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아파트는 세울 때 산자락을 깎아 집 뒤가 바로 산이다. 산 초입에서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소나무 군락지 사이로 좁다란 오솔길이 나있다. 나이 든 이들이 걷기 운동을 하느라 상시 길이 메인다. 코로나가 한창 번창하던 겨울 한낮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벤치에서 햇볕을 쬐며 면역력을 키우던 곳이기도 하다.
따뜻한 봄날, 오솔길 한쪽 변에 내 또래의 아주머니가 난데없이 화초를 심기 시작했다. 수국을 주로 하여 아이리스, 란타나, 백합등을 심었다. 건강을 다지는 길에 꽃 보는 재미까지 더해져 한결 매력적인 장소로 변모했다.
지난 늦가을의 하루, 세 살짜리 손자가 집에 왔다. 별나기가 민간 설화 속의 ‘오성’ 못지않다. 아내가 때깔 좋은 늙은 호박을 하나 사 와 시집간 딸 방에 두었었다. 녀석이 호박을 발판 삼아 책상 위에 놓여있는 물건을 만지려다가 그만 꼭지 부분이 움푹 들어가고 말았다. 부랴부랴 호박전을 부치고, 씨를 말려 조그만 통에 담아 놓았다.
나는 그 중 하나를 시험 삼아 화분에 심어 앞 베란다에 두었다. 싹이 돋아나고 줄기를 이루더니 노란 호박꽃이 서너 송이 피어났다. 그러고는 단 하루 만에 모두 쪼그라들었다. 절기가 열매를 맺기에는 너무 늦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때는 호박꽃에 암수가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 했다.
호박꽃을 보면서 억척스럽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릴 적 어머니는 남이 선점한 집 앞 언덕에 일전을 불사하고 구덩이 서너 개를 파서 호박 씨앗을 뿌렸다. 여름이 되자 언덕은 온통 초록 호박잎으로 덮였다. 어머니는 여덟 식구를 위해 부지런히 호박 언덕을 오갔다. 처음에는 호박잎으로 쌈밥을 차려내더니, 자그만 연두빛 애호박이 달릴 즈음에는 된장국이 주메뉴였다. 호박을 수확해서는 달착지근한 호박전도 부쳐냈다. 그런 날 저녁이면 구수한 호박 된장국을 곁들여 진수성찬이 되었다. 나에게는 호박이 그냥 호박이 아니었다.
뒷산 오솔길로 올라가는 비탈진 곳은 군데군데 맨땅이 드러나 푸석거린다. 죽은 소나무를 뒤처리한 곳에 독한 재선충 약을 뿌려서 그런지 풀들이 잘 자라지를 않는다. 거기다 이런저런 쓰레기를 갖다 버려서 지져분하기 짝이 없다. 구청에서 사람을 동원해 때때로 청소를 하지만 어쨌든 그곳은 이 산에서 가장 천대받는 구역이다. 걷기 운동을 하러 올라갈 때면 마음 한편이 왠지 불편했다. 오솔길에 꽃 심는 낯선 아주머니를 보던 날, 나도 저 천덕꾸러기 땅에 어머니처럼 풍성한 녹색의 호박밭을 일구면 어떨까 싶었다.
보관해온 호박씨를 물에 불려서 뒷산 삭막한 곳에 파종했다. 씨를 심는 의미는 단순했다. 저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 노란 호박꽃의 순박함을 전해주자는 거였다. 매일 이다시피 페트병에 물을 담아 들고가서 지극정성으로 물을 줬다. 넉넉히 가져가서 남는 물은 오솔길의 수국에도 뿌렸다.
일주일쯤 지나자 군데군데 호박의 쌍떡잎이 돋아났다. 떡잎이 제자리를 잡아갈 무렵, 싹들이 하나둘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누가 파 가버린 것이다. 이런 개념 없는 일에 화가 잔뜩 났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남은 싹 두 곳에 나뭇가지로 듬성듬성 울타리를 쳤다.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그 이후로 손대는 사람이 없었다. 한 달쯤 지나자 움튼 싹에서 힘차게 초록의 줄기를 뻗쳐내기 시작했다.
하루는 운동을 하고 내려오는데 비슷한 연배의 남자가 호박 뿌리 주위를 작대기로 들쑤시고 있었다. 혹시 싹을 파간 사람인가 하고 살펴보니 그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씨앗을 심은 주인공이라고 밝히자 누가 이런 고마운 일을 했는지 안 그래도 궁금했다고 한다. 옛날 못 살던 시절이 생각나서 특별히 비료도 가져와서 뿌렸단다. 내가 함께 잘 보살피자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가슴이 먹먹해온다. 그도 나도 지난 세월에 대한 진한 연민에 빠졌기 때문이리라.
호박은 수년째 휴지기 상태인 땅의 영향인지 잎 하나 하나가 연꽃잎처럼 엄청 컸다. 거기에 노란 꽃이 여기저기서 연이어 피어났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아쉽게도 모두 수꽃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암꽃이면 얼마나 좋을까. 순 자르기를 하고 나니 가지도 엄청 번졌다.
어느 날 산을 오르다 줄기 끝을 보니 손톱만한 아기 호박이 망울진 꽃 밑에 찰싹 붙어 있다. 암꽃이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다음날 가니 그 꽃이 온데간데 없다. ‘세상에나 그 쪼그만 것을 뭐 먹을 게 있다고 따 간단 말인가?’ 나는 당연히 동네 사람들이 그런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듣기 거북할 정도로 걷기 내내 구시렁댔다.
운동을 하고 내려오던 아내가 불쑥 이런 선문답 같은 말을 던진다.
“그거 새들이 따먹은 게 아닐까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같이 정신이 번쩍 든다. 뒷산에 터를 잡은 직박구리 같은 새들이 꽃잎과 열매를 즐겨 따먹는다는 글을 어디서 봤기 때문이다. 어째 그 생각을 못 하고 애꿎은 사람들만 의심했을까? 아내에게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못난 마음만 여지없이 드르내고 말았으니.......
호박의 꽃말은 포용, 관대함 등이다. 오늘 따라 뒷산에 핀 노란 호박꽃이 꽃말 그대로 유난히 관대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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