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제1화
손녀의 눈빛에서 시작된 이야기
나는 2018년,
『정보통신 1세대』라는 제목으로
내 삶을 정리한 책을 냈다.
수십 년 동안 현장에서 몸으로 겪었던
대한민국 정보통신의 발전 과정을
후대에 남기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책을 마치고 나니
한 짐을 내려놓은 듯했다.
이제는 할 일을 어느 정도 마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손녀의 손을 잡고 경복궁을 찾았다.
아이와 함께 걷는 길은
느리고도 따뜻했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이어졌다.
나는 은근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정보통신의 역사가
잘 정리되어 있겠지.’
그러나
전시장 한쪽에 놓여 있던 것은
낡은 다이얼 전화기 한 대뿐이었다.
나는 그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무언가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내 옆에 서 있던 손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묻고 있었다.
“이게 다예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보여줄 것도,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 아이의 눈빛에는
작은 실망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날 이후,
내 마음속에 하나의 질문이 남았다.
“이 역사를 누가 남기는가.”
“이대로 사라지게 둘 것인가.”
정보통신은
대한민국을 바꾼 가장 큰 힘이었다.
전화 한 통 연결하기 어려웠던 시절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통신망을 갖춘 나라가 되기까지,
그 과정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제대로 전하는 곳은
너무나 드물었다.
나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료를 모으고,
사람들을 만나고,
박물관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쉽지 않았다.
관심은 부족했고,
이해를 구하는 일은 더 어려웠으며,
때로는 이런 말도 들었다.
“지금 와서 왜 그런 일을 하십니까.”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어느 날,
박물관에서 만난 한 학예사가
내게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은 정보통신 1세대이십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울림은 깊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내가 보고,
내가 겪고,
내가 몸으로 살아낸 이 시간이
기록되지 않으면
그대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기술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이야기를 남기려는 것이다.
전화선을 놓던 사람,
교환기를 지키던 사람,
밤새 장애를 복구하던 사람들.
이름 없이
대한민국의 ‘연결’을 만들어 온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가 사라지면
한 시대도 함께 사라진다.
나는 이제 여든을 넘겼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쉬어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지금이 더 급하다.
지금 남기지 않으면
영영 사라질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한 것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말과
한 아이의 눈빛이었다.
“선생님은 정보통신 1세대이십니다.”라는 말은
나에게 기록의 책임을 일깨워 주었고,
손녀의 눈빛은
그 기록이 왜 필요한지를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날,
손녀는 묻지 않았지만
나는 그 질문을 들었다.
“할아버지, 이 이야기는 왜 없어요?”
나는 그 질문에
이제야 답을 하려 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정보통신은 연결이다.
그리고 그 연결의 이야기를 남기는 일은,
지금 우리 세대가 미래세대에게 해야 할 책임이다.
첫댓글 우와! 놀랍고 생생한 정보통신 이야기!
맞다, 1980년대 초반에도 전화 주문하면 2~3년 씩 기다려야 개통되었지! 소식 전하기 힘든 세상이었는데! 참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글쓰기는 더 반갑습니다! 잘 읽었습니다!