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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수군조련도. 19세기말.
정유재란 발발 6개월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은 작전지휘소에 첩을 데려와 살았고 술주정이 심해 부하들의 원성을 샀다. 정유재란 때 거제도 칠천량에서 이순신이 키운 조선수군을 모조리 수장시킨 장본인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명나라 원병은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조선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낸다. 이를 계기로 기세등등했던 왜군은 한반도 남부로 밀려나고 전쟁도 장기간 교착상태로 접어든다.
명나라 군대는 그러나 조선에 주둔하면서 우리 백성들에게 많은 고통도 함께 안겨줬다. 경상도 의병 정경운(1556~
1610)이 쓴 <고대일록>은
"명나라 장수 유참장(劉參將·유정)이 운봉에서 함양으로 와 성주(함양군수 이희급)의 멱살을 잡고 향소로 끌고 가 마구 구타하니 지금이 어느 때인가. 명나라 군대가 함양 군에 가득하고 주민은 텅 비었다"
며 명나라 지휘관과 군사들의 행패를 고발하면서 "그들이 주는 피해가 왜노와 다를 바 없었다"고 개탄했다.
그들은 조선 사람들을 무고하기도 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가 저술한 <앙엽기>에 의하면, 명나라 원군을 이끌고 온 이여송(1549~1598)은 체찰사 유성룡(1542~1607)과 윤두수(1533~1601)가 전란 중에 집에서 술이나 마시며 국왕을 기만했다고 비석에까지 새겼다는 것이다. 다음은 <앙엽기>의 내용이다.
"선조 33년(1600) 1월에 제독 이여송은 자신의 비문에 '임진년 12월 25일 압록강을 건너왔다. 유성룡, 윤두수 등은 와신상담하며 치욕을 씻고 흉적을 제거할 일에 마음을 두기는 커녕, 사가에 편히 앉아 내키는 대로 술 마시며 즐겼다. 중국 조정을 업신여길 뿐 아니라, 국왕을 기만해 예의에 어긋나고 교양에 벗어나는 행동이 자못 심하였다'고 새겼다. 아-, 슬프다. 당시의 여러 점잖은 사람들이 어찌하여 명의 장수에게 이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는가."
이여송은 자신의 공적을 드높이기 위해 죄없는 유성룡과 윤두수를 헐뜯은 것이다. <앙엽기>도 "무고한 게 틀림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실학파의 스승 이익(1681∼1763)의 대표저술 <성호사설>은 이여송을 임진왜란 극복에 공이 큰 인물 중 하나로 꼽는다.
<성호사설>은 "임진왜란의 최대 공로자는 석성(당시 명나라 병부상서로, 조선 파병을 결정한 인물)이며 이순신은 그 다음이고 이여송과 심유경이 또 그 다음"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조선이 명나라에 대해 갖고 있던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평가로 보인다.
사진2. 이여송 초상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총사령관으로 평양성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지만 약탈, 강간 등 범죄를 저질러 비판도 컸다. 조선인의 후손이며, 그 역시 조선 주둔 때 부인과 자식을 뒀다. 일본 덴리대도서관 소장.
이여송은 조선 출신인 이영의 후손으로, 집안은 요동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부친의 벼슬을 물려받아 지휘사가 됐다. 명나라 황제의 명에 따라 명군 4만300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이여송은 우리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지만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후로는 기세가 꺾여 싸움을 기피한 채 교섭에만 일관했다.
명나라 군대는 그러면서 가는 곳마다 약탈, 강간, 폭행 등의 범죄를 저질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이여송은 명나라로 귀국한 뒤 요동총병이 됐으며 1598년 타타르가 요동을 침공하자 경기병 4000여 명을 이끌고 방어에 나섰다가 복병을 만나 전사했다.
이여송의 후손들이 우리 땅에 살고 있다. 이여송의 손자 이응인은 명청 교체기의 혼란 속에 조선으로 왔다. 이여송은 또한 조선에 주둔할 때 부인과 자식도 뒀다. 정조 24년 4월 8일자 실록에 "(이여송) 제독이 우리나라 사족의 딸을 맞아들여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그 후손 중 첫 급제자가 나왔다"고 적혀 있다.
명나라 장수 중에서도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운 인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적의 예봉을 꺾은 인물은 명나라 장수 양호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중환(1690~1756)이 집필한 지리서 <택리지>는 천안지역을 소개하면서 양호에 얽힌 일화를 거론한다. <택리지>에 의하면, 왜적이 남원에서 전주를 거쳐 북쪽으로 올라오자 양호가 평양에서 한양까지 700리를 이틀 만에 달려왔고 다시 천안까지 내달려 왜군과 맞붙었다.
