권력을 중심에 두고 한축으로는 협력을 또 다른 한축으로는 선의의 경쟁을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관계를 유지한다.
현장권력을 상대로 한 노동조합과 현장조직 간의 일반적 관계는 아래 표8)과 같다.
표8) 현장권력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과 현장조직 간의 관계 | |||
노동조합 노동현장권력 | 노동조합 | ||
강 | 약 | ||
현장조직 | 강 | A | B |
약 | C | D |
현장 권력을 둘러싼 자본과 노동 간의 관계에서 노동조합과 현장조직의 권력이 강해 노동현장권력을 장악하는 A의 경우가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서는 가장 바람직한 구조이다. 이에 반해 B의 경우는 노동조합이 현장권력에 결합하는 힘이 약한 상태에서 현장조직이 현장권력에 대한 힘이 강할 때 나타나며 C의 경우는 그 반대로 현장조직의 힘이 약한 상태에서 노동조합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이다. B와 C의 경우 현장권력을 중심에 두고 노자간의 주도권을 가지고 다툼을 전개함에 있어 일정 한계를 가질 수 있는 구조이다. D의 경우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서 가장 취약한 구조인데 D의 경우는 노동조합이나 현장조직이 현장권력을 중심으로 한 힘이 약한 상태에서 자본이 현장의 주도권을 장악한 경우를 말한다.
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30년의 역사에서 자본과 정권은 ‘비리 파’를 동원하여 ‘국민 파’와의 연합을 통해 민주노총 중앙지도부를 장악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합의주의 참여 및 총파업 투쟁을 둘러싼 교란책동을 통한 간접적 노동현장 통제와 함께 신자유주의적 신 경영 전략을 통한 노동현장의 직접적 통제 전략을 동시에 추진했다.
이에 반해 민주노조운동은 전노협과 민주노총으로 이어지는 노동조합의 전국적 조직 건설과 민주노동당 등 제도정당 건설을 통한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으로 대응 했다. 이러한 민주노조운동의 대응은 결국 민주노총 지도부 구성에 있어 비리파와 국민파의 연합의 진출을 통한 사회적 합의주의 및 총파업 투쟁 전선의 교란과 함께 제도정당 건설 중심으로 한 대리정치 확산을 야기 시키면서 현장권력을 둘러싼 노동조합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87년 이후 노동현장을 둘러싼 노자간의 대립관계를 단순화 하면 그림 1)과 같다.
그림1) 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노동현장을 둘러싼 노자간의 30년의 대립 관계 |
5. 87년 노동자 대 투쟁 그리고 30년의 역사 - 한국 민주노조운동에게 드리는 제언
87년 노동자 대 투쟁의 시작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처절한 절규에서 나타났듯이 자본과 정권의 권위적 노동통제에 맞선 현장투쟁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은 전노협에 이어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조합운동 수준에서 전국적 조직 건설로, 그리고 민주노동당 건설 등 노동자 정치세력화 수준에서 제도정당 건설 투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또한 ‘노민추’로 시작한 선진적 활동가들은 ‘제조업 대공장 중심의 기업별 현장조직’에서 ‘전국 현장조직 대표자회의’로 그리고 ‘현장실천・사회변혁 노동자 전선’을 발전해 왔다.
그러나 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자본과 정권은 노동현장의 주도권을 다시금 재탈환 하고자 비리-개량주의를 동원한 노동조합 상층단위의 개량주의 지도부 구축과 사회적 합의주의를 동원한 노동법 개악 그리고 전국적 총파업 투쟁 전선의 교란책동, 개별 기업 차원에서 노동현장을 대상으로 한 신 경영전략 등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자본의 축적 과정의 고도화를 위한 전 방위적 대응 체계를 구축해 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노조운동의 사회적 합의주의 참여 반대 및 총파업 조직화와 대리정치로 점철되는 제동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방침 철회 등 노동조합 운동의 전투성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노자관계의 핵심적 공간인 노동현장에서의 노자관계는 노동의 주도권이 약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자본의 주도권이 강화되는 형태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자본과 정권의 현장 권력에 대한 주도권이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현장은 고용안정과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노동자의 투쟁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이러한 현장 투쟁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노자관계 형성이 비정규직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노자관계에 있어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한국 민주노조운동에게 다음과 같이 제언을 하고자 한다.
