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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전 미문이라고 하는 곳에서 40년 동안 일어나 걸어보지 못했던 앉은뱅이를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켰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사용하신 것은 그가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또 이 병인을 향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고, 또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나타난 기적입니다.
오늘은 이 병인 앉은뱅이 이 사람의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그의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를 통해서 일어난 이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솔로몬의 행각에 모였습니다. 지금 베드로를 사실 보기 위해서 모인 거예요. 이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 누구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그때 베드로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 때문이 아니다. 이 기적은 나로 인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능력, 그리고 그것을 믿는 믿음이 오늘 이 역사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어떤 영웅에게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관심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관심 그것이 병적으로 나타나면 관종이라고 그래요. 누구에게나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선이 집중될 때 그때 아니라고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기적의 근원이었어요. 여러분 그 이름은 어떤 이름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이었어요. 사실 유대 사회에서는 이 예수라고 하는 이름이 흔하게 쓰여졌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바 예수 예수의 아들이라는 이름도 나오고, 실제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도 나오고, 구약 성경에는 예수라고 하는 이름의 뜻을 가진 비슷한 이름들이 많이 나와요. 예수, 예슈아, 여호수아, 이사야, 호세야 이런 이름들은 다 비슷한 어근에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발음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구원, 구원이라고 하는 그 의미를 담은 단어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원을 갈망했어요. 그래서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자신들의 그 소망과 갈망을 담아서 지은 거예요. 그 이름이 지금 제가 나열해 드린 이름입니다.
우리도 그런 이름들을 많이 짓잖아요. 우리는 복을 좋아하니까 복돌이 복순이 복남이 복자를 많이 넣습니다. 사람들이 무의식 속에 가지고 있는 그 소망입니다.
유대인들도 그랬다는 거예요. 그런데 2천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가 이 땅에 오셨는데 그의 이름도 예수였어요. 그런데 이 이름은 마리아와 요셉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 지은 이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이름은 자기 부모가 지었는데 이 이름은 계시된 이름이에요. 마리아가 잉태될 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예수라 하라.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독생자는 예수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이 지상에서 33년 동안을 사셨습니다.그가 공생의 일을 할 때도 예수라고 하는 이름으로 일하셨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공생의 마지막에 요한복음 17장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그 제자들을 위해서 또 자기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가 두고 가는 이 땅을 위해서 하신 기도가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인데 그 기도문에 이렇게 주님은 고백하고 있어요.
17장 11절에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존하여 지켰나이다.
아들의 이름이 뭡니까? 예수예요. 그런데 그 이름이 본래는 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 예수로 그 이름을 가지고 내가 활동하면서 내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지켰나이다. 그들을 보존했나이다.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성자 하나님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본래 그 이름이 성부 하나님의 이름이었다고 이 놀라운 비밀을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에서는 구약의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을 여호와 또는 야훼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발음은 정확한 발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가 없었어요.
우리도 그런 문화를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그 유교의 전통을 따라서 높은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합니다. 아무개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존함이 어떻게 되시냐고 물으면 우리 아버지는 성원용이에요. 이러면 속으로 생각 이 쌍놈이구나 못 배운 놈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해 어떻게 배운 사람은 어떻게 해요? 성 원자 용자를 쓰십니다.
요즘은 이제 그렇게까지는 안 하지만 그래도 조금 아는 사람 내 부모를 존중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사람은 부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거예요.
제가 프랑스에 와서 받은 문화 충격 중에 하나가 아무나 이름을 부르더라는 거예요. 우리는 대통령 이름도 그냥 마크롱 이렇게 불러버려요. 제가 어린 게 아니고 우리 애들이 어렸을 때 유치원 학교를 보냈더니 그 친구들이 저를 보고 제 아내를 보면 혜경 원용 이러는 거예요. 어린 것들이 처음에 그게 적응이 잘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신기한 건 제가 프랑스 이름으로 샤흘러라는 이름을 가진 샤를르 근데 샤를르라는 이름을 부를 때는 그냥 샤를리 님 이렇게 안 하고 샤를 이렇게 부르면 별로 거부감이 없는데 이게 우리 문화에서 지어진 우리 이름을 부를 때는 딱 그렇게 다이렉트로 부르면 이게 뭔가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이 있더라 이거예요. 저도 많이 적응했지만 우리 교회 내에서 이 한국 커뮤니티 안에서 어느 권사님이 원용 씨 뭐 이런다든가 우리 학생 중에 나라가 원용 막 이러면 약간 좀 충격을 받을 것 같아요.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게 그렇게 중요했는데 유대인들도 그런 문화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특별히 하나님에 대해서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못한 거예요. 그 거룩하신 하나님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가 어떻게 부를 수 있는가 그래서 성경을 필사하는 서기관들도 여호와라고 하는 이름이 나올 때는 가서 목욕을 하고 나올 때마다 목욕을 하고 회개 기도를 하고 그리고 앉아서 기록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반인이 이 이름을 부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신에 여호와 야훼라고 하는 여호와나 야훼는 이 같은 단어를 다른 방식으로 발음하는 거예요. 지금 논쟁이 있어요. 여호와라는 말이 정확한 발음이냐 야훼라는 말이 정확한 발음이냐 어쨌든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했냐면 다른 이름으로 변형시켰어요.
