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빈의 눈빛에 홀렸는지 빨간색 실크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지고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불길이 타오르는 돌밭 길을 걸어오고 있다. 그리고 악마가 속삭이듯 유혹적인 멘트. "날 빨아들여". 결국 여자가 정말 빨아들일 듯한 기세로 손을 내밀어 원빈의 커피에 손을 대고 그 순간 프렌치 카페는 불이 되어 타오른다. 다음 순간 원빈의 몸에 기대어 있던 여자는 펑하고 사라진다. 이어서 원빈의 야릇한 미소와 함께 "악마의 유혹, 프렌치 카페"라는 카피가 나오면서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악마적인 유혹을 지닌 프렌치 카페. 적당한 정도로 어두워 더욱 음산한 분위기, 흩날리는 실크, 활활 타오르는 불꽃, 남녀의 결합, 이중적 의미의 카피. 성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인 광고다. 물론 이 광고가 여성의 육체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자의 매력을 강조했고 우리들 머리 속에 성적인 상징 체계로 자리잡고 있는 것들을 동원함으로써 보다 고차원적인 전략을 썼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고차원적인 전략의 하나로써 이런 성적인 상징체계를 더욱 자극하는 것은 이 CM의 배경음악이다. 마치 오래된 LP를 듣는 것처럼 흐릿한 음악이 묘한 음색의 목소리와 어울려 전체 CM의 분위기를 돋구어준다. 어떤 곡인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고 마치 데쟈뷰를 체험하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마취약처럼 온 몸에 퍼져 CM의 내용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 같다. 어디서 들어본 곡일까? 사람의 호기심을 은근하게 자극하는 이 곡은 영화 OST에 삽입되었던 곡이다. 1962년 작으로 우리 나라에는 "죽어도 좋아"란 제목으로 소개된 영화 "Phaedra"의 라스트 씬에 등장하는 "Goodbye John Sebastian"이란 곡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래 바흐의 "Toccata and Fugue"란 곡이지만 거기에 주인공 알렉시스 역의 앤서니 퍼킨스의 절규하는 대사가 곁들여지면서 제목이 새로 붙을 만큼 원곡을 뛰어넘는 감동으로 여러 사람에게 사랑받는 곡이다. 곡이 등장하는 배경인 영화 "Phaedra"는 본래 그리스 신화에 연원하고 있다. 테세우스의 두 번째 아내인 파에드라는 전처 소생인 의붓아들 히폴리토스를 만나면서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 마음을 히폴리토스에게 말하지만 히폴리토스는 당황해 자리를 피하고 그것을 일방적으로 배반으로 규정한 파에드라는 히폴리토스가 자신을 넘보았다고 테세우스에게 말한다. 화가 난 테세우스는 아들을 저주하고 히폴리토스는 마차 사고로 생을 마감하게 되고 여기에 슬퍼하던 파에드라가 자살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영화는 이 신화를 그대로 재현해 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자기 운명의 선택에 있어서 알렉시스가 히폴리토스보다는 보다 능동적으로 표현됐다는 점이다. 마지막 자살의 장면에서 차를 몰며 바흐의 음악을 트는 그의 모습은 반항의 표현이다. 바흐와 그의 음악으로 상징되는 것은 이성적, 종교적으로 자유로운 자아를 구속하는 사회제도이다. 알렉스는 사회제도에 대한 불신과 비웃음을 표현한 것이다. 비록 혼자의 힘으로 어떠한 변화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최대한 자신을 표출한 몸부림이었다. 더욱 능동적인 주인공에 의해서 멋진 라스트 씬이 연출되어서일까? 고대 신화가 벌을 내리듯이 일방적인 입장으로 ''그래서는 안 된다'' 식의 교훈을 강조했다면 영화 페드라는 그 교훈이 많이 희석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희석되다 보니 일면 ''그러면 정말 안되는 건가?'' 하고 정정당당히 의문을 제기한다는 느낌이 든다. 즉 영화 "Phaedra"는 신화의 주제였던 계모와 의붓아들간의 사랑을 신화에서보다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객인 우리는 앤서니 퍼킨스의 비장한 연기에 잔뜩 몰입해 감동의 바다로 헤엄쳐 들어간다. ''오래 오래 기억될 명화야.'' 결국 영화 "Phaedra"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나 그 영화의 사운드 트랙인 "Goodbye John Sebastian"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것에 대한 반항이다. 계모와의 사랑이 인정되지 않는 세상, 그리고 그러한 세상을 인정해야 하는 알렉시스 자신. 모든 상황이 부조리하기만 하다. 부조리하면서도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만큼 큰 절망이다. 그리고 그 절망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듯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부조리함이 영화 속에서만 있는걸까? 천만에. 우리들이 발붙여 살고 있는 현실 세상에도 수두룩하게 많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건지. 왜 힘있고 권력이 있는 자들은 더욱 잘 살게 되는 건지. 왜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기회는 제공되지 않는 건지. 이런 거창한 것들은 넘어가더라도 하다 못해 왜 서로 관심사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그래서 자주 싸우기도 하는 남녀가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지. 