그는 원숭이를 태운 말을 적진에 풀어 혼란해진 틈을 타 철갑기병으로 파고들어 적을 크게 무찔렀다. 들판은 금세 왜군시체로 뒤덮였다. "왜적들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뒤로 그와 같은 승리는 없었으며, 이곳의 들에서 밭을 갈다 보면 지금도 창이나 칼 따위를 줍는 경우가 있다"고 <택리지>는 밝힌다.
양호는 그러나 1598년 벌어진 울산 전투에서는 크게 패해 2만명의 병사를 잃었는데 이를 승리로 보고했다가 파직됐다. 1619년 후금과의 전투에서 대패한 죄로 투옥돼 사형 선고를 받고 1629년 처형됐다.
전쟁 초기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것은 조정의 지도층과 군대의 장수들이 무능력했던게 결정적 원인이었다. 전쟁은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썩어빠진 지휘관들이 군대 내 요직을 꿰차 조선군의 경쟁력을 끊임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대표적 인물이 원균(1540~1597)이다.
원균은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6개월 전인 1597년 2월, 이순신을 몰아내고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해군총사령관에 오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순신의 작전지휘본부를 첩의 거처로 만들어 버렸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원균은 이순신이 제장들과 전략을 논의하던 운주당 건물에 첩을 데려와 거주했다. 그는 장수들과 만나지 않았으며 술을 좋아해 술주정을 부리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의 본진이 안골포와 가덕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원균의 무덤(평택 도일동 산82)- 시신은 없이 신발을 묻었다고 한다
도원수 권율(1537~1599)의 질책에 못 이겨 출전했지만 허둥대다가 수많은 배와 군사를 잃었다. 남은 조선 수군을 끌어모아 거제 칠천도에 주둔했는데 다시 적의 기습을 받아 모조리 궤멸됐다. 원균은 언덕으로 기어올라 도망쳤다. 그렇게 달아난 원균은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 지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누군가는 소나무 밑에 원균이 혼자 주저앉아 있다가 왜군에게 죽었다고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도망쳐 죽음을 모면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고 <징비록>은 말한다.
조선해군이 임진왜란 발발이후 처음으로 패전한 싸움인 동시에, 전멸 당한 '칠천량 해전'이다. 칠천도에서 승리한 왜군은 남원을 거쳐 충청과 전라를 유린하게 된다.
사진3. 19세기말 20세기 초 대동강과 평양성 대동문.
임진왜란때 북진하던 왜군들이 대동강에 가로막혀 평양성을 쉽게 함락하지 못했다.국립민속박물관 소장.
7년 전쟁은 침략의 원흉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끝나게 된다. 강항(1567~1618)이 쓴 <간양록>은 그런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다. <간양록>은 전쟁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강항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체험을 기록한 책이다.
강항은 선조 때 문신으로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군량보급에 힘썼으며 남원이 함락된 후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려다가 왜군에 붙잡혔다. 강항은 일본에서 승려들에게 유학을 가르쳤는데 이들은 일본 주자학의 선구자가 되니, 강항은 일본 주자학의 스승인 셈이다.
강항은 책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못생기고 키는 짤막하다"고 적고있다. <간양록>에 따르면, 그는 날 때부터 손가락이 여섯인 '육손이'였다. 성장 후 "손가락이 여섯 개나 있어서 무엇하랴" 하고는 칼로 하나를 잘라버렸다.
집안이 가난해 머슴살이를 하다가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 들어갔다. 출신은 미천했지만 배포가 커 출세가도를 달렸다.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 중 하나가 반란을 일으키자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태연하게 "항복하면 부귀를 잃지 않도록 보증하겠다"고 항복을 권유했다.
적들이 달려들어 죽이려고 했으나 적장은 "나를 위해 계책을 말하러 왔는데 어찌 죽이랴" 말하고 돌려보냈다. 히데요시는 돌아오자마자 군사를 이끌고 가 난을 진압했다. 그 뒤 여러 전투에서 승리해 결국 일본 열도를 평정한다.
두 번이나 조선을 침략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8년 3월 병을 얻어 7월 17일 죽었다. 후계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혼란을 우려해 그의 죽음을 비밀에 부쳤고 시체의 배를 갈라 그 속에 소금을 채워 넣고 평소 입던 관복을 입혀서 시체를 나무통에 앉혀놓았다. 그 모습이 감쪽같아 장수들도 그가 죽은 줄 알지 못했다.
강항의 문집 《수은간양록》(국립중앙박물관)
8월 30일,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자 조용히 상을 치렀다. <간양록>은 "조선인을 소금에 절이라고 한 지 한 해도 되기 전에 소금으로 제 놈 배때기를 절이게 됐다"고 격정을 토로했다. 그해 11월 참혹했던 전쟁도 막을 내린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30.원균은 전사했나, 도망쳐 목숨을 건졌나 [임진왜란-대환란4]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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