우선 첫 번째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의 모든 역량을 노동현장으로 집중할 것을 제안한다.
노동현장은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축적의 공간이며 노동자와 자본가간의 계급적 대립이 가장 첨예하게 전개되는 투쟁의 현장이다. 노동조합운동, 현장조직운동, 제도정당운동 등 모든 민주노조운동은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노동현장으로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노동현장에서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의 조직적 결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노동현장에서 전개되는 투쟁을 위한 선진노동자들의 조직인 현장조직에 대한 재 건설이 요구된다. 이러한 노동현장을 집중하는 노력은 지난 30년간 빼앗긴 현장권력을 되찾기 위한 다양한 고민의 과정이 될 것이다.
두 번째는 민주노조운동 내에 암약(暗躍)하고 있는 비리집단 척결을 통해 건강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민주노총의 선거 자금을 자본으로부터 받아 ‘국민 파’와 연합하여 10년 동안 민주노총 지도부를 장악했던 ‘국민 파’와 ‘노연’을 중심으로 한 ‘비리 파’에 대한 척결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민주노조운동의 미래를 불확실하다. 이는 단순하게 도덕성 회복만의 문제가 아니라 민조노조운영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회복의 문제이다.
2004년 이 수호 집행부 시절 사회적 합의주의에 참가 결정이 대의원 대회라는 의결기구의 결정을 넘어 중앙집행위원회라는 집행기구에서 위원장 단독 결정이라는 ‘직권조인’은 ‘국민 파’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이 ‘비리 파’인 노연과 결합하여 노동자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노동자 민주주의의 복원은 87년 노동자 대 투쟁의 과정에서 형성된 ‘자주성’, ‘민주성’ 그리고 ‘변혁지향성’이라는 민주노조운동의 기본적 정신을 복원하는 과정인 것이다.
세 번째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해 민주노조운동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96년 김 영삼 정권의 노개위와 98년 김 대중 정권의 1기 노사정위원회 참여 논란은 ‘국민 파’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으로 인해, 그리고 2004년 노무현 정권의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 관련한 논란은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의 ‘국민 파’와 비리집단인 ‘노연’의 연합 지도부들에 의해 최소한의 노동자민주주의조차 부정된 상태에서 위원장 직권으로 참여를 결정하는 등의 과정을 거쳤다. 사회적 합의주의 참여 논란은 결과적으로 민주노총의 총파업 투쟁을 교란시켰으며 현장 투쟁 동력을 소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문제는 자본과 정권의 사회적 합의주의 공세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권의 2017년 5월 일자리 위원회에 민주노총의 조건부 참여 결정 그리고 8월 구성된 경제사회발전 노사정위원회 관련한 쟁점이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이다.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20여년 가까이 진행된 한국적 ‘사회적 합의주의’ 공세에 대해 이제 논란의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 분명하고도 명확한 사회적 합의주의 ‘반대’ 입장을 천명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본 졸고는 부족하지만 민주노조운동을 구성하고 있는 현장조직운동과 노동조합운동 그리고 제도정당 운동을 중심으로 지난 87년 노동자 대 투쟁과 이후 30년의 역사와 과제를 뒤 돌아 보았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의 30년의 역사에 직・간접적 개입과 영향을 미친 조직은 이외에도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국제 꼬무니스트 전망’, ‘노건투’, ‘노동사회과학연구소’, ‘노동자공동투쟁’, ‘노동자공동연구소’, ‘사회주의자’, ‘노동해방동맹준비위원회’, ‘노동자 연대’, ‘다른 세상을 향한 연대’, ‘맑스 사상 연구소’, ‘볼세비키’, ‘뿌리’, ‘사노넷’, ‘사회실천연구소’, ‘사회진보연대’, ‘좌파노동자회’, ‘새날을 여는 정치연대’, ‘전국 노동자 정치협회’,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 ‘한국 노동사회연구소’ 등이다.
물론 이 외에도 많은 조직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조직들이 지난 30년 동안 민주노조운동에 직간접적으로 미친 영향은 매우 클 것으로 판단이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이들이 민주노조운동에 미친 영향을 본 졸고에 담아내지를 못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후 연구 과제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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