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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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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작품 1 | 담북장 |
대표 작품 2 | 아버지의 호두나무 |
수상연도 | 2008년 |
수상횟수 | 제27회 |
출생지 | 청주 |
[수상 작품]
담북장 / 박영자
냉동실 문을 열 때마다 은박지에 싼 주먹만한 그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 건드리곤 한다. 그런데도 왜 그것을 쉽게 치우지 못하는 것일까. 한 번 먹을 양밖에 안 남았는데 선뜻 손이 가지 않아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이 무슨 기념품이 될 물건도 아닌데 말이다.
소나기가 세차게 퍼붓던 날 그 형님이 우리 아파트 앞에까지 와서 전화를 했다. 웬일인가 싶어 뛰어 내려갔을 때, 우산 속에서 해쓱한 얼굴로 애써 웃으며 담북장이 든 비닐가방을 건네주고는 비가 많이 올 것 같아 서둘러 가야 한다며 황망히 차에 올랐다. 인사도 제대로 할 새 없이 형님을 놓치고는 멀어져 가는 차 뒤에 대고 멍청하게 손을 흔들고 서있던 내 꼴이 지금 생각해도 쓴웃음만 난다.
그 날 저녁 담북장을 끓이며 나는 많이 부끄러웠다. 나는 언제 누구에게 이런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보았는가 하는 자책 때문이었다. 담북장 뚝배기를 가운데 놓고 우리 내외는 입으로는 맛이 있다고 하면서도 가슴이 저렸다. 밤이 되니 이 집 저 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담북장을 어떻게 받아야 옳으냐고. 폐암수술을 한 지 얼마나 됐다고 100리 길도 넘는 시골에서 청주까지 손수 차를 몰고 왔으며 집집이 담북장을 나누어주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짚이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그 형님이 암수술을 받고 서울 병원에 있을 때, 우리 모임에서 번거롭지 않게 한다며 대표 두 사람만 병문안을 갔었기에, 퇴원하여 시골집으로 내려왔을 때 하루 날을 잡아 병문안을 갔었다. 그 형님으로서는 그 빚을 갚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그 형님이 우리들에게 베푼 인정과 사랑이 얼마인데 그까짓 쥐꼬리만한 성의를 마음에 두었다니 그 송구스러움이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병문안을 갔을 때만해도 희망적으로 보였기에 웬만치 마음을 놓고 올 수 있었는데 그 형님은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그 때 차를 타고 황망히 내 곁을 떠나 듯 우리 곁을 영영 떠나고 말았다. 진짜 고독한 사람은 쉽게 외롭다고 투정하지 못한다더니 병마와 외로운 싸움을 하면서도 표 내지 않고 의연하기만 했는데 그 진한 생의 애착을 어떻게 놓고 눈을 감았을까.
오늘이 바로 그 형님의 첫번째 기일이다. 작년 여름 아들의 생일을 해먹고 돌아오는 길에 그 형님의 부음을 받았으니 그나마 날짜라도 기억할 수 있어 다행이다. 지금쯤 그 형님이야 하늘나라에서 편안하게 지낼 것으로 믿지만, 남편 되시는 분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외국에 나가 있다던 장가 못 들여 애를 태우던 둘째아들은 어찌되었으며, 이런 저런 안부가 궁금한데 어디에도 물어볼 데가 없어 막막하다.
생각하면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다.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던 사람도 본인이 가고 나니 모든 것이 단절되고 만다는 것이 씁쓸하기만 하다. 마치 강물에 돌 하나 던지면 잠시 파문이 일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표도 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세월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흘러갔다. 이렇게 한 사람씩 손을 놓다보면 우리 생애도 끝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겁고 답답한 마음에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이 그 형님 기일이 아니냐고 했더니 화들짝 놀란다. 하긴 이 바쁜 세상에 가족이 아니면 누가 기일을 기억하겠는가. K와 나는 그 형님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았지만 정말 할 말이 없어 한참씩 침묵이 이어지곤 하다가 한숨으로 전화를 끊었으니 마음은 더 무겁다.
