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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통주의란 무엇인가?
신정통주의는 20세기 초에 출판된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를 기점으로 시작된 신학으로서, 개혁주의와 자유주의의 중도 입장에 있는 신학이다. 20세기 초까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고고학과 역사비평 등의 영향으로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거부하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했다. 이때 칼 바르트가 등장하여 위기에 놓인 문화를 초월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자유주의 신학을 혹독하게 비판했고, 그의 책 <로마서 강해>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칼 바르트는 성경의 일부 모순과 오류를 인정하여 기존 정통 신학과의 차별성을 유지하였고, 이후 ‘신정통주의’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신정통주의 신학은 미국과 한국의 정통 교단에 깊숙히 침투하여, 교회를 극심한 혼란에 빠드리게 된다. 미국의 경우, 1920년대부터 프린스턴 신학교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를 받아들였고, 이에 저항하던 그레샴 메이첸은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떠나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웠다.
한국 장로교회의 경우에는 역사상 크게 3번의 분열이 있었는데(1951년 고신 측과의 분열, 1953년 기장 측과의 분열,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 위 3가지 분열 중 신사참배 문제로 갈라진 고신 측과의 분열을 제외한 기장 측과의 분열과 통합·합동 측의 분열에는 바로 신정통주의 신학이 그 중심에 있었다. 먼저, 1953년 기장 측의 분열은 성경의 고등비평학을 인정하고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적 특성이 강했던 김재준에 의해 일어났다. 메이첸의 제자로서 개혁주의 신학에 충실했던 박형룡에 의해 김재준이 탄핵 당하자 그의 지지 세력들에 의해 기장 측의 분열이 일어났던 것이다. 다음으로,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은 WCC(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이견이 중심에 있었지만 신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개혁주의와 신정통주의의 대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정통주의 신학은 성경보다 이성을 높이는 이단적이며 매우 위험한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얼핏 보면 개혁주의 신학과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속아 넘어가는 성도들이 많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칼 바르트의 신학을 대중화시킨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 시리즈>를 통해 신정통주의 신학이 설교상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주제별로 살펴보면서, 어떤 부분에서 우리의 신학과 비슷하게 보여지는지, 또한 어떤 부분에서 우리의 신학과 결정적으로 달라지는지에 초점을 맞춰 분석해 보자.
신정통주의 성경관 비판
1. 오직 말씀?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신정통주의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난히 강조한다는 점이다. 특히 칼 바르트는 성경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세속 문화에 동화된 동시대의 자유주의자들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당시 유럽이 자유주의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때였음을 감안하면,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던 동시대의 개혁주의자들에게 그들은 같은 편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정용섭 목사 역시 말씀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세속 문화에 동화된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오직 성경"을 외치며, 좁은 길을 걸어가려 하는 개혁주의 성도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들린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지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1) 정용섭 목사는 김동호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설교 중 "빈번한 예화 사용"을 줄이고 "말씀 중심"의 설교를 회복하라고 촉구한다.
(2) 정용섭 목사는 박종순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신학적 깊이 없이 청중의 감정만을 자극하는 복음성가의 사용을 줄이고 말씀 중심의 설교를 회복할 것을 촉구한다. 이런 주장은 개혁주의 진영 외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는 주장이기 때문에, 이런 부분만 보면 개혁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3) 정용섭 목사는 김상복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한국교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성공 지상주의" 또는 "기복주의"적 설교를 매우 강하게 비판한다.
(4) 정용섭 목사는 윤석전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말씀에 대한 충실한 강해가 없는 단순한 카리스마적, 선동적 설교를 강하게 비판한다.
(5) 정용섭 목사는 김진홍 목사와 조헌정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말씀에 대한 강론에서 벗어난 우파/좌파 이념적 설교를 각각 강하게 비판한다.
(6) 정용섭 목사는 이성희 목사의 "복지중심적 목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말씀 중심의 사역을 회복할 것을 촉구한다. 그는 목사의 사명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목사는 설교자"라고 생각했던 청교도들의 신앙과 매우 흡사해 보인다.
(7) 정용섭 목사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와 옥한흠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하나님 중심적" 메시지, "그리스도 중심적" 메시지의 설교의 모델로서 극찬한다.
