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신춘문예 당선작]
책가도 / 이수국
나는 살았지만 죽은 사람
오크 향 원목 책장을 창문 앞에 세웠다
책을 좋아한 왕이 책가도(冊架圖)를 세워 일월오봉도를 가렸듯
햇살과 달이 가려진 방
창틈으로 들어온 빛이 어둠을 가른다
박물관 유리문 너머 책가도
가로와 세로의 배열 속, 그림 위에 꽂힌 천년의 페이지들
그림 속 책을 보던 왕과
유리문 안을 보는 내 눈이 책가도 위에서 만났다
그림 한구석 은밀히 쓴 화공의 이름이 흔들렸다
책장 바닥에 그늘 한 권을 괴자 몸이 중심을 잡는다
무너지던 중력을 다시 세운 건 한 권의 책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기대고 있는 책을 꺼내면
그들의 체온이 손끝을 타고 가슴으로 전해오고
작가를 지우며 작가를 꽂는다
이럴 때 사전을 거역하는 것은 유쾌한 일
문장이 자라는 시간
스위치를 켜면 책과 나는 조도가 같아져
수백 년 전 죽은 우린 서로 이마를 맞대며 이야기한다
눈감은 순간에도 새로운 이름이 눈을 뜨고
서로 다른 시계들이 태엽을 돌리면 한 곳에서 만나는 페이지
나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람
바람과 함께 써가는 연대기
이곳에도 낱장 사이 기압골이 있어 새로운 바람이 분다
내 안의 책장을 만지면 나는 가끔 살아 있는 것 같다
https://naver.me/IGKhseM3
책가도- 책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품을 그린 그림. 정조가 책거리에 대해 강한 의지를 보이자, 양반계급은 이 새로운 유형의 회화를 수용하며 같이 향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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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5년도 강원일보 당선작 이수국의 "책가도"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심사는 이영춘, 이홍섭 씨께서 하셨네요. 심사위원은 당선작으로 뽑은 경위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수국의 시 '책가도’는 정조가 좋아한 책가도를 중심으로 상상을 펼쳐나간 작품으로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았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기대고 있는 책”을 통해 “나는 살았지만 죽은 사람”, “나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응모자의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심사평을 바탕으로 이수의 당선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 당선작 "책가도"는 조선시대 정조가 사랑했던 한국 전통 민화의 한 장르인 "책가도"를 모티브로 삼아서, 책과 인간, 그리고 시간의 관계를 깊이 있게 탐구한 시편입니다.
시의 구조
1. 서사적 도입 -시간과 공간의 초월(1-5행)
2. 전개-과거와 현재의 만남(6-11행)
3. 확장-책을 통한 존재의 연결, 깨달음과 변화(12-21행)
4. 결말-시간의 순환과 생의 연속성(22-25행)
이 시는 편의상 크게 5연으로 나눠 읽을 수 있는데요.
나는 살았지만 죽은 사람
오크 향 원목 책장을 창문 앞에 세웠다
책을 좋아한 왕이 책가도(冊架圖)를 세워 일월오봉도를 가렸듯
햇살과 달이 가려진 방
창틈으로 들어온 빛이 어둠을 가른다
1연의 첫 행 "나는 살았지만 죽은 사람"이라는 구절은 살아 있지만 과거에 묶여 있거나 무기력함과 단절감을 느끼는 존재임을 말하죠.
결국, 화자가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오크향 원목 책장을 창문 앞에 세웠다"는 둘째 행은 자신의 삶 속에 책장을 두는 행위를 묘사하고 있죠. 책을 좋아한 왕이 책가도로 일월오봉도를 가렸다는 표현은 자신도 책을 통해 현실의 햇살과 달을 가리고 새로운 세계를 형성했음을 나타냅니다.
박물관 유리문 너머 책가도
가로와 세로의 배열 속, 그림 위에 꽂힌 천년의 페이지들
그림 속 책을 보던 왕과
유리문 안을 보는 내 눈이 책가도 위에서 만났다
그림 한구석 은밀히 쓴 화공의 이름이 흔들렸다
책장 바닥에 그늘 한 권을 괴자 몸이 중심을 잡는다
2연의 "그림 속 책을 보던 왕과 유리문 안을 보는 내 눈"이 '책가도'를 통해 과거 왕과 연결되어 대화를 나눈다"는 구절은 책가도를 통해 과거 왕과 연결되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말하죠.
"책장 바닥에 그늘 한 권을 괴자 몸이 중심을 잡는다"는 구절은 화자의 내면적 균형 회복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너지던 중력을 다시 세운 건 한 권의 책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기대고 있는 책을 꺼내면
그들의 체온이 손끝을 타고 가슴으로 전해오고
작가를 지우며 작가를 꽂는다
이럴 때 사전을 거역하는 것은 유쾌한 일
문장이 자라는 시간
스위치를 켜면 책과 나는 조도가 같아져
수백 년 전 죽은 우린 서로 이마를 맞대며 이야기한다
3연의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기대하고 있는 책"이라는 구절은 과거 글쓴이와 오늘의 독자가 만나는, 즉 과거와 현재 삶의 연결을 의미하죠.