형님은 치마만 둘렀지 남자였다. 그만치 대범하고 씩씩했으며 억척스러웠다. 여자 교감이 귀하던 시절에 교감까지 지내는가 하면 여교사 회장으로 도내 여교사를 통솔하기도 했고 동창회며 각종 모임에서 늘 선두에 서 있었다. 오토바이를 몰고 쌩쌩 달리지를 않나, 자동차 운전도 일찍부터 하고 다니던 맹렬여성이었다. 멀찍이 그를 바라볼 때는 같은 여자로서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하고 혀를 찼었다. 그가 여군 출신이라는 소문을 듣고 나서야 그러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15, 6년 전 그 형님과 나는 무슨 인연이 닿았던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내 기질과는 딴판인 그가 부담스럽기까지 했는데 그는 특이 한 방법으로 다가왔다. 출근하는 그의 오토바이에는 늘 짐이 실려 있었다. 학교급식이 없던 시절이니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거나 매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찌개며 국이며 반찬을 해 가지고 와서는 점심시간마다 불러 모으는 것이다. 신세지는 것이 싫고, 대 선배인데 거꾸로 된 처사이니 편편치 않았다. 그러나 먹는데서 정 난다는 말이 꼭 맞았고 우리는 어느 새 동화되고 말았다.
남의 궂은 일에는 발 벗고 앞장서던 그 형님, 학교 친목회장을 도맡아 하며 L선생의 남편이 비명에 갔을 때도 우리를 진두지휘하여 일을 치러 내는 통 큰 여자였기에 많이 의지하고 살았었는데 이제 옆구리가 허전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여러 남매의 맏이로 자랐다. 어머니가 행상을 나가야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으니 어린 동생을 데리고 학교엘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단다. 동생을 동반하고 수업을 받던 때 그것을 묵인해준 담임 선생님이 한없이 고맙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었다. 결혼하고도 평탄치 않던 생활은 정말 산전수전 다 겪은 인고의 세월이었다. 그래서 이리 부딪고 저리 깎이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억순이가 되었던 것이다.
퇴직하고도 일거리를 찾아 쉬지도 못하다가 겨우 시골에 정착했는데 백수는 할 것 같던 그 기백도 암이라는 절벽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고단한 생애가 암을 불렀을 것이라고들 수군거렸다.
이제 나는 갚을 길 없는 사랑 빚 때문에 마음이 아리다. 담뿍장 맛도 전같지 않다. 역겨운 듯한 냄새가 나면서도 구수하고 특이한 맛의 담북장을 참 좋아했었는데 이제는 담북장을 대하면 그 형님이 떠올라 전에 먹던 그 맛이 아니다. 인생의 단맛, 쓴맛, 떫은맛이 다 섞인 듯 느껴지는 오묘한 맛이다.
가끔씩 그 형님과의 추억을 더듬는 일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산다는 게 다 그런 거라고 하지만 모래성을 쌓았다 허문 것처럼 허무하기만 하다.
아버지와 호두나무 / 박영자
아버지의 고향집에 커다란 호두나무가 있었다. 고개를 한껏 젖혀야만 나무의 끝이 보일 정도로 크고 우람하며 잘 생긴 나무였다.
지금은 몰락했다고 할까, 보잘 것 없이 폐허가 된 집이 안타깝지만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할아버지 댁은 그 동네에서 부잣집 소리를 듣는 좋은 집이었고 운치가 있었다. 산밑에 ㄷ자로 앉은 안채에는 대청마루가 넓었는데 아름드리 기둥이며 나뭇결이 반들반들 윤이 났다. 그 대청마루 한구석에는 박달나무 다듬잇돌이 놓여 있었고 단아한 차림의 큰어머니가 장단 맞춰 다듬이질을 하는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안마당을 건너가면 사랑채가 있었고 할아버지가 긴 장죽을 물고 내다보시던 모습이며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쓴 어른들이 늘 사랑채에 드나들던 모습이 어렴풋하다. 바깥마당은 무척 넓었고 흙도배를 한 부뚜막처럼 깨끗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마음을 끈 것은 옹달샘과 연못과 호두나무였다. 안채를 돌아 건넌방 뒤쪽으로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옹달샘에 맑은 하늘이 담겼고 그 물이 흘러드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연못은 늘 고요했으며 때때로 흰 구름이 흘러가는가 하면 잠자리가 꽁지깃을 적시고 가거나 제비가 물을 차고 날기도 했다. 그 연못가에 호두나무가 있었는데 아침이면 까치소리가 낭랑하고 아름다운 새들이 깃들어 지저귀는가 하면 여름이면 매미들이 자지러지게 울어대기도 했다.
