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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의존교회150911a (벌집)―이 근호 목사
오늘은 디모데후서 1장 11절부터 봅시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성경 해석의 기본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성경에 나와 있는 이 내용은 이미 주어진 현실입니다. 이 현실에 대해서 인간 쪽에서 11절의 말씀처럼 이 일을 인간들이 하고 있어요. 하고 있는데 엉터리로 반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발췌해 내고 찾아내는 것이 성경 해석의 기본이 되고 있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여기 “내가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라고 되어 있죠. 그러면 우리는 이 복음을 보고 아,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새삼스럽게 해봐? 라고 나서는 경향이 있는데 나서기 전에 우리는 이미 때로는 반포자와 때로는 사도와 때로는 교사로 활동하고 있고 살아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선포하고 무엇을 전하고 무엇의 교사냐 하면 나 자신의 잘남을 반포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로, 사도로 이미 맹렬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상당히 난해한 이야기를 제가 끄집어냈죠.
성경이 이렇게 주어지게 되면 현재 우리가 만들어 진 현실이 있고 추가해서 플러스 이 말씀의 현실이 들러붙는다고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서 주어진 말씀은 네가 생각하는 현실 자체가 교체되어야 된다는 것을 언급하는 거예요.
교체된다 하는 것은 이미 기존에 가지고 있는 우리의 성질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마땅히 반발하죠. 구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주겠노라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결같이 오해했습니다. 그 약속의 땅이 텅텅 비어 있는 줄 생각한 거죠. 그저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왜? 하나님이 하도 자신만만해 하니까요. 하나님의 자신만만이지 자신의 자신 만만이 아니거든요.
아, 애굽에서 떠나서 땅이 없는데 모세를 통해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영원히 자자손손 대대로 살 수 있는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자손이 살 수 있는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약속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는 나라가 가나안 땅을 통해서 이루어 질것이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구경삼아 정탐꾼을 보냈거든요. 보내고 난 뒤에 그 사람은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두 사람 배놓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속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참 하나님을 믿은 우리가 바보라는 겁니다. 요즘 교회에서 옛날처럼 하나님한테 울고불고 우리가 하나님 믿은 게 바보라는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왜, 애초부터 믿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애초부터 하나님을 안 믿어요. 교회라는 권력, 우리 교회에 누가 어떤 권력자가 살고 사회지위가 어떻고 평균 수입이 얼마이며 그 교회에 등록함으로서 나에게 부가 되는 이익은 얼마냐? 저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저 사람과 사귀어 놓으면 내 미래가 어떻게 필 것인가! 그런 것을 계산해서 교회에 다리고 또는 그쪽이 내가 기대하는 나에 대한 위로와 관심과 사랑과 애정을 그 교회 교인들이 충분히 나에게 제공할 수 있느냐?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치 이상으로 나에게 더 많은 가치를 나에게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 있느냐 그것을 파악해서 교회를 등록하고 다니는 겁니다.
뭘 믿어요? 하나님을 믿어요? 보이지도 않는데?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데요. 거기 교인보고 믿을 만 해서 다니잖아요. 애초부터 믿은 적이 없기 때문에 나오는 것도 쉬워요. 몇 주 안 나가면 되는 겁니다. 뭐 울고불고 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교회의 목사들은 현대인의 교인들이 다 그렇기 때문에 발목을 잡아서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드는 수법을 씁니다. 이것을 잘 써야 목회가 잘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목돈을 내게 해서 목돈 낸 것이 아까워서 다른 데 못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목돈 내는 방법은 바로 집사에서 장로로 또는 일반 성도에서 서리 집사에서 권사로 승진 시켜 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돈을 거기에 목돈을 내잖아요. 그러면 돈이 아까워서 몇 년 다니다보면 같은 교인이라고 경조사비 많이 나갔잖아요. 그리고 자기 딸은 점점 크잖아요. 딸 시집 갈 때 경조사비 다 회수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못 나오는 거예요.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처음부터 둘 다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안 믿고 하나님을 따라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 감안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갔는가? 자기 선배들이 광야에서 뺑뺑이 돌다가 의심하다가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한 40년 동안 다 죽었다는 그 실패를 통해서 비로소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가는 추진력이 생긴 겁니다.
그 말은 우리 선배, 선조들, 우리 아버지 때를 하나님이 죽이셨다는 이 말은 그들만 죽였다는 말은 그 이후에 태어난 인간들은 일단은 광야에서 죽이지 않는다는 그러한 사실이 밝혀졌죠? 죽일 자와 죽이지 않을 자의 경계를 누가 사용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광야를 통해서 활용했잖아요. 다 죽이지 않다는 말이죠. 그럼 누가 살고 누가 죽느냐가 명백해 졌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약속의 땅에 간다는 사람은 어쨌거나 저쨋거나 안 죽이고 살려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기대를 한 겁니다.
그러면 40년에 다 죽은 후손들은 어떻게 되는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다 죽죠. 땅을 차지 해 놓고 그 땅에서 다 죽습니다. 약속의 땅을 세자로 이야기하면 뭐냐 하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입니다. 왜냐하면 주변에 독일 나치 군인들이 보초 서 있기 때문에 아람, 암몬, 모압, 에돈, 블레셋, 이런 사람들이 독일의 나치군인들이거든요. 나치 군인들의 보초를 누가 세웠습니까?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여기다 집어넣으신 그 하나님이 보초를 세웠잖아요. 물어! 물어! 하고
쎄퍼트 쫙 깔아놓은 거예요. 순한 양을 깔아 놓은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들 블레셋, 암몬 시대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으르렁 으르렁 엑소입니다.
항상 으르렁 거려요. 아직 때가 안됐어! 좀 기다려봐! 광야에서는 적이 없이 그냥 하나님이 직접 죽였는데 이 죽이는 방법이 발전했어요. 죽여도 그냥 죽이지 않고 주께서 뭔가 얻어내고 죽이십니다. 더 깊은 죄를 발취시키는 대가로 그들을 죽이십니다. 사사기 2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그들을 온전히 다 내어 쫓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살펴보기 위해입니다. 제가 하는 말은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은 약속 속에 없습니다. 인간이 성경을 보고 이해하는, 다시 말해서 여기 11절에 나오는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할 때 이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 없습니다.
왜 없느냐? 이미 자신이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지금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활동하느냐 디모데후서 1장 11절에 나오니까 자기가 반포자인양 자가 사도인양 자기가 교사인양 의시대면서 행세하고 싶은 욕망을 우리는 다툴 길이 없어요. 성경말씀으로 일체됨으로서 나도 신자라고 외치고 싶은 거예요.
기원후 408년에 로마가 둘로 나눠져요. 하나는 수도를 이스탄불로 옮기고 또한 쪽에 남아 있는 게 서로마인데 서로마에 호노리우스라는 황제가 있어요. 애가 나이가 11살이에요. 김정은 하고 나이가 비슷합니다. 황제이긴 황제인데 아무도 몰라요. 애에요. 어린애에요. 기껏 하는 일이 궁전에서 닭을 키우는 거예요. 닭 키우는 게 재미있어요. 그런데 그 서로마에 반달족이라는 이방민족이 쳐들어옵니다.
처 들어오는데 그것을 지켜 줄 사람은 스틸리코 장군입니다. 나이가 많은 노련한 장군인데 그 시대 로마에서 인간 같은 인간은 이 사람밖에 없어요. 이 장군은 백전노장이고 그동안 11살 먹은 황제를 키우다시피 키우면서 선대 황제가 죽고 난 뒤에 이 로마를 유지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적들은 가까이 왔는데 황제가 내린 결단은 뭐냐? 마음에 안 든다고 스틸로코 장군을 죽여 버립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썩은 손이 멀쩡한 손을 칼로 내친 거예요. 그래서 로마가 망해 버려요. 지금 우리 몸이 누구냐 하면 약속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만든 현실에 속한 몸이거든요. 그런데 그 약속을 누가 훼방하고 방해하는 줄 알아요? 바로 썩은 내가 나를 이 현실의 주인공인양 설치는 거예요. 꼭 11살 먹은 철없는 애에요. 내가 이 세상에 어떤 위대한 영웅이 되고자 빛내고 이 세상에 멋있게 내가 여기 있다 나를 알아 달라! 24시간하는 짓거리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있다! 나 여기 있어! 나를 무시하지 마! 라고 하는 짓이 바로 호노리우스가 스틸리코 장군을 칼로 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 이 몸을 마치 내게 속한 몸인 줄 알고 나를 영웅 만들기 위해서 나는 반포자요, 나는 사도요, 나는 교사라고 행색을 하고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합니까?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들이에요. 우리 자신이 정신병자들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머리 안에 뇌 들어 있죠. 그 뇌가 만들어 내는 현실 안에 머리가 들어 있어요. 어느 것이 범위가 크고 어느 것이 범위가 작아져 있습니까?
