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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천하별미
과이야가 주방에 들어가자 주방 내의 사람들은 모두 놀라는 기색이 현연했다.
"다들 듣게. 내가 여기 요리사와 솜씨를 겨루어 보기로 했네. 내가 나물요리 몇 개를 만들 테니 암자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 심부름을 좀 해 주게. 자, 임자는 가서 두부 네 모를 가져오고 임자는 어디 가서 속히 버들잎 백 잎을 따오게. 마른 것은 절대 안 되니 싱싱한 걸로 말이야. 그리고 임자는 마름을 가져와. 벗기지 말고 껍질째로 말일세. 그리고 또 임자는 밖에 나가 아무 나뭇가지나 몇 개 꺾어 오게. 껍질은 절대 벗기지 말고 굵기는 새끼손가락만 하면 되네. 그
리고 임자는 무우 몇 개를 썰어 와."
과이야가 일일이 분부하자 주방 사람들은 어디서 이런 미치광이가 다 굴러 왔나 하는 눈초리로 과이야를 말똥말똥 쳐다볼 뿐 누구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에 성이 난 과이야가 고함을 질렀다.
"냉큼 움직이지들 못할까!"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과이야는 요리사를 돌아다보았다. 역시 화가 나 있던 요리사는 수족들을 향해 버럭 고함을 쳤다.
"개 같은 놈들! 당장 시키는 대로 못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과이야가 한참을 기다려서야 사람들은 다섯 가지 재료를 들고 들어왔다. 재료가 모두 갖추어지자 과이야는 비로소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연신 손을 놀리며 일호춘의 요리사에게 말했다.
"잠시 후에 어디 내가 만든 요리를 한번 먹어 보라구."
곁에서 과이야가 만드는 요리를 들여다보던 요리사는 잔뜩 낯을 찌푸렸다. 무릇 요리란 색깔, 냄새, 맛, 그리고 모양을 중시하는 법인데 과이야가 만든 다섯 가지 요리는 색깔과 모양부터가 틀려 먹었다.
"자, 먹어 보게."
과이야는 요리사에게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요리사는 젓가락을 잡아 쥐고 물끄러미 요리 접시만 내려다보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홍칠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어디 내가 먼저 이 두부 맛을 볼까?"
홍칠이 젓가락으로 두부를 집으려 했다. 그러나 두부는 젓가락이 닿는 순간 흐물흐물 부서져 내려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이 놈의 두부를 어떻게 지졌기에 젓가락도 대기 전에 부서져 버려? 이래 갖고야 먹을 수가 있겠나?'
홍칠은 다시금 조심스레 젓가락으로 두부 밑을 받쳐 들다시피 하여 얼른 입 안에 던져 넣었다. 홍칠이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두부는 엿같이 스르르 녹으며 목구멍으로 꿀떡 넘어갔다.
"별미긴 별미구먼. 이 두부 맛이 별미야."
그는 딱히 두부 맛을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연하고 부드러운 맛이 우유 같기도 하고 물고기살 같기도 한 한편 소고기 등심처럼 구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호춘의 요리사는 시답지 않게 생각했다.
'그깐 두부요리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구. 이 거렁뱅이야 평소 맛있는 거라곤 먹어 보지를 못했을 테니까 그 잘난 두부구이 하나 먹으면서도 저 호들갑이지.'
"이봐 노형, 자네네 일호춘 이름을 빌려 이 다섯 가지 요리를 만들었으니 금후 노형은 이름을 크게 떨칠 걸세."
과이야가 떠들자 묘대야도 덩달아 말했다.
"어서 앉아 이 요리들을 먹어 보라니깐."
요리사는 속으로 시답잖게 생각하였지만 그래도 호기심은 있어 젓가락을 들어 두부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집으면 부서지고 들면 미끄러져 아무리 해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백수십권 우사야가 웃으며 말했다.
"안 되겠군. 내가 도와줘야지."
그는 홍칠이 했던 것처럼 젓가락 한 쌍으로 두부 밑을 살짝 들어 요리사의 작은 접시에 옮겨 놔 주었다.
"자, 들어 보게."
요리사는 행여라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며 접시를 입까지 가져가서는 입을 크게 벌려 쏟아 넣듯 하였다.
두부는 요리사의 입에 부어지기가 무섭게 스르르 목구멍을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입 안에 남은 뒷맛은 정말 희한했다. 딱히 무슨 맛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별미였다.
요리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30년 이상 요리사 노릇을 해 왔지만 이렇게 맛 좋은 두부요리는 생전 처음이었다. 그는 과이야를 바라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버들잎요리, 쑥요리, 나뭇가지요리까지 전부 맛을 본 요리사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재주를 가졌기에 음식이라고는 할 수도 없는 재료들을 가지고 이렇듯 기막힌 요리를 만들어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거 참 맛있다. 마름 맛이 이럴 수가 있는가? 이건 어떤 물고기나 새우보다도 더 맛있는데?"
