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재송마을 ①
전선만든 조선골 ·재송직화(栽松織火)
재송(栽松)마을은 재송동의 자연마을로 본동마을이었다. 동부센트레빌 위쪽 장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로 동하면(東下面)의 제일 큰 마을이었다. 동래군 동면에 소속되어 있다가 1946년 부산부 수영출장소에 소속되었고, 1957년 동래구에 편입 된 후 1980년 해운대구 승격과 함께 편입된 것이다. 1740년 간행한 동래부지 방리조에 의하면, ‘재송리는 동면 관내에 있으며, 관문에서 10리 거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산천조에는 ‘재송포는 동래부에서 동쪽으로 10리에 있고, 소나무가 수만 그루 서 있다(栽松浦 在府東十里有松數萬株)’고 기록되어 있다. 재송(栽松)이란 마을 이름은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1904년 간행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 의하면 당시 재송동의 호수는 54호이다. 김ㆍ정(鄭)ㆍ이ㆍ정(丁)ㆍ강ㆍ허씨 등 성씨가 살고 있었다. 재송 마을은 장산 아래 울창한 넓은 송림을 등지고 앞으로는 수영강이 수영만으로 흘러내려 아름다운 산수에 쌓인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농촌이다. 이 마을은 수영강과 송림 사이의 농지를 이용한 농사를 짓고 넓은 송림을 이용한 반농반림(半農半林)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강 건너편에 좌수영이 있어 국가 소유의 토지인 둔답이 있었고 사창(社倉, 조선시대 각 고을에 곡식을 쌓아두던 곳)이 있었다. 사창을 열적에 사창직에게 조 2두 5승을 지급한 것이 동하면고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재송포는 재송마을 앞 수영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던 포구이다. 지금의 재송동 남쪽 충렬로와 동해남부선 철로 아래까지 옛날에는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며, 이 재송포 주변은 아름드리 소나무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수영강 상류로부터 운반되어 온 토사로 메워지면서 포구의 흔적마저 사라져버렸다.
동하면고문서에 의하면, 조선골(造船谷, 재송1동 산 74-5번지 일대)에서 전선(戰船)을 만들어 재송포에 띄워 좌수영으로 갔다. 일본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국내 최초로 부산에 고구마를 재배한 인물, 조엄(1719~1777)이 통신사로 일본으로 갈 때 조선골에서 만든 전선 2척이 갔다는 기록도 있다.
재송마을은 부녀자들의 베짜는 길쌈은 중요한 소득원이었다. 밤에 베틀 윗머리에 등잔불을 이 집 저 집에서 밝혔으니, 수영강 건너편 좌수영성에서 바라볼 때면 소나무 사이로 일렁이는 여름밤의 반딧불처럼 보여 장관이었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수영 8경 중 1경인 재송직화(栽松織火)라 하였다.
전통마을이었던 재송동 지역도 1980년 이후 정책이주 지역과 주택조성 지역으로 지정되어 30만 평을 구획 정리하였으며 아파트 집단 단지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도시화의 물결이 넘쳐흘렀다. 그리고 수영비행장 터에 센텀시티 신도시가 조성되었고, 마을 중심가에 동부센트레빌, e-편한세상 아파트 등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면서 옛 마을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