머리 안에 뇌가 들어있는데 뇌가 상상하는 뇌 안에는 그 안에 내 머리뿐만 아니라 내 몸 전체가 다 들어 있어요. 그러면 뇌 상상이 큽니까? 내 육체가 큽니까? 내 신체가 작지요? 인간은 이 모습을 감단하지를 못해요. 생각해 봅시다. 이 세상 안에서 신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었다. 언약을 주었다. 이렇게 하죠.
그러면 세상 안에 언약이 들어 왔죠. 이게 오해라니까요. 세상 안에 약속이 들어온 게 아니고 약속 안에 세상이 들어있는 거예요. 약속 안에, 그리스도 안에 세상이 들어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문제가 풀어지지 않으면 성경전체 해석이 다 호노리우스가 스틸리코 장군을 죽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실컷 설교하고 실컷 주님을 방해하고 그리고 나오는 결과는 이것은 나의 현실이다! 그것은 배후자가 있어요.
마귀가 그런 짓을 하거든요. 성경 봤지? 네, 성경 봤습니다. 성경에 뭐라 하더냐? 쉐마, 쉐마 합니다. 쉐마라는 뜻은 뭐냐 하면 들어라! 이스라엘아, 순종하라! 지키라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순종하고 지켰습니다. 이것은 스틸리코를 죽인, 예수그리스도를 죽인 의도, 태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죽었습니다. 잘 지키려고 죽인 겁니다. 예수님을 잘 지키려고 죽인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누가 다 죽였느냐 하면 사알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여호와께 영광 돌린다고 예수 믿는 사람을 색출해서 다 죽였어요. 심지어 다메섹에 예수 믿는 사람 있다는 소문 듣고 열심히 특심입니다. KTX도 특실이 있거든요. 열심도 특심이라 다메섹에 내려가서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인다고 가는 거예요. 분명히 스틸리코 장군을 죽였는데 스틸리코 장군을 죽이려고 가다가 사울에게 나타나 하는 말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분명히 예수님은 죽였어요. 죽였으니까 제자들 도망가고 잠잠하죠. 조용하죠. 궁중들 그렇게 따라 다니다가 사람 죽고 난 뒤에는 조용하잖아요.
난 김대중 대통령이 언제 죽었는지 몰라요. 벌써 죽은 지 몇 년 지났는데 다 잊었어요. 광주 사람은 좀 오래 기억할 거고 나머지 사람은 다 잊어버렸어요. 여러분, 유명한 사람이 죽은 사람 기억합니까? 어떤 때는 헷갈려요.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분이 안돼요.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서요. 여하튼 세상은 평화로워요. 고요해요. 평화로우니까 그들은 일이 잘 풀렸다고 보는 거예요. 정상이라고 보는 거예요. 지금 제대로 현실이 하나님에 의해서 잘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침투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것이라 했으니까 항상 낯설게 예측불허로 하나의 사건으로 그냥 침투를 했죠. 침투를 하니까 디모데후서 1장 9절의 고백이 튀어나옵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주님이 나타나기 전에 왜 진작 이런 고백을 못하냐 이 말이죠. 다메섹에 나타나기 전에 왜 이런 고백을 못하느냐 이 말이죠. 왜 고백을 못하느냐 하면 반포자요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이라는 이것은 하고 싶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내가 그동안 하나님이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에 대해서 내가 훼방질한 그것을 반대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겸하여 노출되는 사건과 더불어서 비로소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반포자는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사도도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교사도 내가 아니죠. 그러면 나는 뭐냐, 주님의 교사임을 반대하는 교사이고 주님의 반포하심을 반대하는 거짓 반포자요 거짓사도로서 행세해 왔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이게 성경해석의 기본입니다.
성경해석의 빛이라 하는 것은 마치 어둠을 동반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동반된 어두움을 해석을 해 줘야 됩니다. 그것을 놓쳐버리면 안됩니다. 만약에 예를 들면 저도 가끔 중국집에 가는데 갈 때 마다 갈등을 일으켜요. 짬뽕 먹을까? 자장면 먹을까? 보통 시골의 손님 같으면 짬뽕 먹을래? 자장면 먹을래? 하면 오늘은 짬뽕 먹을래! 오늘은 자장면을 선택했어! 이렇게 되는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앉아서 짬뽕 먹을까? 짜장 먹을까? 하면서 아이 모르겠다! 자장면! 하면 주인이 뒤통수를 때려요. 그 애가 누구냐 하면 그 주인집 아들이라 “너는 손님 아니거든! 너 공부하라 했는데 집에 밥솥에 밥 있는데 여기 와서 고민하고 있냐?” 손님도 아닌데 손님행세를 하냐! 이 말이죠.
우리는 현실을 선택할 권한이 없어요. 우리는 내 인생을 내가 고를 그럴 권한과 자격도 없어요. 아, 예수 믿을까? 부처 믿을까? 되지도 않을 선택을 왜 해요? 교회 갈까? 말까? 되지도 않을 선택을 왜 합니까? 그래! 결심했어! 자기가 이휘재도 아니고 그래 이제부터는 교회 출석할 거야! 출석한 시점부터 자기가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이제는 교회 안 나오면서 훼방하다가 교회 나와서 본격적으로 훼방질하고 있어요. 주님의 현실은 외부에 있기 때문에 약속은 우리 외부에 있어요. 우리 외부에 있는 약속이 우리 내부에 약속된 내용을 차곡차곡 담고 쌓아요. 우리는 일종에 캐리어 가방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우리는 빈 가방이고 가방에다가 차곡차곡 주께서는 그 약속을 채우십니다. 그 채워진 약속이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라는 것은 달랑 애들이 하는 목걸이죠. 그런데 십자가 사건은 뭡니까? 바로 예수님과 악마의 싸움이잖아요. 싸움 하는 그 내용이 우리 속에 차곡차곡 담겨요. 완전히 우리는 졸지에 전쟁터가 돼요. 우리 속이 니글니글 거려요. 뭔가 잘 못 먹은 것 같아요. 버터에다가 마요네즈에다가 뭔가 니글니글해요. 자꾸 우리 속에서 싸워요. 우리는 장소만 제공했을 뿐입니다. 주의 약속에 대해서 현실 속에 약속이 있다는 그 세력과 아니야 현실밖에 약속이 따로 있다는 그 세대가 싸웁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다는 세력과 아니야 말씀이 있어서 이 세상은 말씀대로 만들어 져야 했었어! 라고 하는 겁니다.
두 번째 것 해 봅시다. 약속이 먼저 있어서 이것을 1장 8절에서는 창세전에 약속이 있었고 그 다음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현실이라는 것, 창조세계인데 이 현실이 있죠. 그럼 현실 속에 누가 있죠? 우리 자신이 있는 겁니다. 우리자신이 있으면서 우리는 자신이 현실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이해가 진짜 현실을 훼방하고 방해하고 왜곡시키고 엉터리로 만드는 그런 원인제공자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거죠.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누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이미 죽었죠. 예수라는 사람은 이미 죽었잖아요. 그 잔당들이 남아 있죠. 그 잔당들이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뭐라 소문을 내느냐 하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날리는 거예요. 그러면 사울은 하나님께 열심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이미 15년 전에 죽었고 그러면 산 사람은 누구에요? 본인은 살아 있잖아요. 그리고 그 살아있는 본인이 일을 할 때 누구의 지시대로 일을 한다는 겁니까? 자기가 믿는 여호와하나님 대로 일을 하죠. 그 사울이 믿던 하나님은 뭡니까?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뭘 줬다?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과 율법과 말씀을 준 하나님을 믿죠. 이게 뭐냐, 사울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던 현실감이죠. 이게 왠지 낯설지 않죠? 꼭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실하고 꼭 닮았고 같아 보일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말씀 주셨고 우리는 지키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예수라는 작자가 나타나서 그때 훌륭하시고 고매하시고 인격이 높으신 분들이 자세히 살펴보사 아하 이런 인간은 이단이라는 것을 이미 이단이라는 찌꺼기라는 것을 끄집어내고 그게 과연 이단인지 아닌지를 하나님께 맡겼는데 마침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 주셨는데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딱 앞뒤가 알리바이가 딱 성립이 돼요.