홍칠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여럿은 그 바람에 너도나도 다투어 마름요리를 먹어 보았다.
"과이야, 자네 요리 솜씨는 정말 놀랍군. 이 나뭇가지요리는 정말 세상에 다시없는 요리 중의 요릴세."
과이야는 일호춘의 요리사를 보고 히죽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과이야가 나뭇가지나 버들잎으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만 하면 요리사는 나뭇가지나 버들잎을 그냥 씹어 먹겠노라 말했었다. 여섯은 모두 일호춘의 요리사를 지켜 보았다. 과이야가 품에서 나뭇가지 두 개와 버들잎 한줌을 꺼내더니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자, 노형, 이젠 말한 대로 해야지? 약속은 약속이니까."
일호춘의 요리사는 여럿이 지켜 보는지라 하는 수 없이 버들잎을 한 움큼 쥐어 입에 밀어 넣었다. 버들잎을 씹어대는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죽을 상이 되었다. 입귀에서는 푸른 즙이 질질 새어 나왔고 고통스러운 기색이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과이야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홍칠이, 자, 이젠 갑시다."
여섯은 전부 흐뭇한 기색으로 주루를 나섰다.
그들이 누각을 내려가자, 일호춘의 요리사는 방으로 뛰어가 서둘러 짐을 챙겼다. 그는 보따리를 꾸려 들고 나와 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일한 품삯이나 챙겨 주시오."
주루 주인은 요리사의 뜻하지 않은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서 물었다.
"뭐? 뭐라구?"
"어서 품삯이나 주시오. 난 여기 일 그만두겠소."
요리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루 주인이 놀라 어벙벙해 있자 요리사는 느닷없이 고개를 젖히고 껄껄 웃더니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소리. 지금 품삯이나 챙기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루를 달려나가 저만큼 멀어져 가고 있는 여섯 사람을 뒤쫓으며 소리쳤다.
"거기 좀 기다려요! 거기 좀 기다려요!"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며 달려가 과이야의 발 앞에 넙죽 엎드렸다.
"사부님, 이 제자를 받아 주십쇼. 게으름 없이 사부님의 가르침을 잘 받겠습니다."
과이야는 도리질을 했다.
"글쎄 내 제자질을 하기는 수월할지 몰라도 네가 평생 배워도 내 재주의 절반도 못 배워 낼 게야."
"아이고, 사부님 재주 절반만 배워 내도 전 천하에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제발 자비를 베푸시어 아무쪼록 이 놈을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대내오주들은 모두 껄껄 웃었다.
"좋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를 따라라."
묘대야가 말했다.
임안으로 돌아온 일행은 이번에는 서호로 향했다. 호숫가에는 '취선루'라는 술집이 있었다. 사층으로 된 주루인데 누각 위에는 검은 편액이 걸려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나라 때 신선거사(神仙居士) 진희이(陳希夷)가 쓴 것이라고 한다.
일곱이 취선루에 들어서자 유소화작 허삼야가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나 허삼야가 요리할 차례인데, 우리 대내오주의 재주가 어떤가를 자네 홍칠이 평생토록 기억하게 만들어 주지."
그리고는 소리쳤다.
"게 누구 없느냐!"
심부름꾼 하나가 얼른 달려왔다.
"나으리께서 무슨 분부가 계시는지요?"
"여기 산 물고기가 있겠지?"
허삼야가 물었다.
"물론입죠. 이 서호가 말라도 우리 취선루엔 펄펄 뛰는 물고기가 언제나 있습지요. 무엇이든 주문만 하십시오. 냉큼 대령해 올리겠습니다."
"그럼 가서 요리사에게 말해라. 우린 모두 다섯 가지 요리를 먹을 참인데 하나는 살아 있는 서호 물고기, 하나는 술이 담긴 물고기 부레, 하나는 살코기 있는 물고기 대가리, 또 하나는 살코기 있는 물고기 지느러미, 그리고 또 하나는 눈이 있는 물고기 꼬리, 이렇게 다섯 가지 요리를 가져오도록 해라."
허삼야의 말에 심부름꾼은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취선루에서 몇 해 동안 일해 오면서 그런 요리는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터였다. 그는 허삼야를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으리께서 말씀하신 그런 요리는 우리 주방에서 못해 드릴 겁니다. 다른 요리들을 시키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허삼야가 언성을 높였다.
"우린 꼭 그 요리를 먹어야겠는데? 잔말 말고 만들어 와. 만약 못 만들어 오면 너희네 취선루 간판을 떼어 박살을 내 버릴 테다. 그러나 그걸 만들어 낸다면 너에게 은 열 냥을 상으로 주마. 요리사한테는 한 백 냥 주고."
심부름꾼은 돈은 안 받아도 좋으니 별탈이나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황급히 주방으로 달려갔다.
"영감님, 큰일났습니다요!"
