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사람으로 태어나 죽음으로 마무리하는 과정은 마치 하루의 생활이나 한 해를 보내는 과정과 흡사하다. 태양처럼 아침에 떠올라 낮 동안에 다양한 생활을 하다가 저녁이 되면 일몰과 함께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올 한 해도 어김없이 지나면서 한층 황혼의 품으로 다가섰다. 이는 바로 생과 죽음으로 상징되고, 세대를 이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그 존재의 사유와 가치가 불멸의 영원성을 갖는다.
따지고 보면 생과 사의 문제는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그 주체인 나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른 인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마치 잠을 자는 동안에 전혀 사물의 흔적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과사의 문제는 영원한 잠을 자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뿐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고민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남겨진 가족들을 비롯한 사물과의 끈끈한 사랑과 애증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왔듯이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평범한 진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생각 때문이다. 주변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남을지라도 인간은 모두 언젠가는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친구의 소개로 금년도 노벨상 수상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노르웨이 작가인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이란 소설이다. 분량도 많지 않아 읽기는 수월하지만 이후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수준 높은 작품이다.
이 소설은 「요한네스」라는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고 일생을 어부로 지내다가 생의 마지막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그가 살아온 지난날들에 대한 추억과 먼저 떠난 사람들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 그리고 남은 가족들에 대한 가슴시린 사랑을 이야기 한다. 이렇듯 이야기 속에서 삶과 죽음이, 현실과 죽음의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주어진 운명 안에서 부대끼며 살다가 죽음으로써 그의 삶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다시 그 후손들에게 새 생명으로 이어지면서 죽음과 삶은 하나라는 담담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미 이 세상을 하직한 주인공이 화자(話者)가 되어 머나먼 과거와 살아온 세월 그리고 남은 미래에 대한 회상과 희망을 이야기 한다. 잠을 자다가 그대로 평온한 얼굴로 세상을 마감하면서 자신의 주변을 되돌아보는 잔잔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누구라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반드시 지나야 할 죽음의 과정을 마치 소풍을 떠나듯 설레는 마음과 더 이상은 대화할 수 없는 남은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교차한다. 어느 누구라도 담담하게 인생을 정리하는 주인공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게 만드는 작가의 필치가 돋보인다.
소설은 『노르웨이』 해안마을 어딘가에서 출산 장면으로 시작된다. 일이 잘못되어 아내나 아이나 아내와 아이 모두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찬 남자의 내적 독백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태어난 아이는 언제나 혼자가 되어 때가 되면 스러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아마도 무신론자인 남자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지만, 반면에 사탄의 의지도 역시 작동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할아버지처럼 「요한네스」라고 부르겠다고 벌써 오래전부터 아내에게 말해 두었다. 산모의 오랜 진통과 비명소리 그리고 산파의 목소리가 뒤섞인 끝에 한 아이가 태어난다.
장이 바뀌고 그사이 긴 시간이 흘러, 「요한네스」는 노인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일곱 명의 자식을 낳았다. 가족을 이루고 너무 외진 곳이었던 고향을 떠나 새로운 이곳에 터전을 잡았고 고깃배를 타고 나가 생계를 꾸렸다. 그의 아버지 역시 어부로 평생을 보냈고, 이미 사랑하는 아내도, 평생 서로의 이발을 해주던 어부(漁夫)인 친구도 곁을 떠난 지금은 근처에 사는 막내딸인 「싱네」 만이 거의 매일 그를 보러 오다시피 한다.
그는 평시보다 더 일찍 일어나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썰렁한 집안에서 혼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빵을 먹는다. 별다른 기대가 없는 일상,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고 원래 그대로인데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듯하다. 늙은 몸도 무게가 거의 없는 듯이 가뿐하다. 눈에 들어오는 사물들, 풍경이 어쩐지 너무 달라 보인다. 「요한네스」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바라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보는 것마다 변해 있으니, 눈앞의 보트하우스들 역시 너무 무거운 동시에 믿을 수 없이 가벼워 보인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런 독백을 하는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앞으로 곧장 다가오는 막내딸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몸 한가운데로 쑥 들어가더니 그대로 그를 통과해 지나친다. 실제로 세상에서 인물은 흔적 없이 떠나가더라도 그 주변을 둘러쌓던 대부분의 사물은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종일 전화를 받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온 딸은 오늘은 담배에 손댄 흔적이 없고 재떨이는 말끔히 비워져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의 죽음을 예감한다.
작가는 삶과 죽음이라는 보편적 문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세세한 감정과 리듬감 있는 필치로 예리하게 표현하였다. 대부분 이 세상에서 아버지는 아이에게 세상을 가르치고 시간이 흐른 뒤 그 아이가 제 아이를 가르치듯, 삶과 죽음의 세계는 단절되지 않고 연속적으로 이어진 신의 섭리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죽음을 두려워말고 삶의 연장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갖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자신의 마지막 정리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전적으로 자신이 주도해야 한다. 사실 고통 없이 건강하게 살다가 떠나길 누구나 소망한다. 비록 그렇게 살진 못할 지라도 그래도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그 사실 자체로써 행복한 일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90년대 초에 본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와 동시에 한 시절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주제곡이 떠올랐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남자주인공「샘」이 사랑하는 연인인 「몰리(데미 무어가 주연)」의 주변을 맴돌면서 그녀를 지켜본다. 영혼이라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결국 다른 유령의 도움으로 그녀와 재회를 하고 천상으로 떠나기 전 드디어 '사랑한다'고 말한다.
평범한 우리 모두는 가능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 동서고금을 통해 살펴봐도 아무리 부와 명예를 누렸을지언정 죽음 그 자체를 혐오하고 다소 부족해도 살아있다는 그 실재에 만족한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의하면 귀향길에 「키르케」의 충고로 예언자인 「테이레시아스」에게 귀향할 수 있는 방법과 경로를 묻기 위해 지하세계인 『하데스』에 내려갔다. 그곳에서 어머니를 비롯한 여러 혼백을 만났는데 그 중 하나가 「트로이」 전의 용장인 「아킬레우스」였다. “그대는 죽었다고 슬퍼하지 마시오.”라고 위로하자 「아킬레우스」는 지체 없이 말한다.
“죽음에 대해 내게 그럴싸하게 말하지 마시오. 영광스런 「오뒷세우스」여! 나는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힘든 인생살이 일지라도 이 세상에 살아 숨 쉬며 사는 것이 더 좋다는 의미인 것이다.
결국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커다란 행복이다. 오늘의 삶 자체에 큰 보람을 느끼면서 자신이 의지하는 신에게 감사할 일이다. 더욱이 건강하게 사는 일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아직 자신을 통제할 여력이 있을 때 자신과 가족을 위해 건강증진에 노력하는 실천이 필요하다. 나아가 언제라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도록 단단하고 빈틈없는 주변의 정리를 말끔하게 할 일이다.
(2023.11.27.작성/12.24.발표)
※성탄과 연말연시를 맞아 모든 독자 여러분들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 드리며, 새 해에도 더욱 건안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