하나님께 대드는 자는 나무에 달려 저주가 받는다는 말이 어떻게 그렇게 잘 맞는지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나무에 달려 죽었으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했고 그 예수라는 작자가 죽었으니까 예수는 이제 와서 확실해 졌다 뭐가? 이단인 것이, 가짜 메시야라는 것이 확실해 졌다! 그런데 부활했다는 소리가 들리니까 가짜의 연장선으로 봐서 색출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다! 라고 생각한 것이 사울이라는 사람이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런데 디모데후서 1장 8절에서 뭐라 합니까? 이것마저 하나님이 예정된 약속이었다는 거예요. 바로 이 방식을 그대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는 사실이에요. 왜? 동일한 성령이니까요. 여기 오늘 본문에 성령이라는 게 나옵니다. 여기 14절에 보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말씀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시간이 모자라요. 왜냐하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에베소서나 빌립보서 골로새서 나오는 성령과 관련돼서 나오는 변화들 성령 없는 사람들이 성령 받고 난 뒤에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하는 그 변화들이 나와요.
그 변화들을 전부 다 끄집어내서 우리가 과연 신자 맞는지, 우리가 천국 가는 백성들이 맞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시간을 요하겠죠. 그런데 지금 디모데후서를 하기 때문에 전부 다 거론할 수가 없어요. 제가 조금 있다가 관련해서 로마서만 거론하겠어요. 하여튼 간에 성령 안에서 이렇게 언급하는 것을 봐서 우리의 부르심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거룩한 부르심인데 이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지 않고 우리가 예측하거나 기대하거나 소망하거나 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은근히 노렸던 것이 아니고 영원한 때부터 예수 안에서 정해 진 것이다. 은혜로 정해 진 것이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렇다면 자기가 이런 짓거리를 한 것이 뭐다? 하나님이 정해 진 거예요.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뭐라 했습니까? 내가 사람에게 죄짓지 않고 누구에게만 죄를 지었다? 하나님에게만 죄를 지었다고 하잖아요. 그런 뻔뻔스럽고 건방진 게 어디 있습니까? 사람을 죽여 놓고, 너는 이실직고 하렸다! 너는 우리한테 죄지은 것 없어, 너하고 나는 단짝이야 너는 죽고 나는 살고 네가 죽음으로서 나는 비로소 토대를 알았고 난 뿌리를 알았다, 고맙다! 우리 아야! 주께서 꺾어진 뼈로 인하여 내가 살았네! 아이고 우리아야 아무 소리하지 않고 내 명령대로 잘 죽어줘서 고맙습니다. 이게 다윗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살았음을 내가 이제 알았노라! 그럼 죽은 인간은? 죽은 인간은 낙이 없네! 죽여 버리니까, 드라마 같으면 나중에 출연료나 받지요. 이것은 마치 연극 무대 같아요. 지금 까지 한 것을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마음대로 사세요! 그리고 그것이 돌이켜서 다 하나님의 예정한 우리의 죄의 역할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네 마음대로 하세요! 라고 할 때 우리 마음대로가 개떡같이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게 뭐냐?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반포자요 사도요 교사의 노릇을 톡톡히 하는 그런 네 마음대로 하세요! 실컷 하셔서 방해 많이 하세요. 비비꼬는 겁니다. 실컷 하셔서 마음대로 하나님 영광 많이 돌리세요! 그것이 바로 우리를 죄인 되게 한 그 사람 나름대로 주님의 방식을 적용시킨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무시입니다. 개소주 아닙니다. 그냥 개무시! 개소주하고 좀 달라요. 인간 개무시, 이게 안 되면 해석 다 엉터리입니다. 인간 개무시 안하면 설교자는 강단에 서지 말아야 됩니다. 제가 수요일에 그렇게 했죠. 제발 네가 좀 빠져 나와라! 빼라! 말이죠. 어른들 노는데 애가 왜 와요. 닭이나 키우던 11살 먹은 애가 어른들이 전쟁에 왜 끼어들어가지고 나라를 유일하게 지킬 수 있는 스틸리코 장군을 죽여 버렸잖아요. 완전히 메시야 아닙니까? 예수님 같아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 이야기를 오늘날 불신자가 들으면 뭐라 하겠습니까? 네가 하나님이면 핍박하면 네가 수비하고 방어하지 왜 방치하느냐? 네 잘못이다! 이렇게 나올 것이다 말이죠. 우리가 핍박을 하더라도 네가 알아서 딱딱 막아야지!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일 때 예수 당신은 멍청히 쳐다보고 뭐했나? 자기 백성이 죽는데? 그러면 주님이 뭐라 합니까? 네 죄를 알게 하기 위해서 죽였다! 사울에게 잡혀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거든요. 그것은 너의 죄를 알게 하기 위해 죽은 거예요.
죽고 난 뒤에 사울에게 죽은 자가 벌떡 일어나 출연료 받고 있어요. 완전히 엑스트라에요. 개런티 받고 있어요. 죽을 때 처참하게 죽고, 죽고 난 뒤에 낙원에 가서 분장 지우는 거예요. “아이 오늘 너무 힘들었어! 나 죽는데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이렇게 사극 같으면 화살 빼내고 캐찹 뿌린 피 닦고 7만원 받고 집에 가는 거예요. 본향에 가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엑스트라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하세요. 엑스트라!
연세 많으면 연세 많은 분의 엑스트라 있고 젊은 사람들은 젊은 엑스트라 있고 사울은 사울대로 엑스트라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 같은 공통점이 있어요. 나를 위한 나만의 현실을 우리는 죽을 때 까지 포기 못한다. 나를 위한 나만의 현실, 그 현실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 모든 것을 나의 거래 상대자로 나만을 위한 현실에 배치해 놓고 믿습니다. 하고 엉터리로 살아오고 있었던 겁니다.
마치 사울이 여호와 하나님을 대상자로 삼고 주를 위해서 제가 아낌없이 헌신하겠습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몰랐어요. 그게 쉐마인줄 알고 그게 순종인줄 알고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래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아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해! 하되 네 구원 문제는 네 현실 밖에 있는 창세전에 약속대로 구원이 주어져서 사울을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운 겁니다.
따라서 사울은 처음부터 중립적이었어요. 아, 이제는 뭐하지? 아 교사 해야겠다! 자기가 골라잡은 게 아니에요. 그냥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막 살았어요. 제가 막 살았다 하지만 사울 입장에서는 막 산 게 없어요. 조심스럽게 신중에 신중을 했고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넜어요. 그러나 나중에 보니까 그게 막국수 같은 종류, 메밀처럼 막 산거예요. 그게 막 사는 거예요. 이제 풀렸죠? 막사는 것의 비밀을요?
차이점이 뭐냐? 내가 만든 현실 속에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몰랐고 내가 만든 현실 속에서 나는 참된 의인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9절에 보면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라고 이야기 했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뭐를 결재 올리라고 하겠습니까? 네 행위가 뭐냐고 오늘 퇴근 시간까지 빨리 서류해서 올리라고 하는 겁니다. 네가 행한 것이 뭐냐고 올리라는 거예요.
그러면 사울은 적기 쉽죠. 나는 여호와를 위해서 충성을 다해서 예수 믿는 사람 다 죽였습니다. 이렇게 나오겠죠. 그것은 사울의 결재이고 또 우리의 결재 올릴 것이 있다 이 말이죠. 예수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그런 것을 올리는 거예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구원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구원 받고 난 뒤에도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받고 난 뒤에 구원 받는 그것이 우리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자기 일이거든요. 우리고 얼마나 11살 먹은 철딱서니 없는 애인지 자꾸 주님의 구원을 내 구원이라고 내 소유화 시키고 빌붙으려고 자꾸 애를 쓰는 거예요. 왜 그렇게 주님의 구원이 내 구원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주님의 몸에 같이 묶여서 구원을 받는데 왜 독자적으로 내 구원을 따로 챙기느냐 말이죠. 마귀가 그렇게 배후에서 조종하고 시킨 거예요.
여기서 주어진 문제가 뭐냐 하면 지금 우리는 스스로 고칠 수가 없어요. 내 머리 안에 두뇌가 들었는데 내 머리 안에 두뇌가 들었다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하느냐? 내 안에 있는 두뇌가 상상을 하니까 내 머리 안에 두뇌가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 이렇게 되는 거죠. 두뇌가 내 몸 밖에 있는 것처럼 머리 안에 두뇌가 그렇게 생각들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약속 안에 우리가 있죠? 그 약속 안에 우리가 있는데 우리는 뭐라고 오해를 합니까? 그 약속마저 내가 꾸며낸 현실 안에 약속이 활동하는 것이 내가 느껴진다고 조작하고 날조하고 꾸미는 거예요.