"작가를 지우며 작가를 꽂는다"는 구절은 책을 읽으면서 글쓴이와 자신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전은 언어의 표준적 정의와 고정된 의미를
담고 있는 도구로, 객관성과 규범성을
상징합니다.사전을 거역한다는 것은 이러한 고정된 의미에서 벗어나, 언어를 자유롭게 새롭게 해석하거나
상상력을 발휘하는 행위입니다.)
눈감은 순간에도 새로운 이름이 눈을 뜨고
서로 다른 시계들이 태엽을 돌리면 한 곳에서 만나는 페이지
4연에 "눈 감은 순간에도 새로운 이름이 눈을 뜬다"는 구절은 화자가 독서를 통해 새로운 사유와 깨달음을 얻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서로 다른 시계들이 태엽을 돌리면 한 곳에서 만나는 페이지"라는 구절은 각기 다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독자인 화자에게 연결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나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람
바람과 함께 써가는 연대기
이곳에도 낱장 사이 기압골이 있어 새로운 바람이 분다
내 안의 책장을 만지면 나는 가끔 살아 있는 것 같다
5연의 "바람과 함께 써가는 연대기"라는 구절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책은 독자를 통해 지속적으로 쓰이고 전달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도 낱장 사이 기압골이 있어 새로운 바람이 분다"는 표현은 책의 물리적 공간을
뜻하면서도, 과거와 현재, 작가와 독자, 생과 사
사이의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을 상징합니다. 이 공간에서 "새로운 바람"이 부는 것은 책이 새로운 사유와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내 안의 책장을 만지면 나는 가끔 살아 있는 것 같다"는 구절에서는 책을 통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고, 그 느낌을 표현한 구절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책이 화자의 존재를 지탱하는 본질적 요소임을 암시하는 구절이죠.
이 구절은 (책을 읽는 동안에는) "나는 죽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임을 다시 확인하는 진술"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끝부분의 구절은 이 시의 첫 행 "나는 살았지만 죽은 사람"이라는 구절과 대비되는 수미상관의 기법으로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시의 구조 측면에서 주제 의식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이는 "책가도"가 단순히 과거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와 소통하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시가지는 이러한 수미상관의 구조는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고 순환되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정리를 해보면, 시인은 책장을 창문 앞에 세워 햇살과 달빛을 가리는 행위를 통해 책이 단순한 지식의 집합체를 넘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매체임을 암시합니다. 또한, 박물관 유리문 너머로 과거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림 속 책을 보던 왕과 현재의 화자가 책을 통해 만나는 장면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경험과 문화의 영속성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이 시는 시간과 기억의 흐름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며,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예술적 연속성과 초월성을 성취한 시편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수국의 당선작 "책가도"에서 우리가 시 창작 관점에서 배울 점은 무엇일까요?
우선, 이시는 독창적인 상징 구축과 사유의 확장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전통적인 시화인 "책가도"를 소재로 해서, 시간과 공간, 생과 사를 연결하는 상징적 매개체로 승화시킨 점입니다. 평범한 대상이나 사물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보편적인 주제나 새로운 관점을 발견해내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상징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기대고 있는 책이라는 철학적 사유와 깊이를 우려내고 있습니다. 또 "작가를 지우며 작가를 꽂는다"는 사유의 확장을 통해, 단순한 독서 행위를 넘어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그것을 경험하게 합니다. "내 안의 책장을 만지면 나는 가끔 살아 있는 것 같다"라는 표현에서는 감정을 절제하면서 철학적 사유를 깊이 우려내는 절묘한 조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는 감각적인 언어와 구체적인 이미지 구사를 들 수 있습니다.
"오향 원목 책상을 창문 앞에 세웠다"는 구절은 오크나무의 향기와 원목의 질감을 시각과 후각적으로 전달하여 독자에게 마치 그곳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햇살과 달이 가려진 방"이라는 표현은 빛이 차단된 공간의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그려내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죠.(정조가 일월오봉도를 가린 것과 화자가 햇살과 달을 가린 것을 대비하여 일월이라는 시간의 초월을 묘사)
"책장 바닥에 그늘 한 권을 괴자 몸이 중심을 잡는다" 는 표현도 이미지가 구체적이면서 무척 상징적입니다.
이렇게 모호한 추상이나 관념적 표현이 아닌, 구체적인 사물이나 장면을 통해 주제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죠.
셋째는 여운을 남기는 열린 마무리를 들 수 있겠습니다. "내 안의 책장을 만지면 나는 가끔 살아 있는 것 같다"라는 구절은 명확한 결론을 내리는 대신 독자에게 여운을 남기는 기법을 쓰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외에도 이수국의 "책가도" 당선작은 전통적인 소재를 재해석하고 있는 점, 그리고 과거와 현재, 생과 사가 만나는 시간과 공간의 교차로에서 초월성을 드러내고 있는 점 등이 다양한 관점에서 창작적 통찰을 제공한다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2025년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수국의 "책가도"를 분석해 보았습니다.
이 시는 "책가도"라는 전통적인 한국의 서화를 모티브로 하여, 책과 인간,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생과 사의 관계를 탐구한 작품입니다.
창작 기법 측에서도 상징과 구체적인 이미지 구사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간의 교차, 생과 사의 경계 탐구, 전통과 현대의 융합, 수미상관 기법, 열린 마무리 등, 배울 점이 많은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기법들을 활용해 독자와 깊이 소통하는 작품을 많이 창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 이탤릭체는 옮긴이의 개인적 의견을 첨가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