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세베리노
일 시 | 행 선 지 | 거리 / 시간 | 비 고 |
2013년 6월22일. 06:50 | 반포대교남단 국민은행 앞 | ||
07:00 | 출발 | ||
08:00 | 은이성지 | 50.7km / 1시간 | 차량으로 이동 |
08:25 | 신덕고개 | 1.7km / 25분 | 도보로 이동 |
08:50 | 골배마실 | 2.2km / 50분 | 도보 |
09:40 | 망덕고개 | 1.8km / 1시간40분 | 도보 |
10:45 | 애덕고개 | 2.0km / 2시간45분 | 도보 |
11:00 | 미리내성지 | 0.5km / 2시간55분 | 도보 |
11:30 | 미리내성지 미사참례 | ||
13:00 -14:00 | 식당. 점심식사 | ||
14:00 -15:30 |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 | ||
15:30 | 미리내 출발 | 차량으로 이동 | |
17:00 | 하남 산곡동 | 회합및 평가 | |
18:00 | 출발 | ||
19:00 | 반포도착,해산 |
#.은이성지에서 미리내 성지까지 세개의 고개인 신덕, 망덕, 애덕을 넘어 미리내까지 산길을 걸어 걸리는 시간은 충분하게 잡아
3시간 입니다.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며 걷는 길은 한국 천주교를, 그리고 신앙선조와 순교자를, 한국통일을 위한 기도와 그리고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께 향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충분하게 생수와 행동식을 준비하고 기도하며 걷는 초여름날의 은이 - 미리내 트레킹은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하신 우리들의 영원한 사부님하고 만남과 형제적 사랑으로 가득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름다운 성지순례에 많은 형제, 자매님들의 참가를 기다려 봅니다.
모방 신부는 1836년 부활절(4월5일)을 전후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 공소'를 방문하였다. 그는 여기서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고 세례를 주었다. 김대건에 앞서 두 소년이 신학생으로 선발 되었는데 최양업(토마)은 2월 6일에, 최방제는 3월 14일에 각각 서울로 올라와 한문과 라틴어 등 외국으로 유학 갈 공부를 하며 수련에 있었다. 그러나 김대건은 7월 11일에서야 이들과 합류하였다.
모방신부는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보내기로 했다. 세 신학생들은 12월 2일 서울을 떠나기 전, 앞으로 공부하게 될 신학교 교장에게 순명할 것과 교구 신부가 되어 열심히 봉사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리고 12월 3일 중국으로 귀환하는 유방제 신부와 정하상, 조신철 등 신자들의 인도를 받으며 변문으로 떠났다. 이 때 조선인 신자들은 변문에서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 신부를 맞아들여 귀경하였고, 세 신학생들은 샤스탕 신부를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남하하여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로서, 신앙인들이 극동 진출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며, 동양 전교 활동의 거점이었다. 출발할 당시에는 세 신학생들이 공부할 장소가 결정되지 않았었다. 이들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동양인 성직자 양성소인 페낭 신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당시 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신학생들이 소요를 일으킨 일이 있어서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을 맡았다.
세 신학생들은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하여 1837년 8월과 19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다. 그 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다. 김대건의 건강 역시 좋은 편은 아니었다.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은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 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다.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29일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출동을 중지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하여 강남 교구장 베지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10월 2일 상해를 떠난 그는 10월 23일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에 머물면서 3차에 걸쳐 의주 변문을 통한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1843년 4월부터 거처를 소팔가자로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 곳에는 1841년부터 페레올 신부가 머물고 있었다. 김대건은 1843년 12월 양관에서 있은 제3대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 후 주교의 지시를 받고, 1884년 1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 했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12월 최양업과 같이 소정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 그들은 사제품의 법정 연령인 만24세 미만이므로 사제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김대건은 1845년 1월 1일 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한 뒤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하여 상해로 도항할 준비를 하고 4월 30일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에 승선하여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8월 30일 상해를 출발 40여일 만인 10월 12일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의 사목 활동 기간은 짧았다. 그는 입국하던 해 11월 12월 사이에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 등을 방문했는데, 은이 공소에는 그의 동생 난식과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 두 달이 조선에서 있은 사목 방문 활동의 전부였다.