코미디로 그런 코미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십자가에서 부활했잖아요. 부활했을 때 도마가 하는 말이 저는 보고서 믿겠습니다. 주께서는 자, 봐라! 하고 창 자국 못자 국을 보여 줬거든요. 이 코미디에서 내가 보고서 믿겠습니다. 라고 할 그 순간에 도마는 자기 세계 바운더리 테두리를 포기 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난 평소부터 보고서 믿는 것이 내 신조니까 내 신조를 건드리지 마세요!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뭐냐, 관섭하는 것을 제일 싫어해요. 애들이 왜 자꾸 어른 되고 싶은 줄 알아요? 관섭 없는 나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빨리 갖고 싶어서 어서 어서 키가 커라! 수염이 나고 빨리 어른이 돼라! 나는 숙녀가 되고 숙녀로 탈바꿈해야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른이 되기 전에는 엄마만 관섭했는데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까 이제는 사회에 나가니까 관섭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에요. 이제는 굴욕적으로 관섭을 받기 시작합니다. 역겨울 정도도 관섭 받습니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알아요. 내가 이 세상에 조직의 부속품이지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나는 피라미드의 그냥 밭에 있는 하나의 벽돌, 하나의 저 밑바닥에 소리도 없고 나가면 나가라는 소리 하는 사람도 없이 그냥 미미한 존재라는 겁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겁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그동안 얼마나 자기만의 현실이라고 그것을 만들고 쥐고 있었습니까? 이것을 우리가 알아도 집에 가면 또 자기만의 현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깨질까 싶어서 지금도 부들부들 떨고 있어요. 그런데 그 모든 공포와 두려움이 한 순간에 딱 달아나 버려요.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약속의 현실이 나의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 그것만 딱 알고 있으면 내가 이렇게 부들부들 떠는 것조차 내가 보기에 비참하지만 그것마저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게 의로운 행위라고 한다면 나는 그 의로운 행위를 수용하기만 하면 되잖아요. 내가 나를 평가하면 안돼요. 그냥 평가받으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도요, 반포자요, 교사요, 그것을 합쳐서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디모데후서를 잠시 멈추고요 로마서 10장을 한번 봅시다.
로마서 10장 15절에 보면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그러니까 택배나 우편배달부가 왔을 때 우편배달부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 자기 겁니까? 아니죠. 주인이 따로 있죠. 그리고 전달할 그 소포를 자기한테 전달합니까? 그러면 우체국 직원들 부자 됩니다. 아하, 이 물건 봐! 다 나한테 왔네! 그것은 뭔가 잘못된 거죠. 직원은 전달만 할 뿐이죠. 그렇다면 이 우편배달부가 있는 우체국의 현실은 자기가 우체국을 세운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이미 세워진 조직 내에서 자기는 그냥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죠. 이미 세워진 그 조직, 그 현실, 그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이게 관권이에요. 이미 세워진 조직을 안다면 내가 혼자 자기만의 현실과 자기만의 실제 세계 때문에 혼자서 고민하고 걱정한다는 것은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거죠. 왜냐하면 이 나의 세계가 아니잖아요. 예를 들면 우편배달부가 편지를 전달하면서 배달하고 가야하는데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혼자 계단에서 우는 거예요. 편지를 대충 햇빛에 비추어보니까 우리 그만 만나자! 이런 게 있었다 말이죠. 그만 만나자 있으면 그것은 울던지 말든지 편지를 받을 사람이 결정할 문제이지 자기가 울고불고 할 그렇게 할 필요가 없잖아요. 불쌍한 편지 받을 사람이라고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내가 내 자신이 나의 세계가 없는데 왜 우리는 근심과 고민을 하는 겁니까? 이것은 십자가 에 대한 모독이에요. 주께서 십자가 지신 이유가 뭡니까? 도마에게 창 자국 못 자국을 만지라고 하니까 도마가 이제 알았네! 라고 이야기 했습니까? 나의 세계는 애초부터 없었더랬군요! 나의 세계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주님을 테스트한 것은 당신을 테스트한 것은 나의 세계가 이미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나의 세계에서 납득이 되는 사람인가를 확인 작업, 나의 세계를 곤고히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 안에 있는 내가 더욱더 유리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데 창 자국 못 자국 보고 난 뒤에 졸지에 자기는 그런 만지는 짓 자체가 뭐냐, 그동안 내가 나도 몰랐던 내 죄를 내가 나도 몰랐던 내 상한 심령을 그대로 반복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까발려진 것이 되죠. 들켜 버린 겁니다.
그래서 들키면 되는 겁니다. 뭘? 나의 현실, 나의 세계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은 내 두뇌가 만든 망상이에요. 그런데 그 망상은 이제 주님에 의해서 네가 현실이냐 내가 현실이냐 그 약속이 현실이냐, 네가 만든 현실이냐 그 전쟁터로 바뀌면서 우리는 제대로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나 당해도 쌉니다. 그것을 증거하는 겁니다.
나요? 나 예수 믿는다고 사람들을 많이 죽인 그 사도가 나입니다. 나는 포행자요, 나는 살인자요, 그런데 창세전부터 주의 약속에 의해서 그것마저 주께서 용서하시고 이미 구원되었기에 그런 사태를 저를 통해서 유발시켰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주님의 숙제였고 주님 자신의 일이었지 내가 원했던 일이 아닙니다를 증거하면 되죠.
로마서 10장 11절을 봅시다. 이 말씀은 너무나 정확하게 우리를 찌르는 말씀이에요.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 말은 부끄럼을 실컷 당했어요. 모든 부끄럼이란 부끄럼은 다 당했어요. 예수님은 벌거벗어 죽었잖아요. 영광인줄 아세요. 그 부끄럼을 당해도 왜 고민꺼리가 안됐죠? 부끄러움을 당해도 피하고 싶지 않았죠? 남 눈을 피해서 모자이크 처리 해 주세요! 왜 이게 안 되죠? 왜 이럴 필요가 없죠? 왜 그렇게 해 놓고 당당하죠?
도대체 나에게 일어난 현실이 지금 나의 현실이 아닌 낯선 현실인데 이 현실이 어디서 왔다는 말입니까? 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그 능력이 바로 새로운 구조에서 생겨납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50911b (벌집)―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11절을 다시 읽어 보면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 말은 앞으로 부끄러운 일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는 겁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네가 원래 생각 했던 너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부끄러우냐 하면 야, 이게 옛날 나의 내 현실인데 그게 아니란 말이야? 이럴 때 부끄러워요. 내가 바보같이 바보짓을 했다 자기가 주님 앞에 철딱서니 없는 짓을 한 것이 너무나 후회되기에 남이 나를 조롱하는 것은 그것은 조롱도 아니에요. 내가 주님 앞에서 못을 짓을 한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남이 하는 것은 내 간지러운 것 긁어주는 것밖에 안돼요.
더 긁어! 더 긁어! 더 내 욕해! 그래도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내 잘못을 그런 식으로 내 죗값을 치룰 수 없어! 나는 죄인 중에 괴수야!
복음 있는 사람은 그동안 내가 공들여 구축한 현실을 와르르 무너뜨린 거예요. 그것은 어린 애일 때, 11살 먹은 애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니까요. 철딱서니 없어서 나 기분 나쁘다고 충실한 장군을 그냥 내칠 정도로 그냥 기분에 사는 거예요. 따라서 세상 현실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즉흥적인 기분에 따라서 좋았다가 싫어졌다가 엎어졌다가 자빠졌다가 미워졌다가 그래서 이별이 만남 보다 그렇게 쉬운 이유를 아시겠죠?
기분이에요. 기분 탓이에요. 전부 다 기분 탓이에요. 얼마나 기분에 왔다 갔다 했는지 그 어설픈 현실 구조, 내가 내 지난 구조를 부수는 것을 너희들이 나에게 부끄러움을 주면서 부숴준다면 나는 당신들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하겠다! 내 손으로 허물 수 없는 것을 당신들이 허물어주니 고마울 뿐이다. 너는 죄인이야! 옳소이다! 제가 죄인입니다. 제대로 지적 해 주니 감사합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죠. 그동안 주님이 우리 때문에 얼마나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까? 바른 현실을 가져왔지만 아무도 각자의 현실이 너무 공고해서 주님의 참된 현실을 우리는 보지 않고 죽여 버린 거예요. 교회에 세 명 있다가 교회가 해체됐다! 부끄러움 느끼지 않죠. 끓어 모아봐야 세 명인데요. 그런데 교회가 삼천 명 모였다가 다 헤어졌다면 그러면 본인이 자존심이 얼마나 상하겠습니까? 아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죠. “아이고 삼천 명 교회 목사로 호화롭게 살다가 꼴 좋다! 교인 하나도 없고!” 이런 소리를 뒤통수 두고 할 때 얼마나 부끄러우냐 이 말이죠.
그런데 복음을 아는 사람은 내 힘으로 무너질 수 없는 나의 왕국이 주님의 약속이 내 현실 속에서 못 벗어나는데 이미 약속이 못 벗어나는 못 벗어나는 그것을 허물어주니까 주님이 너무 고맙죠. 삼천 명 교회 안 무너졌으면 나는 지옥 갈 뻔 했으니까 이런 고마움이 어디 있습니까?