추석 때 명절을 쇠러 가면 그 호두나무에 셀 수도 없이 많은 호두가 조발조발 열려 마음이 풍요로웠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나가보면 연못 위로 물안개가 자욱한데 물위에 아람이 벌어 쏙 빠진 호두 몇 개가 동동 떠 있었다. 호두나무 옆에는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 자루가 긴 뜰채가 세워져 있었고 누구든지 일찍 일어난 사람이 그 뜰채로 호두를 건졌으니 사촌들과 어울려 호두를 건져 올리는 일은 낚시질만큼이나 재미있던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부자이기도 했지만 집안에 연못까지 파놓고 즐길 만치 풍류가 있었던 분이었던 듯싶다. 한 때는 도둑이 들까 봐 돈뭉치를 참새가 깃들이는 초가집 처마 밑에 여기저기 숨겨둘 정도로 풍족했다지만 재물은 3대를 가지 못한다고 했던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큰아버지는 재산을 축냈고 아버지는 홧김에 객지로 떠났으니 집안은 기울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할아버지가 임종하시자 족제비 몇 마리가 돌담에 올라서서 슬피 울었고 그게 집안의 업이었던 모양이라고 했다.
연못가에 서있던 그 큰 호두나무는 아버지가 초등학교 3학년 되던 해 식목일에 학교에서 내준 작은 묘목을 받아다 심은 것이란다. 아버지가 10살 때라고 하니 70년 전의 이야기이며 그 나무의 수령도 70년이 넘었다.
호두나무는 참 오랫동안 우리 집안 식구들에게 고소하고 영양가 있는 호도를 제공했다. 큰아버지는 해마다 호도를 수확하여 형제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셨고 그 때마다 “이 나무는 네 아버지가 심은 나무”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큰아버지가 손질해 놓으신 뽀얗고 대글대글한 호두를 한 자루 가지고 오는 날은 부자가 된 듯 흐뭇했고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는 기쁨 또한 컸었다.
큰아버지는 작고 예쁜 호두를 골라 짝을 맞춰 놓으셨다가 내어주시며 빙그레 웃는 것으로 나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곤 하셨다. 그 호두는 내 작은 손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고 앙증맞아서 뽀드득뽀드득 비벼대면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지난 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직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고향집을 지키는 사촌 오빠에게서 호두나무에 대한 소식이 왔다. 어느 날 새벽 잠자리에서 벼락 치는 소리에 놀라 뛰어나가 보니 호두나무가 쓰러졌더라는 것이다. 요 몇 해 호두가 잘 열리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단다. 80을 목전에 두고 병석에 누워 계신 아버지의 건강과 호두나무의 노화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버지가 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호두나무 역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겉은 멀쩡했는데 나무 밑둥치가 반은 다 썩었더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앓고 계실 때 호두나무도 병중에 있었을 터인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 안타깝지만 어쩌랴.
아버지의 일생과 호두나무의 일생이 그러하듯이 나무의 일생은 사람의 일생과 많이 닮아 있다. 아버지가 고향을 떠나 자수성가해서 우리 육남매를 두고 일가를 이루어 살 동안 호두나무 역시 아버지의 고단한 삶처럼 고향집을 지키며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내지 않았던가.
호두나무가 한 생을 마감하기까지 늘 호두를 받아먹을 줄만 알았지 그 나무가 얼마나 힘들고 고단했으며 얼마나 아팠는지는 한 번도 헤아리지 못했다. 고향집에 가면 그윽한 시선으로 호두나무를 올려다보시던 아버지는 그 나무의 마음을 헤아려 보셨을지 모르지만…….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봄을 맞으면 서둘러 새잎을 돋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으며 가을이 깊어 열매를 다 털어주고 미련 없이 잎까지 벗어버리고는 얼마나 허망한 웃음을 날렸을까. 아니면 만족하게 너털웃음이라도 웃었을까. 이내 묵도하는 자세로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듬으며 무엇을 소망했을까. 그 고독하고 힘겨웠을 세월을 한 번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한 미련함이 부끄럽다.
아버지가 객지에 나가 살면서도 집안의 대소사를 주관하시는 바람막이였듯이 호두나무는 고향집의 크나 큰 바람막이였다.
