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What It Takes to Birth a Church
가라? 기다리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타락한 인류를 향한 속죄가 드디어 이루어졌다. 하늘의 천사들은 이제 죄가 끝나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교회인 그분의 백성 역시 과거의 모습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날 밤, 그분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셨다. 요 20:21~22 제자들이 짧은 시간에 메시아의 예언을 모두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조력자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엘렌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대가 성령의 침례를 받을 그 때,그대는 지금까지 그대의 삶에서 알고 있던 모든 것보다 더 구원의 기쁨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서신, 1890, 33 그날 밤, 그리스도는 "그들의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눅 24:45 하셨다. 이후 40일 동안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위대한 사명을 밝히 보이셨다.
성경에는 '지상 명령'과 관련된 네 가지 국면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태복음 28장에 나타난 "가서 제자를 삼으라에서 한 가지 명령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다른 세 가지 국면을 포함시킬 때, '대사명은 더욱 완전한 그림으로 드러나게 된다.
부활하신 그날 밤, "죄 사함을 전파하라는 사명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해야 할 우선적인 일은 "가서"가 아니라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무르라는 것이었다. 눅 24:46~49 며칠 후에 갈릴리에서 제자들이 주님을 만나는 동안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명이 주어졌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61:15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사명을 강조하셨다.
마지막 대사명이 기록된 것은 감람산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이 구절은 전체를 인용해야 좋을 것이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4~8
그러므로 대사명의 완전한 그림에는 "머무르라", "가라" 그리고 "기다리라"는 명령이 포함된다. 아울러 기대했던 것보다 더 광범위한 목표, 예컨대 "죄 사함의 선포, "복음의 전파 그리고 “제자의 양육 또한 포함된다. 하지만 예수님이 40일 동안 이런 주제들을 제자들에게 설명하였을지라도 그들은 몇 가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오심? 지금 오심?
사도행전 1장의 본문을 다시 보자. 몇 주에 걸쳐 그리스도는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할 그들의 책임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언급하셨다. 또한 효과적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왜 성령이 필요한지 강조하셨다. 제자들이 감람산에 가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그들이 성령을 온전히 받기 전까지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의 침례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의 대답을 보면 그들은 완전히 핵심을 놓치고 있었다. 그들은 성령님이나 증인에 대하여 묻지 않았고 그분의 왕국이 회복될 시간에 대하여 물었다. 그분은 이미 그들에게 “이 세상에 일시적인 왕국을 세우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 아니라고" 행적, 30 분명히 선언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새로운 사상으로 변화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흥미롭다. 그분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행 1:7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재림의 징조에 관해 말씀하셨던 때를 생각나게 하는 말씀이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24:36 42 라고 하셨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엇갈린 시각이 재림교회 안에 많이 퍼져 있다. 1844년 이래로 많은 이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날짜'에 미혹되었다. 재림의 '날짜'를 알 수 있다는 최신 해석들이 담긴 서적이나 강연은 언제나 인기를 끌었고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이 <예수님께서 2020년 이전에 오실 12가지 이유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면,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지 모른다.
나는 예언의 신과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던 신실한 한 사람을 기억한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예수님께서 2003년 5월 15일이나 그 이전에 오실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구약의 확실치 않은 해석을 그 주장의 근거로 삼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내가 만일 그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인하여 영혼들이 멸망당하면 내게 그 책임이 있다는 논리를 폈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의 예언에 얼마나 자신이 있었으면 말한 대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어떤 결과가 있어났을까? 그가 주장한 날이 왔다. 두어 주일이 지난 후에 나는 그를 교회에서 봤다. 그는 기둥 뒤에 숨을 곳을 찾았다. 나는 그를 찾아가 손가락을 어떻게 했는지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우리는 관심의 대부분을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쏟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재림교인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한 최후의 몇 주 동안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분의 강조점은 증인으로서의 능력을 가지기 위하여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에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 우리가 그분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되는 것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셨다.
성령님이 우리의 삶에 오시는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보다 선행한다. 성령의 침례는 그분의 오심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 요 16:8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령님은 세상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에 오신다. 요 16:7 성령님이 교회를 통하여 일하실 때에 세상은 예수님께로 인도된다.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했던 침례 요한 눅 1:15 은 놀라운 약속을 하였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 마 3:11
성령의 침례는 사복음서에 모두 언급된 유일한 약속 마 3:11; 막 1:8;눅 3:16; 요 1:32~34 이며 사도행전에서도 두 번 행 1:5; 11:16 언급될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의 침례를 받아야 할 필요성을 매우 강조하셨다. 신약 성경에서 이보다 더 위대한 약속은 주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때를 위한 하나님의 사자 역시 성령의 침례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엘렌 G. 화잇의 출판된 저술에서 성령의 침례 혹은 유사한 표현이 8,943회 등장한다. 이것은 그녀가 기록한 원고 열 개 중 한번꼴로 등장한다는 의미이다.