가을철에 벌집 만지지 마세요. 벌에 쏘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날마다 우리를 쏘아댑니다. 내가 만든 현실을 내 손에서 허물까봐서 내가 나한테 질책하고 나한테 벌을 내리고 똑바로 살아라! 내가 그동안 공들인 게 얼마 인데? 매일같이 우리한테 다짐에 다짐을 각오의 각오를 경려의 경려를 그렇게 스스로 자기 각오를 해요. 그거 다 허물어져야 합니다. 하늘나라 119에 신고를 해서 “나”라는 말 벌집 좀 떼어가라고 해야 돼요. 예, 알겠습니다. 해서 천사가 중무장하고 와서 하얀 살충제 뿌려서 다 죽여 버려요. 좀 죽여 줬으면 좋겠어요. 내 현실에 일체 남지 않도록 내 자식, 내 가족, 내 모든 것이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주의 것으로 바뀌기를 우리가 그런 기도를 해야 됩니다.
주여! 벌집 쑤셔주시옵소서! 주님께서 벌집을 쑤시듯이 우리를 쑤셔 놓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된 반포자와 교사와 사도로 세우는 필수 코스에요. 하여튼 내 것이라는 것이 무익한 종이니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때 까지 들쑤셔 놔요. 놀고 있네! 네 것이 어디 있어? 네 것은 없어! 값으로 준 것이라고 해야지 내 것이라? 네 것이 어디 있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죽으라. 모든 것이 죽으면서도 주의 것인 것을 깨닫고 안 죽고 살면서도 주의 것인 것을 깨닫게 하고 어쨌든 간에 우리로 하여금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게 하시는 겁니다. 우편배달부로 고민 없는 가운데…….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10장 15절에서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보내심을 받는가? 그것은 로마서 10장 16절에 나오는 고백이 있는데 그 고백을 여러분들이 하신다면 누가 뭐래도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맞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한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이 멘트입니다.
목사가 실컷 설교 해 놓고 “이것을 믿는 게 바보지! 이것은 아무도 못 믿어! 믿을 수가 없어! 내가 믿으면 손에 장을 지질게”하고 손에 붕대를 감고 나와야 돼요. 손에 장을 지진다. 이게 못 믿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내 운을 타인에게 맡깁니까? 평소에 우리의 행동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왜 그 귀중한 내가 천당 가느냐 지옥 가느냐 하면 문제에 대해서 왜 내가 손을 뗍니까? 손을 떼고 왜 그것을 다른 분에게 맡깁니까? 약속에게 다 맡깁니까? 만약에 약속이 너 지옥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서 사람들이 특히 목사나 장로나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이 교회 50년, 60년 믿고 난 뒤에 이구동성으로 하는 소리가 똑같아요. “아이고, 천국 있는 것, 누가 가봤나? 아무도 몰라!” 이겁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귀신이 있는지 그것은 아무도 몰라! 이것은 본인이 남한테는 안 해요. 본인이 매일같이 해요. 왜냐하면 이제 믿음 지탱하는데 힘에 부쳐서 그동안 억지춘향으로 믿는 척을 해 왔는데 그것도 나이 드니까 짜증나요. 노골적으로 내배 째라는 식으로 아이고 너는 가봤나? 뭐! 늙은 은퇴 목사가 젊은 몰사 불러가지고 “너무 설치지마! 열 내지 마라! 너 믿음 있는 것 같지? 나도 다 너만큼 했는데 주님이 있는지 없는지 난 모르겠다! 네가 내 나이되면 안다!” 아직 까지 교인들이 모이니까 도와주겠지! 주님이 너랑 한 편인지 알지? 한 편 아니야! 한 편 못 먹어! 도대체 예수 믿는 증거를 아직도 내가 목사 된지 50년 됐는데 아직 증거를 확보 못했어!
너도 증거 확보 못해! 있는 교인들이 다 나가면 어떻게 할 거야? 증거 없어! 따라서 우리는 그동안 교회를 믿었지 예수 믿은 게 아니야!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데 친절한 제가 또 대신 이야기를 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하라고 하면 예수 이야기, 주님 이야기 안 나옵니다. 뭐가 나옵니까? 그동안 이 교회가 기도해서 응답 받아서 땅을 샀고 지금 그 이야기가 나와요. 교회 이야기가 나와요. 어떤 장로가 회개해서 땅을 받쳐서 그 교회보고 영광을 돌리니까 사람들이 모인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우리기도 덕분에 자식이 잘되고 사모가 얼마나 기도를 잘해서 애 둘 유학 보낸 게 다 잘되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자기가 기대한 현실을 이야기해요. 부끄러움을 당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평소에 은근히 노렸던 자랑, 그 목적, 내가 평생을 두고두고 투자해서 얻었던 그 목적을 달성한 것만 쏙쏙 뽑아서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인양 그렇게 선전하면서 떠벌입니다. 자신의 반포자요, 자신의 사도요, 자기 자신의 열심을 증거하는 교사입니다. 처음부터 그랬었어요. 주님은 부속에 불과하고요. 처음부터 그랬었어요.
그러면 목사님은 늘 안 그럴 자신이요? 그러면 십자가 마을의 목사님들 안 그럴 자신 있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실컷 해 놓고 이것만 딱 붙이면 됩니다. 저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했거든요. 그런데 이게 바로 십자가 앞에 죄입니다. 이것만 붙이면 돼요. 참 쉽죠? 남들 하는 대로 그대로 하세요. 그리고 이게 바로 그동안 몰랐던 죄였습니다. 근원적인 죄였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랑하고 자기 현실을 안 놓치려고 하는 이것이 바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악마의 하수인 노릇을 한 그 죄입니다. 마귀의 얼굴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을 주께서 십자가로 알게 하셔서 포행자요, 살인자인 우리를 창세전부터 예정하사 고백해서 이런 죄를 증거하는 반포자와 사도로 그동안 죄지으면서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 쓰기를 이사야를 끌고 옵니다. 이사야가 뭐라 하느냐 하면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으리오. 이것은 이사야 53장 1절에서 나온 이야기죠. 이사야 53장 1절을 이야기하려면 이사야 6장부터 이야기해야 돼요. 이사야가 얼마나 다른 인간이 되었는가가 있어요.
6장에 보면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갑자기 새로운 현실이 나왔어요. 자기가 아는 현실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이었습니다. 그게 뭐냐, 주께서 영광 중에 나타났습니다. 이사야가 하는 말이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망한 이유가 뭐냐, 이사야 53장이에요. 누가 믿었으리요? 내가 잘못해서 망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망해야 되는 존재로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애초부터 망해야 될 인간으로 태어난 겁니다.
제가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화장터에 한 줌의 재가 됐다 합시다. 그러면 그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 쟁반에 그 재를 담고 그 회색, 재에서 필름을 돌려보면 재가 되기 전에 화장터에 들어가기 전에 화장터에 들어가는 모습 나오겠죠. 더 앞으로 필름을 돌려보면 방금 임종해서 울고불고 있는 자식의 모습이 나오겠죠. 더 돌려보면 숨을 헐떡이면서 큰아들은 집 갖고 둘째 아들은 밭 가지고 세 째 딸은 출가외인이니까 아무 것도 없다! 그 이야기하고 죽겠죠.
그 다음에 더 당겨보면 아직도 나이 한 70돼서 팔팔해서 노인정에서 화투치고 장기 두고 바둑 두고 하겠죠. 더 당겨보면 은퇴해서 할 일 없이 다방에 앉아 있고 더 당겨보면 50돼서 사표를 낼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이 나오겠죠. 결국은 뭡니까? 한 줌의 재가 되기 위한 원인 찾기, 재가 되기 위해서 어느 하나의 과정을 뺄 수 없는 과정, 절차들을 밟아 본겁니다. 이게 허무주의라고요? 아닙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왜, 그것이 바로 반포자요 교사고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죄 지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만 얼마나 죄를 지었으면 누가 나한테 욕을 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 하니까 그 기쁜 소식을 오해하면 안돼요. 복음은 나를 짓밟도록 짓밟는 주님의 기쁜 소식이지 나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에요. 그런데 나를 짓밟을 때에 주님의 안목, 주님의 관점을 내 관점으로 섞여버리면 나는 밟히면서 감사해요.
주님이 아니면 누가 나를 질근질근 밟아주겠습니까? 벌집을 119 아니면 누가 건드리겠습니까? 119도 건드리다가 죽을 판인데 순창에 어떤 119는 벌집을 잘못 건드려 죽었어요. 내 벌집을 누가 건드리겠어요? 딸을 시집보냈는데 간지 1개월도 안돼서 아빠 나 이혼할래! 그러면 집구석 벌집 쑤셔 놓은 것 하고 똑같죠. 아직 까지 부조 낸 명단도 남아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혼하겠다고 하면 완전히 벌집을 쑤셔 놓은 거죠.