그의 교회 활동은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서 끝났으니, 말년의 직책은 조선 교구 부교구장 이었다. 그는 1846년 5월 14일 주교로부터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범하여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왔다 . 거기서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고 10일에는 해주 감영으로 이송 되었다가 다음 날인 6월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김대건은 포청에서 3개월 동안 40차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26세였다. 그의 시체는 모래사장에 가매장 되었는데 40일 후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하여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 그의 두개골을 혜화동 소재 가톨릭 대학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1857년에 가경자, 1925년 7월 5일에 복자로 되었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김대건 신부는 25편의 편지를 남겼는데. 한글본 1편, 한문본 1편 나머지는 라틴어로 쓰여 졌다. 라틴어 편지는 23편으로 비망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은사 신부님에게 보낸 편지들로서 조선 입국 통로를 답사할 때의 보고와 옥중 편지이다. 서두를 "신자들 보아라"로 시작하는 한글 편지는 사형을 앞두고 옥중에서 조선 신자들에게 보낸 회유문이다. 한문 편지는 장문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 입국 통로의 개척을 위한 네 번째 답사 여행 후 기록한 것인데 한문 진본은 없고 프랑스 번역본만이 남아 있다.
또한 그는 현재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2통의 라틴어 작문과 <조선 전도>도 작성했다. 이중 작문은 신학생 시절에 작성한 것이고, 지도는 선교사의 조선 입국 안내를 위한 일종의 행정 지도로 부제이던 1845년 초 잠시 귀국했을 때 작성한 것이다. 이 밖에도 교회측 기록에는 김대건 신부가 옥중에 있을 때 정부 당국의 요청으로 세계 지도를 작성하고, 지리 개설서를 저술하였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성지순례는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이며, 재속의 일을 잠시 끊어 버리고 하느님과 사부님께 향하는 수행자로서의 여정이다. 또한 자신의 죄를 끊고 새 삶을 다짐하는 고백의 순간이다. 순례의 길에는 주님의 복음적 삶을 따르려는 혁신적 믿음이 살아 있는 길이고, 주님과 함께하는 수난의 십자가의 길이다. 또한 선조들의 순교 여정에 담긴 숭고한 정신을 찾아 떠나는 믿음을 증거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온누리에 신앙의 자취를 남기며 걸어서 하늘까지 가는 여정이 바로 야고바트레커들의 지향점이다.
도보순례 의식.
1) 주님의 기도
2) 출발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은이성지 떠나기 전 남기신 말씀을 듣고 잠시 묵상 한다.
" 약 6개월간 은이마을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하던 김대건 신부님에게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고 페레올 주교님의 명령이 새롭게 주어집니다. 그 명은 다름 아닌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선교사들과의 연락, 또 곧이어 조선에 입국해야 할 매스뜨로 신부님과 이제 곧 자세로 서품될 최양업 토마스 부제의 입국로를 알아보기 위한 임무였습니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는 또다시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게됩니다. 1846년 4월 13일 김대건 신부는 은이마을에서 교우들과 마지막 미사(부활대축일 미사)를 봉헌한 후 조선 교회의 숙원 사업인 성직자 영입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길을 떠나게 됩니다. 은이성지를 떠나시기 전에 김대건 신부는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 험난한 때에 우리는 천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 할 용맹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구합시다. 지금 우리의 주위에는 검은 마귀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의 삶을 모르는 위급한 처지에 처해 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천주님의 안배하심에 맡기고 주 성모님께 기구하기를 잊지 맙시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 있게 된다면 또 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를 합시다. 끝으로 내 홀로 남으신 불쌍한 어머니을 여러 교우 분들이 잘 돌보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이 말씀을 교우들에게 유언으로 남기시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실 길을 떠나시게 됩니다.