다행히 제자들은 순종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약속한 성령이 오시기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렸다. 10일을 정해 놓고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령이 오실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전에 알지 못했던 성령이 오신 것은 불과 10일 후였다. 오늘날 우리도 똑같이 할 수 있을까?
오순절 부흥의 비결
시간을 가지고 엘렌 화잇의 <사도행적> 4장 오순절'을 주의 깊게 읽어보기를 바란다. 집중하여 읽으면 어떻게 제자들이 오순절 시간을 보냈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 그 장에서 인용한 구절이 있다.
...“제자들은 약속의 성취를 기다릴 때에 참된 회개로 그들의 마음을 겸비하게 하고 그들의 불신을 자복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하신 말씀을 상기하였다. 기억에서 사라졌던 진리들이 그들의 마음에 다시 떠올랐으며, 그들은 서로 이것들을 전하였다. 그리스도의 경이로운 생애가 그들 앞에 한 장면 한 장면・・・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그분의 순결하고 거룩한 생애를 명상하였다. 그들은 주님을 비탄에 젖게 했던 일들로 인하여 슬픔에 잠겼다. 그러나 용서를 받았다는 생각으로 그들은 위로를 받았다. 그들은 세상 앞에 가능한 한 담대하 주님을 시인하기로 결심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만나기에 적합하게 되도록 그리고 매일의 교제에서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도록 매우 열렬히 기도하였다. 그들은 영혼 구원에 대한 부담을 가졌다. 그들은 복음이 세상에 전해져야 할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능력을 간구하였다.
기다리며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했으며 이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이르렀다. ・・・성령의 감화로 참회와 자복의 기도가 죄를 용서받은 찬양의 노래와 함께 어우러졌다. 사도들은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며 '사랑은 여기 있으니'라고 부르짖었다. 제자들은 나누어 주신 선물을 붙잡았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루에 수천 명이 회개하였다." 행적, 35~38..
여러분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이것이 오순절의 사건을 있게 한 요인이었다. 이것이 오순절 부흥의 비결이었다. 우선 마음에 떠오르는 사실은 이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관심을 기울였던 만큼 성령님에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품성, 예수님의 사역을 기억하였고 그것을 서로에게 반복하여 나누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어떤 분이셨는지 또한 그들에게 남기신 유산이 무엇이었는지 묵상하였다. 두 번째는 이러한 묵상을 통하여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충만하게 되었고 이로써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가 더 있다. 그에 앞서 이를 요약하려고 한다. 만약 독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령 충만을 위하여 간구할 때 이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제자들의 분명하고 단순한 행동에 나타난 특징들에 주목하라.
- 제자들은 함께 모여 약속을 기다렸다.
- 제자들은 진정한 회개의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었다.
· 제자들은 그들의 불신을 고백하였다.
-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당하실 희생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기억하였다.
- 제자들은 그들이 기억하는 진리들을 서로 반복하여 나누었다.
- 제자들은 예수님의 거룩하신 생애를 묵상하였다.
- 제자들은 세상에 예수님을 전하기로 결심하였다.
- 제자들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는 진지한 열망을 가지고 기도하였다.
- 제자들은 불화에서 벗어나 교제를 통해 서로 가까워졌다.
- 제자들은 죄 사함의 노래로써 예수님을 찬양하였다.
- 제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경탄하며 이를 깊이 생각하였다.
- 제자들은 나누어 주시는 선물을 붙잡았다.
|
마지막으로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이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기도의 가치와 예수님에 대한 묵상의 가치를 의심하는 사람은거의 없다. 우리는 매일 한 시간씩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이 우리에게좋은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소망, 83 참고 그러나 우리가 특히 서양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하나 됨이다.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매일 개인적으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중요한 시간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기도하기로 결심할 때 드디어 우리는 개인적으로, 가족 간에, 교회에서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변화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북극권에 무르만스크 Murmansk 라는 유전 지대가 있다.일 년의 대부분이 겨울인 혹독한 마을이다. 90년대 중반에 그곳에 재림교회가 한 곳 있었지만 죽어가는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연약하기 그지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그곳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인구 감소율은 최악에 달했다. 한때는 교인이 22명이었으나 결국 8명으로 줄었다. 목사와 그 아내, 석유 굴착 설비에서 일하던 6명이 고작이었다.