어떻게 감당하겠습니다. 그 철딱서니 없는 딸이 누구인지 아세요?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이 세상이 누구의 세상입니까?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잖아요. 아들의 세상이죠. 누가 철딱서니 없이 놉니까? 아버지 엄마 생각 안 하고 자기 남자친구 하고 다투었다고 다투는 이유도 아주 간단해요. 심각한 것도 아니에요. 빨래 양발 통에 넣지 말고 빨래 통에 넣으라는 건데 말을 안 들어 하여튼 시가집하고 똑같아! 뭐 시가집? 이래서 이혼한다는 거예요. 성격이 안 맞는다고 얼마나 자기만 생각하는지 그게 오늘날 우리잖아요.
내가 만든 현실, 내 두뇌에서 만든 상상, 사울이라 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저기 계시고 하나님께서 충성했고 쉐마 말씀 듣고 순종하고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고 극히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자기가 말벌 덩어리인줄 모르고 귀신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도 모르고 그저 부귀영화 세상 모든 것을 정복하려고 인기 얻으려고 하고 나를 무시하지 마라하고 무시하면 또 삐져서 교회 안 나오고 전부 다 이게 뭐냐 하면 말벌이에요.
도대체 누가 이것을 인간 만들겠습니까? 이 철딱서니 없는 것을 누가 인간 만들겠어요? 주님께서 진짜 현실로 찾아오십니다. 카메라에 빛을 많이 쪼아버리면 피사체가 다 날아가요. 밝은 색만 있지 뭘 찍었는지 드러나지 않아요. 그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때 자기 주시는 것은 관심이 없어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 다음에 주님이 뭐라 하느냐 하면 그렇다면 나를 위해서 누가 갈 사람이 있어야지? 제가 가겠나이다. 주의 말씀이 뭐라 했습니까? 네가 백날 나를 불러봤자 네 말을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래도 가겠나이다. 이사야가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남들 보기에는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겠죠. 그러나 이사야는 그 때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망하는 백성들 가운데 내가 있다 했어요. 지난 수요일에 제가 영주시 평온 면에 가서 느낀 것을 이야기했죠. 거기에 영주 댐 있잖아요. 영주 댐이 있는데 여기에 지금 한 참 철거중이에요. 마을이 몇 채 되지도 않아요. 제가 보니까 한 15채쯤 되는데 철거중이에요. 수몰 지역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어떤 중이 도를 닦는다고 하면 바보 아니에요? 수몰 지역에서 왜 도를 닦아요?
현재 72억 인구인데 모든 인류는 수몰 지역인데 이게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이미 물로서 수몰된 지역이에요. 수몰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말이죠. 거기서 도를 닦아요? 성화한다고요? 이미 죽은 자에요. 지금 안 죽으니까 말썽꾸러기, 시집간 지 한 달 만에 이혼하겠다고 하는 본인이 살았다고 여기는 거예요. 본인이 살았다고 여기는데다가 진짜 생명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니까 사람들은 그 예수를 죽여 버렸잖아요. 죽여 버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죽은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시켰죠. 그러면 누가 산자요, 누가 죽은 자입니까? 모든 인간은 수몰 지역이에요. 전부 다 죽었어요.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지금 물속에서 하고 있어요. 물속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산가족 추석 상봉하고 하는데 여기 수몰지역이에요. 우리 동네 누구 집 아들 사법고시 합격했습니다. 플랜카드 만들어 붙여요. 수몰지역에서요. 모든 인간은 똑같아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이 수몰지역이 뭐냐, 이게 바로 죽음이라 해요. 이 죽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라 합니다. 이게 의에요. 하나님의 분노와 공의와 정의입니다.
어떤 불신자들의 모임에 가서 강의를 했는데 제가 성경을 딱 2시간 특강을 했는데 거기에 오신 분들이 다 좋아해요. 거기에 다음 시간에 인문학 강좌를 할 교수 한 사람이 앉아 있었던 거예요. 지 이야기 할 것을 제가 다 이야기했거든요. 일부로 도스에프스키 강론을 하고 한 시간 쉬고 두 번째 시간에 도스에프스키 작품을 이야기했어요. 까로마소 형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악령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지 전공 분야를 이야기했어요. 지는 전공분야이지 나는 수몰지역인데 물속에 있는 거예요.
그분이 하는 말이 상당히 염세주의적이군요. 이렇게 하더군요. 염세, 허무하다 이거거든요. 그래서 제가 답변했어요. 허무로 보입니까? 하나님의 분노로 보이지 않습니까? 헛되고 헛된 것이 중요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분노,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할 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의를 본거예요. 하나님의 거룩을 본거예요. 그 거룩 앞에 누가 서리요! 감히!
누가 서겠습니까? 지금도 신곡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수몰지역에서 장사한다는 것을 아무도 안 느껴요. 왜? 자기가 의롭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자기 세계 밖에 몰라요. 자기가 의롭다는 거예요. 신곡시장뿐만 아니고 그러면 교회는? 똑같아요. 이 우상 덩어리 주께서 손대지 마세요. 주께서 키워주세요! 이러고 있습니다.
제가 첫 번째 시간에 뭐라 했느냐 하면 교사, 반포자, 사도가 없다고 했죠. 아무도 없습니다. 왜 없느냐? 본인들이 성경 말씀을 자기 현실 속에 풍덩 성경이 들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들어본 것을 보니까 그 안에 디모데후서 1장 11절 12절이 있고 거기에 보면 반포자 교사 사도 있는 게 보이니까 그게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죽은 인간이 있다고 하는 것은 없는 거예요. 내가 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있다고 판정하는 그 판정, 내는 엄연히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논리가 생긴 거예요. 이 논리가 어렵죠. 나는 판정을 하고 판단을 할 수 있는 나는 엄연히 절대로 사라지면 안 돼! 를 기본 전제로 깔아 놓은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것을 없다고 이야기를 함으로서 그렇게 있다고 하는 네가 사실은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죽은 존재의 진짜 살아계신 나는 길이요 진리요 그 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나는 생명이잖아요. 생명이 어두움 속에 온 거예요. 이것은 죽은 거예요. 어떤 장례식에 장례식이 다 그렇죠. 장례식에 가면 기독교식 장례 진행하는 목사님이 하는 말이 자, 여러분 우리 권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하늘나라 맨션아파트에서 잘 삽니다. 거기에는 처소가 많으니 요한복음 13장에 이야기하거든요.
그 목사가 뭘 하나를 놓쳤어요. 13장의 끝에 있는 말씀을 놓쳤었어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못 온다! 그것을 놓친 거예요. 우리가 갈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상상해서 예측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극락 천국 없어요. 왜?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상상하기 때문에? 내가 상상 하기 때문에 죽을 내가 상상하기 때문에 없는 겁니다.
오늘 강의를 정리하면 천국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없습니다. 왜? 내가 하나님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포에르바하의 주장입니다. 모든 신은 우리가 상상한 것이다.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을 하기 위해서 신을 만들어 낸 거예요. 내가 존재하고 신이 존재함으로서 두 존재가 다 살아 있는 것으로 그렇게 우리는 믿고 싶어요. 그래야 주님을 상대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죠. 주님한테 하소연 하는 것을 기도라고 하고 뇌물 주는 것을 헌금이라고 하고 주님 앞에 재롱잔치 벌이는 것이 찬양과 봉사라고 그렇게 더욱더 나 살아있음을 더욱더 나를 살아 있도록 스스로 자기를 확인하는 방법이 그 방법 밖에 없어요.
여호와를 반대하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사울이 설치는 그 열심, 그로인하여 반대급부로 누가 살아있어요? 내가 정당한 존재로 살아 있는 거예요. 로마서 10장에서 그것은 바뀝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따라서 자기 의를 밟지아니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반드시 예수 믿는 사람은 성도는 반드시 무엇을 거쳐 가야 돼요? 내 의가 무엇인지를 똑똑하게 자백해야 돼요.