3) 묵주 기도 5단을 바치며 걷는다.(환희의 신비)
신덕송(新德頌)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진리의 근원이시며 그르침이 없으시므로
계시하신 진리를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나이다.
1) 주님의 기도
2) 1846년 6월 8일 옥중서신 발췌문을 읽고 잠시 묵상의 시간을 갖는다.
-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들에게 한 장의 편지를 보내게 되니 결례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환경과 공경하올 신부님들에 대한 생각과 애정이 이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음력 3월경에 지극히 지극히 공경하올 페레올 주교님의 뜻을 따라 백령도로 항해 하였습니다. 거기에 중국 어선들이 와 있었고, 그 어선들을 통해 신부님들에게 보내는 여러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것들은 그 후 조선 포졸들에 의해 압수되었습니다. 그 편지들은 라틴어와 한문으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돌아오면서 네 명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우리를 같이 포승으로 묶고 수도로 이송하였습니다. 가는 도중에 읍내들을 지나며 밤을 지냈습니다. 모든 무리들이 우리들을 구경하기 위하여 달려 들었습니다. 저는 마치 외국인처럼 체포되었습니다. 서울에는 여러 신자들이 잡혀 있었습니다. 곧 현석문 가를로도 포교지를 위해 봉사하던 다섯 여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또한 저의 집에 있던 물건들도 압수되었는데 그것들은 돈과 가구 등등이었습니다. 지금은 포졸들이 교우들을 특히 공경하올 페레올 주교님의 복사인 이재의 토마스를 체포하기 위해 사방에 파견되었습니다. 주교님과 신부님이 잡힐까 두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큰 박해가 될 것입니다. 저는 편지들 때문에 많은 문초를 받았습니다. 함께 갇혀 있는 교우들에게 저는 고해성사로 힘을 복돋우고 있고, 또 두 예비 교우에게 영세를 주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열 명이 잇습니다. 다른 감옥에는 아마 7- 8명이 갇혀 있을 것입니다. 중략.. 미구에 천당에서 영원하신 성부 대전에서 다시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저를 대신하여 다른 모든 신부님들께도 인사를 드려 주십시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코마스, 잘 있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나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도록 부탁하네,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힘을 저에게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의 환난을 굽어 보소서, 주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사라피신다면 주여! 누가 감히 감당할 수 있으리까!!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들 안녕히 계십시오. 무익하고 부당한 종, 그리스도를 위하여 묶인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 김 안드레아 올림. -
3)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 (계속)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주실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나이다. |
1) 주님의 기도.
2) 김대건 신부님 시신 이장과 관련된 망덕고개에서 생긴 일을 묵상 한다.