그래서 아도나이 엘로힘 아도나이 주 하나님 아도나이 엘로힘 주 하나님 이렇게 야훼라고 하는 이름 대신에 그 이름을 못 부르니까 다른 별칭을 부른 거예요.
불어 성경에도 에데흐넬리라는 말을 씁니다. 영원하신 분 카톨릭 교회는 아직도 이 부분을 다이렉트로 부르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한국 천주교회는 보니까 이 하나님의 이름이 나올 때 그것을 그냥 부르지 않고 교황청의 어떤 결정을 따라서 주님으로 대부분을 주님으로 부릅니다.
그런다고 그래요. 그만큼 지금까지도 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데 조심을 합니다. 그래서 이 구약 시대부터 유대인들은 이 발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발음이 묵음으로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이 정확한 발음이 이 하나님의 이름을 얘기하는 정확한 발음이 무엇인지 사실은 나중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수백 년이 지난 후에는 다 그걸 잊어버린 거예요. 그냥 단어만 있는 거예요. 자음만 있는 거예요.
그러다가 10세기 AD 10세기의 맞소라라고 하는 학파에서 이런 단어들에 모음을 붙이기 시작하면서 그 발음을 임의적으로 붙여서 이런 발음일 것이다라고 해서 붙여진 것이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야회 여호와라고 하는 발음이죠. 그래서 사실 그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정확한 것은 무엇만 있냐면 구원이라는 의미만 있는 거예요.
그런 차원에서 여호와 야회 예수 구원이라는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는 아마 그 구약의 하나님의 그 묵음으로 남아 있던 이름을 그렇게 붙여서 여호와 야훼로 불렀지만 더 정확한 이름은 예수라고 하는 이름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추정해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계시하신 예수라는 이름은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셨던 이름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이름 예수 하나님은 왜 이름을 가지셨느냐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프로젝트를 가지셨기 때문이에요.
구원을 해야 될 대상이 없다면 이 이름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아야 될 대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이름을 정하시고 이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하신 거예요. 이 이름으로 행하시다가 그의 아들에게 주셨다가 그 성령에게 이 이름을 붙여서 보내시고, 그리고 후에는 이 이름으로 주님의 구속 사역을 계속 감당해야 될 저와 여러분에게도 허락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예수라는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 이름으로 구속을 행하셨고 그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을 천사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천사 숭배 사상이 있었어요.
히브리서 초반을 보면 천사 얘기가 많이 나와요. 근데 천사인데 천사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이렇게 하는 그래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1장 4절에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나면 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은 비교급이나 최상급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비교할 수 없는 완전히 격이 다른 존재라는 거예요. 천사는 천사는 피조물이고 이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한 가지를 더 붙인 것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받으셨음이니 예수님이 본래 신분도 천사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셨지만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그 증거는 이 이름 이 아름다운 이름을 유업으로 받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름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예요.