요리사는 늙은 노인이었다. 그는 호들갑을 떨며 들어오는 심부름꾼을 태연히 바라보며 물었다.
"왜 이 야단이냐? 집에 불이라도 났느냐?"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 밖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영감님한테 괜한 시비를 걸려고 합니다요."
"그래?"
노인은 빙긋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반문했다.
"모두 일곱이 왔는데 그 일곱의 행색이 정말 괴상해요. 하나는 거렁뱅이 같고 하나는 요리사 같지만 나머지 다섯은 벼슬아치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인들 같지도 않고 도무지 뭐하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 인간들이 평생 듣지도 못한 요리를 시키지 않겠어요?"
"네가 듣지 못한 요리야 세상에 많지. 하지만 우리 취선루에서 꼭 못한다고는 할 수 없지."
"글쎄, 그들이 뭘 시켰는가 들어 보기나 하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뭐 살아 있는 서호 물고기, 술이 담긴 물고기 부레, 그리고 뭐 살코기 있는 고기 대가리, 살코기 있는 고기 지느러미에다 또 눈깔있는 고기 꼬랑지, 모두 이런 것들이라니깐요?"
그의 말을 듣고 나자 요리사도 적이 놀라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조용히 물었다.
"그래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모두 이층에 앉아 있어요. 그 다섯 가지 요리를 해 주면 저에겐 은 열 냥을, 영감님께는 백 냥을 상으로 주고, 그렇지 못하면 우리 취선루 간판을 박살내 버리겠대요."
요리사는 더 긴말을 하지 않고 일어서더니 주방을 나갔다.
이층에 올라와 그들 일곱을 본 요리사는 속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상석엔 서른 살 안팎의 젊은 거렁뱅이가 앉아 있고, 그 양 옆에는 뚱보 하나와 말라깽이 하나가 각각 배동해 앉아 있었다. 그들 모두는 상석에 앉은 거렁뱅이를 대단히 받들어 모시는 것 같았다. 하석에는 요리사 복장을 한 사람과 얼굴이 길쭉한 깡마른 사내가 앉아 있었는데 두 사람 다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요리사는 그들에게 읍을 하며 인사부터 올렸다.
"나으리들께서 이렇게 취선루를 찾아 주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자네가 이 주루의 주인인가?"
허삼야가 물었다.
"아니올시다. 소인은 이 취선루의 주방장올시다."
요리사는 얼굴에 애써 웃음을 띄웠다.
"임안의 주루 네 곳 중 취선루가 제일 유명하다기에 우리가 일부러 왔으니 잘 좀 부탁하네."
묘대야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요리사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시킨 그 다섯 가지를 어서 만들어 와야지. 제대로만 만들어 오면 큰 상이 있다!"
허삼야가 품에서 은자 한 꾸러미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그 다섯 가지만 만들어 내면 이 삼십 냥 은자를 고스란히 내주겠다."
일곱 사람을 바라보는 요리사의 얼굴엔 난처한 기색이 돌았다.
그는 뭔가 말하려다가 그냥 잠자코 서 있기만 했다.
"왜 그러고 서 있는 건가?"
허삼야가 눈을 치뜨며 물었다.
그제야 요리사는 허삼야에게 허리를 굽신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으리들, 제 말 좀 들어 보시지요. 우리 취선루에 이런 고담이 하나 있습죠. 대송(大宋) 개국 황제 태조(太祖)께서 하루는 승상 조보(趙普)를 데리고 우리 취선루에 오셨답니다. 그런데 그 조보란 승상은 성미가 심히 까다롭고 괴벽한 분으로, 그분이 그런 다섯가지 요리를 시켰는데 당시 취선루의 요리사로 계시던 허 노인께서 그 다섯 가지 요리를 만들어 대접해 올렸답니다. 태조 황제께서 심히 기뻐하시며 옛사람 말에 '신선은 부럽지 않고 원앙이 부럽도다'라는 말
이 있는데, 취선루에 와 보니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제왕은 부럽지 않고 신선이 부럽도다' 하셨더랍니다. 그러니 당시 취선루의 다섯 가지 물고기 요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지요. 후에 태종(太宗)께서도 즉위하여 우리 취선루 허 노인을 불러다가 그 다섯 가지 물고기 요리를 시켜 드시곤 했답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오늘에 이르러 취선루에는 그 절묘한 기술이 전수되지 못하고 오래 전에 끊어져
버렸습니다. 소인도 그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나 듣고 그런 일이 있었나 부다, 생각할 뿐이지요. 모르긴 해도 지금은 온 천하를 다 뒤져 봐도 그런 다섯 가지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못 찾을 겁니다."
그러자 허삼야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한번 시범을 보여 볼까? 내가 다섯 가지 요리를 만들어 보일 테니 주방으로 안내하게."
주방에 들어선 허삼야는 요리사를 시켜 서호의 산 물고기를 가져 오게 했다. 취선루는 주방의 층계 옆에 못을 하나 만들어 거기에 물고기를 잡아다 기르고 있었다.