나는 평생에 이렇게 복 받고 이렇게 자랑하고 나는 가정이 화목하고 이런 것이 다 잘 먹고 잘 사는데 다 기도 덕분입니다. 라고 이야기하세요.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죽게 한 자기 의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만 붙이면 되는데 그것을 못 붙이네요. 내가 열심히 새벽기도 해서 교회를 이렇게 크게 세웠습니다. 이게 바로 마귀의 전당입니다. 왜 그 뒤에 말, 마귀의 전당이라는 말을 못 붙입니까? 이게 바로 죄 덩어리입니다. 그것을 왜 못 붙이죠? 부끄러움을 당해야 하는데 부끄러움을 안 당하려고 하는 거예요. 왜? 로마서 10장에 그 말이 있다는 거예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가 나오는데 그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는 말씀조차도 본인이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디모데후서 1장에는 "우리의 행함대로 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행함은 뭡니까? 성경대로 지키면서 그것이 내 것이 되고 자하는 그것을 노리고 행하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진짜 사도가 되고 난 뒤에는 우리의 행함대로 된 게 아니라 하죠. 내가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로마서 10장 1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이사야 53장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아무도 믿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 아무도 믿지 못한다는 이유는 각자 만든 현실 속에는 그게 포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을 봅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특히 세 번째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죠? 그러면 천국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지금 사람들은 마음을 공략해요. 마음속에 천국이,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마음을 공략해서 주여! 주여! 집 사 주세요! 산당에 기도 하는 것처럼 기도 하게 되면 마음을 다루면 마음이 바뀌어 진다는 거예요. 그러면 마음이 바뀌도록 그렇게 일하는 그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자기 마음이죠. 자기 마음에 의해서 자기 마음이 바뀌면 이게 뭡니까? 네가 너의 모습을 보여라! 하면 들어와서 내 모습이다. 그 모습 말고 네 모습? 이거다! 이것밖에 못해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니까 그것은 자기 마음에서 상상한 것 밖에 안 되죠.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알지 못하죠.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내가 여기 있고 이 땅에서 생로병사 고생 많이 해요. 그런데 죽으면 어디 갈 것인가? 그 죽으면 어디 갈 것인가 라는 그 세계는 누가 만들어 낸 겁니까? 내 마음이 만들어 내죠. 이것을 동결성이라 하는 겁니다. 현재에 있는 나를 그대로 가져가는 거예요. 가져가려고 하면서 여기다가 성경말씀을 큐티 하면서 있는 대로 다 투입해요. 다 투입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간 나는 내 마음에서 벗어났습니까? 내 마음에서 못 벗어나죠.
왜냐하면 내 마음은 이것까지 인데 이 경계선 밖의 미지의 다른 세계, 이쪽 눈에 보이는 세계 아닌 멋진 세계, 그러면 두개가 합치면 둘 다 어디서 나왔습니까? 둘 다 내 마음에서 나왔죠. 이게 바로 종교입니다. 이게 불교이고 이게 기독교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기존에 있는 교회가 뭐라 합니까? 목사님, 그것까지 따져 버리면 누가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겠죠. 그게 바로 이사야 53장 1절 아닙니까? 누가 믿으리오, 있잖아요. 안 믿으면 되잖아요. 안 오면 되잖아요. 안 오는 교인을 오게 했으면 그것은 네 마음이다. 네 마음이라 하니까 그것은 주님의 세계가 아니고 너의 세계이고 거기서 증거되는 것은 나 자신의 잘남을 자기 의의 반포자요 자기 자신은 잘남을 사도요 자기 자신을 과시하는 교사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호노리우스에요. 11살 먹은 바보에요. 자기가 썩은 손이 멀쩡한 손을 잘라버리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아무도 믿지 못한다는 이사야 53장 그 다음 구절이 뭡니까? 그의 채찍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죠. 그 우리는 우리가 아니고 채찍 맞은 사건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 지는 새로운 피조물로 나오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연결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이 아니고 주님의 마음이 담긴 새로운 피조물로 나옵니다. 그 새로운 주님의 마음의 안에는 뭐가 있느냐? 나의 하는 모든 것은 죄인중의 괴수였다는 그게 나오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죽어서 천당 가하겠다는 그것마저 죄가 되고 설교한 것 기도 한 것 다 죄가 되고 하여튼 내가 나한테 집어넣은 모든 행위는 전부 다 죄가 되고 우리의 구원은 내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약속된 바가 있기 때문에 구원되는 거예요. 우리는 증거할 것은 그 약속만을 증거하는 겁니다.
더불어 우리의 잘못된 죄도 같이 동반해서 증거되는 겁니다. 이게 성경 해석입니다. 사도는 고린도전서 2장 4절에서 하는 말이 나는 꾀려고 절대로 전하지 않는다. 내가 전하는 것은 성령의 나타남이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다. 인간의 지혜를 인문학 강좌 교수의 이야기 한 것이 인간의 지혜잖아요. 그 지혜를 무시하는 것을 세 자로 개무시라 합니다.
우리의 전공 분야를 개무시 하는 거예요. 백날 해 봐라 그거 죄다! 얼마나 개무시 입니까? 판사님 판결 해 봐야 지옥 갑니다. 이게 얼마나 개무시 하는 거예요? 롯데 회장님, 지옥 가서 롯데회장하세요! 이게 얼마나 개무시 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왜? 다 수몰지역이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뭐 온갖 짓을 해도 수몰 지역이에요. 이 수몰지역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수몰지역에 돌아가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그게 주님의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만듭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와요. 성령으로 만들어요. 디모데후서 1장 14절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그런데 성령이 들어갈 수 있는 그 우리는 여기 우리가 아니고 십자가를 경유한 우리에요. 십자가를 경유한 우리에요. 내가 생각했던 우리는 죽고 그리스도가 탑재된 우리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의 연장선, 그리스도의 몸의 확장이죠. 몸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리스도 몸의 지체들 그리스도께서 창세전의 예정된 명단을 파악하고 그 입수한 명단을 가지고 아버지와 의논해서 자기의 양떼라고 뽑아낸 그 우리에요. 그 우리에만 성령이 오죠.
그러니까 디모데후서 1장 14절의 말씀이 있으니까 또 한 성질하고 또 자기 현실 고집하는 사람은 디모데후서 들여다보고 하는 말이 야, 이거 내 안에 성령이 있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앞에 10절부터 거쳐 오세요. 디모데전서부터 거쳐 오세요. 나는 폭행자요, 나는 살인자요, 나는 아무 가치 없는 오히려 주님을 훼방했다! 주님을 훼방했다고 흉내 내지 말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요. 내가 어떻게 주님을 훼방했습니까? 나는 내 현실 속에 약속을 집어넣어서 나라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십자가 때문에 구원 받았다고 주장을 하는 했던 그런 죄인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해야 됩니다.
결국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나 잘났습니다. 그거 증거하는 나 이렇게 훌륭합니다. 그거를 증거하는 게 나인데 나이 들어도 고쳐지지 않네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죄였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0절을 봅시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주님은 살아 있어요. 안 살아있어요? 살아 계시죠. 활동합니까? 활동 안 합니까? 활동합니다. 활동하는데 주님의 활동을 경험하지 못하니까 자꾸 주님 본인을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키가 몇 센티이고 몸무게 몇 킬로인지 그것을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지금 주님의 활동이 기능으로 나타나거든요. 나타났다 했잖아요. 나타날 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은혜대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으로 드러내시잖아요. 사람은 자기 현실을 고집하다보면 나는 있고 썩지 않는 것을 자기가 골라잡으려고 해요. 뷔페 가서 오늘은 김밥 좀 먹을까? 잡채 먹을까? 오늘 갈비 먹을까? 골라 담는 것처럼 오늘 썩지 않는 것 좀 담고 여기 영원한 것 좀 담고 자기가 담으려고 해요. 그게 바로 옛날 자기중심의 버릇이에요.
나는 사도도 한번 돼보고 반포자도 돼 보고 교사도 한번 돼 보고 자기 자기한테 안수하고 세워줍니까? 로마서 10장을 보게 되면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셨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라고 되어 있죠. 이것은 보내시는 분이 따로 있다는 거죠. 보내심을 받은 자가 따로 있는데 따로 있으니까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만 보게 되면 복음 전하는 이것이 굉장히 보람 있다고 생각하죠. 사도가 꼭 거기다가 집어넣는 것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1장12절에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또 무엇을 받는다고요? 고난을 받는 다는 겁니다.
아이, 그것은 우리가 알죠. 아세요? 진짜 아세요? 고린도후서 1장 8절에 뭐라 되어 있는지 알아요? 살 여망이 없다 했습니다. 고난이 버틸 수 있는 고난이 아닙니다. 살 여망이 끊어졌어요. 이고니 온 지방에서 사도는 이미 죽었어요. 돌을 던졌는데 본인도 죽은 줄 알았어요. 기절을 했으니까 흔히 드라마에 나오는 기억상실증에 걸릴 정도로 그 정도로 기억 상실증에 걸려 버리면 옛날 것은 이미 죽었어요.