여러분 천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러요. 그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 이름을 유업으로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요. 아무나 바꿔 아무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이 사용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이름입니다. 여러분 그 이름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이름은 왕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마음껏 사용하라고 주신 거예요. 그 이름을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이것은 마치 왕의 도장과 같아요. 옛날에 왕명이 떨어지면 이게 왕명이다라고 하는 의미에서 도장을 찍습니다. 황제의 도장을 찍습니다. 그걸 옥새라고 그래요. 그냥 종이 한 장의 글씨가 있는 거지만 거기에 이 옥새가 찍히고 나는 순간 이것은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해 그때부터 그 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니까요. 그걸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오늘 그걸로 사용하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와 우리가 다를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을 믿고 우리가 사용하느냐 오늘 그 이름이 외쳐질 때 그 이름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의 차이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소중한 이름, 하나님의 이름 이 이름을 잘 사용하셔서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문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은 예수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일어난 사건이에요. 그런데 19절에서 20절에 보면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니
그다음에 베드로가 또 하는 이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그다음에 언급하는 것은 회개가 일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기적은 중요한 거예요. 그러나 기적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어요. 기적이 목적이 되면 그게 신비주의입니다. 기적이 목적이 되면 그게 열광주의예요. 많은 사람들이 그 기적을 보고 열광합니다. 기적을 보기 위해서 모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목적이 될 수 없어요. 모티베이션이 되는 거예요. 내 신앙이 이제 새로운 어떤 출발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구나. 기적은 하나님이 현존하신다. 하나님이 지금도 여기 역사하신다는 눈에 보이는 사인이에요. 그걸 보는 순간 하나님이 계시니 내가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면서 어떤 변화의 모티베이션이 되는 건데 그리고 과정입니다.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더 좋은 단계로 나아가는 그래야 되지 않겠어요. 그게 기적의 의미입니다. 과정이고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증거예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적이 목적이 되는 경우가 있어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더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어느 교회에서 누가 병 고침을 받았다더라 그거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에알로 그래서 어떻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와서 구경하고 야 그거 굉장하네. 야 이거 역시 다르네. 그러고 흩어지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기적은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의미가 있어요. 그다음 단계가 뭐냐? 회개입니다. 회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자기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현존 여러분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해 보셨어요? 우리가 처음 신앙생활할 때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하나님 바로 여기 계시구나 하면서 막 그 떨리는 마음으로 눈물 콧물 흘리면서 변화됐던 그 순간을 기억해 보세요. 하나님의 현존의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면 누구에게나 회개가 일어나는 거예요.
물론 간땡이가 부은 사람들도 있죠. 오만 방지한 사람도 있어요. 하나님 앞에 섰는데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 고백부터 나오는 거예요. 저를 떠나소서 너무 두렵고 너무 거룩하니까 회개로 이어져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기적의 그다음 단계는 회개입니다. 회계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기적은 신비주의예요.
그래서 오늘 바울이 베드로가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불신앙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걸 봤으면 내가 그동안 하나님을 부인했던 것을 회개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을 회개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날이 일어나냐? 죄 용서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고 유쾌하게 되는 날이 온다. 이 유쾌하다는 번역 뭐 다른 성경에는 다른 번역이 있지만 유쾌하다.
원래 이 뜻은 원기를 회복한다 안식을 누린다. 여러분 유쾌하게 되는 느낌을 한번 여러분 상상해 보시겠어요 제가 감기를 영국 갔다 와 가지고 영국 독감 프랑스 독감보다 세더라고요. 보통 2주 걸릴 겁니다. 그래서 나는 보통 1주 안에 끝내거든요. 약 독하게 먹고 빨리 끝내는데 3주가 걸려 마무리까지 가는데 근데 이 감기에 걸리면 막 집부득하니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고 막 몸은 아프고 내 살 것이 내 살 것이 아닌 것 같고 느낌이 그렇잖아요. 막 기분도 나쁘고 뭘 먹어도 맛도 없고 막 그런 그런 상태가 되다가 몇 번 그런 경험을 해요. 하룻밤을 딱 자고 났는데 끝났구나 하면서 뭔가 몸이 확 살아난 느낌 뭐 그런 느낌 경험해봤어요.
난 하여튼 그 그리고 이제 마지막에 가서 이제는 끝났구나 하는 그러면서 이 몸과 마음이 회복되는 원기가 회복되는 그 기분 기가 막힙니다. 그 기분은 남 얘기라 감동이 없나 봐 그런 하여튼 그게 영적으로도 제가 방황하다가 정말 변화돼서 주님을 만나고 며칠간 회개의 경험을 하고 막 눈물 콧물 흘리고 났을 때의 그 기쁨 그 느낌은요. 꼭 이런 유쾌하게 되는 느낌. 영과 혼과 육이 그동안 그렇게 나를 짓누르고 있던 어둡게 짓누르고 있던 그 늘 죽고 싶은 마음 그 우울한 마음 그런 마음이 순식간에 떠나가면서 말이 막 날아갈 것 같고 내가 좋으니까 막 그 기도원에 올라갈 때는 모든 게 우울하고 막 그랬는데 그 나무에 잎사귀들이 막 춤을 추는 것 같고 완전히 다른 세상, 다른 은혜를 경험했어요.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길 원하는 거예요. 기적을 구경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다음 단계 회개를 통해서 용서받고 회복되는 그런 역사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 기적은 맛보기에 불과해요. 혹시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여러분 누군가가 그런 간증을 하면 하나님 살아계시구나. 내가 인식하면 내 각성을 하면 내게 회개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를 고백하고 내어놓으면 그다음 단계로 하나님 우리를 인도하셔요. 용서하시고 원기를 회복시켜주시고 유쾌하게 되는 날, 그리고 새로운 인생길을 열어주시는 겁니다.