태재고개에서 잠시 쉬고는 능골 앞산에서 이르니 동이 트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부터는 용인 땅이다. 여기까지만와도 내집 근처에 온 듯이 안도의 숨이 쉬어진다. 이고서 하루를 보낸 그는 다시 해가지자 길을 재촉하였다. 여기서 부터는 압고지, 용인읍, 송전으로 간다면 직선 코스라 하루밤이면 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으나 큰길로 가자면 위험에 뒤다를 것을 아는지라 그는 참바테 고개를 넘어 새래, 삼막골, 태화산 기슭으로 들어가 통점골 다리내 고개를 넘고 두렁이 고개를 넘어 은이를 지나 별미 고개까지 왔다. 반 년전만 해도 신부님이 계시던 은이 마을이요. 지금 쉬고 고개에서는 신부님이 미사를 드리시던 토담집이 무성한 나무사이로 지붕만 보이고 지금 앉아 쉬고 있는 이 길이 바로 신부님이 지나시던 길이라 신부님의 발자국 소리가 나는 듯 했고 신부님의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다.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마음 놓고 신부님을 부르며 통곡했다. 이곳에서 하루 해를 보내고는 다시 길을 재촉해서 별미 고개 능선을 타고 해실이 고개를 접어드니 이곳이 속칭 신덕, 망덕, 애덕, 고개라고 하는 험하기 짝이 없는 산길이다. 이 길은 전에 김신부님을 뫼시고 여러번 다녀 본 길이라 밤이라 해도 그리 서둘지 않았다.그러나 워낙 나무가 울창하고 험하여 가금 산짐승들이 나타나는 곳이기도 하며 또한 산적들이 나타난다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워낙 힘이세고 담력이 센 원선시오는 한 두놈의 도적이나 군졸 다위를 만나도 때려 뉘고 갈 마음이 준비되어 있었다. 망덕고개에 이르렀을 때 별안간 획하는 소리와 함께 두 눈에 서기가 비추는 소아지만한 호랑이가 나타났다. 아무리 담력이 센 원선시오였지만 이 때만은 등골이 오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무서운 짐승을 노려 보며 크게 호령을 했다 한다. 네 이놈 아무리 짐승이기로서니 우리의 위대한 김신부님의 시체를 모시고 가는 앞 길을 막다니 썩 물러나지 못할까! 이 한마디의 호령으로 호랑이는 슬그머니 산중턱으로 사라졌다. 원선시오는 다시한번 성모님과 자기 수호천사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또 걸음을 제촉하였다. 마지막 고개인 애덕고개 가지 오니 날이 새었다. 이곳에서는 바로 눈앞에 검은정이 동리와 미리내도 보인다. 그러나 만일을 위해서 여기서 또 하루를 지내기로 했다. 그리하여 시체를 감추어 둘 곳을 몰색하니 마침내 화전 콩밭이 있어 콩밭속에 시체를 감추어 놓고 자기는 솔폭 밑에 누워 있기로 했다.
3)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계속)
애덕송(愛德頌)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근원이시며 한없이 좋으시므로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제 몸 같이 사랑하나이다.
1) 주님의 기도
2) 이민식 빈체시오 옹을 애덕고개에서 만나 들은 오기선 신부님 증언 말씀 묵상
-자꾸만 계속되는 5리나 되는 길을 걸으며 나는 이 빈체시오 할아버지께 꼬치꼬치 여쭈어 보았다. 할아버지는 제밥 구수하게 유모를 섞어가며 남곡리 양지에서 미리낶가지 오려면 신덕, 망덕, 애덕, 세고개가 있지, 박해를 피하던 신자들이 삼덕을 기리며 넘나든 곳이지, 나도 신덕, 망덕 고개는 잘 빠져 넘었는데, 애덕 고개를 넘으려니까 날이 밝지 않겠나. 저 비탈 콩밭 오른쪽 밭고랑에 김신부님 시체를 숨겨 놓고 솔가지를 쳐서 여러겹으로 덮고 보니 해가 점점 높아지지 뭐냐. 해가 높아지자 콩밭에 임자가 일꾼을 데리고 올라와 가을걷이를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이 할아버지는 고개를 넘어가 소나무 밑에 배를 쭉 깔고 숨어서 눈만 내놓고 망을 보았다. 그런데 콩을 거두는 일꾼들이 점점 시체를 숨겨둔 곳 가까이로 다가 가는 것이 아닌가.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할아버지의 가슴이 졸아 들었다. 몇 번인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드렸던 묵주신공이지만 더욱 더 정성껏 드리기 시작했다.
제목숨 대신 드려도 좋으니 우리 착한 목자 김신부님 장례나 잘 치루게 해주십시오. 저걸 보세요. 이제 두서너 고랑만 더 베어 들어 오면 만사는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성모님 기적을 내려 주시옵소서. 온갖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사람들은 콩밭을 게속 베어 들어 오고 있었다. 김신부님의 시체를 감춰 둔 곳에 거의 다가 왔을 때 갑짜기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동서남북에서 장대 같은 비가 쏱아지면서 천둥과 벼락이 울었다. 그러자 콩밭 임자가 ' 여보게들 내려가세 다음에 날씨 좋을 때 와서 거두세' 하는 것이 아닌가. 콩밭 주인이 일꾼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흰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고 날이 개었다.
3)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