상기의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정용섭 목사는
1. "빈번한 예화사용"이 아닌, "오직 성경"을,
2. "감성 자극"이 아닌 "오직 성경"을,
3. "성공 지상주의" 또는 "기복주의"적 설교가 아닌 "오직 말씀" 중심적 설교를,
4. "카리스마적" 또는 "선동"적 설교가 아닌 "오직 말씀 강해"에 기반한 설교를,
5. 좌파든 우파든 "이념 지향적" 설교가 아닌 "오직 말씀" 중심적 설교를,
6. "복지 중심적" 목회가 아닌 "말씀 중심적" 목회를 주장하면서
7. 목사의 사명은 "설교"에 있다고 생각하고,
8.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상의 내용만 보면, 정용섭 목사는 "오직 성경"에 기반한 "개혁주의"적 설교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 과연 그럴까?
2)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살펴본 대로 정용섭 목사는 엄청나게 "말씀"을 강조한다. 설교에 있어서의 빈번한 예화 사용, 말씀에 대한 충실한 이해가 결여된 감성적인 자극 또는 카리스마적 설교, 말씀 그대로의 메시지가 아닌 기복주의적 또는 이념 편향적 설교, 말씀보다 복지에만 치중하는 목회 등이 정용섭 목사가 주로 비판하는 대상이다. 즉 그는 목사의 사명이 "설교"에 있으며,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그리스도"를 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강조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그는 귀신론으로 유명한 김기동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아래와 같은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다.
정용섭 목사는 축자영감설을 "주술적 세계관"이라고 믿는다. 축자영감설이란 무엇인가? 성경 말씀의 "모든 내용"이, 일점일획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뜻이다.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성경에 "인간의 글"이 조금이라도 개입되어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정용섭 목사에 의하면, 성경 축자영감론은 "성서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철저히 훼손"되게 만든다. 즉 성경의 모든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규정해버리면, 성경을 기록한 인간 저자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게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그가 聖經(성경)을 聖書(성서)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성경을 "경전"이 아니라 "인간의 책(書)"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위 문장은 철저히 "김기동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는 와중에 기록된 "한 문장"이기 때문에, 자세히 읽지 않고 건성으로 읽으면 놓치기 쉬운 문장이다. 특히 "축자영감론" 같은 조직신학의 용어에 익숙치 않은 독자들은 더욱 그렇다. 한 문장 가지고 너무 시비 거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독자들은 아래의 문단을 보라.
정용섭 목사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축자영감론을 "성서가 문자의 차원에서 완전하게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준이며, 성서가 진술하고 있는 모든 명제는 진리이고, 초자연적인 보도 역시 역사적 사실"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정용섭 목사가 축자영감론을 비판한다는 것은, 성경이 "완전하게"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며, 우리에게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볼 수도 없으며, 성경이 진술하는 "모든 명제"가 진리인 것도 아니며, "초자연적인 보도"를 역사적 사실로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정용섭 목사는 루터와 칼빈이 종교개혁 당시 축자영감론을 주장한 것은, "교회가 신앙의 기준"이며 "성경해석권이 오직 사제"에게만 있다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사제주의에 맞서기 위해서 도입한 것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렇다면, 정용섭 목사는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인가? 확실히 그렇다. 정용섭 목사는 임영수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아래와 같은 발언을 하다.
정용섭 목사는 소위 "기독교 영성의 대가"들에서 발견되는 "역사과학적 영성의 결핍"을 논하고 있다. 사례로는 "바울"과 어거스틴의 여성차별적 구도, 루터의 지동설 부정, 크롬웰과 찰스 왕의 비민주적 정치 행태를 꿰뚫어 보지 못한 조지 폭스를 들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울의 여성차별적 구도"이다. 정용섭 목사는 바울 서신을 "여성차별"로 보고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역사과학적 영성이 결핍"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성경에도 오류가 있다는 뜻이 되는가? 확실히 그래 보인다. 지나치게 시비를 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아래 글도 보자.
정용섭 목사는 릭 워렌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워렌이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기술한 행13:22을 설교에서 인용했다고 비판한다. 왜 그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가? 행13:22 본문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뿐임을 보여주는 본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해당 본문이 "오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용섭 목사는 "어불성설"이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더 나아가 구약성경이 "다윗 왕조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 역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한다. 이는 구약 전체를 "오류"로 단정짓는 무시무시한 발언이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유효한 건 결코 아니다!"라는 문장은, 그가 확실히 성경 본문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하고 성경을 대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릭 워렌 목사의 새들백교회가 "마케팅"과 "엔터테인먼트"에 물든 교회가 되었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같은 길을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코 그렇게 같은 길을 가는 신학자가 아니었음을 위 대목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 대목만 더 보기로 하자.