호두나무는 이제 순리를 따라 무거운 세상 짐을 벗고 떠나신 아버지처럼 땅으로 돌아갔다. 호두나무가 사라진 큰집 연못은 얼마나 허허로울까. 아버지가 안 계신 친정 집처럼 썰렁하게 찬바람이 불지 않을까.
[작가 프로필]
충주사범대학교 졸업,
초등학교 교사로 38년 교직에 종사.
1984년 제1회 전국사도실천기 당선. 1990년 <한국수필> 천료.
저서: 수필집 은단발의 봄(2000), 햇살 고운 날(2006).
수상: 충북수필문학상(1999), 청주문학상(2003), 제1회 충북여성문학상(2006)
[작품 심사평]
박영자의 수필과 정(情)의 미학 / 김우종
한국수필은 ‘정의 미학’이다. 한국수필의 가장 두드러진 성격이 이것이다. 수필이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이나 희망사항을 떠나서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누가 뭐라든 한국 수필은 정의 미학으로서 씨가 벌어지고 떡잎이 굳은 땅을 비집고 나오고 많은 가지에 잎이 무성해서 사람들이 편히 쉬고 가는 정자나무가 된 것이다. 아마도 그 잎과 가지가 차지하는 부피와 이 나무가 차지하는 영토의 면적으로 보면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될 것이다. 다만 편히 쉴 자리는 되지만 가끔 무료한 것이 흠이다.
박영자 수필집 햇살 고운 날의 첫 쪽에 쓴 서문을 보면 자신이 이런 수필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몸에 맞추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치수와 재질과 색깔과 모양에서 모두 제 몸에 꼭 맞는 옷을 입는 것은 매우 보기 좋은 일이다.
아주 오래 된 시절, 풋내 나던 그 시절, 어느 선비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생각 끝에 나는 정(情)이라고 했다. 그 선배는 아름다울 미(美)자를 쓰고는 아름다운 것은 영원하다고 했다. 그것이 화두가 되어 늘 가슴에 머물렀다. 둘 중 어느 것도 버릴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서야 그 두 가지를 합친 것이 사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내가 쓰는 수필은 정(情)과 미(美)와 사랑(愛)에 바탕을 둔 수필을 쓰고자 했다.
작자는 이 말로써 자신의 수필이 바로 ‘정의 미학’임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정이란 무엇인가?
여러 작품 중에서 「담북장」은 정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적절한 모범답안이 된다. 첫머리에선 담북장이 소개된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보게 되면서도 오래도록 보관해 두고 있는 담북장. 특별한 기념품도 아닌데 왜 그것을 그처럼 오래도록 보관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첫 단락이다. 다음 이야기는 암으로 죽은 한 여자의 일생이다. 같은 학교 동료 교사였고, 교감도 지냈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씩씩한 여군 출신인데 암으로 덜컥 죽어버렸다는 경력. 다만 죽기 전에 친구들 집마다 찾아 가서 담북장을 배달해 줬다는 것이 특기할만한 사항인데 죽은 것은 안 된 일이지만 이 이야기는 별로 흥미를 끌만한 여자의 일생은 아니다. 이 여인이 수필가라면 인물 약력 소개란에는 별로 쓸 만한 것이 없는 여인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작자가 “한 폭의 동양란 같은 수필을 쓰고 싶다”고 말한 동양란의 은밀한 향기가 있다. 여기서 은밀한 향기라고 말하는 것은 어디선지 모르게 은근히 풍겨오는 향일 뿐만 아니라 상대를 유혹하려는 저의를 지니고 풍겨 주는 여인의 향기 같다는 뜻이다.
이 수필에서 작자가 보여 주는 정이라는 것이 그렇다. 암으로 죽기 전에 담북장을 돌린 여군 출신의 행위의 동기는 정이다.
이 여인이 입원 중이나 퇴원 후 집에 있을 때 찾아 준 친구들에게 담북장을 한 봉다리씩 배달하고 나서 얼마 후 죽은 것은 병문안에 대한 주고 받기 식 답례라기보다는 그렇게 정을 준 사람들을 두고 차마 그냥은 저승길로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아서 했던 행위로 읽혀진다. 이것이 먼저 받은 것에 대한 채무이행으로만 이해되면 세상은 살맛 안 나지만 그렇게 죽음을 앞둔 사람이 백리 길 되는 먼 곳까지 찾아 가서 담북장을 돌린 이유가 이별을 앞둔 정 때문이라고 읽혀진다면 세상은 정말 살 맛 나는 아름다운 풍경화로 다시 채색된다.
