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법화삼부경의 내용 및 사상
법화삼부경의 개경開經이라 할 수 있는 <무량의경>의 주된 내용은 한량없이
다양한 가르침도 결국 한 가지 가르침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 한 가지 가르침이란 바로 ‘모양 없는 도리[無相]’를 말한다.
이 도리는 삼라만상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되,
한 찰나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생멸하는 삼라만상의
온갖 변화에 따르지 않고 모양없이 존재한다.그래서
생겨나고[生]․
유지되고[住]․
변화하고[異]․
사라지는[滅]
일체 제법이란 현상적으로는 존재가 인정되지만,
참된 실상實相의 분상에서는 한 티끌도 없이 언제나 비어 있다.
<무량의경>에서는 생生․주住․이異․멸滅(혹은 생로병사)로
변화하는 현상과는 무관하게 생명 자체의 변하지 않는 도리가 있음을 일깨워준다.
즉 시간과 공간의 3차원적 한계를 떠나 영원히 존재하는 ‘모양 없는 도리[無相]’,
곧 참된 실상이 있기 때문에 일체법의 변화가 가능한 셈이다.
이는 본래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파괴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근본 원리이다.
쉽게 말해 아라비아 숫자를 1부터 시작해서 아무리 큰 숫자까지 헤아린다 하더라도,
그 낱낱 숫자마다 제로(0)를 곱하면 모두 제로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즉 모든 존재의 속성이 공空이므로, 제아무리 크고 요란한 존재
(태양․별․산․바다․권세․재물․미모 등등… )
일지라도 근원에서 보면 공空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에 크고 작은 숫자들이 모두 제로에서 출발하여 시작되는 것처럼,
생명의 근원이 공이므로 또 온갖 만물이 생겨나고 사라지며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공空은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입장을 지니는 동시에
모든 존재를 긍정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피한 속성이다.
따라서 <반야경>에서 말하는 공사상과
<승만경>이나 <열반경>에서 대두되는 여래장, 불성사상은 결국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반야경의 공사상을 <무량의경>을 비롯한 <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이라는 입장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시키고 있다.이에 관하여 나가르주나(용수)는 일찍이 <대지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제일의공第一義空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일의공이란 제법실상을 말한다.
이는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절대적인 실재이며, 이것이 바로 제법의 실상이다.
그런데 그것이 현상으로 나타나는 경우에는 결코 고정된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물질적 대상이든 정신적 대상이든 그 어떤 존재라도 항상함이 없기에[無常] 변화가 가능하며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오역죄를 범한 중죄인이라도 지극히 참회함으로써
착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고, 중병에 걸렸다가도 나을 수 있는 법이다.
모든 사물에 고유한 자성自性이 있다면 한 번 지어진 것은 영원히 변함이 없어야 한다.
음식도 결코 상하는 일이 없을 테고, 나뭇잎이 썩어 거름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을 터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한 번 봄이 되면 다시는 겨울이 올 수 없으며 씨앗에서는 결코 싹이 나올 수 없고,
꽃도 새로 필 수 없지만 만약 신이 꽃을 창조했다면 결코 시들지 않아서 열매는 평생 맺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무리 세월이 가도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될 수 없고, 중생은 끝내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몸과 마음의 변화는 수십만 가지로 파도치듯 움직이고 있으며,
감정의 변화 또한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현상계의 사물 역시
눈에 감지되든 않든 간에 수십만 가지로 매순간마다 줄기차게 변화하며 움직인다.
곧 이러한 모든 것은 일체제법에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똑같은 현상이라도 주어진 조건과 환경이 바뀌면 결과 또한 그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이는 오늘날 유전자 변형이라든가 생명공학을 통해 복제도 가능하게 된 것을 보면
충분히 헤아려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똑같은 콩이라도 밭의 거름이나 햇볕과 물의 정도에 따라 크기와 수확하는 양이 다르게 된다.
설사 같은 나무에 돋아난 잎이라도 햇빛을 받는 위치나 여러 조건 등에 따라 저마다 엽록소의 농도가
달라지게 되고, 크기나 모양새도 조금씩 다르게 된다는 것을 관찰할 수가 있다. 심지어 한 가정 안의
형제자매나 일란성 쌍둥이조차도 성격이나 모양이 제각기 서로 다르지 않은가.
이리하여 중생계에는 저마다의 모양과 성품과 능력과 작용들이 달라서 온갖 삼라만상으로 벌어지는데,
이는 고정된 자성이 없기에 가능한 것이다.
본 성품이 공하기 때문에 일체 만법으로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공空과 제법諸法의 관계는
서로 같지는 않지만 다르지도 않은 불가분의 관계로써,
비었다 해도 완전히 허무한 단멸공斷滅空은 아니며
또 만법이 있다 해도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중도中道의 이치를 모르고
겉으로 드러난 차별성에만 빠져 있으므로
중생은 본래 청정하고 평등한 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