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 취한 국민 의회
이성의 예배를 소개한 한 변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입법 의원 여러분, 광신은 이성 앞에 길을 양보했습니다. 그 흐린 눈으로는 빛의 광채를 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무수한 군중이 고딕식 둥근 천장 아래 모였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진리를 다시 반향(反響)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프랑스 국민은 유일의 참 예배, 곧 자유와 이성에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 여기서 공화국의 군대의 성공을 위하여 기원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물체 곧 자연의 걸작품인 이성의 여신을 취하기 위하여 생기 없는 우상을 버렸습니다”(M.A.Thiers,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vol.2, pp.370, 371).
여신이 식장에 들어가자마자 변사는 그의 손을 잡고 회중을 향하여 말하였다.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공포심이 만들어낸 무력한 하나님의 분노 앞에서 더 이상 떨지 말라.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이성 이외는 아무것도 신으로 인정치 말라. 나는 여러분에게 이성의 가장 숭고하고 순결한 상(像)을 여기서 보여 준다. 만일 여러분이 반드시 우상을 가져야 한다면 이와 같은 우상에게만 제사를 드려라. 자 이성의 여신의 제막식을 자유의 의회 앞에서 거행한다.”
“여신은 의회장의 포옹을 받은 후 화려한 수레에 태워져, 많은 군중들 사이를 통과하여 노트르담 성당으로 인도되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위치를 차지하여 높은 제단 위에 앉아 참석한 모든 자들의 경배를 받았다”(Alison, vol.1, ch.17).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공중 앞에서 성경을 불태워 버리는 일이 있었다. 어떤 회합에서는 박물관 서민 협회의 사람들이 “이성 만세”를 부르면서 시(市)의 공회당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막대기 끝에다가 반쯤 불타다 남은 몇 권의 책들을 꿰뚫어 메고 갔다. 그 책들 중에는 천주교의 성무일과(聖務日課), 미사서, 신구약 성경 등이 있었는데, 의장은 그 책들에 대하여 “인류에게 온갖 어리석은 일을 행하게 하였으므로 큰 불로 보응을 받았다”(Journal of Paris, 1973, No.381.Quoted in Buchez-Roux, Collection of Parliamentary History, vol.30, pp.200, 201)고 말하였다.
그런데 무신론자들이 완성시키고 있었던 일을 시작한 것은 법왕권이었다. 프랑스를 급속히 멸망으로 밀어넣은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인 모든 상태는 로마교의 정책이 이루어 놓았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무서운 상태를 기술한 한 저자는 왕위와 교회가 그 극단적인 행동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부록 21 참조). 엄격히 비판하면 그것들은 모두 교회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법왕교는 종교개혁을 왕위의 적이요,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파괴하는 불화의 요소라고 말함으로써 왕들의 마음을 자극하였다. 왕위를 통하여 가장 비참하고 잔인하며 가장 견딜 수 없는 압제와 박해를 행한 것은 그와 같은 모양으로 고취된 로마의 정신에 의한 것이었다.
자유의 정신은 성경과 병행하였다. 복음을 받아들인 곳에서는 어디서나 사람들의 마음이 각성되었다. 그들은 무지와 부도덕과 미신의 노예로 속박되어 온 질곡(桎梏)을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유인으로 생각하고 행하기 시작하였다. 왕들은 그러한 일들을 보고 저들의 전제 정치의 장래를 염려하였다.
로마는 왕들의 질투적 공포심을 자극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1525년에 법왕은 프랑스의 섭정(攝政)에게 말하였다. “이 종교광(宗敎狂-프로테스탄트를 가리킴)들은 종교계를 혼란케 하고 파괴할 뿐만 아니라 나라의 통치권, 귀족 계급, 법률, 질서, 계급 등을 파괴하는 자들이다”(G.de F’elice, History of the Protestants of France, b.1, ch.2, Par.8). 불과 몇 년 후에 법왕 사절은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폐하여, 속지 마십시오. 프로테스탄트들은 종교의 질서는 물론이요, 국가의 질서도 모두 전복시킬 것입니다. 왕위는 제단(祭壇)과 마찬가지로 위험합니다. …새 종교가 들어오면 새 정부가 필연적으로 들어설 것입니다”(D’Aubigne, 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Europe in the Time of Calvin, b.2, ch.36). 또한 신학자들은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하여 “사람들을 유인하여 신기한 것과 어리석은 일을 하게하며, 왕으로 하여금 신하들의 충성심을 잃어버리게 하여 교회와 나라를 다 같이 파괴시키는 자들이다”고 주장함으로 백성들의 편견에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로마교는 프랑스가 종교개혁 운동을 반대하게 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프랑스에서 박해의 칼을 처음으로 든 것은 왕위를 지탱하고, 귀족을 보호하고, 법률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Wylie, b.13, ch.4).