그들은 현실을 직시하였다. 무엇인가 혁명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는한 교회는 그대로 문을 닫게 될 운명이라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독자라면 그와 같은 장소에서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당장 처한 그들의환경을 보지 않고 대신에 주님을 보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예수님께 완전히 헌신함으로 그들의 삶 전부를 드렸다. 이 얼어붙은 툰드라 지역에 사는 그들에게는 책임과 더불어 용기가 필요했다. 마침내 그들은 한가지 제안을 했다.
매일 새벽 꽁꽁 얼어붙은 6시에 목사를 비롯한 일곱 명의 남자들이 '바다코끼리'라는 이름의 클럽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들은 내의까지 벗고 거기서부터 미리 알아 둔 얼음 호수의 낚시 구멍까지 걸어갔다. 한 사람씩 얼음물에 자신을 담갔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구멍 주위에 무릎을 꿇고 어깨동무를 한 채로 성령의 불을 내려달라고, 그리하여 그들의 마음이 영혼을 위한 사랑으로 녹게 해 달라고 아주 열렬히 기도를 했다. 왜 그들은 이와 같은 유별난 행동을 했을까? 아마도의아한 생각이 들 것이다. 기도하기 위해서라면 난로가 있는 누군가의 거실에서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마도 우리라면 대부분 그런 방식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르만스크의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책임을 감당하고 싶었다. 날마다 얼음물에 몸을 담그는 것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다른 사람들을 물의 침례로 이끌기 위하여 그들이 먼저 준비되고자 하는 그들만의 서약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기 위하여 여름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매일 한결같이 반복했던 그 일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서로에게 분명히 인식시켰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놀라운 결과가 벌어졌다. 이 일을 시작한지 1년 동안 그들은 80명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교회 성장률은 1,000퍼센트에 달했다. 그 후 몇 년이 안 되어 그 지역에 적어도 6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사람 수보다 보드카 병이 더 많았던 곳에서 말이다.
"복음 사업이 그처럼 무력한 이유는 성령의 임재가 없기 때문이다. 학식과 달란트와 언변과 선천적, 후천적 재능을 다 가졌다고 해도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단 한사람의 마음도 감동시킬 수 없고 단 한 명의 죄인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없다. 이와 반면에 아무리 무식한 제자일지라도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 우주에서 최고의 감화를 끼치는 통로로 만드실 것이다." 실물, 328
생명적 교회의 두 가지 전제 조건
초대 교회의 탄생 과정은 아이의 탄생과 같았다. 둘이 하나가 되어야 다른 하나를 생산할 수 있다는 면에서 동일하다. '연합'이 생명적 교회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한마음"으로 하나 되는 것을 강조한 이유이다. 행 1:14; 4:32; 5:12
이 개념은 불변의 원칙이다. 왜 하나님은 세 개체로 존재하시는지궁금했던 적은 없는가? 여기서는 삼위일체와 같이 헤아리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성을 바라봄으로 우리는 배울 것이 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요일 4:8, 또한 다른 이와 나누기 전까지 사랑은 실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세 분 하나님이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세 분이 완전한 겸손으로 완전한 사랑을 표현하시고 실천하신다. 사랑한다는 말만으로는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역시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의 대상인 어떤 피조물이 존재하기 전부터 언제나 세 분으로 존재하셨다. 성경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에 대하여 읽을 때, 성삼위 하나님은 서로 존중하고 양보하려고 애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삼위 하나님은 서로를 첫째로 생각하신다. 성령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을 높이고, 아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높인다. 아버지 하나님은 성령과 예수님과 하나 됨을 취하심으로 두 분을 동시에 높인다. 요 16:13~15 성삼위 하나님이야말로 최초의 공동체이시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셨을 때, 독단적으로 행하지 않으셨다. 창조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창세기 1장에는 각 날을 만드신 뒤에 모든 것이 "좋았더라" 창 1:4, 10, 12, 18, 21 라는 선포가 나온다. 여섯째 날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서는 "심히 좋았더라" 창 1:31 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마침내 완전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서는 창조에 속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좋지 아니하니"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 때, 여호와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창 2:18 라고 말씀하셨다.