또 남들 눈꼴사나울 정도로 좋아 죽을 것만 같던 닭살 커플들이 쉽게 헤어질 수 있는 건지. 오히려 앞뒤가 맞아 조리 있어 보이는 일들을 찾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우리들은 늘 이성, 논리를 부르짖으면서 우리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오히려 부조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앞 뒤 안 맞는 일들이 훨씬 많은데. 따라서 인간을 이성적인 특성만 갖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성적인 면을 갖고 있는 반면에 감성적인 면도 갖고 있다. 그리고 이성과 감성이라는 이분법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특성들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런 인간들이 살아가기에 이 사회는, 이 세상은 오히려 이성적인 계산만으로 살아가기 힘들고 또한 그 결과 역시 합리적으로 산출되지도 않아 부조리한 모습이 보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너무나도 쉽게 그런 사실을 망각한다.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한정지으면서 이성 외의 특성은 아예 고려의 대상에서도 제외해 버린다. 혹여 넓게 봐서 감성까지 본다 하더라도 그 두 가지 이외의 특성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 짓는다. 고대 서양의 철학자들이 주지주의냐, 주정주의냐로 시끄럽게 떠들었던 것이나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 주리론이냐, 주기론이냐로 들썩였던 것들이 모두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바와 다르기 때문에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 지루한 대결에서 일단 지금까지 승리해온 것은 이성과 이성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다.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동물인 인간으로선 사회 유지를 위한 규칙과 논리가 필요하게 마련이다. 그 규칙과 논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엔 이성적인 요소들이 필요하고 따라서 그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는 이성적인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 구조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소리를 낼 수도, 그 외의 다른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다. 이른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 스스로 갇혀 버린 격이 된 것이다. 그 울타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는 구조 자체에 반하는 것으로 판단되어 이단으로 몰리게 된다. 자신의 감정으로 고민했던 수많은 사람들, 울타리를 넘어서 다른 삶을 꿈꿨던 사람들은 그렇게 이단이 되어갔다.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정리해 버렸던 알렉시스처럼. 너무나도 단편적이고 편협하기에 부조리하지만 이성에 대한 신앙만을 요구하는 세상의 폭력 앞에 무릎을 꿇는 수 밖에. 하지만 이제는 그 철옹성 같던 구조도 변해가고 있다. 또 변해가야만 한다. 이미 울타리 안의 삶으로만 인간들을 만족시키기엔 울타리의 영역은 너무 좁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동적인 존재이다. 울타리 밖을 바라보고 상상을 하고 때론 밖에 나가기도 하면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한 시도 자체를 불온하게 바라보는 것은 인간 최고의 가치인 자유를 무시하는 답답한 모습이다. 너무나도 틀에 맞게 잘 길들여져 더 이상 발전할 가능성이 없어진다. 발전은 늘 다양한 시도와 그 시행착오에서 이뤄진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현재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삶의 다양한 재미를 발견해 내고 그것을 직접 해 볼 수 있는 자유의지. 이제는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 스스로 만든 벽을 깨야 한다. 보이는 길 밖의 세상을 맛보고 더욱 인간의 영역을 넓혀 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언젠가 그 벽, 그 울타리에 부딪혀 절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알렉시스처럼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영화 "Phaedra"에서 주인공이 보여주었던 소극적인 반항은 결코 금단의 벽에 부딪히는 비이성적인 자의 몸부림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이라는 이름을 맹신하면서 그 안에 스스로 갇혀버린 우리들에게 보내는 경고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 벽을 넘어서서 자신의 의지를,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행동할 수 있는 적극성을 촉구하는 메시지였다. 우리 자신을 가두지 말자. 남이 알까 두려워 속으로 감출 필요가 없다. 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자부하자. 그것이 보다 인간다울 수 있는 길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커다란 혜택이고 우리들은 모두 그 혜택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