허삼야는 산 물고기를 도마 위에 올려 놓고 비늘도 벗기지 않고 손바닥으로 물고기 배를 천천히 내리눌렀다. 그러자 고기는 입을 쩍쩍 벌리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허삼야는 조미료들을 고기 입에다 한 움큼씩 쓸어 넣고는 대가리를 번쩍 들었다. 그는 이번에는 물고기 입에다 술을 부어 넣었다. 술은 조미료와 한데 어우러져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물고기 뱃속이 찰 만큼 차서 입을 벌리면 술이 입귀로 줄줄 흘러 나올 정도가 되었다.
허삼야는 긴 꼬챙이로 물고기 아가리를 꿰어 물고기를 기름솥에 넣었다. 뿌지직 소리가 나며 기름이 튀었다. 얼마 안 가 물고기는 노랗게 튀겨졌다. 허삼야는 그것을 꺼내 접시 위에 놓고 조미료즙을 그 위에 뿌렸다.
얼마 후 그가 완성된 물고기 요리를 탁자 위에 올려 놓으니 이를 지켜 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물고기는 양옆의 살코기만 튀겨졌을 뿐 눈과 입, 지느러미 등은 그대로 살아 퍼득이고 있었던 것이다.
"자, 먹어들 보시오. 요리 맛이 어떤가? 맛도 대단히 좋지만 다 먹을 때까지 물고기가 죽지 않는다는 게 이 요리의 특색이오."
묘대야가 자신 있게 설명을 했다.
모두들 먹어 보니 과연 기막힌 별미였다. 반시간쯤 지나자 나머지 네 가지 요리가 마저 만들어졌다. 하나같이 맛이 기막히고 희한한 요리였다.
사람들은 먹으면서 칭찬이 자자했다. 모두들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나자 허삼야가 말했다.
"다 먹었으면 이제 다른 데로 갑시다."
포식한 일행은 이제 서호의 절경을 구경하자고 자리를 떴다.
그들이 누각을 내려오자 취선루의 늙은 요리사가 다가오더니 허삼야에게 덜컥 무릎을 꿇었다.
"나으리, 이 소인의 소원 하나 들어주십쇼. 저에게 무슨 일을 시켜도 좋으니 아무쪼록 그 물고기 요리 다섯 가지를 만드는 비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고 싶은 생각 없는데?"
허삼야가 쌀쌀하게 말했다.
그러자 요리사는 허삼야에게 물었다.
"사부님의 대명(大名)은 어떻게 쓰시는지요?"
"나? 허씨라고 하네만 그건 왜 묻지?"
요리사는 눈이 휘둥그래서 허삼야를 쳐다보았다.
"맞았어, 맞았다니깐! 그러면 그렇지."
요리사가 중얼거렸다.
"맞긴 뭐가 맞단 말인가?"
요리사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나으리께선 분명 서호 허 노인의 후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야 이런 절세의 재간을 갖고 있을 수 없죠."
허삼야가 심드렁하니 되물었다.
"그러면 어떻고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떤가?"
"나으리, 여기 좀 와 보세요."
요리사는 허삼야를 주방 뒤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작지만 아주 알뜰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한쪽 벽면에 초상화 한 폭이 걸린 게 눈에 띄었다. 몸이 여윈 한 노인을 그린 초상화였다. 그림의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고 있었다. 초상화 아래에는 장생패위(長生牌位) 하나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선사조 허로지위(先師祖 許老之位)'라는 일곱 자가 씌어져 있었다.
"소인은 허 노인을 서호 취선루의 사조(師祖)님으로 받들어 공대하고 있습니다. 나으리께서도 허 노인의 후예이시라면 부디 취선루를 위해 빛을 내게 하여 주십쇼. 그 절묘한 재간이 취선루에서도 빛을 내게 해 주십시오."
허삼야도 서호 허 노인의 초상을 숙연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향 세 대를 피워 들고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향불을 향로에다 꽂아 놓고 돌아선 허삼야는 묵묵히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요리사에게 건넸다.
"어보(魚譜 ; 물고기 요리 작식법)라네. 자네 마음이 고마워서 주는 거야."
요리사는 감격하여 두 눈 가득 눈물을 글썽였다.
허삼야는 조용히 웃어 보이고 일행들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달빛이 없어 칠흑처럼 캄캄한 밤이었다. 그들 일곱은 객점에 들었다. 홍칠과 한 방에 든 묘대야는 잠이 오지 않아 촛불이 다 타도록까지 뜬눈으로 지새웠다. 문득 미립과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레이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밖에서는 이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 왔다. 묘대야는 살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아주 익숙한 길이라, 깊은 밤에도 묘대야의 걸음은 아주 빨랐다. 잠깐 사이에 그는 한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이렇듯 깊은 밤에도 그 골목은 시끌벅적한 게 번화한 느낌이었다. 길가에는 탁자들과 걸상들이 놓여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밤을 새고 있었다.
