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儒敎)에서 도리나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을 일컬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한다.
조선조 건국과 함께 명(明 1368)나라의 속국이 되고,
조선조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의례의 근간으로 삼아
건국 이념과 통치철학의 기본 강령으로 채택했다.
그 후 明 헌종(1465) 때 구준(丘濬)이
주자의 4례(四禮)와 사상을 집대성하여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 8권을 저술하고
조선왕조는 이를 받아들여 더욱 강화시킨다.
국가의 제례가 왕실을 중심으로 귀족화되고
더욱 엄격히 법제화되었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 예(禮)에 의한
송사(訟事)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색당파의 근원이 되어
조선조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또한 지배계급을 형성, 계급사회가 되며
반상(班常)의 위상은 더욱 강화된다.
서자(庶子)들은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막혀버려 훗날 난(亂)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숙종 때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했던
윤휴(尹휴)와 박세당(朴世堂)이 각각 중용주해 (中庸註解),
사변록(思辨錄) 등을 지어 주자와는 다른 독자적인 경전해석을 내놓자
송시열은 이들을 사문난적이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사색당파의 정쟁 도구로 썼던 송시열 일파는
윤휴를 처형케 하고, 박세당은 삭탈관직으로 몰아냈다.
이처럼 성리학이 융성하면서 다른 일체의 사상과 종교를
이단(異端)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유교(儒敎)에서의 조상숭배 사상을 종교적 단계로 끌어 올렸다.
그리하여 유교적 제례는
사회 기강을 바로 잡는 국가적 기반이 되었고,
치국(治國)의 근본 이념이 되었다
이것은 중국을 월등히 능가하는 것으로
장장 5백 년에 걸쳐 조선조의 절대사상,
유일사상으로 이 땅에서 꽃을 피운다.
명(明)나라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였던
이지(李贄 이탁오)의 말을 빌려 보자.
공자는 존경하지만 '그를 신성불가침의 우상으로 떠 받들면서
살아있는 천만 사람들의 입을 틀어 막는 주술로 삼고,
중생의 성령을 조여 죽이는 법보로 삼는다면
이는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비판했다.
일찍이 朱子가 “하늘이 중니(仲尼 공자의 字)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지 않았다면
만고의 역사는 기나긴 밤과 같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유해칭찬(贊劉諧)이란 글에서
“그러면 아마도 중니가 태어나기 전의 복희나
그 이전 성인들은 날이면 날마다
불을 밝혀 길을 다녔겠소이다” 라고 설파했다.
孔子를 신격화하는 황당함과 가소로움을
조소한 이 글을 근거로
이탁오는 성인을 비난하고, 법을 어겼다는 죄명 쓰고
76세의 나이에 이단의 낙인이 찍혀 감옥에서
스스로 머리를 찍고 죽음을 맞는다.
宋나라 이후, 朱子의 주석으로 고정된 유교 경전은
국가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학문 체계로
孔子는 신성불가침한 권위로 세상을 지배했다.
부처와 老子 보다 훨씬 파괴력을 지닌
공자를 비판하거나, 경전의 진리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한문수 2008. 8. 6. 1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