왜 하나님은 그 좋은 창조에 좋지 않은 것이 있도록 허용하셨을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되었기에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반사하고 있었다. 창 1:26~27 하나님은 아담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전까지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스스로 이해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개인적 경험을 통하여 사랑의 대상이 필요함을 알고 계셨지만 아담으로 하여금 그런 필요를 깨닫도록 시간을 주셨다.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셨을 때, 아담은 그를 자신의 일부로 생각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아라." 그리고 아담은 그녀를 히브리어로 여자를 뜻하는 '아샤'라고 불렀는데, 이는 남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이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창 2:23 창세기 5장 2절에 따르면 '아담'은 인류를 뜻하는 일반적인 이름이었지 남성의 이름에 해당하는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아담은 여성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독립된 남성이 아니었다. 또한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명백한 증거 중 하나는 사람이 사람의 형상으로 후손을 재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참 4:1 그것은 천사들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라도 다른 까닭을 생각해 보았는가? 결혼 상대의 정반대 모습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는가? 이것의 근본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공동체를 이루어 살도록 하셨다. 다시 말해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선택권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교회 역시 같은 방식이 적용된다. 제자들 사이에 불화와 심한 질투가 있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계명을 한 가지 더 주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이것이 그 이유였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사랑받지 못할 사람을 사랑할 때, 당신이 베푼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을 돌보아 줄 때, 당신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예표가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하늘 아버지의 아들과 딸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5:43~48
그리스도의 첫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1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서로를 향한 사랑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남녀차별이 사회에서 보편적이던 때에 남자들과 여자들이 함께 모였다. 행 1:14 베드로만 해도 그는 영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
막 14:29 다른 사람들에게 우레와 같았던 야고보와 요한은 어떤가. 막 3:17 친구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도마도 거기 있었다. 요 20:24~25 예수님을 무시하고 조롱했던 그분의 형제들과 그분을 따른다고 했던 제자들도 있었다. 요 7:3~5 거기에 그런 사람들이 함께 모였지만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행 1:14 하나가 되었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니 연합하게 된 것이다.
존경하는 화잇 여사는 여러 해 전에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심령의 성화란 그리스도의 본성을 사람 속에 심는 것이다. 복음적 종교는 우리의 삶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다시 말해 살아 움직이는 원칙이다. 그것은 품성 속에 나타나고 선한 일에 드러난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사랑이 경건의 기초이다. 사람이 말로 무엇을 공언하든지 간에 형제를 향한 이기심없는 사랑을 갖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이러한 정신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절실한 필요이다. 자아가 그리스도 안에 녹아들면 사랑은 자연적으로 샘솟는다. 그리스도인 품성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은 다른 이들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고자 하는 충동이 마음에서 끊임없이 일어날 때이다. 다시 말해 하늘의 햇빛이 마음에 가득하고 그것이 용모에 나타날 때이다." 실물, 384
바로 이것이 초대 교회에 일어났던 것이다. 공동체를 이루어야 생명적 교회의 두 번째 조건인 성령의 침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려면 둘이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 초대 교회가 연합되었을 때,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였다. 바로 성령으로 탄생한 교회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할 수 없다. 또한 이 두 가지 조건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연합의 교제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이다.
♣ 적용과 소그룹 연구를 위한 질문들
1.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 나타난 네 종류의 '지상 명령'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2. 제자들이 성령의 오심보다 세상 끝이 언제인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제자들의 경험은 오늘날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3. "성령님이 우리의 삶에 오시는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보다 선행한다." 이 진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4. 사복음서에 모두 언급되었고 사도행전에 두 번 언급된 신약의 약속은 무엇인가? 왜 이 약속이 신약에 강조되어 있는가?
5. 성령님을 기다리는 동안 제자들이 행동했던 12가지 항목들을 다시 살펴보라. 그들의 행동에서 어떠한 공통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가?
6. 함께 모여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힘든 이유는 무엇인가?
7. 우리 교회에서 초대교회와 유사한 경험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8. 러시아의 무르만스크 교회에서 일어난 놀라운 이야기는 여러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9. 아담과 그 아내의 창조를 통하여 어떤 통찰력을 얻게 되었는가? 또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10. 요한복음 13장 34~35절을 다시 읽으라. 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 말씀을 하셨을까?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11.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였던 120명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라. 그들의 성별, 나이, 직업, 사고방식, 개성이 달랐지만 어떻게 하나가 되어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