묘대야는 주기를 내 건 어느 자그마한 술집에 들어가 말없이 서 있었다.
심부름꾼 하나가 나와 보더니 안에 대고 소리쳤다.
"손님이 왔어요!"
그러자 안방의 문발을 들추며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술을 드시렵니까, 아니면 음식을 드시렵니까?"
여인이 묘대야를 보고 물었다.
"아니, 난 사람 한 분을 만나러 왔소."
묘대야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여인은 묘대야를 유심히 훑어보더니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손님은 부자이신 것 같은데 이런 곳에 친구가 있단 말씀이신가요?"
묘대야는 집 안으로 느릿느릿 몇 걸음 걸어 들어가 복판쯤에 이르러 홱 몸을 돌리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소녀 하나 야밤에 자작술을 홀로 마시며 좀처럼 일어서질 않네."
그러자 여인의 얼굴에 갑자기 웃음이 번지며 반갑게 말했다.
"아이고, 그러고 보니 대내오주의 맏이신 묘대야 어른이시군요."
묘대야는 묵묵히 웃어 보였다.
그 여인이 고개를 숙여 정중히 말했다.
"어서 들어가시죠. 안에서 기다리십니다."
묘대야는 여인을 따라 어두운 낭하를 한동안 걸었다. 한참을 들어가자 눈앞이 환해지며 자그마한 방이 하나 나타났는데 거기에 웬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두건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암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오셨군요."
묘대야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무슨 분부라도 있으신지요?"
"당신들 대내오주들이 그 사람을 따라다닐 필요가 뭐요? 개방 방주 미운산은 벌써 밀소에 숨어 버려서 여느 사람은 접근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당신들도 찾아내기 어려울 거요."
여인이 차분한 음성으로 질책했다.
"우리 형제 다섯은 기실 개방 중에서 자못 중요한 인물 몇을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 방주를 찾아낼 수도 있을지 모르지요."
"폐하의 뜻은 그 개방을 당신들더러 없애 치우라는 것이오. 그런 인물들이 이 세상에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말예요."
묘대야는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여인이 문득 나직이 소리내어 웃었다.
"묘대 씨, 듣자니 묘대 씨는 여인들과 가까이하는 것을 싫어한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묘대야는 놀라 가슴이 뛰었다.
'아니, 그런 일을 황제께서도 알고 계시단 말인가?'
묘대야는 입을 다물었다.
"묘대 씨, 여인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직 맘에 드는 여인을 만나지 못한 거겠죠?"
'우리 대내오주의 일을 손금 보듯 하는 걸 봐서 이 여인은 궁내의 여인임이 분명하다. 황궁 내의 여인이라면 십중팔구 황제의 것인데 잘못 건드렸다간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니 조심해야겠군.'
묘대야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여인이 다가왔다.
"묘대 씨, 날 봐요. 날 보면 여인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
여인의 몸에서는 향긋한 향내가 물씬 풍겨 왔다. 황궁 안에서 쓰는 분 냄새였다. 그 냄새에 묘대야는 정신이 아찔해지며 가슴이 뛰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당황한 묘대야의 물음에 여인이 깔깔 웃었다.
"묘대 씨, 당신은 남자로 태어나서 어찌 여자보다 남자를 더 좋아하는 거죠?"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비단 옷깃을 풀어헤쳤다. 곧 여인의 탄력 있고 풍만한 젖가슴이 탐스럽게 드러났다.
"어때요? 탐나죠?"
"왜 이러시는지 알 수가 없구려. 당신이 궁중에 계시는 분이라면 이 묘대한테 그러시는 게 아니오."
여인은 또다시 소리내어 웃었다.
"제가 누군지 모르시죠? 제가 어떻게 생긴 여자인지 모르시죠? 그러니 저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제 내 얼굴을 보실래요? 보시면 홀딱 반할걸?"
여인은 얼굴에 늘어뜨린 두건을 살짝 들어 보였다. 묘대야는 눈부신 그녀의 미모에 적이 놀랐다. 그녀는 여전히 두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였는데 한쪽 얼굴만 보아도 그녀가 어느 정도의 미녀인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묘대야는 그녀를 외면하며 결연히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문을 나서는 묘대야를 바라보며 여인이 나직이 탄식했다.
"바보, 바보 같은 위인이야……."
홍칠은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묘대야와 한 방에 들었던 생각이 나 곁을 살펴보았다.
"묘대, 묘대!"
묘대야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홍칠은 옆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베개 하나만 덩그마니 놓여 있을 뿐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는 이상한 생각에 과이야와 허삼야가 든 방에 가 보려고 몸을 일으켰다.
이때였다.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홍칠은 얼른 문을 열어 보았다. 어둠 속에 젊고 아리따운 여인 하나가 서 있었다.
"저와 함께 가실 곳이 있는데요."
