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나가르주나는 왜 〈중론송〉을 지었는가?
이제까지 〈중론송〉귀경게에 관해서 꽤 긴 해설을 했습니다. 이 귀경게를 통해서 나가르주나가 불교의 핵심 교설 곧 연기(緣起)에 대한 이해를 집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해설로,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연면히 이어지는 ‘한 맛(一味)’을 느끼셨으면, 제 의도는 충족된 셈입니다.
귀경게에서도 또렷이 드러나듯이 〈중론송〉의 주제는 ‘연기’입니다. 나가르주나가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첫 번째로 손꼽았던 게 바로 ‘연기’였던 것입니다. 저는 ‘연기’를 ‘존재의 인과관계’로 풀어 귀경게를 해설했고, 나가르주나의 타깃을 본질주의자로 규정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중론송〉본문에 대한 해설로 넘어갈까 합니다. 그렇지만 그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군요.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나가르주나는 〈중론송〉을 저술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중론송〉은, 경전과는 달리, 치밀한 체계와 논리를 중시하는 철학적 논서입니다. 와수반두가 〈석궤론〉에서 말하고 있듯이, 논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비로소 ‘논서’라 부를 수 있습니다. 첫째, 배우는 이의 번뇌를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배우는 이를 삼악도(三惡道: 지옥, 아귀, 축생) 및 윤회 생존에서 구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철학서’와는 그 용도가 판이하지요? 논리학마저도 해탈에 이르기 위한 길로 수용하는 인도 전통에서는, 불교의 철학적 논서가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습니다.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때 열반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러한 논서의 쓰임새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중론송〉의 저술 의도도 간략하게나마 〈중론송〉 귀경게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본질주의자가 제시하는 ‘세간의 무수한 속설’을 잔가지 치듯 제거하여, 배우는 이로 하여금 ‘완전한 해방의 영역’인 열반으로 안내하기 위하여 〈중론송〉을 썼다고 말입니다.
한편 구마라집이 번역한 〈청목소〉는 〈중론송〉의 저술 목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 시바神에게서 생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시간에서 생겼다고 하고, … 어떤 사람은 자기원인적 존재(自然)에서 생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원자(微塵)로부터 생겼다고 한다. 이러한 잘못 때문에, … 갖가지 사견(邪見)에 빠져, 갖가지 방식으로 ‘나’나 ‘내 것’을 말하며, 진리를 알지 못한다.
부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갖가지 사견을 끊고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하여, 먼저 성문승(聲聞乘)을 대상으로 한 법문에서 십이인연(十二因緣)을 설하셨으며, 이미 십이인연을 익히고 행하여 큰마음(大心)(=보살심)을 지녔으며 깊은 진리를 받아들일 만한 바탕이 형성된 사람을 위하여, 보살을 대상으로 한 대승 법문(大乘法)을 통해 존재의 실상에 관해서, “뭇 존재는 생기는 것이 아니며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동일한 것이 아니며 별개의 것도 아니다(一切法, 不生不滅, 不一不異)” 등등 [뭇 존재는] 끝없이 공(空)하여 [본체는] 그 어떤 것도 없다(畢竟空無所有)고 설하셨다. …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오백 년이 지난 상법(像法)시대에 사람들의 인식능력은 둔해지고 뭇 존재에 깊이 집착한 나머지, 십이인연(十二因緣), 오음(五陰=五蘊), 십이입(十二入=十二處), 십팔계(十八界) 등에 관한 확정적 정의만을 구하고, 부처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문자에만 집착하여, 대승 법문 가운데 ‘끝없이 공하다’는 설법을 들어도 왜 [뭇 존재가] 공(空)한지를 알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의심을 품었다.
곧 만약 모든 것이 끝없이 공하다고 한다면 죄복(罪福) 및 그 과보에 관해서 어떻게 구별한단 말인가? 이같이 [죄복 및 그 과보의 구별이 없]다면 일상적 진리(世諦)와 궁극적 진리(第一義諦)의 구별도 없어지지 않겠는가? 이같이 ‘공’의 자구적 정의만을 취하여 탐착을 일으켜 [뭇 존재가] 끝없이 공하다는 사태(畢竟空)에 대해 갖가지 오류를 일으켰다. 용수보살(龍樹菩薩=나가르주나)이 이러한 오류를 없애기위하여 이 〈중론(송)〉을 지었다.”
〈청목소〉를 보면, 공사상에 대한 갖가지 오해를 시정하기 위해서 〈중론송〉을 쓴 게 됩니다. 공을 허무로 보는 본질주의자의 오해에 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지요. 여기서는 공사상과 윤리의 문제를 짚어 보겠습니다.
■ 이종철 교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일본 동경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도 Mysore대학 연구원과 중국 북경대 교환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중이며, 전공은 불교철학(구사, 유식)이고 ‘인도불교와 동아시아불교의 비교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