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산 자락에 위치한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원년 (742년)에 이름 모를 신승 세 사람이 세웠다고 하나 고증할 길이 없고 동리산파를 일으켜 세웠던 혜철스님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 는데 처음에는 대안사로 불리웠으며 불교의 구산선문중 하나인 동
리산파의 본산지로 선암사, 송광사, 화엄사, 쌍계사 등을 거느려 꽤 오랫동안 영화를 누렸던 사찰로 혜철선사와,
도선국사가 득도한 정양 수도의 도량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광자선사가 32칸으로 넓혀 지었으나 고려시대 중기에 송광사가 조계종의 본산지로 지위를
굳혀 따로 제금났고, 조선시대에는 어느절이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 바람을 탈 수 밖에 없었으나
효령대군이 머물며 왕가의 온당으로 삼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줄곧 옛날의 영화로움을 되찾지 못한채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일제시대에는 도리어
화엄사의 말사로 격하 되었다. 그나마 여순반란 사건과 6.25전쟁때에는 대웅전 등 많은 건물들이 불에 타 버렸고
지금의 대웅전은 1989년에 옛 모습을 본따서 새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뜰에는 돌로 만들어진 혜철 스님의 부도와 광자선사를 기리는 탑과 비가 이끼 낀 채로 남아 있어 이 절의 연조가 오래됨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는 태안사는 문화재 자료 23호로 지정되어 있고 경내에는 태안사 바라 등 9점의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태안사 능파각 1999년
'능파(凌波)'란 미인의 걸음걸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 누각 밑을 굽이쳐 흐르면서 기포를 일으키는 물길을
가리킨 말인 듯 하다. 그만큼 아름다운 물줄기다.
계곡의 양쪽에 있는 자연암반에다 낮은 석축을 올리고 길다란 통나무 두 개를
잇대어 걸친 위에 놓인 능파각은 정면 1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맛배 지붕의
건물이다. 난간에 걸터앉아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면 천년의 세월도
찰나 같기만 하다.
세속의 번뇌를 이 다리를 건너면서 던져 버리고 불계로 입문 한다고 한다.
세속의 번뇌를 이 다리를 건너면서 던져버리고 불계로 입문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데..
통나무로 보와 바닥을 깔아놓은 맞배지붕입니다. 영조13년(1737년)에 세워진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를 한 건축물로 지방문화재 82호로 지정되어 태안사에서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건물 중에 하나라고......
지금은...... 잠시 걸터 앉아 쉬어갈 뿐......
능파각은 신라 문성왕 12년(850) 혜철이 창건했다는 속설이 전하고 있지요.
하지만 좀 더 믿을 만한 ‘태안사사적기’는 영조 13년(1737)에 지은 뒤 1923년까지 4차례에 걸쳐 중수했다고 적었습니다.
능파각은 1996년에도 해체하여 썩은 재목을 교체하고 다시 세우는 보수작업이 이루어졌지요
그러나 원래의 능파각의 모습과 달리 복원되었다.
계곡에 가로질러 놓은 통나무도 현재처럼 각진 게 아니고 원목을 절반으로 나눈
반원형 이었다. 처마를 받치는 기둥도 전봇대처럼 매끈하게 깎은 직선이 아니고
자연목 그대로 사용해서 곡선미를 한껏 살려낸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이렇듯 보수가 잦은 것은 폭우가 내리면 계곡이 넘치기 일쑤이고,
평소에도 습기가 목재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임보 시인은 ‘능파각’에서
‘개울 위에 다락을 세웠으니 누각(樓閣)이요/개울 위에 다리를 놓았으니 교량(橋梁)이요
/개울 위에 절문을 얹었으니 산문(山門)이다/동리산 계곡 물 위에 뜬 봉황의 집’이라고 읊었습니다.
짤막한 시에서 능파각의 성격까지도 잘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리산이라는 이름을 풀어보면
‘오동나무가 우거진 숲’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능파각을 ‘계곡 물 위에 뜬 봉황의 집’이라고 표현했나 봅니다.
이제 자동차를 타고 태안사를 찾으면 능파각을 건너지 않고도 곧바로 절 마당에 닿습니다.
하지만 조금 걷더라도 계곡의 운치를 느끼면서 시인이 ‘봉황의 집’이라고 감탄한 능파각에 들러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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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선사 혜철은 15살에 영주 부석사에 출가하여 30살에
당나라에 유학했다.55살에 돌아와 쌍봉사에 머물다 63세에 이곳에서 산문을 개창했다.
그의 문하에 모여든 승려들은 대부분 신라 말 고려 초
우리나라 불교계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명성이 지금까지남아있다.
적인선사 부도이름은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이다.
옆에 있는 부도비가 세워진 872년경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게 천년도 더 된 유물이라니....
구경하는 다른 사람들.부도 옆의 동백나무에 정신이 팔렸다.
동백나무에 열린 열매를 신기 해 한다.
동백나무 나이 겨우1백여년
부도나이 천년이상.
적인선사의 부도는 우리나라 부도의 한 전형을 이루는 팔각원당형.
8각의 기단석과.원형의 연꽃 받침을 한 중대석과 8각의 탑신 그리고
기왓골이 선명한 지붕들.
여기에 화려한 상륜부 등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부도가 특히 대단한 건 이 부도를 만들 당시 어떤 모델도 없었다는 것.
일주문 앞에 있는 광자대사 부도는 적인선사 부도보다 100년이나 뒤에
만들어졌어도 그 완벽함을 따라오지 못한다.
더군다나 광자대사 부도는 적인선사
부도라는 모델이 있었음에도.
기단석에 새겨진 사자 상
천여 년의 세월을 비웃기라고 하듯
금방이라도 살아서 튀어 나올 듯이 생생하다
곡선과 직선의 완벽한 조형미와 균형미를 갖춘 적인선사조륜청정탑.
이름 없는 석공에 의해 만들어졌지만과히 태안사의 보물답다.
부도 옆에는 부도 비가 있다.부도 비의 상층부와 받침대를 제외하고 비문이 적힌 가운데
부분은 전쟁으로파괴되어 버렸다.그러나 누군가가 비문을 탁본해 놓은 게 있어서
비문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동리산태안사 배알문 1999년
적인혜철선사慧撤禪師(785~861)의 부도탑과 탑비를 모신배알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호남의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의 현판으로 된배알문
광자대사탑(廣慈大師搭) - 보물274호
일주문을 막 지나 오른편 부도밭에 있으며 고승 광자대사의 부도당이다.
높이는 약 3m에 달하고 지석대부터 상륜부의 보개까지 8각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부 위에 탑신을 차례로 놓은 전형적인 8각원당형으로서 보물 274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안사가는길목.개곡에핀진달래 스케치
그림 이호신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