여인이 홍칠에게 말했다.
"내가 왜 아가씨를 따라가야 하지?"
홍칠이 반문했다.
"당신도 개방의 사람이죠?"
"글쎄, 그렇긴 하지만, 그게 아가씨와 무슨 상관이오?"
홍칠의 말에 여인이 방긋 웃었다.
"상관이 없다니요, 개방에는 여인이 없나요?"
"있기야 있지. 하지만 드물지. 그런데 아가씬 도대체 누구요?"
"난 미립이에요. 들어 본 적 있어요?"
여인은 홍칠을 향해 다시금 웃어 보였다.
그녀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홍칠은 그녀를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섰다.
"댁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절 따라가 보지 않으실래요?"
여인이 다시 물었다. 홍칠은 암만 생각해도 그녀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 보긴 봤는데……, 어두워서 잘못 본 걸까?'
그가 대답하지 않자 여인은 안타까운 듯 깊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분명한 것은 당신과 같은 개방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밖엔 달리 전할 말이 없군요……."
"개방 사람이라구?"
홍칠은 자기 사부나 몇몇 장로들이 아니면 자기를 찾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부님이 날 부른다면 여자를 시켜 부르지는 않을텐데."
홍칠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미립이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부른다면 안 가시겠어요? 여자가 모시러 왔다고 안 가시겠어요? 안 가시겠다면 그만두세요. 하지만 저쪽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오리라고 굳게 믿고 있어요."
홍칠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그녀를 따라가 보기로 마음 먹었다.
객점을 나오자 문앞엔 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말 두 필이 끄는 이두마차인데 풍등까지 켜져 있어 이 야밤에 무척 괴이한 인상을 주었다. 홍칠은 서슴없이 마차에 올랐다.
얼마를 달렸을까. 그들은 큰 저택 앞에 이르렀다. 미립이 대문을 두드리자 한 노인이 대문을 열고 나왔다.
"오셨습니까요?"
미립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미립은 마차를 대문 안으로 몰고 들어가게 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미립은 홍칠을 이끌고 후원으로 들어갔다. 후원에는 큰 나무 상자 두 개를 놓은 밀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난 오른쪽 상자에 들어갈 테니 당신은 왼쪽 상자 안에 들어가세요."
미립이 웃으며 말했다.
홍칠은 암만해도 수상쩍은 생각이 들었다. 야밤 삼경에 사람을 불러내어 다짜고짜 끌고 와서는, 이제는 또 우스꽝스럽게 상자 안에 들어가라니 도대체 뭐하자는 수작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홍칠은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따라가보자고 마음먹었다.
홍칠이 상자 안에 들어가자 곁에 서 있던 장정 몇 명이 밀차를 끌기 시작했다. 얼마를 또 그렇게 갔을까? 느닷없이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나으리께 전해 드릴 옷감 상자입니다."
밀차는 뜰 안으로 들어갔다.
"상자를 여시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드디어 상자가 열렸다.
홍칠은 그 사이 뻣뻣하게 굳은 몸을 겨우 움직여 간신히 상자를 빠져 나왔다. 머리칼은 봉두난발이 되고 얼굴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립이 홍칠을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들어 가시지요."
홍칠은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 16, 7명 가량 되는 거렁뱅이들이 모여 앉아 골패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인지 홍칠 일행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미립은 홍칠을 데리고 그 안을 통과하여 뒷문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또 한동안 걸어서야 어느 한 집 앞에 이르렀다.
집 안은 깜깜했다. 미립은 부시를 쳐서 촛불을 켰다.
"따라오세요."
그녀는 촛불을 들고 앞장섰다.
"조심하세요."
미립이 홍칠을 붙잡았다. 순간 홍칠은 미립의 몸에서 풍겨 오는 그윽한 향기에 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때였다. 바닥에서 삐그덩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둘이 서 있는 자리가 서서히 밑으로 꺼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쾅 하는 소리가 나더니 바닥에 닿는 느낌이 들며 멈춰 섰다.
"이젠 다 왔어요!"
어둠 속에서 미립이 말했다.
철판이 아래로 떨어져 내릴 때 미립의 손에 있던 촛불이 꺼져 버려 사방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미립이냐? 홍칠이는 데려왔느냐?"
어둠 속에서 한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예, 오셨습니다."
"불을 켜라!"
등잔 두 개가 갑자기 밝게 켜졌다. 석실 안은 꽤 넓었다. 석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앞에는 오직 널찍널찍한 큰 층계들이 있고 층계 위에는 돌의자가 있었는데 그 위에 한 노인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홍칠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홍칠은 이 노인이 개방 방주 미운산임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개방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 이렇게 미운산을 만나게 되자 가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감회가 소용돌이쳤다.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방주님께 소인 인사 올립니다."
"됐네, 그만 일어나게."
미운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시녀들을 불렀다.