작가가 수채화 물감 같은 것으로 정성껏 그리고 싶었던 것이 이런 정의 미학이다. 그리고 작자가 그걸 냉장고에 보물처럼 처박아 두고 차마 먹어치우지 못한 이유 역시 그런 정의 아름다움을 전해 준다. 먹어버려도 그만이고 자칫하면 김치냄새와 함께 별난 냄새까지 풍길 터인데 그걸 그렇게 간직하는 별난 행위의 이면에는 정의 의미를 모르는 다수 인간들에게는 신선한 의미가 될 수도 있다.
한국 수필은 신변잡기의 대명사라는 오명을 자주 뒤집어쓴다. 문학은 아주 작은 신변적 소재를 통해서도 온 세계를 바라보고 우주를 바라 볼 수 있으므로 만일 소재만으로 그런 평가가 나온다면 그것은 필자와 수필에 대한 명예훼손이다.
그런데 수필이 정의 미학이라면 그것은 신변적인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정은 실제적 경험적 삶에 오랜 시간 곰팡이 균이 살아 있어서 숙성하는 밀주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누라와 남편의 정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일상적인 삶에서 부부간처럼 신변적인 것이 없다. 밤에는 맨살로 신변이 완전 밀착되니까 가장 신변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변적인 것은 아기자기하고 짜릿하고 새콤달콤한 것만은 아니다. 신변적인 것은 탈도 많다. “청천 하늘에 별도나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엔 탈도 많다”는 아리랑처럼 일제 시대가 아니라도 우리네 살림살이는 항상 탈도 많고 말도 많은 법이다. 특히 부부들은 싸움도 잘한다. 그리고 나이 들면 부부생활도 시시해진다. 몰래 저지르고 들어오는 짓거리만큼 흥분도가 따르지 못한다. 그런데도 부부는 어느새 헤어지기 어려운 끈으로 단단히 묶이게 된다. 그것이 정이다. 오르가즘의 추억만이 아니라 싸우고 할퀴고 기물 부순 전쟁의 추억까지 모두 꼬와서 단단히 엮은 끈이 정이다. 그래서 나이 들면 누구나 정으로 산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부부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정이 붙는다. 박영자의 수필은 특히 이런 신변적 소재로서 정이 붙어버린 이야기가 많다. 정말 죽고 못 사는 애완견의 「정 때문에」만이 아니라 이 수필집에 실린 대부분이 정을 전하는 신변적 소재들이 많다. 그리고 그 소재들은 모두 오랜 시간 숙성한 소재들이다. 「아랫목」, 「아버지와 호두나무」, 「꽈리」등 모두 추억 속에서 오래 숙성한 과거의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정이란 함께 살아야 생기는 것이므로 정의 미학을 쫓는 문학은 신변적일 수 밖에 없고, 신변적인 것은 매우 위험한 함정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오래 되고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타성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신선도가 떨어진 생선처럼 값이 떨어지기 쉽다.
러시아 슈클로브스키(Shklovsky)의 ‘낯설게 하기’도 그래서 나온 언어미학 이론이다.
‘낯설게 하기’란 영문 번역본에서도 make strange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도 그냥 쓰고 있지만 정확한 문예이론으로 옮기자면 ‘참신하게 만들기’ 라야 될 것이다. 이런 슈클로브스키의 언어미학적 이론의 근거는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친숙해진 사물이나 관념은 새로운 느낌으로 바뀌지 않으면 무의미해진다”는 데 있다. 좀 과장된 비유를 쓰자면 매일 보는 마누라는 별다른 불편이 생기지 않는 이상 저녁에 자리에 누울 때까지 그녀의 행방에 관심이 없게 되며 낮에 그녀를 봤는지 못 봤는지 기억조차도 가물가물하다는 것. 그래서 마누라는 나이 들수록 맨날 미장원에 가고 얼굴 뜯어 고치고 옷 사 입어서 “이게 누구야, 몰라보겠는데”하는 ‘낯설게 하기’를 해야 남편이 기억해준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므로 신변적 소재일 수밖에 없는 ‘정의 문학’이 ‘정의 미학’으로서의 문학성을 성취해 나가려면 다른 어느 장르보다도 미학적 기법으로서의 고민이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영자의 수필은 많은 진지한 노력의 성과로서 잔잔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