맛만 보고 맛보기 위해서 맛만 보고 끝나면 얼마나 손해인지 아세요? 더 진짜 깊은 맛이 있어. 신앙생활은 그저 남 잘되는 거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비밀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이 예비하신 세계가 있어요. 더 아름답고 깊고 더 기가 막힌 세계가 있어요. 그것을 사모하셔야 돼요. 신앙생활은 절대 매너리즘이 없어요. 이걸 알면 지루하지 않아요. 들어가면 또 또 더 좋은 세계가 있다 이거야. 하나님의 세계는 끝도 없습니다. 그런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다음에 지금 베드로가 또 말씀하는 것은 이제부터는 예수께 집중하라는 거예요.
이제 너희가 십자가에 달아 죽인 그 예수께서 그 예수의 시대가 왔다. 22절과 23절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는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을 받으리라 하였고, 성경의 결론은 예수입니다.
먼 훗날 한 선지자를 보낼 예수님은 선지자이기도 해요. 삼중직을 가졌어요. 제사장이면서 선지자면서 왕이면서 그걸 메시아예요. 지금 예수님을 말씀하는 거예요. 그 마지막 때에 한 선지자를 메시아를 보낼 터인데 그때부터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게 구약부터 얘기돼 있던 거예요.
근데 사실은 예수님이 모든 것의 결론이에요. 근데 유대인들은 그 예수님을 몰라보고 예수님을 배격했어요. 예수님 살아계실 때도 요한복음 5장 39절에 성경은 나에 대해서 말하는데 너희가 너희가 영생을 얻으려고 성경에 대해서 상구하고 읽고 묵상하는데 그 성경은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가 내가 왔는데도 내게 오기를 원치 않는도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구약 성경 전체가 아주 액기스를 짜고 마지막 들어가 보면 예수님을 얘기하는 거라는 거예요. 구약도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예요. 이 천하 만물도 예수님이 창조하셨고 예수님이 계속해서 지켜나가시고 완성하시는 역사입니다.
골로세서에 의하면 그에 의하여 그를 위하여 창조하였다. 예수님도 천지창조에 참여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사실 구약도 아들을 향해서 나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 그 아들이 이 땅에 오신 다음부터는 오신 다음부터는 철저하게 예수에게 집중해야 되는 거예요. 그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모든 것이 예수님께 집중이 돼 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잖아요. 딱 올라갔더니 예수님 옆에 모세와 엘리가 서 있는 거예요. 엘리아가 베드로가 너무 깜짝 놀랐어요. 모세와 엘리사는 구약의 대표 주자예요. 최고의 선지자, 최고의 지도자예요. 그래서 그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 장막 셋을 짓고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엘리아를 위하여 그냥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때 하늘로부터 홀연히 빛난 구름이 덮이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니 너는 저의 말만 들으라. 신약 시대는 아들의 말을 듣는 시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 집중하고 그의 말을 듣는 시대예요. 하나님께서는 그의 메시지를 보낼 때 다양한 방법과 다양한 모습으로 보내셨다고 그랬어요. 히브리서 1장 1절에서 2절에 보면 옛적의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한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예수님이 오신 다음에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은 하나로 끝나버렸어요. 아들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오신 이후에는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를 통해서 말씀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이 신약 시대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에게 집중해야 되는 거예요.
유대인들도 불편하지만 우리가 내가 십자가에 잡아죽인 그 예수가 부활했고 이제는 그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것이 불편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이니 너희들도 예수에게 집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에게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가르치신 말씀을 듣고, 또 그분의 생애를 묵상하고 십자가 앞에 나가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은혜와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게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 말씀하셔서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음성 들을 때가 온다. 바로 지금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당신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순간에 모든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아들의 음성이에요. 이미 그 음성이 우리에게 들려졌고, 지금도 끊임없이 그 음성이 우리에게 들려지고 있어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 음성을 듣는 인생에게는 앉은뱅이가 40년 동안 한 번도 못 일어난 그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을 누르고 있던 모든 장애가 풀어지고 회복되는 거룩한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에게 집중되고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하셨던 그 놀라운 구원과 은혜의 세계로 깊이 더 깊이 나가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