"운낭(雲娘)과 여아(麗兒)야, 등잔 몇 개를 더 밝혀라. 내 홍칠이를 좀더 자세히 봐야겠다."
그제야 홍칠은 방주의 뒤에 여인 둘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단한 미인들이었다. 두 미인은 조용히 등잔 몇 개를 더 밝혔다. 석실 안은 곧 대낮처럼 밝아졌다.
"이봐 홍칠이, 자넨 개방의 제자로서 소씨 거렁뱅이와 함께 개방의 율을 무시하다가 집법장로에게 책벌을 당했는데, 지금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달갑게 복종하는가?"
미운산이 물었다.
물론 홍칠은 여전히 불복이었다. 하지만 자기의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간 방주의 노여움을 사기밖에 더 하겠느냐는 생각에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집법장로의 책벌을 소인은 달갑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자 미운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거짓말은 왜 하지? 너와 소씨 거렁뱅이는 사제간이 아니냐? 개방 계율을 지키지 않고 책벌에 불복인 건 너나 소씨 거렁뱅이나 다 마찬가지일 텐데 왜 나를 속이려고 하지?"
홍칠은 미운산의 말에 사내 대장부로서 솔직해지기로 생각을 고쳐 먹었다.
"방주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소인은 그 책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순간 미운산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럴 테지. 난 자네가 불복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어."
"방주님, 저와 사부님은 확실히, 개방 제자들은 비렁뱅이질만 하고 제 손으로 일하여 벌어 먹어서는 안 된다는 개방의 계율을 위반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 계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의파가 개방에 등장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부자들이 개방에 가입해서는 금의파인지 뭔지 하는데 이게 뭡니까? 자기들의 옛 생활을 못 잊고 과거의 향락에 미련을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것은 탓하지 않고 엉뚱하게 소
인과 소인의 사부님이 술 좀 마시고 홍안루에서 요리사 노릇을 하며 제 손으로 벌어 먹는 것만 나쁘다고 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홍칠의 열변에 미운산은 운낭을 돌아보더니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홍칠이, 자넨 과연 솔직하군. 개방의 계율은 이미 백여 년을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 그중 어느 것이 이제 와서 옳고 그른지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네. 아무튼 오늘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자네와 개방의 계율을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네와 아주 중요한 대사를 논의하자는 것이네."
미운산의 기색은 심각했다.
"방주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무엇이든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시지요."
"좋아, 자네도 개방의 제자거늘 개방에 어려움이 있으면 목숨을 내걸고 개방을 위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네."
미운산의 말에 홍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개방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날로 흥성해 가는데 도대체 개방에 무슨 어려움이 있단 말인가?'
"홍칠이, 자네 이걸 좀 보라구."
미운산은 도포자락을 헤쳐 두 다리를 내보였다.
홍칠은 아무런 이상도 발견해 낼 수 없었다.
미운산이 웃으며 말했다.
"겉만 봐서는 아무런 이상도 없어 보일 걸세. 하지만 이 두 다리는 누구에겐가 독해를 입어서 쓸 수 없게 되었네. 그래서 일어서지도 못하지."
홍칠은 너무나 놀라 잠시 할말을 잃었다. 그는 멍하니 미운산을 쳐다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어느 놈이 감히 방주님을 독해했단 말입니까?"
"자네는 어쩌면 믿지 않을 테지만 개방의 장로 열하나 중에 누군가가 한 짓이지."
"설마……, 저의 사부님이 한 짓은 절대 아닐 겁니다."
홍칠의 말에 미운산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그건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개방의 장로 열한 놈 중 어느 놈이든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홍칠이 잠자코 있다가 물었다.
"방주께선 해를 입을 때까지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셨습니까?"
"독약은 극독이지만 방법이 묘해서 처음엔 아무런 감각도 없었지. 그러다가 이상하다 싶더니만 하루도 못 되어 이 모양이 돼 버리더군."
미운산이 탄식했다.
"우리 개방은 사람이 많다 보니 일도 복잡한 편이지. 지금 개방내에선 아직 내가 이 모양이 된 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감추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조만간에 소문이 나게 마련이지, 그래 자네를 불러 온 걸세. 난 자네한테 큰 일을 좀 부탁하려 하네."
"제게 무슨 일을 맡기시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목숨을 내걸고 거행하겠습니다."
미운산은 잠자코 홍칠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개방엔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이라는 두 가지 절기가 있는데 자네가 내 이 두 가지 절기를 배워 익히지 않겠는가?"
원래 개방의 이 두 가지 절기는 대대로 방주에게만 전수되는 것으로 외인에게는 절대 전해 주지 않는 법이었다. 미운산이 개방의 이 두 가지 절기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자 홍칠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가슴이 울렁거렸다.
"방주님,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그것만은……."
"자네더러 방주가 돼 달란 말은 아니네."
미운산이 홍칠의 마음을 읽은 듯 결연히 말했다.