혁명 전의 프랑스 위그노 교도들의 도피와 함께 일반적인 쇠퇴가 프랑스를 엄습하였다. 번화하던 생산 도시는 타락한 도시로 전락되고, 비옥하던 지방은 원시적인 황무지로 바뀌고, 이상한 진보를 보인 기간 후로 지적 부진과 도덕적 퇴폐가 계속되었다. 파리는 하나의 거대한 구빈원(救貧院)이 되었으며, 혁명이 일어나던 당시에 약 20만 명의 거지들이 왕의 손으로 구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제수이트 당원들만은 쇠퇴하여 가는 나라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교회와 학교와 감옥과 노예들이 노를 젓는 갤리선에서 무서운 독재를 행사하였다. 프랑스의 성직자들, 왕, 입법자들의 수완으로도 어쩔 수 없게 되어 마침내 온 나라가 무정부 상태와 파멸로 들어가게 만든 그 나라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은 복음이 가져다 줄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백성들은 구주께서 가르쳐 주신 자아 희생과 무아(無我)의 사랑의 귀한 교훈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복리를 위하여 극기를 실행하지 않게 되었다. 부자가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여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았고,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고역과 압박에 대하여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부요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이기심은 더욱 극심하고 억압적으로 나타났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나타난 귀족들의 탐욕과 방탕은 농민들을 약탈하고 착취하기에 이르렀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가난한 자는 부자를 미워했다. 많은 지방에서 토지들은 귀족들이 차지하였고, 노동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소작을 하는 데 불과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주의 자비에 의존되었고, 그들의 지나친 요구에도 복종하지 아니하면 안 되었다. 교회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부담은 중류와 하류 계급에서 부담하였으므로, 그들에게는 집권자와 성직자들로부터 많은 세가 부과되었다. “귀족들은 쾌락을 제일로 생각하였고, 농부들이 굶어 죽는 것에는 전연 관심이 없었다. …백성들은 언제나 그들의 지주의 전적인 이익을 도모하여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농부들의 생활은 실로 끊임없는 수고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생활이었다. 그들이 불평을 말하면 그것은 오만한 모욕으로 취급되었다. 법정에서는 언제나 농민들의 호소보다는 귀족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재판관들이 뇌물을 받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일반 사회의 제도가 부패됨으로 말미암아 귀족들의 변덕스러운 주장이 법률과 같은 힘을 갖게 되었다. 평민들은 한편으로 세속적 권력자에게, 다른 한편으로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바치게 되었는데, 그 세금의 절반도 왕실이나 교회의 금고로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그 돈의 나머지 부분은 방탕한 자아 방종에 낭비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자기들의 동족들을 궁핍하게 만드는 그 사람들은 오히려 납세를 면제받고, 국가의 법률과 관례에 따라 여러 가지 중직에서 권리를 행사하였다. 그와 같은 특권계급의 사람들은 약 15만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하여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절망적이며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부록 22 참조).
혁명이 일어난 근본 원인
프랑스 통치자들은 이 치명적인 정책의 결과를 거의 내다보지 못하였다. 성경의 교훈은 공평, 절제, 진리, 평등, 자애의 원칙들을 백성들의 마음에 심어 줄 것이었는데, 그러한 미덕들은 국가를 번영케 하는 유일한 초석이다.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잠 14:34, 16:12).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7).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사람은 국가의 법률도 가장 성실하게 순종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정당하고 합법적인 온갖 권위를 행사하는 나라의 왕을 공경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는 불행히도 성경을 금지하였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파문하였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원칙과 신조에 굳센 사람들, 예민한 지력과 도덕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 자기의 양심을 거스르지 않고 진리를 위하여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과 용기의 사람들, 그들은 갤리선의 노예로 고역을 당하거나 화형을 당하거나 감옥 속에서 신음하였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은 먼 곳으로 피하여 간신히 안전한 곳으로 갔다. 이와 같은 상태는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 250년간 계속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에 박해자들의 광적인 분노를 피하여 간 복음의 사도들이 일반적으로 현저히 뛰어난 지능, 미술, 공업, 질서 있는 생활 등을 통하여 그들이 피난 온 그 지방을 부요하게 한 사실들을 프랑스 사람들은 보지 못한 세대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와 같이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이주하여 가는 일과 비례하여 그들의 나라에는 그런 재간 있는 사람들이 차츰 줄어 갔다. 만일 이미 가 버린 그 사람들이 모두 프랑스에 남아 있었다면, 만일 그 3백 년 동안에 추방된 그 사람들의 공업 기술로써 프랑스 국토를 발전시켰다면, 또한 그들의 예술적 소질로써 창작에 힘썼을 것 같으면, 만일 그들의 천재적인 창작력과 분석하는 능력을 가지고 그 문학을 발달시키고 과학을 육성시켰을 것 같으면, 만약 그들의 지혜로써 의회를 지도하고 그들의 용맹으로 싸우고, 그들의 공의로 나라의 법률을 제정하고, 성경의 종교로 백성들의 지능을 계발시키고, 양심을 다스리게 하였더라면, 오늘날 얼마나 찬란한 영광이 프랑스를 두르고 있을 것인가? 프랑스는 얼마나 위대하고, 번영되고 행복된 나라가 되었을까? 그 나라는 많은 나라들의 모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맹목적이요,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프랑스는 모든 덕망 있는 교사들과 질서를 잘 지키는 우수한 사람들과 왕위를 충성스럽게 옹호해 주는 사람들을 나라 밖으로 몰아냈다. 그들의 나라를 세상에서 명성 있고 영광스러운 나라로 만들어 줄 사람들에게 화형이 아니면 추방을 택하라고 강요하였다. 드디어 국가의 쇠퇴는 극도에 달하여, 추방될 만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더 이상 남지 아니하였고, 화형주로 끌려갈 만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없어졌고, 나라 밖으로 추방할 만한 애국자들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Wylie, b.13, ch.20). 그리하여 마침내 무서운 혁명이 일어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