아침 드라마 이야기를 꼭 여기 이 바쁜 시간에 해야 합니까? 이브의 사람, 이브의 사람에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두 사람이 등장해요. 다른 사람 된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억 상실되었음을 기억하게 하시는 겁니다. 잊으라. 이겁니다. 왜 잊으라는 것이냐면 너는 지금 까지 살아 온 것이 너한테 고난이었다. 왜? 진리도 모르죠. 주 안에 자유도 없었죠. 마귀한테 매여 살았죠. 얼마나 힘들어요? 그 놈의 집의 재산 있는 76억 그것을 관리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차 3대 있는 것 엔진 오일 가는 날짜 기억하는 것 힘들고 아파트 2채 있고 위장 이혼시키는 게 이게 얼마나 힘들겠어요? 참 행복한 힘듦이지만 그 힘듦이란 우리가 평범한 힘듦하고 똑같아요.
둘 다 나를 위해서 산다는 자체가 이게 힘듦입니다. 나를 위해서 산다는 자체가 항상 죽음에 노출되니까 힘듦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장에 살 여망이 없는 거예요. 살 여망이 깨어지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의 태도는 뭡니까? 차라리 죽이세요! 라는 게 똥배짱입니다. 소원이 있는데 소원이 뭐냐 하면 빨리 죽는 거예요.
얼마나 살 희망이 없으면 도대체 복음 전파자를 이렇게 애를 먹일 수 있습니까? 남이 죽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를 죽이는 거예요. 옆에 이단자를 보내서 얼마나 밟았는지 자기는 죽은 줄 알고 이고니 온 성 밖에 나가 떨어졌어요. 깨어나 디모데 건져가지고 또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모든 성경 해석의 밑바닥에 뭐가 깔려있습니까? 안 죽었거든 해석하지 마라! 죽는 것이 소망이 아니거든 설교하지 하라! 해석하지 마라! 이런 투로 이야기합니다. 아이고, 이거 하다 죽어야 돼! 이런 마음이 아니거든 설교하지 마라는 거예요.
이 설교하면 더 살려줍니까? 이런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고난입니다. 고난을 즐기는 거죠. 제 이야기가 아니고 로마서 8장 이야기입니다. 지금 장차 오는 고난은 뭐를 유발시키느냐 하면 이렇게 힘들죠. 하지만 이것은 뭐를 자꾸 기억하게 하느냐 하면 세상에는 기억상실이지만 천국, 올 미래에 대해서는 그게 기억나게 하리라!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도다!
그냥 고난 없으면 좋아요. 하지만 고난 받을 때 성도의 특징은 그 안에 성령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줬거든요. 말씀이 뭐냐? 고난 받을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장차 올 영광은 족히 이것과 비교가 안 된다. 죽여라! 죽여라! 하나님 이참에 그면 죽여 버리세요! 사도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세 번씩이나 기도 했잖아요. 고린도후서에서 이 가시를 빼달라고 그 가시도 그냥 가시가 아니고 앞에 붙어요. 사단의 가시에요. 보세요! 사단을 하나님이 얼마나 잘 활용하십니까? 사단으로 하여금 성도에게 달려들게 해서 그러니까 욥이 옛날이야기가 아니에요. 지금 주에게 주어진 겁니다.
사단이 달려들게 해서 사단으로 하여금 우리를 살 여망이 없도록 지금도 그렇게 유격조교가 모자를 눈도 안 보이게 쓰고 똑바로 하십시오! 하면서 계속 우리에게 유격 훈련을 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똑바로 못하겠다! 차라리 죽여라! 이렇게 나오는 정답이 되는 겁니다. 감당도 못하겠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구나! 하면서 도망합니다. 항상 우리로 하여금 살려고 하면 자꾸 주의 영광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를 잊어버려요. 그러면 복음 반포자가 됩니다.
우편배달부가 남의 편지를 읽고 혼자 우는 것과 똑같아요. 어이고 인간아! 그냥 전달해 주면 되잖아요. 내가 나의 운명의 우편배달부가 되세요. 마치 타인을 대하듯이 나를 대하세요. 우리 스스로 우리한테 대화하세요. 꿈의 대화를 하세요. 기타 치면서 꿈의 대화를 하세요. 힘들지? 어쩌느냐 못산다? 죽으라! 알았어! 딩딩딩 날마다 자기가 자기를 보고 대화하세요. 어떤 경우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누가 복음 2장에 보면 목자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천사의 음성이 들리죠.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의 평화로다! 기뻐하심을, 누가 기뻐요? 주님이 우리를 보고 기뻐 한데요. 그 목동들 나중에 목장 장으로 승진했습니까? 없어요. 하나님이 기쁘다고 우리에게 환란을 주시는데 어쩌란 말이냐! 그 안목으로 바뀌어져야 돼요. 그게 찬양 요소가 돼요. 내가 당한 것이 찬양 요소가 됩니다.
주님이 치면 이상해요. 밟아놓고 즐거워하니 그 취미를 어떻게 이해하죠? 자기 백성을 밟아놓고 좋다고 하늘나라 잔치 벌이고 있어요. 기뻐하심 중의 평화로다! 왜냐하면 우리의 벌집이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에 마귀는 살아서 주님이 주시는 안목이 아니고 내가 은근히 기대했던 그 현실을 어느 새 돌아서면 그 현실을 또 추구하고 있어요. 저 돈 돌려주세요. 복음 아니까 복음 알았으니 날아갔던 재산 도로 찾게 하옵소서! 재원씨 같으면 복음 알았으니 인기 다시 얻게 하옵소서! 이렇게 나오겠죠. 포맨에 있었을 때 인기 있었잖아요. 복음 알고 난 뒤에 인기를 다시 얻고 싶어요.
이제는 박정현하고 콜라보레이션 하고 싶어요. 누구처럼……. 아이고, 좋겠다! 발라드의 여왕과 노래 부르니까 얼마나 인기가 있겠어요. 그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왜? 몸이 살아 있는 한 윙윙 벌집처럼 움직입니다. 성령께서 119 소방대가 돼서 그 상황과 상황이 어느 새 날아가게 만들어요. 복음을 전했더니 갑자기 새 교인이 20명이 와르르 왔다. 주께서 은혜 주시면 왔던 교인 20명에다가 플러스알파 있는 교인 2명 보태서 다 나가 버립니다. 그때 우리는 알아야 돼요. 주의 영광이 지금의 고난 보다 더 확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그 순간입니다.
내가 엉뚱한 것을 또 마귀의 시험 들어서 세상 부귀영화에 또 놀림을 받았구나! 내가 바보 등신도 아니야 완전 눌림 받았어! 이 치열한 내 몸이 주께서 주신 약속의 몸을 내가 칼로 쳐서 내가 바보짓을 했구나! 이 어리석은 내가 마귀에 들려서 이 몸이 이미 주님의 몸으로 등록이 되었는데 내가 이 몸을 가지고 내가 꿈꾸던 내 욕구대로 해 보려고 그렇게 괴롭히고 질타하고 그것밖에 못해! 월급 그것밖에 못 받아! 내가 나를 쥐어박아요.
차라리 마포대교 가서 죽어라! 내가 자기를 권유한다니까요. 아마 평화 그렇게 살아야 된 운명 같아요. 내일 언제 죽을지 모름지기 죽을 때 까지 우는 그런 운명으로 살아야 됩니다. 주님이 주신 이 약속은 우리 밖에 있습니다. 우리의 시공간 밖에 있어요. 왜냐 창세전부터 계획 잡힌 거니까요. 그런데 그 계획 잡힌 중에 하나가 뭐냐 내가 내 식의 현실을 따로 벌집을 만든다는 그것조차 좀 더 계획 잡힌 중에 반드시 필수 과정으로 있어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긍정합시다.
아이고, 바보야 내가 은혜 받아야 돼! 하고 그렇게 자책하지 마세요. 그것마저 필수 절차입니다. 막 사세요. 그리고 성령께서 막 살고 있음을 알려줄 때 이미 창세전에 계획 잡힌 대로 진행됨을 알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온 가족이 웃을 때도 생일 축하합니다. 하면서 촛불을 훅 불 때도 그게 환란이고 고난입니다. 그 환란 고난이 반드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죽음에 이르도록 이 세상에서 마지막 있는 믿음마저 떼어내기 위해서 지독하게 이 세상에 집착하는 우리의 본 모습을 알려주고 성령께서 네가 가야 될 세계는 이 세상과 족히 비교가 안 된다고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우리는 거기서 뭐라 고백하느냐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 다음에 내가 아는 복음을 누가 믿었으리요. 어느 새 내가 이사야 되고 내가 사도 바울이 된 그 경험, 성령이 주신 경험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니고 이미 말씀이 약속이 되어 우리 속에 장착, 탑재되어 우리 속에 침투하여 말씀인 것과 말씀 아닌 것을 분별하고 가려내는 작업으로 우리가 쓰임이 되어 진 것이 창세전부터 주신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감사케 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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