"난 그저 내 이 두 가지 절기를 자네한테 전수해 주려는 생각뿐이야. 자네는 이 절기를 익힌 후 장차 개방에서 새로운 방주가 서게 되면 그 절기를 그 새로운 방주에게 전수해 주어야 하네. 그래서 우리 개방에 그 두 가지 절기가 실전되지 않게 하는 게 자네 임무야."
홍칠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방주님께선 어찌하여 저희 사부님을 불러 이 두 가지 절기를 전수해 주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소씨 거렁뱅이가 날 해치지 않았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제 사부님은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홍칠은 단호히 말했다.
그 말에 미운산은 모호한 웃음을 웃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난 자네에게 이 두 가지 절기를 전수함과 동시에 내 방주 자리는 자네 사부인 소씨 거렁뱅이한테 넘겨줄 작정이네."
홍칠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미운산을 바라보았다.
'방주께서 방주 자리를 사부님께 넘겨줄 생각이라면 어째서 그 두 가지 절기도 함께 전수하려 하지 않는 걸까? 무엇 때문에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을 굳이 나로 하여금 다음 방주에게 가르쳐 주도록 하려는 걸까? 도대체 방주님은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거지?'
홍칠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미운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소씨 거렁뱅이도 믿지 않고 다른 장로 열도 믿지 않네. 난 오직 자네만 믿을 뿐이야. 자네는 개방의 두 가지 절기를 배우더라도 그냥 보통 제자로 있어야 하네. 만약 자네 사부가 날 독해한 사람이 아님이 확인되면 자네가 할 일은 없네. 그러나 일단 자네 사부가 날 독해한 사람임이 판명되는 날엔, 자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네 스스로 알고 있을 걸세."
미운산의 말에 홍칠은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분명 방주를 해치려던 사람이 소씨 거렁뱅이일 경우 가차없이 처치하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홍칠이, 그렇게 할 수 있겠나?"
미운산의 눈이 홍칠의 기색을 훑었다.
그러자 미운산 곁에 있던 두 여인이 각각 옥소와 검을 꼬나들고 나는 듯이 내려와 홍칠을 겨누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자네는 여기서 죽는 길밖에 없어!"
미운산이 탄식하듯 말했다.
"왜 할 수 없다고 그러세요? 저분은 당당한 사내 대장부로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거예요. 그 일은 저분에게 맡겨 주세요, 아버지."
미립이 갑자기 나섰다.
'아버지라구? 아니, 저 미립이라는 여자가 미운산의 딸이었단 말인가?'
홍칠은 납득이 안 갔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한사코 개방의 구원은 받지 않겠다고 악을 쓰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미운산이 엄숙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홍칠이, 내 좀 자세한 내막을 말해 주지. 어떤 자가 우리 개방과 강남 철장방으로 하여금 송나라를 반역하고 금나라에 투항하라고 나를 협박한 일이 있지. 내가 그 말을 듣지 않으니 이렇게 해코지를 한 거야. 자네도 자칫하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걸 각오해야 해. 내가 개방의 두 가지 절기를 가르쳐 주겠지만 각별히 조심해야 하네."
그리고는 곁에 있는 세 여인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홍칠이 자네가 여기 온 줄을 다른 사람은 누구도 모르고 있지만 이 세 사람 중에 누군가 간첩일 수도 있지. 운낭이 아니면 여아일 수도 있고 혹은 미립일 수도 있으니 언제나 사람을 조심해야 한단 말일세."
홍칠은 미운산이 남에게 독해를 입더니 머리마저 잘못된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부터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홍칠은 미운산에게 깍듯이 읍을 했다.
"방주님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좋네. 미립아, 홍칠이를 데리고 가 숙소를 마련해 드려라. 홍칠은 오늘부터 이곳에 머물며 두 가지 절기를 배울 것이다."
홍칠은 미운산에게 절을 하고는 문을 나와 철판을 타고 땅 위로 올라왔다.
홍칠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개방의 장로 열은 모두 개방의 대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인데, 가령 그 사람들 속에 반역자가 있다면 개방은 앞으로 어떻게 되려는 것일까?'
홍칠은 한없이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방주님께서는 방주 자리를 왜 저희 사부님에게 넘기겠다고 하는지 알 수 없군요."
골똘히 생각을 굴리던 홍칠은 옆에 있는 미립에게 불쑥 물었다.
미립은 홍칠을 한번 쳐다보고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가령, 개방을 독차지하려고 애쓰는 놈이 당신의 사부님이라면 그 다음부터, 즉 당신의 사부님이 방주가 된 후부터는 방주를 해치는 일이 없어질 테죠. 하지만 만일 그 반역자가 당신의 사부님이 아니고 다른 놈이라면 그놈은 또 당신의 사부님을 해치려 들 겁니다."
그제야 홍칠은 미운산의 계책이 아주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주님께선 당신으로 하여금 그런 불상사를 막게 하려는 거예요."
홍칠은 자신의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를 절감하며 묵묵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