정용섭 목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건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의 피를 원하실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바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성경 말씀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지 않고 그 틈새에 "인간의 생각"이 끼어들어 갈 수도 있다는 신학적 전제가 이처럼 참담한 해석까지 낳게 된 것이다.
"오직 말씀"을 강조한다고 해서 반드시 "말씀을 사랑하는 설교자"인 것은 아니다.
깊이 따져봐야 한다.
3. 사상 영감? 성경 비평학?
앞서 살펴본 대로, 정용섭 목사는 "오직 말씀"만을 외치면서도 말씀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는 모순된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성경에 "인간적 오류"가 섞여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처럼 앞뒤가 안맞는 주장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정용섭 목사의 성경관이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는 성경에 대한 애착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신정통주의자들은 바르트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이라고까지 호칭한다. 실제로 바르트는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말하려면 반드시 성경을 통해서 말하였고, 자신의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정통 개혁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들만을 사용하였다.(그러나 용어의 의미는 자기식대로 바꾸는 "용어혼란 전술"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칼 바르트는 ‘사상 영감’을 주장했다. 즉 성경의 "사상은 신적으로 영감" 되었으나, 그 "사상이 옷 입은 언어는 인간 저자들이 하나님의 인도 없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은 "신적 계시에 대한 인간의 증언"이다. 성경의 저자들은 분명 "신적인 계시"를 얻었으나 "연약한 인간"이기에 "그것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오류를 일으킬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연약한 인간의 증언을 통해 말씀하셨다. 성경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사상"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이다. 성경은 구속사의 측면에서는 오류가 없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세세한 부분에서는 오류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핵심인 "구속사"에서는 오류가 없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칼 바르트의 글을 직접 읽어보자.
즉, 바르트에 따르면, 선지자와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에는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있었고, 또 "실제로" 범해졌다는 것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기록한 글은 "말씀 자체"가 아니라 "말씀의 증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 해석에 있어서 고등비평은 불가피하다. 자유주의 신학을 혹독하게 비판한 바르트이건만, 결국 "성경 위에서" 감히 성경을 "비평"하겠다는 생각만큼은 결코 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바르트의 성경관을 그대로 수용한 정용섭 목사는, 권성수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성경비평학"의 필요성을 힘주어 강조한다.
정용섭 목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인들을 전멸시킬 것을 명령하신 이유가 가나안 인들의 부패한 죄 때문이라는, "성경 말씀 그대로" 설명한 권성수 목사의 설교를 "순진해서 좋기는 하지만 어리석다."고 비판한다. 그 이유는 "성경의 보도를 사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니 그러면, 성경의 보도가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 정용섭 목사는 가나안 전쟁이 "유목민이던 유대인들과 농경민이던 가나안 사람들과의 문화 갈등" 때문에 일어난 것인데, 성경 기자가 이를 "종교적 충돌"로 보도했다고 설명한다. 아니, 그러면 정용섭 목사의 이러한 판단은 성경에 없는 내용인데 도대체 어디에서 근거한 것인가? "약간의 문화사적 안목"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판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용섭의 목사의 "문화사적 안목"으로 "성경을 비평"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놀랍게도, 우리나라에서 거의 제1교단의 제1신학교라고도 할 수 있는 장로교(통합) 소속의 장로회신학대학교(장신대) 신학성명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1985년 장신대 신학성명의 제1명제는 아래와 같다.
위 제1명제의 글을 보면 신정통주의자들의 "사상영감"에 대한 이해가 잘 나타나 있다. 성경 안에 "중심 메시지"(사상), 즉 "복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해서만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진리들은 "이 복음에 입각해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외의 내용들은? 인간적인 오류가 끼어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비평학에서 얻은 통찰"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 장신대가 감신대나 한신대보다 성경 비평의 강도가 더 약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 비평에서 강도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단 성경에서 한 구절을 의심하고 비평하기 시작하면, 다른 구절에 대해서도 다 의심하고 비평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 말씀에서 어디까지가 "복음"이고, 어디까지가 "복음 이외"의 영역인지 딱 잘라 선을 그을 수 있을까? 사람마다 "각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게 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 결국 "각자의 판단"이 성경 위에 군림하게 된다. 따라서 여러 종류의 진보주의 신학이 "성향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지만, 성경을 비평한다는 원칙에서 같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 "말씀을 취사선택하는 권한"을 갖게 된 인간이 높은 위치에 서게 된다.
과거에 김재준이 "신정통주의 신학"을 표방하며 한신대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성경 비평의 강도가 지금의 장신대 정도였음을 깊이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도올 김용옥 같은 개망나니 신학자가 탄생할 줄 김재준이 과연 예측했을까? 장신대도 계속 이대로 간다면, 수십 년 후에 "제2의 도올"이 탄생할지 모를 일이다. "성경 위에 군림하여 비평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장신대의 미래는 매우 어두워 보인다.
4. 신학보다 체험?
앞서 말한대로, 칼 바르트를 위시한 신정통주의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자체"라기보다 "말씀의 증언"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 증언 속에 담겨 있는 "사상"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무오성을 지니지만, 세부적인 기술에서는 인간적인 오류가 섞여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성경의 "세부사항"보다 "전체적인 메시지"에 관심을 더 기울일 수밖에 없고, 당연히 "조직신학"을 강조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경의 핵심 메시지를 주제별로 요약해 놓은 것이 조직신학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용섭 목사의 설교 비평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1) 정용섭 목사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인용하며 조직신학의 중요성을 아래와 같이 강조한다.
(2) 정용섭 목사는, 릭 워렌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성경의 특정 본문을 조직신학적 이해 없이 자의적으로 왜곡하여 설교했다고 비판한다.
(3) 정용섭 목사는, 박영선 목사의 <하나님의 열심>에서 아브라함, 요셉, 다윗 등에 관한 설교를 거론하면서, "신앙적 영웅의 무용담"이 아닌 "이들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풀어낸 설교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처럼 정용섭 목사의 "조직신학"에 대한 강조는, 개혁주의 성도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개혁주의 역시 조직신학을 매우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왜 조직신학을 강조하는가?"이다. 개혁주의자들이 조직신학을 강조하는 이유는, 성경 전체가 "한 분의 저자"(하나님)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즉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 전체가 한 분 하나님께서 쓰신 책이니, "통일성" 있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조직신학이다.
반면 정용섭 목사가 조직신학을 강조하는 이유는, "성경 전체"가 아닌 성경의 "사상"(구속사)만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차이가 무슨 대수냐고? 중대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아닌 "말씀의 증언"이라고 해버리면, 오늘날의 설교자가 강단에서 선포하는 설교와 별 차이가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설교 역시 "말씀의 증언"이지 "말씀 자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성경 말씀과 설교자의 말씀은 무엇이 다르게 되나? 성경이 설교자보다 더 권위를 가져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된다. 아래 글을 살펴보자.
정용섭 목사는, "신학이 아니라 체험이 먼저"라는 김영봉 목사의 설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는 체험이 아닌 계시(또는 계시를 해설한 신학)를 우선시하는 개혁주의와 상반된 평가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가? 바로 성경 말씀을 "계시"가 아닌 "말씀의 증언"으로 보는 신정통주의 성경관 때문이다. 정용섭 목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쓸 때도, "부활의 예수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신학을 전개했다는 주장을 한다. 다시 말해 바울서신은 "계시"가 아닌 "경험의 기록(말씀의 증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가 아닌 "계시 경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더 나아서 정용섭 목사는, 오늘날의 설교자들도 "바울과 같은 경험"을 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과 같은 경험을 하지 못한 설교자들은, "기독교 영성과 거리가 먼 단순한 연설 기술자"라고 한다.
결국 정용섭 목사는 조직신학을 강조하지만, 그 조직신학의 원천이 "계시"가 아닌 "말씀의 증언(경험에 대한 기록)"에 있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래서 성경의 유일무이한 권위가 사라지고,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성경의 저자들이 경험한 것과 동등한 경험을 할 것이 강조된다. 그 경험이 조직신학보다 더 높은 권위를 차지하게 될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신학보다 체험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용섭 목사의 성경관은 "성경 66권으로 모든 계시가 종결되고 더 이상의 추가계시가 필요하지 않다."는 개혁주의적 성경관에 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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